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금춘가족 펴내는 권오웅씨-′긴 겨울을 지나 지금은 봄날′(글/이미홍)

봄은 참 따사롭고 포근하다. 그리고 봄은 그 부드러운 햇살 속에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리하여 봄은 희망이고 꿈이다. 하여 사람들은 봄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겨울 이 길고 혹독할수록 더 절실하다. 더 이상 얼어죽을 염려가 없는, 최소한 온 세상이 말라붙어 먹이를 구할 수 없어 굶어죽을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은, 그것만으로도 봄은 가난한 이들에겐 축복인 것이다. 몸이 가난한 이도, 마음이 가난한 이도 한마음으로 봄을 기다린다. 긴 겨울을 견디고 생명의 봄을 맞이했다는 것, 그것은 곧 그들이 혹한 속에서 살아 남았다는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겨울을 겁내지 않아도 되는 따사로운 봄볕 속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춥지 않다.

여기에 더 이상 봄을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 있다. 바로 그렇게 기다리던 봄날을 이미 맞이한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봄날인 사람, 그러면서도 늘 지금의 봄날을 함께 나누는 '금춘가족'을 꿈꾸는 사람, 권오웅(42)씨. 그를 만나러 가던 날은 겨울의 한복판인 1월 중순 무렵이었다. 그런데 날씨까지도 그를 만나러 가는 걸 아는 듯, 며칠 전까지의 몇 십 년 만이라던 그 매섭던 한파가 거짓말처럼 해사하게 풀린, 봄날 같은 날씨였다.

[금춘가족]만들기 5년, 몰라보게 늘어난 소중한 가족들

입구에 금춘가족이라 쓰여진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락 게임기 앞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두엇이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게임기가 일곱 여덟 대쯤 되는, 농촌 마을의 초등학교 앞에 있기에 딱 안성맞춤인 조촐한 오락실이다. 게임기 위 벽에 오락은 알맞게 공부는 열심히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 오락실 주인의 마음이 읽혀지는 듯 하다.

오락하던 아이들이 동전을 바꾸기 위해 두드리는 문에다 대고 인기척을 하노라니, 안에서 오웅씨 부부가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기며 맞는다. 조심스레 들어선 방 안에선 부인 이화숙(42)씨가 오웅씨가 손님을 맞을 양으로 씻고 단장하는 것을 거들고 있었던 듯, 오웅씨가 쑥쓰러워 하며 부인 손에서 양말을 받아 마저 신고는,

"잘 오셨습니다. 제가 권오웅입니다." 하고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그 정중한 인사 앞에서 나는 이 사람은 참 반듯한 사람이구나. 아니 반듯하게 살려고 많이 노력하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그가 세상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상처에 대한 나름대로의 당당한 복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가볍든 심하든 장애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세상 사람들 너희들이지 나는 아니다하는, 세상살이가 더 이상 겁나지 않는 그런 담담한 눈빛을 그는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머무는 곳, 방 한쪽에는 작은 서탁 위에 금춘가족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뜻이 너무도 선연한 지금은 봄날. 즉 하루하루를 늘 봄날처럼 꿈을 가지고 즐겁고 행복하게 가꾸며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지었다고.

그는 그렇게 혼자 금춘가족을 꾸려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오 년, 그는 식구 욕심 많은 가장처럼 금춘가족을 알뜰살뜰히도 기르고 일구어 왔다. 그 결과, 그들 식구들만이었던 금춘가족의 수는 이 겨울로 이제 234명이 되었다. 한 호, 한 호, 참 착실히도 가족을 불려왔다. 가족 수를 늘리는 게 처음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는 몰라보게 늘어난 식구들이 제각기 다 소중하고 이쁘기만할 뿐이다.

