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산′ 펴낸 산사나이 권오춘씨(글/백소애-편집기자)
산꾼들은 찾아가서 위험하고, 일반인들은 몰라서 위험한 게 산입니다.
“으이그 저 눔의 불효자식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나오는 산악인을 볼 때면 우리 모친이 항상 던지는 말이다. 부모 가슴을 철렁이게 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식가진 부모 심정이야 다들 그러할 것이다. 한때는 겁 없이 기세등등 산을 오른 권오춘씨도 어머니의 속 꽤나 썩였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산꾼들은 찾아가서 위험하고 일반인들은 몰라서 위험한 게 산이리라.
학가산, 천등산, 아기산, 천지갑산 등 낯설지 않은 우리지역 산을 자기 집 앞마당처럼 좍 꿰고 있는 한우리산악회 등반대장인 그가 얼마 전 ‘안동의 산’이라는 책을 덜컥 내놓았다.
그를 만나기 전 나는 좀 비장한 마음을 품었더랬다. 산악인 엄홍길씨가 함께 등반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떠난 ‘약속’이란 다큐가 문득 기억나서일까. ‘산사나이’ 권오춘씨를 만나러 가면서 다부진 체격에 동상 걸린 빨간 코를 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사나이를 상상했더랬다. 하지만 거기에는 책 내는 게 대수도 아니고 산 타는 것도 대수가 아닌, 책을 보고 혹여 틀린 지명이라도 있다면 고쳐줄만한 분이 ‘안동’지 구독자 중에 많이 있을지도 모르니 그런 분들이 연락을 해주면 좋겠다는 차원에서 인터뷰에 응한 키 큰 사내가 있을 뿐이었다. 그를 한우리산악회 사무실이자 그가 대표로 있는 한 산악용품전문점에서 만나보았다.
산사나이 권오춘씨의 산행기록 <안동의 산>
“괜한 체면치레 같은 거 싫어합니다. 그럴려고 책 냈던 것도 아니고.......그냥 옛날부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었고 제가 모은 자료를 묵히기 아까워 산행하시는 분들에게 산꾼들의 경험을 나누어주는 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많이 조심스러워했다. 솔직히 몇 년 동안 꼬박 정성을 들여야 하는 이런 작업의 결과물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할 만도 하건만 그는 계속 안동 사는 산꾼이 쉽게 풀어낸 안동의 산이야기일 뿐이니 너무 추켜세우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봐달라고 손사래를 친다.
2년 전에 준비할 때가 17주년이었으니까 올해로 한우리산악회 창립 19주년이 된다. 처음 책을 발간하자는 얘기가 나왔을 때 더러는 괜히 일 만드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이해해요. 사실 일이긴 일이죠. 하지만 지역에서 이런 식으로 묶어놓아 기록을 남기면 다음 사람이 보고 살을 더 붙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요.”
최근 자료로 준비하느라 2년을 꼬박 산을 오르고 준비했다. 어차피 글 쓰는 데는 아마추어라 서툴더라도 이해해주리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처음엔 회원 모두의 글과 자료를 수록하려고 했으나 여러 명이 붙들고 있으니 세월아 내월아가 되는 거 같아 기획안을 낸 권오춘씨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는지 한우리산악회 창립멤버인 그의 이 특별한 기념물이 지금은 산악회뿐만 아니라 안동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책은 800부 정도 발행했다. 사실 지역 내에서 경제적 이익을 보고자 한 것도 아니고 단지 필요한 이들에게까지 돌아가지 않는 비매품의 한계가 있을 듯하여 가격을 붙여 내놓았다. 타지 산악인들에게도 배부가 된 터라, 운전대를 돌려 안동으로 온 이들도 더러 있다.
한우리산악회원 중 산나물에 일가견이 있는 회원과 사진도 좀 찍는다는 회원들과 함께 구석구석을 누빈 결과 책에는 안동색이 짙다. 곳곳에 산나물을 소개해놓고 개념도에는 옛날에 불리던 골 이름도 숱하다. 각 산의 특징과 산행코스, 미니종주코스, 위치도, 개념도가 빼곡히 담겨져 있다.
