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 돌아가는 신비의 여행지 홍춘마을(글/임세권-안동대 교수)

지금의 황산시와 강서성의 우위엔현(무원현源縣)을 포함한 옛 휘저우(徽州)지역에 있는 수많은 전통 마을 가운데 한 군데를 간다면 두말하지 않고 꼽는 데가 바로 홍춘(굉촌宏村) 마을이다. 이 마을이 이처럼 널리 알려진 것은 2000년 세계문화유산에, 이웃한 시디마을과 함께 등재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가보면 역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주차장에 내려 입장권을 사서 마을로 들어가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널찍하게 마을 앞에 자리잡은 호수다. 마을을 들어가려면 이 호수의 중간에 만들어진 돌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다리는 호수의 복판에 아치형으로 솟아올라 운치를 더해준다. 저우룬파(주윤발周潤發)와 장쯔이(張子怡)가 주연한 유명한 와호장룡이란 영화의 시작은 바로 이 남호(南湖)의 돌다리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와호장룡에는 이 외에도 홍춘마을의 풍경이 몇 장면 더 나와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 이 마을은 더 각별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면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의 중앙에는 반달형의 호수가 있고 마을 북쪽으로부터 수로를 따라 흘러들어온 물은 이 호수에 모였다가 다시 마을 남쪽으로 난 수많은 골목을 따라 형성된 수로를 통해서 마을 남쪽에 있는 남호로 흘러들어간다.


마을의 골목길은 사람 하나나 둘이 겨우 지날 정도의 좁은 길이지만 길 한쪽 옆으로는 반드시 수로가 지나가고 그 수로를 흐르는 물은 모든 집의 대문 앞을 지나면서 집집마다 용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집앞을 지나는 수로에는 수로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서너단 만들어져 있어서 그릇이나 야채를 씻는다든가 또는 빨래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교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마을은 한국의 마을이 거의 자연스레 모여든 자연취락인 것과 대조적이다.
이와 같은 특이한 구조의 마을 형태는 중국에서도 매우 독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마을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첫 번째로 관심을 갖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을의 설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이야기는 단순히 마을 설계 뿐 아니라 휘저우 지역의 상인들의 삶과 문화가 투영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는 매우 흥미롭다.