금춘가족들과 나누는 희망의 이야기

1993년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 기성이의 가족신문 만들기 숙제가 금춘가족의 시작이었다. 처음 가족 신문을 만들 때는 그냥 나도 한 번 우리 가족 이야기를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소박한 욕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으면서 -실제로 그는 프로그래밍 자격증을 비롯한 컴퓨터 자격증이 서너 개나 되는 진짜 컴도사로 초등학교 특별시간에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 저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은 그럼 한 번 만들어 보자로 바뀌었고, 무엇을 생각하면 망설이는 법이 별로 없는 그는 곧바로 밤을 새워 가족 신문 만들기에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금춘가족 1호가 태어났다. 그리고 2호, 3호, 그는 금춘가족 속에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그 꿈과 희망을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진 이웃들과 정말로 가족이 돼서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는 법을 그 속에서 스스로 배웠다. 물론 금춘가족 속에는 장애인만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웅씨와 뜻을 같이하고 작은 정성을 보태며 이 가족의 구성원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아픈 식구들에게 먼저 마음이 가고 그리고 손이 간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근육이 조금씩 마비되어 가는 장애를 가진 장애인이기에 말로는 다 못하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가 한 번도 쉬지 않고 매호마다 힘들고 지친 가족들을 찾아서 그 아픔을 온 가족들과 함께 나누며, 그렇게 열심히 금춘가족을 만들어 온 무의식의 저 편 어딘가에는 몸과 마음이 아픈 그 모든 식구들에 대한 그의 간절한 기도와 염원이 담겨 있을 터였다.

인생의 봄날을 가져다 준 아내

그러나 금춘가족의 시작은 사실은 그 훨씬 이전에 있었다. 조금씩 몸을 좀먹어 들어오는 장애와 가난으로 절망 속에 지쳐가던 그에게 봄날은 남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런 그로 하여금 다시 봄을 꿈꾸게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부인 이화숙씨였다.

근육디스트로피. 열 다섯 살,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몸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죽음을 생각했다. 삶을 포기한 순간 그는 집을 떠났고 그렇게 삼 년여를 떠돌았다. 그러다가 차마 삶을 포기하지 못한 그는 그렇다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말 못하는 아버지와 장애가 심해서 누워만 지내는 형,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수발 때문에 13살의 나이에 학교도 그만두고 끼니를 걱정하고 있는 어린 누이동생이었다. 거기에다 말못할 지독한 가난까지 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죽지 못할 바에야 살자고, 그것도 폼나게 잘 살아 보자고 돌아온 그였다. 그는 악착같이 열심히 지극 정성으로 농사 일에 매달렸다. 밤을 새워 나름대로 고향 토질에도 맞고 수익성도 높은 작물에 대해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여러 작물을 실험 재배도 하면서 그는 농사짓는 재미와 성공에의 꿈을 키워갔고, 그 꿈은 그가 짓는 참깨 농사와 더불어 영글어갔다. 그의 참깨 밭에서는 말 그대로 참깨가 쏟아졌고, 그 참깨 덕분에 오웅씨네는 땅도 사고 살림도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참깨 농사는 그에게 봄날을 가져다 주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로 하여금 봄날을 꿈꾸게 한 평생의 반려자 이화숙씨를 데려다 주었다.

그 이야기는, 말하자면 이렇다. 그가 참깨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자신의 경험과 당시의 심경을 있는 그대로 적어서 참깨가 쏟아지는 땅이라는 제목으로 농민 잡지인 새농민에 실었다. 이 글로 인해 혹여 인생의 반려자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소박하면서도 막연한 바람을 조심스럽게 담아서. 그리고 마침 그때 경주 집에서 맏딸로 살림을 돕고 있던 지금의 부인 이화숙씨가 우연히 오웅씨의 글을 읽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웅씨의 글을 읽으면서 이화숙씨의 마음이 무작정 오웅씨에게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해요. 그 글을 읽고 있는데 이 사람한테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이 사람한테는 내가 꼭 필요하겠구나, 내가 가서 이 사람과 이 사람 식구들에게 참말로 힘이 되어야겠다. 그런 생각이 책을 덮고 나서도 계속 나는 거예요. 그래서 보따리 싸 들고 무작정 왔죠 뭐."

참 말이 쉽다. 처녀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마음 먹고 집을 훌쩍 떠나기가 그리도 쉬운 일인가 말이다. 이건 예정된 운명에 다름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집을 떠나기 전날 밤 화숙씨가 꾼 거짓말 같은 꿈 이야기는 이런 생각을 더욱 굳게 만든다.