작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글쓰는 것보다도 개념도를 작성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개념도 안에 지명을 찾아 적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동네 터줏대감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붙들고 “뭐라 불렀니껴?” 물으면 “ 뭐라캤지.” 하는데 도통 못 알아먹어 묻기도 여러 번이었다. 사투리를 쓰다보니 글로 받아 적고 여러 번 되묻기도 어렵고 단어 하나 물으려 3시간을 달려간 적도 있었다고. 그러니 정작 글 쓰는 것보다 개념도 정리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웠다. 옛 지명에 대한 정확한 근거가 없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지명을 활자화시켰는데 나중에 틀리다는 얘기라도 들을까봐 면구스럽다고.
“골 이름 하나 알아내려고 몇 시간을 투자해야하니까 그게 참 힘들었어요. 제가 책에 부연설명은 못했습니다만, 혹여 이 책을 보시고 틀린 지명이 있다면 그 정확한 명칭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거주하시는 동네 어르신들이 알려주는 골 이름을 취합해서 다수가 말하고 신빙성이 있고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을 붙였어요.”
산이 숱하게 많으니 다 넣을 수는 없고, 아쉽기야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최대한 객관성 있게 1:50,000으로 만든 국립지도원의 지도에 등재된 산으로 기준을 잡았다.
“그렇다고 꼭 유명한 산 위주로 하지는 않았어요. 가까이 의성에서도 많이 찾는 산인데 안동에서는 잘 모르는 산도 있어요. 사람들한테 산 이름을 물으니 잘 모르더라구요. 사람마다 약간씩 다르게 얘기를 하더군요. 그런 산은 통일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우리나라에도 두리봉이라 불리는 곳은 많아요. 그런데 지역 어른들은 질래재라고 해요. 재라는 게 옛날 어른들이 동네서 동네로 넘어갈 때 쓰는 고개를 말하는 거잖아요. 이래저래 알아보니 두리봉이라 불렀다 하더군요. 그래서 그 이름으로 붙여놓았어요.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면 그나마의 소소한 역사도 알아내기가 어려워요. 지역 산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죠.”
본인이 되어도 좋고 누가 되어도 좋으니 여기에 살을 더 붙여 안동의 산을 더 풍성하게 담아낸다면 그것 또한 좋겠단다. 그의 바람대로 다른 지역에서도 그 지역 산꾼들이 나서서 지역 산 알리기에 동참한다면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제 관광은 감상뿐만이 아니라 체험이 되어야 된다고 봐요. 안동사람들조차 하회마을 풍경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의외로 없습니다. 산 위에 벤치나 인공조형물을 세우는 건 저도 달갑지 않지만 마늘봉 같은 곳에 서너 명 올라가 볼 수 있는 조망타워라도 세워두면 그것도 관광성이 있을 것 같아요. 마늘봉에서 내려 보는 하회마을 전경이 참 멋지거든요. 안동사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인간이 자연을 최소한 훼손하면서 원하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도 무조건 하지마라는 것보다는 낫지 싶어요.”
산을 많이 다니면서 안타까운 점도 많았다. 무조건 ‘산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기 보다는 ‘훼손하지 마시오’로 푯말이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나 한철 생업을 하는 사람이나 산을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나, 모두들 사람과 자연에 대한 예의만 지키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그가 산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무조건적인 입산금지보다는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사람들의 산행을 독려하자는 것이다.
영남대 산악회 OB, 산과의 인연으로 결혼
그는 영남대 79학번 산악회 OB다. 화학과를 나와서 제약회사 실험실에 몇 해 근무했다. 부인 손귀옥씨(46)를 그때 만났다.