소의 형상을 닮은 왕씨의 동성마을
시디마을과 함께 이현에 속한 홍춘마을은 지금부터 800년 전 남송(南宋) 때 세워졌다고 전한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왕씨(汪氏)이다. 왕씨 문중은 일찍이 동한(東漢) 시기에 휘저우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는 가장 빨리 휘저우에 정착한 대문중의 하나이다. 휘저우의 지리적 환경의 특징은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대부분은 한국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에 의지하여 형성되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마을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 한정되게 되었다. 따라서 강력한 문중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인구의 증가는 피할 수 없는데 마을 자체가 수용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으므로 인근 다른 지역으로 분파되어 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런 결과로 지역의 대성들은 휘저우 지역의 전체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오늘날 휘저우의 많은 지방에서 왕씨 성을 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홍춘은 왕씨 성의 촌락이다. 일찍이 12세기에 몇 집의 왕씨 집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최초로 받아들인 것은 풍수학상의 이치이다. 그러나 이후 삼백년 동안 왕씨들이 모든 휘주 지역에서 인구가 번성하고 크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홍춘의 왕씨는 인구가 줄어드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마을에서 화재까지 자주 일어나게 되어 홍춘의 왕씨들은 마을이 융성하는 것은 커녕 오히려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명(明) 영락(永樂) 연간에 이르러 홍춘마을에 왕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외지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후중냥(호중랑,胡重娘)이라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후중냥은 홍춘에 시집 온 후 홍춘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마음아파 했다. 그는 친정집의 힘을 빌려서라도 마을이 침체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이웃 슈닝현(休寧縣)에 사는 아버지 친구 허커다(何可達) 선생이 당시 유명한 풍수가임을 생각해내고 그 사람을 청해서 마을이 발전할 수 있도록 새롭게 계획하도록 부탁하였다.
허커다 선생은 홍춘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는 마을 안의 집과 도로들을 여러차례 조사하였으며 마을 주변의 산천형세도 상세히 조사하였다. 이후 십년이 지나서 겨우 홍춘의 설계가 완성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보는 홍춘은 허커다 선생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조화와 통일을 구현시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허커다는 홍춘을 설계하면서 소가 누워있는 형상으로 마을을 만들고자 하였다고 한다. 소는 농사를 짓는 데 가장 중요한 동물이며 사람과 가장 가깝고 또 힘든 일을 끈기 있게 해내고 온순하여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귀감이 되는 동물이다. 허커다가 마을의 모습을 이러한 소의 형상으로 만든 것은 마을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고난을 이겨내며 그 일한 만큼 마을을 부강하게 해준다는 뜻에서였다.
그래서 마을 안에 소의 위에 해당하는 연못을 파고 마을의 서쪽으로 큰 장목(樟木)을 심어 소의 뿔로 만들었으며 남쪽을 흐르는 하천에 다리를 놓아 소의 다리로 하였다. 또 마을 안의 골목과 수로들은 소의 내장을 의미하며 마을 남쪽 앞에 있는 남호 호수는 소의 또 다른 되새김 위를 뜻하는 것으로 뒷날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 안을 여기저기 다녀보면 마을의 수로체계가 특별히 잘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수로는 마을 뒤의 맑은 계곡물을 개개의 집 앞이나 뒤로 흘러가게 한 것으로 일종의 개방된 상수도 기능을 가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깨끗한 물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8시 전에 먹는 물을 뜨고 8시 이후는 세탁용수를 떠냈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은 위생을 지킬 수 있었고 외부에서 전염병 같은 것도 쉽게 마을로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수로는 또한 방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마을에 불이 나더라도 쉽게 진화할 수 있었으며 홍춘마을이 지금까지 수백 년을 온전한 옛 모습 그대로 전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수로의 기능과 관련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신과 후중냥 부부는 실제로 허커다 선생의 설계에 따라 홍춘 마을을 건설한 사람들이다. 왕신은 산시(산서,山西)의 양운주부(糧運主簿)를 맡아 있어서 고향 일을 직접 주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많지 않은 월급에서 백은 만량을 내어 마을을 건설하는데 출연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여느 휘주 여인들처럼 시집오자마자 독수공방의 새댁이 되었으나 지금까지의 보통 휘저우 부녀처럼 규방 안에서만 생활을 하는 관습을 깨고 밖으로 나와 마을을 건설하고 계획을 하는 중임을 맡았다. 후중냥은 풍수 선생을 앞세워 촌락 조사를 새로하고 마을을 다시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의 중심인 월소(月沼) 계획이 확정될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월소를 원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한 것은 둥근 모양은 원만하고 완벽한 형태로서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설날의 풍경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중냥은 "달이차면 기운다"고 생각하고 혼자 힘으로 마을사람들을 설득하여 월소를 반월형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실로 앞날의 홍춘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남겨주는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장사꾼 사타구니 밑으로 드나들다
홍춘마을에는 많은 명청대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어서 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옛 휘주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실제 모습을 보듯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집을 한 채 든다고 하면 누구나 서슴치 않고 들 수 있는 집이 바로 승지당(承志堂)이다. 이 집은 청나라 말기 유명한 소금상인 왕딩귀(왕정귀,汪定貴)가 지은 자신의 살림집이다. 승지당이 건립되던 시기는 휘주상인들이 서서히 쇠락하던 시기였으나 왕딩귀 같은 대상인은 시세를 타지 않고 재부를 탄탄히 쌓아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승지당은 모두 일곱 채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9칸의 천정(天井, 집 내부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 위해 만든 수조와 같은 시설)과, 60여 칸의 청당(廳堂,대청과 같음)을 가진 완전하게 보존된 대 저택이다. 이러한 큰 규모의 집은 대체로 외부에서 온 손님들이 머무는 공간과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고 독서하는 공간, 고용인들이나 경호인들을 위한 공간 등이 있어서 집 전체를 보면 당시 부호들의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승지당은 당시 휘파건축(휘저우지역의 독특한 건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인 목조각(木彫刻)이 뛰어나서 이 집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집의 아기자기한 구조는 물론 각각의 건물마다 장식된 아름다운 조각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승지당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옆문 위의 두공의 형태이다. 문은 모두 세 칸으로 중앙에 정문이 있고 그 양쪽에 옆문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옆문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옆문 위의 금칠을 한 화려한 조각의 두공모양을 자세히 보면 "상(商)"자 모양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배가 불룩한 상인이 두 다리를 벌리고 서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승지당을 드나드는 사람 모두가 그 신분에 관계 없이 장사꾼의 사타구니 밑으로 지나가게 하는 뜻을 가졌다고 전한다. 이는 휘저우 지역의 다른 저택을 가보아도 볼 수 있어서 휘파건축의 보편적 특징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승지당에 이러한 이야기가 전하는 것은 당시 상인들이 경제적으로는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어도 현실사회에서는 신분적 차이로 인한 차별을 많이 받고 있었으며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로서 사대부를 조롱하는 뜻이 있지 않나 생각되기도 한다.