"그 글을 읽고 이 사람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서는 저 보고 자꾸 따라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따라갔더니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물길을 따라 자꾸 가더라고요. 그 물길이 끝나는 곳에 작은 집이 한 채 있는데 할아버지가 그리로 들어가라고 자꾸 손짓을 하더라고요."

이러니 어찌 그들 부부의 인연을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화숙씨는 그 꿈을 꾼 다음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섰다. 오직 오웅씨한테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화숙씨는 오웅씨를 찾아왔다.

한편, 몸이 불편한 형과 함께 큰 맘 먹고 정산 읍내에서 시작한 신발 가게를 지키던 오웅씨, 집에 누가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고등어 한 손을 사 들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젊은 여자가 자기 집인 양 여동생과 함께 메주를 만들어 매달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말 그대로 이 여자 이화숙이 들이닥친 거지요. 처음에는 그저 돌려보낼 생각만 했지요. 제가 이 사람을 설득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우리 집을 보고도 안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나중에는 제가 설득을 하다가 하다가 안돼서 그럼 일주일만 이 집에서 살아봐라, 직접 겪어보고 그때 결정하자 그랬어요.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안가겠다는 거예요. 덕분에 저는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졸지에 장가를 들게 된 거죠."

이 대목은 두 사람이 사랑 싸움을 할라치면 지금도 오웅씨가 큰 소리를 치는 것 중의 하나로 오웅씨 말대로 하면, 화숙씨가 죽자사자 같이 살자 해서 자신은 얼떨결에 어찌어찌 살게된 거지, 절대로 그때 찾아온 스물 두 살의 화숙씨가 곱고 이뻐서였다거나 첫 눈에 좋아졌기 때문이라거나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말로 해야만 사랑이겠는가. 더구나 그에게 화숙씨가 어떤 아내인가. 그의 말마따나 그에게 봄을 가져다 준 사람이 아닌가.

"집 안에 여자가 있다는 게, 여자의 손길이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걸 이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면서 알게 됐어요.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제가 겪어 온 인생이 춥고 힘든 가시밭길이었다면, 이 사람이 저한테로 온 다음부터는 제 인생의 봄날이 시작된 거라고 봐요. 우리 가족이 힘들고 가난했던 생활에서 벗어나 생활의 안정을 얻게 된 것도 그렇고, 생활이 나아지니까 아무런 꿈이나 앞날에 대한 계획도 없이 낙심하고 있던 식구들이 차츰차츰 미래를 꿈꾸게 된 것도 그래요. 사실 조금씩 약해져가는 근육 때문에 농사도 점점 힘에 부치고, 저 하나만 바라보는 식구들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거든요. 그런데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뒤로는 정말 거짓말처럼 하는 일이 잘 풀렸어요."

어둡고 추운 겨울의 밑바닥에 있던 남편에게 봄을 가져다 준 여자. 그리고 오웅씨가 그 봄을 [금춘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게끔 한 사람. 화숙씨 말고 세상 어느 아내가 남편 가슴에 이런 의미로 새겨져 있을까.

그런 아내를 한 순간에 잃어버릴 뻔한 일이 있었다. 불공을 드리러 가던 차가 사고가 났는데 차에 탄 일행 12명 중 9명이 죽고 화숙씨를 포함한 세 사람만이 살아 남은 큰 사고였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던 그 절망과 기도의 시간들. 부인 이화숙이 없는 세상을 한 번도 생각조차 못했던 오웅씨는 그래서 딸과 아들이 학교 때문에 시내로 나가고 부인 화숙씨와 티격대며 지내는 이즘의 하루하루가 진정 따사로운 봄날이다.

그래서일까, 때마침 마을어른이 찾아와서 부탁한 도장을 새기면서-오락실이 잘 안되자 도장새기는 기술을 배웠던 그다- 하는 말이 장차에는 여기에다 행복연구소를 차리고 싶단다.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데 몸이 자꾸 약해지는 거 빼고는 늘 봄날이라는 오웅씨. 오늘은 도장을 네 개나 새겼으니 밥벌이는 하게 됐다며 화숙씨를 쳐다보는 얼굴에 미처 다 숨기지 못한 웃음이 매달려 있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