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국 할아버지의 부치지 못한 편지(글/이미홍-객원기자)

용상동에 사는 안효국 할아버지는 1928년생이다. 고향은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용포리이며, 6.25때 22살의 나이로 월남했다. 피난을 나서던 길에 부인과 아이와 헤어져 찾아 헤매다 피난 행렬에 휩쓸려 단신으로 대동강을 건넜다. 그렇게 북을 뒤로 한 지 60여년, 어느덧 80이 된 그가 지난 5월, 북에 있는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58년 만에 쓰는, 그러나 끝내 부칠 수 없는 편지였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했던 어린시절
검산면에서 알아주는 대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난 덕분에 그는 호사스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방학 때 학교에서 고향 집으로 돌아올 적이면 집에서 일하는 넷이나 되는 머슴들이 ‘작은 나리님, 나리님’하고 부르며 깍듯이 대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족이 희생당했지.”“그때 내가 느낀 게 뭐냐면, 봉건사회에서 계급 차이 이런 게 너무 안됐더라고.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일꾼이 나더러 ‘아유, 낭군님. 이번에 좋은 학교에 합격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이래. 어린 마음에 내가 이게 참 불평등하고 안 좋은 거로구나 느꼈지. 이런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지. 학교에 다니면서 평등의식에 눈을 뜨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빠지게 된 거지. 한마디로 우리 집안의 걱정거리였지.”
그래서였는지 훗날 인민군이 들어와 그가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머슴들이 나서서 ‘이 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나서주어 화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해 신의주로 갔다. 누군가가 모택동을 만나려면 그리로 가야 된다고 했다. 신의주로 간 그는 공산주의사상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열심히 노래도 부르고 교육을 받고 있는데, 18일째 되는 날 교관이 부르더니 ‘동무는 더 이상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집으로 가라’고 하며 고향으로 가는 차표를 줬다. 신분조회 결과 지주의 아들이라는 게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주계급’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굴레에 좌절했다. 할 수 없이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혼돈과 불안의 기운이 가득했던 청년기
그 당시 북쪽에서는 김일성이 나서서 한창 계급 해방이니 토지개혁이니 하고 있을 때여서, 잘 됐다 그도 토지를 당에 헌납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집안에 일이 터졌다.
“원래 아버지가 몸을 아끼지 않고 머슴들이 있어도 손수 논물을 보시곤 하는데, 한 번은 육촌형들이 몰려와서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몽둥이로 팬 거야. 가만히 보니까 그동안 우리는 잘 살고 자기네는 못살았던 그것이, 감정이 폭발한 거야. 그때 내가 그랬어.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그래도 이건 아니다. 우리가 형네들보다 잘 살았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 어른을 여럿이 몰려와서 패는 건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저 지경으로 만든 당신들을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내 그랬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안 있어 그는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18살 나던 해였다. 그 당시가 대동아전쟁 말엽이었다. 그때 일본에 비행학교가 있었는데 그가 덜컥 그 비행학교에 지원을 한 것이었다. 집안에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하나뿐인 외아들인데 잘못하면 대가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전시에 아들 목숨도 보장하기가 어려울까 어른들이 서둘러 결혼을 시킨 것이었다. 부인은 평양여학교를 나온 재원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하나 놓고 하나는 뱃속에 있을 때였다. 가슴 속에 있던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가족들 몰래 다시 신의주로 갔다. 그러나 신의주는 이미 알 수 없는 기운으로 어수선하게 술렁이고 있었고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꿈을 접은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죽은 사람이 돌아온 듯 반겼지만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식구들을 저버린 남편에 대한 부인의 서운함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그는 이후 가정불화에 시달려야 했다.