승지당 주인 왕딩귀는 많은 재산을 모은 뒤 "오품동지(五品同知)"의 관직을 돈으로 샀다. 이렇게 돈으로 산 관직은 실제 상인들에게 관직의 실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다만 상인들에게 관직을 가진 사대부를 겸했다는 욕망을 채워주는데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왕딩귀 같은 상인들이 이 명목뿐인 관직을 사는 것을 보면 당시 상인들의 신분에 따른 차별이 매우 심했던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홍춘마을이 지금까지 옛 영화의 일부나마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이 마을 출신의 인재들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을을 일으킨 상인들이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그 결과 많은 인재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하여 마을을 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인 배경까지도 든든하게 유지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홍춘의 인재 양성소 남호서원에 남은 뒷얘기들
마을의 교육을 담당해 온 것은 마을 입구 남호 물가에 세워진 남호서원이다. 남호 맞은편에서 남호를 건너 이 서원을 보면 휘파건축의 특징인 검은기와와 흰 벽 그리고 목조의 서원 문이 주변의 수목과 함께 어울어져 호수 물에 어른 거리고 있어서 그대로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아름답다.


남호서원은 17세기 중엽에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홍춘은 이미 큰 부상들을 배출하여 휘저우 지역에서도 대표적인 부촌이 되어 있었고 그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의 마을사람들은 남호 물가에 6곳의 가숙(家塾)을 지었고 그것을 의호육원(倚湖六院)이라 불렀다. 청나라 가경(嘉慶)년간에 져장성(浙江省)의 교육행정을 맡은 학정(學政) 루어원핀(나문빙,羅文聘)이 유람차 홍춘마을에 들렸다. 그는 남호 물가 많은 가숙들이 운영되고 있으나 모두 독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비효율적임을 알았다. 그는 이 가숙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만 있다면 교육이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6곳의 가숙을 하나로 합치도록 건의했다. 홍춘마을에서 왕이원(왕이문,汪以文)과 왕셔우지아(왕수갑,汪授甲)는 이 의견이 매우 훌륭하다고 받아들여서 즉시 자본을 모아 남호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지금 서원을 들어가면 정문 위에 남호서원이라는 현판이 있고 그 뒤로 "이문가숙(以文家塾)"이라는 현판이 또 하나 붙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문(以文)"이라는 뜻은 학문으로 이룬다는 뜻이 있으니 서원의 이름으로 손색이 없다 하겠으나 실제 이는 바로 서원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한 인물인 왕이원(왕이문,汪以文)이란 사람의 이름이다. 서원을 세우는데 가장 큰 공이 있던 것은 실제로 왕셔우지아라고 할 수 있다. 왕셔우지아는 당시 이 마을 출신의 거상이었고 왕셔우지아의 돈이 아니면 서원의 건축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원의 이름이 된 왕이원이란 사람은 왕셔우지아에게 고용된 가난한 서생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서원 이름이 이문가숙이 된 것은 이 두사람의 특별한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왕이원은 운이 나쁜 선비였다. 그는 여러해 동안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였으나 번번이 과거시험에 떨어졌다. 그는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문제로 인해 공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어 집안 부상 왕셔우지아를 따라가서 장사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매일 계산대 옆에 서서 장부 정리 하는 일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과거에의 꿈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점원일을 하면서서도 틈틈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는 주인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왕셔우지아는 왕이원의 공부에 대한 열정을 보고 이 사람의 사람됨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그는 왕이원을 항저우(항주,杭州)지부(知府)에서 자기 사업을 돕는 회계원으로 천거하고 돈을 전달하는 일을 맡겼다. 이는 특별히 충성을 요하는 것이며 마음속에 추호의 의심이 없어야 맡길 수 있는 일이었다.


