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루에서 선어대까지(글/이동백)인류의 역사에서 강을 빼 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인류 문화의 연원을 강에서 찾는다면 그 해답은 자명하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에게 강이 없었다면 역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생존의 가능성도 보장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강은 인간에게 있어서 시작이며 끝인 동시에 그 시작과 끝을 연결해 주는 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강에는 인간의 삶이 있는 반면 휴식이 있다. 강에는 다다름이 존재하고, 떠남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함께 뒤척이면서 그 강물을 따라 흘러갈 것이고, 그 강 어느 언덕에는 시인 묵객의 미음완보(微吟緩步)의 여유로운 산책과 명현 거유의 철학적 사색도 스며 있을 것이다.
이제 그 강의 한 줄기를 찾아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떠나보자.
반변천, 때로는 협곡을 뚫고 반석을 밟으며, 때로는 강마을과 나룻터를 흘러와 낙동강에 몸을 섞어버리는 300여 리 긴 강줄기. 이 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게 되면 산천의 아름다움도 만날 것이지만, 그 언저리에 펼쳐진 사람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들도 접할 수 있으리라.
반변천은 낙동강의 최상류에 위치한 지류로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신한천(神漢川)이라 불려진 이 강은 일월산(1,219m)에서 발원하여 흐르다가 영양읍 북쪽에서 장군천과 합하여 깊은 협곡을 뚫고 남쪽으로 흐른다. 영양의 남쪽에서는 청기천과 합류하고, 진보 부근에서 많은 지류를 합하면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부근에는 더욱 심한 감입 곡류를 이루고 하폭이 좁은 횡곡(橫谷)을 형성한다. 서진(西進)을 계속하는 이 강은 임하호를 만나면서 의지 하나쯤을 꺾어 버리지만, 흐름을 계속하여 결국 자신의 이름을 버릴 안동에 다다른다. 116.1Km를 흘러오면서 반변천은 그 섶에 천길 단애(斷崖)를 세워두기도 하고, 하적호(河跡湖)나 단구(段丘)를 남겨 두기도 한다. 물론 사람들의 숨결이 멈추게 한 적도 없고.
반변천과 낙동강이 만나다
영호루(映湖樓) 높은 마루에 올라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던져 보라. 반변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점쯤에 시선이 가서 자연스럽게 꽂힐 것이다. 두 물줄기는 거기서 잠시 암컷을 두고 다투는 짐승처럼 잠시 힘을 겨룬다. 찰나의 승부로 낙동강은 한 번 휘어지고, 반변천은 자신의 이름을 버린다. 그런 다음 둘은 가슴을 넓힌 하나가 되어 먼 바다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난다. 이 아름다운 도전과 응전의 게임을 늘 지켜보는 것이 영호루인 셈이다. 수백 년 동안 영호루는 반변천 물 구비가 잦아드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 것이다. 달이라도 밝은 밤이면, 무심히 흘러가는 낙동강을 처연히 바라보던 고려왕의 영자(影子)가 다락 위에 나타날 법도 한 이 영호루는 반변천이 끝나는 지점에 마치 느낌표처럼 찍혀 있다.
영호루를 내려와 그 옆으로 새로 난 터널 길을 지나 동으로 1㎞쯤 떨어진 곳에 귀래정(歸來亭)이 서 있다.
귀래정은 고성 이씨 안동 입향조 이증의 둘째 아들인 낙포(洛浦) 이굉이 지은 정자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로 정자의 명칭을 삼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 임청각, 군자정, 하회의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이곳에는 주인을 비롯해 농암 이현보·송재 이우·택당 이식·백사 윤훤 등의 시판이 게시되어 있다
귀래정이 있으므로 반변천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고나 할까. 지금은 포장길이 반변천과 귀래정을 갈라놓음으로써 옛 정취를 찾아볼 길이 없지마는 10여년 전만 해도 반변천의 흰 모랫벌과 미루나무 숲과 귀래정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경치는 가히 사람을 경탄케 할 만하였다. 포도(鋪道)에 밀려난 귀래정에서 바라본 반변천은 서느렇게 불고 가는 겨울 바람 때문에 황량하기만 했다.