시국이 어수선하여 결정한 남한행. 그리고 전쟁
목표를 잃어버리고 모든 것에 회의를 느낀 그는 어느 날 도저히 이렇게 아무 것도 안하고 살 수는 없다고, 아버지에게 남쪽으로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시국이 어수선함을 본인도 느끼고 계셨던 듯, 아버지는 패물이랑 상당한 액수의 현금을 만들어 주셨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해주로 갔다. 그곳에서 일주일을 기다려 안내자를 만나 이남행 길에 올랐다.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만 강을 건너고 산을 타 이동을 했다. 아이가 자꾸 보채고 울 때는 수면제를 먹이기도 했다. 국경에 거의 다 간 어느 날 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싶더니 총소리와 군인들 발자국 소리가 들이쳤다. 안내자가 돈만 챙기고 밀고를 한 것이었다. 수용소로 끌려가서 28일간 수용생활을 했다. 그때 군인들이 제일 먼저 물은 것이 ‘민청(민주청년동맹)을 찾아 남쪽으로 가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는 절대 아니라고, 남쪽에 있는 이모네 집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수용소 생활은 힘들었지만 학교를 다녀 글을 알았던 관계로 그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감방장을 하며 많은 수용소 동료들의 자술서(반성문)를 대신 써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 일로 당시 수용소에 있던 중령의 인정을 받아 아내와 아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수용소에서 계속 지내서는 안 되겠다 싶어 그도 기회를 봐서 ‘아내가 해산할 때가 되었는데 집에 한 며칠만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얻어서 수용소를 나왔다. 마을 근처까지 가서 소식을 전하니 집에서 동네 사람들이 신고를 할지도 모른다고 마을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인심이 날로 흉흉해지고 있던 때였다. 그 길로 그는 아버지가 써 주신 편지 한 장을 들고 평양으로 갔다. 아버지 친구가 평양백화점에 있어서 그곳에서 경리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백화점 경리는 반드시 자격증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도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경리 시험에 합격을 했다. 합격증을 받은 것이 6.25가 나기 한 달 전이었다.


그 무렵 평양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차, 탱크,대포를 싣고 군인들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30만 대군이라고 했다. 그리고 곧 전쟁이 발발했다. 백화점은 문을 닫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곧바로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그는 경리 경력을 인정받아 경리담당 소위로 배정을 받았다. 다행히 그의 부대는 전장과는 떨어진 북쪽에 있는 고산포 부대였다. 이곳은 안전하다고 안심한 것도 잠시 얼마 안 있어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했다는 말이 나오면서 부대는 철수해서 북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그 혼란을 틈타 병사들이 흩어졌다. 전쟁이 코앞에 들이닥치자 죽어도 고향 집에 가서 식구들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에 그도 부대를 도망쳐 집으로 향했다. 국군이 북진을 해 오고 있던 때였다.


 


