다시 열하일기를 읽으며(글/권경인-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2007년 신년 벽두에, 한국일보에서 해방 후 간행된 책 가운데, 역사/문학/경제 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김으로써 고전 반열에 오른 책 50권을 선정하여 '우리 시대의 명저 50'을 발표하고, 각 책을 자세히 소개하는 연재를 시작했다. 이 때 난 '백범일지'에서부터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한국인물 연극사'까지 오십권의 제목과 저자를 살펴보면서 아직 읽지 못한 책들 중 마음에 가는 책을 가려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80년 대 이전에 발간된 책은 우선 읽기 어려울 듯 하여 눈을 최근에 발간된 곳으로 옮기니, 아직 읽지 않은 책 중에서 '고전 읽기의 새 시각과 의미를 선'뵈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읽어야지, 읽어봐야지 하다가 시간은 쏜 살 같이 흘러 이번 구정 연휴 기간의 막바지에 겨우 책을 손에 잡을 수 있었다. 먼저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읽고, 책 뒤편의 에필로그 격의 열하(熱河) 여행기, 열하일기 등장인물, 지도, 책에 쓰인 핵심 개념을 읽으면서 벌써 나는 이 책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열하일기와 나의 인연이 옛 추억인 양 아련히 떠 올라 더욱 책 속으로 빠져들었는지도 모른다.
스무살, 문고본으로 처음 만난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선생이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정사로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사절로 연경에 갈 때 따라가서 약 5개월 동안 만주, 연경, 열하 등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방대한 기행문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때는 내가 대학을 다니던 무렵인 1980년대 중반 무렵인데, 처음에 정음사에서 문고본으로 간행된 이가원(李家源,1917~2000) 역주의 『도강록(渡江錄)』이었다. (박지원 원저/이가원 역주. 도강록 渡江錄. 정음사. 1980년. 194쪽, 정음문고 30>우연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박지원이라는 문장가에게 매료되었다. 그 후 헌 책방을 전전하면서, 겨우 대양서적에서 1973년 한국명저대전집의 일부로 출판된 이가원 변역의<열하일기 상/중/하> 3권을 발견하고 거금을 쾌척했다. 그 때 열하일기를 일독 한 후, 더욱 박지원에게 흠뻑 빠져서 친구들에게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봤냐고 떠들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내 대학 시절의 열하일기 일독은 번역자인 이가원씨가 안동 도산 출신의 한학자로서 조고님과 한 때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한 몫 했다. 아쉽게도 내가 전공한 학과나, 지금 생업으로 일하고 있는 분야나 모두 고전문학과는 담을 쌓은 분야라서, 내 관심은 더 발전하지 못 했으나, 나의 박지원에 대한 존경은 변함없었고, 그 후 신문이나 잡지에서 관련 있는 글 쪼가리를 발견하면 꼬박꼬박 읽었다.
나의 눈시울을 적신 ‘형을 생각하며’
10여 년 시간이 지나 1990년대 중반 내가 성남으로 이사한 다음 선친께서 상경했을 때 같이 수서역 지하의 염가 할인 도서 판매점에 들렀다가, 한문 영인본 ‘열하일기’를 보고 살까 말까 머뭇거렸는데, 그 후 선친께서 안동으로 내려갈 때 그 책을 사신 적도 있다. 내가 머뭇거린 이유는 당연히 나의 한문 해독 실력 부족으로 사 봐야 장식품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서였을 터이고, 선친께서 사신 이유는 그 때 선친께서도 도강록을 읽으신 후라, 읽어 볼 의향이셨을 것이다. 또 세월이 흘러 2003년에 , 박종채(朴宗采, 1780~1835)가 쓴 박지원의 일대기인 ‘과정록(過庭錄)’이 『나의 아버지 박지원』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을 때에도 즉시 책을 사서 읽었다. 이 책을 읽은 때는 선친께서 돌아가신 후 오래지 않은 때였고, 수시로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던 무렵이라, ‘형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라는 시를 읽었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을 생각하며 (燕巖憶先兄)
우리 형님 얼굴은 누굴 닮았나?
我兄顔髮曾誰似
아버지 생각나면 형님을 봤지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생각나면 그 누굴 보나?
今日思兄何處見
시냇물에 내 얼굴을 비추어 보네.
自將巾袂映溪行
벌써 내가 처음 열하일기를 읽은 지도 세월의 두께가 쌓여, 두 번이나 강산이 변했다. 그러니, 다시 고미숙이 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을 펼쳐서 박지원의 박람강기와 해학의 문장을 활자로 보았을 때, 처음 읽는 이야기처럼 신선한 감동을 느낀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앞의 ‘형을 생각하며(燕巖憶先兄)’가 소개된 장면에서는 다시 눈시울이 적셔졌다. 20여 년 전에 읽었던 대양서적 출판의 『열하일기 상/중/하』 3권을 책상 위에 꺼내어 놓고, 저자가 원전을 인용할 때 마다 해당 부분을 뒤적여 찾으면서 몇 시간 책 속을 헤매다 보니, 이제서야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면서 내 마음은 완전히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학 시절에는 연암이 활동하던 시대 배경이나, 열하니 반선이니 하는 지명과 인명이 구름처럼 희미했으나, 사십대인 지금은 훨씬 더 현실감 있고 박진감 있게 박지원의 여행 모습이 그려진다.
이 봄, 고전의 향기에 취해도 좋을 법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상기(象記), 황금대기(黃金臺記) 등 독립된 단편들은 잠깐씩 따로 찾아 읽었다.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막바지 무박 사일 간의 행군에서 모두들 거의 자면서 걷는 모습은, 나도 몇 년 전에 비슷한 체험 훈련을 받은 적이 있어서 눈에 그려지는 듯 했다. 열하일기에 대한 깊은 애정에 바탕을 두고 프랑스 현대 철학의 개념을 활용하는 고미숙씨의 해설은 이 시대 보통 사람들에게도 고전의 향기를 흠뻑 맛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열하일기 문장 속의 해학과 사실적 묘사가 중세의 엄숙주의를 전복시키고 문체의 혁명을야기한 사실이나, 그 의미를 분석한 이 저서에 대한 평은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현대의 명저가 고미숙씨가 언급한 학계의 연암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미처 언급하지 못한 선학들의 연구 성과에도 기대고 있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열하일기와 연암 소설에 관심을 기울여 최초로 열하일기를 번역해 낸 이가원씨의 노력은 현금 박지원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의 본문에 인용된 열하일기 내용은 모두 이가원 번역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단어 몇 개씩만 바꾸어 인용한 한글 번역이 지금 봐도 모두 매끄럽기 그지없을 정도로, 이가원씨의 번역은 뛰어난 것이었다. 특히 이가원씨는 연암이 태어난 해가 1737년 정사(丁巳)년이고 그도 180년 후인 1917년 정사년에 태어나 세기를 격한 동갑(同甲)이라며 자신의 연암연구에 대한 특별한 인연과 애정을 토로한 바 있으니, 아마 연암에 대한 사랑은 저자에 못지않을 터이다. 이 봄, 다시 한번 열하일기를 통독하고 싶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