그때가 마침 여름휴가철이었는데 실험실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여름휴가를 짰다. 우연찮게 손씨와 같은 시기에 휴가를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에 대한 호감만 가지고 있을 뿐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이었다고 한다. 사회 초년생 시절, 산악회 OB들과 더 가까이 지내던 때라 산으로 휴가를 가기로 정했다. 설악산 서북주능을 하기로 하고 최소 2박 코스로 잡고는 짐을 줄이고 줄여 4명이 텐트 하나로 떠날 채비를 했다. 직장동료들끼리 서로 어디로 휴가를 갈 것인지 얘기 중에 권오춘씨가 설악산 서북주능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부인 손씨는 ‘서북주능’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아, 그냥 설악산 놀러가는 정도’로 생각했던 듯. 당사자 권오춘씨는 그냥 지나가는 말로 ‘가실 마음 있으면 텐트고 뭐고 다 준비해놓겠으니 오시라’ 말하고는 잊어버렸다. 그런데 출발 당일 성북역에 배낭을 맨 손씨가 나타났다. 당황한 권오춘씨가 집으로 돌아가서 텐트 하나를 더 준비하고 이것저것 챙겨 떠났다. 친구들도 당황하긴 마찬가지. 어떤 언질도 못 들었던 데다가 험한 산행을 함께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일단 산에 올랐다. 첫째 날은 산꾼들이 많이 묵는 곳에서 하루를 잘 묵었는데 둘째 날은 일반 피서객들이 많이 묵는 곳에서 묵었던지라 시끄럽기가 그지없었다. 잠자리를 봐주고 갔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가서 보니 손씨가 깨진 병에 발을 베여 피를 흘리고 있었다. 상처가 깊었다. 권오춘씨가 웃옷을 훌러덩 벗어 런닝을 찢어 상처를 묶어주었다. 믿거나 말거나 아마 런닝을 찢어 묶어주는 터프한 모습에서 자신에게 반한 듯 하다고 말하는 권오춘씨. 산행을 마치고 마지막 날 해수욕장에 갔는데 그 발을 하고선 물에 들어가려고 한 모습에서 권오춘씨 또한 이 ‘못 말리는 아가씨’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89년 즈음해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왔고 현재까지 산악용품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한우리산악회 창립멤버이니 산악회 사람들과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아이들도 다 컸겠다 부인 손귀옥씨와 함께 트래킹을 할 계획도 갖고 있다. 물론 손귀옥씨가 산에 오를 몸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산이 거기 있으니 가지요” 그의 건강한 산행
전공보다 산 타는 데 더 열중했더니 산은 그에게 평생지기가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친구다.
“사실 마라톤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스톤마라톤이 꿈이자 로망 아닌가요? 꼭 오르고 싶은 산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그는 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다.
“아니오. 없습니다.”
우문인줄 알면서도 또 묻는다.
“산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산이 거기 있으니 가지요.”
“철학자가 다 되셨군요.”
그가 껄껄 웃는다.
“욕심을 버리고 산을 오르면 달라요. 그렇게 오르면 산을 오르는 그 자체로 즐기게 됩니다.”
이전에 큰 사고가 있었다. 그는 그 말을 하기 꺼려했다. 지금이야 웃지만 가슴 철렁한 사고였다. 평생 할 불효를 그때 다한 것 같았다.
“하이고 이거 제 치부가 다 드러나는 거 아닙니까?”
사고가 어찌 치부가 되랴. 그 사고로 인해 그는 산을 대하는 것이 달라졌다. 거침없던 청춘에서 겸손한 중년이 된 것이다. 자연에 분명한 사람. 산 오르는데 잡념을 갖지 않고 순수하게 오르는 사람. 산꾼들이 터를 닦아, 산을 오르는 모든 이가 산행의 즐거움을 맛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권오춘씨. 그의 건강한 산행일지는 진정 산사나이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가 다음에도 안동의 산 구석구석을 누벼 안동색이 가득한 멋진 기록 하나 또 다시 남기길 바랄 뿐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