살아야한다, 살아야한다. 피눈물을 흘리며 건넌 대동강
동태를 살피느라 고향 동네 언저리에서 숨어 지내는데 꿈자리가 하도 이상해서 마을로 들어갔다. 매부가 왜 이제 왔냐며 그를 동네파출소 앞으로 데려갔다. 부락민의 고발로 아버지와 계모, 사촌 큰형님이 총살을 당했던 것이었다. 파출소 앞에 공개 처형된 아버지의 시신이 있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었다. 시신들을 수습해서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동네에도 국군이 들어왔다. 치안대원들이 찾아왔다. 치안대에 들어와 활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아버지와 친척들의 죽음을 본 그가 극구 사양을 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찾아와 설득을 했고 국군 치하에서 그는 치안대원 완장을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있자니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소리가 들리고 국군이 남쪽으로 밀리는가 싶더니 북쪽으로부터 군인들이 물밀 듯이 밀려 내려왔다. 치안대장을 지낸 그가 살아남을 길은 묘연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백화점을 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사두었던 평양에 있는 집으로 보냈다. 그는 가산을 정리해서 일가친척 19명과 이틀 뒤에 마을을 빠져나와 평양으로 갔다. 그러나 평양시내도 이미 피난민의 물결로 아수라장이었고 찾아간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식구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한 것이었다. 간신히 피신했다는 장소로 찾아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길이 엇갈리기를 거듭하면서 그는 식구들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을 알았더라면 그는 일행들에게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삶에는 만약이란 없었다. 그는 우선 친척들을 인솔해서 피난 행렬에 섞여 남쪽으로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동강 근처에서 친척들이 그에게 상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해서 그만 혼자 대동강가로 갔다. 중공군은 이미 대동강을 건넜고, 대동강 다리 근처는 북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과 남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난리였다. 사람들이 새까맣게 철교를 건너고 있었다. 옷을 벗고 강을 건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뒤엉켜서 정신없는 피난 행렬에서 벗어나 다시 일행들에게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그도 어느새 옷을 벗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만 기억한다고 했다. 강을 건너 만났던, 동네에서 사주와 관상을 보시던 어른이 그를 붙들고 손금을 보더니 “이제 너희 집안에는 너 하나 밖에 없구나!” 하시던 그 말이 살아오는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시작한 남한생활
그는 그렇게 대동강을 건너 서울로 왔다. 종로에 있는 큰 교회에서 일주일을 밀가루 죽을 얻어먹으면서 지냈다. 다들 남쪽으로 피난길에 나서고 있었다. 먹고 살아야겠기에 양지쪽에 앉아 피난민들의 짐을 실어다주는 지게꾼이라도 하려면 지게를 훔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종로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피난길에 나선 처형을 만났다. 처형도 난리 통에 아내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처형 일행과 함께 그도 남쪽으로 가는 피난길에 올랐다.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밤에 역사 근처를 서성이던 그의 눈에 길가에 세워놓은 미군 트럭에서 물건 박스들을 들어내는 사람들이 보였다. 알고 보니 미군PX  물품을 수송하는 군용트럭이었다. 물건을 훔쳐내던 사람들이 그를 보더니 그에게도 뭔지 모를 커다란 박스 하나를 던져주고는 각자 박스 하나씩을 들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전쟁은 사람들을 바꿔놓고 있었다. 그는 그 박스를 메고 숙소로 돌아왔다. 풀어보니 사탕이 상자 가득 들어있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이 맞았다. 그걸 들고 역 앞에 나가 팔았다. 사탕은 순식간에 팔렸다. 그는 우선 죽 한 그릇을 사 먹고 나머지 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난을 간 청도에서 담배장사를 했다. 나중에는 그곳에 주둔해 있던 부대의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담배를 주문받아 공급을 해 주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미군들의 신임을 얻게 되어 미군통신부대 안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미군들의 잔심부름을 하는 하우스보이가 된 것이었다.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그가 한때 부끄러워했던 부르주아였던 아버지 덕분에 그가 누릴 수 있었던 혜택, 학교를 다닌 덕에 몇 마디 되지 않지만 영어를 할 줄 안 덕분이었다. 미군들은 그를 ‘조지’라고 불렀다. 부대 안에서의 생활은 편하고 안전했다. 그는 미군들의 잔심부름을 하면서 영어를 부지런히 익혔다. 영어 한 마디가 혈혈단신인 그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주는 것을 보고 그는 영어를 잘하면 살 길이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부대에 들어간 지 일주일인가 지나서 부대가 일선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보급 장교가 그를 보급창고로 데려가 물품을 정리하고는 남은 물품들을 줄 테니 이걸 가지고 장사를 해 보라고 했다. 은혜를 베푼 것이었지만 그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자신도 부대를 따라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는 결국 그 부대를 따라 청도를 떠나 춘천, 포천 등지로 다니면서 4년 동안 하우스보이 생활을 했다. 휴전이 되고 본국으로 가게 된 미군들은 그동안 정들었던 그에게 마지막 선물로 ‘결혼식’을 선물해 주고 싶다고 했다. 혼자인 그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걸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그래서 그때 얼결에 선을 보고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부대원들이 올려준 결혼식이었다.