귀래정을 버리고 반변천 천변을 따라 동쪽으로 한참을 가서 닿게 되는 곳이 용정교이다. 반변천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 가운데 첫 번째 만나는 다리이다. 이 다리 위에서 동쪽을 굽어보는 멋도 멋이려니와 반변천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빼버릴 수 없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수중보이다. 상수도 취수장의 수위 확보를 위해 설치해 놓은 이 수중보는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어, 떠가던 구름 한 조각이 수면 위로 잠시 내려와 몸을 적시기도 하고, 여명의 아침녘엔 물안개가 곱게 피어오르기도 한다. 때로는 수중보로 뛰어오르는 물고기를 낚아채는 물새들의 포식 장면도 만날 수 있다.
이 수중보 옆에는 1998년에 자리를 옮겨 앉은 안동고등학교의 웅장한 건물이 골짜기 하나를 온통 채우고 있어, 적막하기만 하던 곳에 사람의 숨결로 흥성스럽다.
반변천의 역작 마뜰
마뜰은, 반변천이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일궈 놓은 역작(力作)이다. 반변천이 길을 내면서부터 마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마뜰의 깊은 토층(土層)에는 수만 년 동안 쌓아 놓은 반변천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강의 물 흐름이 없이는 마뜰을 생각할 수 없다. 반변천의 물살에 수난을 당한 일이 수도 헤아릴 수 없겠지만, 마뜰은 반변천이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뜰의 오늘이 그러하고, 내일 또한 그러할 것이다.
마뜰은 선어대를 만나면서 송천과 연결된다.
반변천이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명주실타래 하나를 풀 정도의 깊은 소(沼)가 만들어지니, 이것이 선어대(仙漁臺)이다. 영가지는 선어대를 선어연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이곳에 내외교라는 다리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다만 건넛마을 기느리와 이어주는 작은 나룻배가 뱃사공 없이 나루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부터 사공을 잃은 배는 미루나무에 매인 밧줄에 의지하여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강을 건너는 사람이 도르래에 걸린 밧줄을 스스로 잡아당겨 배를 움직여 가는 식이다. 선어대는 심연을 이루었다고 전해오지만 지금은 토사가 밀려들어 하상이 높아지고 말았다. 토사의 유입으로 선어대 주변에는 강 가운데 작은 섬들이 여러 개 형성되어 있다.
<송제사적비>와 <영가지>에 나오는 송제축조기록
선어대와 더불어 관심을 끄는 것이 송제(松堤)이다. 이것은 선어대에서 마뜰 쪽으로 축조된 제방인데, 반변천 물길을 따라 반변천이 끝나는 지점까지 길게 뻗어 있다. 송제 축조에 대한 기록은 <송제사적비>와 <영가지> 등에 남아 있다. <송제사적비>에 의하면 정조 원년(1777)의 수해로 송제가 무너져 부사 김상묵이 1778년에 18만 명을 동원하여 수개월만에 복구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영가지>에는 송제 비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부사 김륵이 열네 고을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1606년 봄에 송제 축조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하지 무렵에 완공하였다는 것이다.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면으로 빠지는 34번 국도가 선어대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서 있는 송제사적비는 비신을 맨 눈으로 읽기 버거울 정도로 깊은 연륜을 가늠케 한다. 개석 따위를 갖추지 아니한 이 소박한 비석은 1m 정도의 높이에 전면과 양 측면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영가지 제언조에 비문이 소개된 비석은 이 사적비에서 6∼7m 위쪽 바위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여간 관심을 두고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것도 고개를 힘껏 젖히고 쳐다봐야 松堤라는 글자를 읽을 수 있다.