왕이문은 항저우에서 성실하고 엄격하게 일을 처리하여 신임을 얻었다. 오래지 않아 지부의 대인(大人)이 50세 탄신일을 맞게 되었다. 이에 항저우의 각계각층에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선물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다. 왕셔우지아도 항주에서 상업을 경영하는 휘저우의 거상으로서 지부대인에게 거액의 돈을 보냈다. 그 돈은 왕셔우지아의 이름을 쓴 두 개의 큰 술독에 담아 보냈다. 그것은 겉으로 마치 두 독의 생일 축하 술을 보낸 것처럼 꾸민 것으로 왕셔우지아의 독특한 뇌물 증여 방법이었다. 여러 곳에서 모여든 생일선물들은 모두 회계를 맡은 왕이원의 손을 거쳐서 다시 창고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부에서 회계 부정이 일어나서 대대적인 감사가 내려오게 되었다. 왕이원은 그의 비상한 머리를 써서 자신을 이곳에 천거한 고향 어른인 왕셔우지아를 돕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감사를 받기 직전에 창고로 가서 은전이 가득 들어 있는 두 단지의 은전을 꺼내고 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납작한 나뭇조각에 "군자지교담여수(君子之交淡如水)" 즉 군자의 사귐은 맑기가 물과 같다는 뜻의 글귀를 써서 단지 속 물 위에 띄어 놓았다. 이후 항저우의 다른 상인들은 모두 지부에 뇌물을 준 것으로 인해 벌을 받았을 때 왕셔우지아는 오히려 깨끗하고 정직한 것으로 인해 상을 받게 되었다. 왕셔우지아는 왕이원이 자기를 구한 것을 알고 마음 속에 늘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왕셔우지아가 자본을 내어 남호서원을 건립하였을 때 그는 서원의 이름을 왕이원의 이름에서 따서 이문서숙(以文書塾)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왕이원은 왕셔우지아의 부패행위를 감추어준 부패공범이라 할 것이겠지만 당시의 휘저우 거상과 그 수하의 의리관계가 결과적으로 홍춘마을의 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그것이 마을의 인재를 양성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다.


남호서원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는 중화민국 초기의 국무총리 겸 재정총장 왕다시에(왕대섭,汪大燮), 청말 내각중서 왕캉니엔(왕강년,汪康年), 청대 시인 황청인(왕승은,汪承恩), 왕통원(왕동문,汪彤雯), 신안의학의 명인 왕잉위(왕응욱,汪應昱) 등이 있다.


오늘날 홍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을 마음에 담아간다. 하지만 이 마을은 청대 휘저우 지역의 상인과 관리의 관계 그리고 계급 사회 속에서의 상인들의 위치 또 그러한 사회적 장애를 헤쳐 나가면서 이룩한 부와 그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 인재양성 등의 당시 사회의 여러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뿐 아니라 중국사람들의 풍수에 대한 생각과 그 풍수가 자연과 인간의 삶을 어떻게 합일시키는지도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홍춘마을은 실로 우리를 적게는 백여년 오래로는 삼사백년을 거슬러 올라 먼 과거 속의 선조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타임머신과 같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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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을을 여기저기 다녀보면 이곳은 여전히 옛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생활의 터전이다. 아기에게 젖을 물린 젊은 엄마도 만나고 갖 수확한 유채씨가 골목 가득히 널려 있기도 하다. 마을 앞쪽 한 옆으로는 채소와 먹거리들을 파는 시장도 있다. 마을은 박제된 과거의 유산을 보여주는 죽은 박물관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영위되는 공간이며 앞으로도 아기들이 자라서 부모의 삶을 이어가야할 터전이다. 이래서 홍춘마을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먼 미래까지 이어지는 살아있는 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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