미군들이 가고 난 후 그는 미8군에서 생활하면서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다. 그 결과 5년 만에 미8군 사령부 통역이 되어 생활하다가 29살 때 부대를 나와 무역회사에 입사를 했다. 영어, 일어가 능통했던 까닭에 무역 일을 맡아서 했다. 2000년에 퇴사를 했으니 그 회사에 거의 40평생을 바친 셈이었다. 


무역회사 일로 안동을 왔다 갔다 했는데 그러면서 영주 순흥에 안씨들 문중의 본거지가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같은 안씨 성을 가진 이들과 만남도 갖고 하면서 자연 안동 지방이 가깝게 느껴지고 정이 들었다고 했다. 6년 전에 세상을 달리한 아내와의 사이에 2남 4녀 총 6남매를 두었는데, 자식들이 다 장성해서 분가를 하고 부인마저 먼저 세상을 뜬 뒤 안동으로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된 것이라 했다.




만득이 같은 생, 자식들에겐 못내 미안할 따름
안동으로 내려와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기억의 끝자락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이북의 식구들을 가슴에 묻고 그 한을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고 술로 살아온 세월들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이북에서 한때는 사회주의자였다가 다시 국군 치안대장이 되었다가 피난을 내려온 자신의 과거를 자식들한테까지 숨기면서 살아온 세월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고 말 못하는 가슴 속의 응어리와 피해의식이 늘 그를 따라다녔고, 항상 스스로를 비관하며 살며 알 수 없는 갈증을 술로 채웠다. 그렇게 밖으로 도느라 그는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고 자식들에게 대학공부를 못시켰다. 자식들한테 해준 게 없으니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저 애비 원망 않고 잘 살아주는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대견할 뿐. 그 자식들에게 그는 어버이날이 있던 지난 5월에 처음으로 ‘북에 너희 언니 오빠가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지역 신문에서 개최한 가족의 달 행사인 ‘사랑의 편지쓰기’에 북에 있는 아내에게 쓴 편지가 당선이 되어 실리게 되면서였다. 그나 죽은 아내나 다 젊은 나이에 결혼을 했기에, 아버지 고향이 북쪽이라고 해도 북쪽에 아버지의 자식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자식들은 충격을 받긴 했지만 아버지의 힘들었던 지난날을 이해해 주었다. 교과서 속에서 배웠던, 박완서의 소설 속 주인공 ‘만득이’ 같은 생을 자신의 아버지가 살아온 것이었다. 


황해도 시골 마을에서 선남선녀인 만득이와 곱단이는 마을 사람들이 다 아름다이 여기는 사랑을 한다. 그러다가 만득이가 징용을 간다. 징용 갔다 돌아온 만득이는 자신을 기다리다 위안부 동원을 피해 시집간 첫사랑 곱단이 대신 한마을서 자란 순애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6.25때 월남을 해서 남쪽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간다. 그러나 남편이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평생 북쪽 땅을 그리워하며 산다고 생각하는 순애는 노인이 된 만득이 고향땅을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서러움에 잠겨 눈물짓는 걸, 곱단이를 못 잊어서 그렇다고 끝끝내 오해를 풀지 않고 가슴에 한을 안은 채 눈을 감는다. 만득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중늙은이한테 쫓기듯 시집을 가야했던 곱단이도, 징용에 끌려갔다가 첫사랑을 잃고 6.25로 가족들과 흩어지고 고향을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만득이도, 그런 만득이를 오해하며 영원히 늙지 않는 남편의 기억 속의 첫사랑을 질투하며 살다 간 순애도 누구 하나 애잔하지 않은 이가 없다. 우리네 역사는 얼마나 많은 만득이와 곱단이와 순애를 만들어 냈는지를 생각하는데, 그에게도 고향에서 결혼을 하기 전 첫사랑이 있었다 한다. 또 하나의 만득이가 여기에 있었던 거다.