선어대 가경
선어대에서 남쪽을 내다보는 맛도 있고, 확 트인 동쪽을 바라보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남쪽은 큰 철탑이 위압적이고, 동쪽은 안동대의 매머드 건물이 시야를 막아 버려서 아쉬움이 남는다. 선어대가 그 가경(佳景)을 스스로 드러내는 곳은 아마 안동 향교 앞의 국도변이 아닐까 한다. 이 지점에서 선어대로 시선을 두면, 우선 마음을 끄는 것은 겨울 바람에 일렁이는 마른 갈대꽃 속에 듬성듬성 군락을 이룬 버드나무들이 곱게 늘어선 몇 개의 작은 섬들이다. 서로 어깨를 맞대고 소근거리듯 떠 있는 이 섬들이 안존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한 번 가서 그 품에 들어, 누워 보고도 싶다. 이 섬들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반변천의 물결이 남쪽 하늘가에 비껴 뜬 햇살을 받고 반짝인다. 수천의 거울 조각이 물을 따라 흐르는 듯하다.
이 또한 지나칠 수 없는 광경인데, 그 물결 위로 떠다니는 겨울새를 만날 수 있으니, 이밖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운이 닿으면 백조 무리와 조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겨울 어느 날, 한 떼의 백조가 반변천을 유영했다는 사실이다. 이 날 이십여 마리의 백조들은 사람의 출현에 개의치 아니하고 물을 거슬러 감에 거침이 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우아한 자태를 넘은 위용이었다. 이는 소동파의 적벽부 일절을 상기케 하니, 곧 강릉을 치고 형주로 향하는 조조 군사의 위용을 일컬은 축로천리( 千里)-배의 이물과 고물이 천리에 이었더라.-가 그를 일컫는 일절이다. 겨울 강 푸른 물결과 한 무리 흰 새 떼와의 멋진 조화를 반변천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선사한 축복이다.
동대에서 본 반변천
선어대를 가까이서 살피는 것 못지 않게 멀리서 조망하는 일도 소중하고 귀한 일이다.
남선면 신석리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기느리 마을이다 이 마을 서쪽에는 덤산이 급하게 반변천으로 빠져든다. 이 산의 발치 위에 작은 약수가 솟아나고, 또 그 한 길쯤 위에는 東臺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벽이 있다. 이 글씨는 1892년 안동부사 동농 김가진이 썼다. 아마 단애를 이룬 이 암벽이 안동의 동쪽에 위치해서 붙인 이름인 듯하다.
이 대에 의지하여 반변천을 굽어본다. 서쪽으로는 멀리 상수원 수중보가 보이고, 그쯤에서 덤산의 한 자락이 높은 단애를 이루면서 끝난다. 그 단애 밑으로 흐르는 물은 곧추서서 세찬 겨울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데, 제 살을 온통 쥐어뜯으며 펄쩍펄쩍 뛰고 있다. 시선을 동녘으로 옮기면, 몇 백 미터 상거에 선어대가 건너다 보인다. 거기서부터 반변천의 물길이 보이는데, 물결은 서쪽과는 달라 사뭇 조용하여 평화스럽다. 그리고 선어대 위에서부터 선어대를 지나 송제에 이르는 곳곳에는 작은 섬들이 널려 있어 아기자기한 멋이 느껴진다. 특히 송제 위쪽에서 동대 앞에 이르는 길게 뻗은 섬 하나는 마치 초승달 같이 아름답다. 이 섬들은 습지를 이루고 있어 물을 정화하는 자연의 보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도 있다.
동대에서 다시 눈을 들어 서쪽을 내다보면, 용상동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우선 아파트군이 시선을 꽉 잡아 버린다. 인공의 것들을 지우고 싶은 욕심이 드는데, 이어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영남산과 안동 시가지이다. 그쯤에서 고개를 좀 들어올리면 능선을 이룬 산마루들이 길게 이어진다. 그 가운데 높은 산 하나가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눈에 잡힌다. 학가산이다. 학가산의 남기(嵐氣)가 안동을 에워싸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높이에서 시선만을 거두어 동쪽으로 보내면 꽤 넓은 들 끝으로 솔뫼리 뒷산이 쫓아나가는 시선의 힘을 꺾어 놓고 만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이 반변천으로 떨어지고 만다. 국도를 이끌고 휘돌아 나가는 반변천의 물길이 저만치 보인다. 반변천은 그 길로 안동대를 옆에 끼고 광탄 나루로 내닫고 있다.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이나 하는 듯이.[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