문득 옆에서 그를 지켜보며 살았을 죽은 그의 아내의 가슴 속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새까맣게 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럴 만치 그는 젊은 시절 밖으로만 내달았다. 무역회사의 업무상 일 년의 반 이상을 출장으로 집을 비웠고 술과 여자문제로 여러 번 속을 썩이기도 했다. 뒤늦게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며 아내를 돌아보았을 때 아내는 이미 다 늙은 노인네였고, 자식들도 모르게 지켜온 남편의 비밀을 혼자 가슴에 묻은 채 얼마 뒤 그를 남겨두고 먼저 가고 말았다. 




여보!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 꿈에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사월초파일 여기 안동에 있는 절 해동사에 가서 부처님 앞에서 당신과 자식들의 무사한 생존을 빌려고 두 손을 모으는 순간 뜨거운 눈물이 주름진 얼굴의 골을 타고 흘러 서둘러 절간을 나왔어요.


여보! 우리 만나는 날까지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희망의 끈을 힘차게 붙들고 살아요.


당신과 자식들의 건강과 상봉의 행운을 기원하면서


2007년 5월 29일 당신남편 안효국


 


부치지 못한 편지, 가슴으로 읽는 편지
그는 북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 그 편지를 영원히 부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산가족 상봉이 한창일 때 그도 상봉 신청을 했다. 그런데 적십자에서 돌아온 답은 ‘생사 확인 불능’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고 했다. 피난 당시 만난 처형과 처남에게서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나중에 만난 고향 쪽 사람들도 남아있던 일가족들이 다 일을 당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남아있던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생사 확인 불능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심정은 뭐라 말 할 수가 없어요. 절망이라는 말 밖에.”


그 이후로 그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부러 귀를 막았다. 그런데 얼마 전 적십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라는 안내였다. 전화를 건 직원은 그가 ‘생사 확인 불능’이라는 답신을 받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같은 곳에서 뭐하는 짓인가 싶어 그는 말도 하기 싫어 그냥 전화를 끊었다. 남들은 밑져야 본전인데 한 번 더 해보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희망이 없는 줄 알면서도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하는 그 생지옥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고향이 북쪽인 사람들이 멀리서나마 고향 땅을 보겠다고 너도나도 금강산으로 여행을 가도 그는 금강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금강산 한 번 보여주고 돈 받고 생색내는 허울뿐인 여행은 그로 하여금 술을 더 마시게 할 뿐이다.



남과 북, 이제는 싸움을 끝낼 때가 됐지요.
그의 책상 위에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 ‘안중근’이 놓여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씨 조상인 안중근 의사처럼 나이 80에 그 자신도 무언가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는 신념에 하루도 손에서 놓지 않고 무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제는 그만 싸워야 하지 않겠어요. 정치고 경제고 남북이고 간에 이제 그만 싸워야 돼요. 아무리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잘 살아도 밤낮 이렇게 헐뜯고 같은 민족끼리 싸우고 있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제가 요즘 생각이 많아요. 한 번 왔다 가면 그만인데 무언가 의미를 남기고 가야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내 나름대로 궁리가 많아요.”


그는 요즘 지난 세월의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실화에 기초한 소설을 쓰고 있다. 남북간의 이념 갈등을 고스란히 겪은 분단의 산 증인이자 시대의 피해자인 자신이 걸어온 길이 사람들에게 한 가닥 경종이 되어 울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는 편지를 쓰고 소설도 쓰고 있다. 그가 평생을 침묵하며 살아오는 동안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아우성들을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세상 속으로 내보내기로 작정을 했나 보다.


8.15를 앞둔 무더운 여름날, 옥수수밭 옆에서 안효국 할아버지가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웃으시는데 그 웃음이 어쩐지 쓸쓸했다. 분단의 역사를 가로질러 평안도 땅에서 안동까지 걸어온 할아버지의 생이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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