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고향, 임동장날 풍경(글/류옥열-임동초등학교 45회 졸업생, 그린에너지 이사)내 고향 임동에는 5일마다 장이 선다. 일명 채거리 장이라 부르기도 하지.
장이 서는 날은 장날이라 하였고 평일은 무싯날로 불러 장날과 무싯날을 구분하였다. 그 의미는 장날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장날이라 하면 그보다 더 반가운 날이 있었을까? 먹고 싶은 것 많고 구경꺼리 많아서다. 학교에서 집으로 갈 때 장거리를 거쳐서 가는 길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행여 일요일이 장날이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장날에는 임동면 각 리의 촌부와 아낙네들이 장거리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농사의 정보와 집안의 대소사까지 서로 의견을 주고받곤 했었다. 장거리 초입부터 고추, 마늘 수집상과 아지매들의 흥정이 한창이다.
“보소! 보이~소? 아지매 보시더. 장 가봐야 그 값이고 고마 주고 가이소!”
“안되니더. 쨍배기 아픈 값도 안 나오는구만! 그 값에는 흥정 안되재?”
“아~따! 아지매는 흥정도 안 해보고 그라니껴?”
“흥저이 다~머꼬! 이야기 안되니더.......” 하고 말끝을 흐리니 장사꾼 아저씨 그걸로 감 잡고 정한 값에 흥정 끝냈다.
최 씨네 주막에서도 시끌벅적하다.
“아~이쿠! 사돈. 장~ 왔니껴?”
“오랫만이시더! 댁내 두루 평안 하시고요?”
“이보게 최 서방댁! 여 막걸리 하고 두부 가오이라~~~”
“사돈 한잔 드시더. 금년 농사는 괜찮체요?”
“글쎄요? 가을에 담배감장 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으이더.”
그리 인사를 주고 받더니 어느새 고주망태가 되어 파장까지 마시고도 모자라 딸네 집으로 원정까지 간 고래골 아재는, 사돈집 가는 길에 토째비 방아째비 오만 귀신 모두 만나 씨름하고는 잠 자리에서는 안방을 사랑방으로 혼돈하여 안사돈에게 대망신을 샀구먼?
어물전에는 제사상에 올라갈 상어 통배기, 기름이 자르르한 조기, 보기만 해도 입이 고소한 간고등어, 빨판이 손바닥만한 문어, 영덕에서 금방 건져온 대게, 청어 등등이 천지다. 진보 아재네 과일가게에는 껍질 얇은 빛깔 좋은 빨간 사과 볼수록 입안에 침 고이고, 가끔 아는 척 하면서 하나 먹어 보라고 인심 썼는데 오늘은 못 본 척하니 무진장 야속타!
과일가게 옆으로 돌아가니 찐빵 가게가 있재. 설탕 듬뿍 뿌린 찐빵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데 주머니에 돈이 없어서 구경만 하게 됐다. 지난 장에는 어매를 졸라 찐빵 맛을 봤는데 오늘은 어매 장에 안 간다고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부지하고 이야기 하는 거 들었지. 참말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다.
김 씨네 신발가게에서는 고무신 흥정하느라 부산하다. 하얀 백고무신을 들고 있는 이싯골 할매의 검고 깡마른손. 아부지가 사주신 타이야표 검정고무신은 2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라. 고무신 보다 발이 커서 발가락 저린 것이 웬수같구만!
아부지가 장에 가시면 꼭 들르는 만물상 아저씨의 좌판에는 구경꺼리가 많았다. 지포 라이타, 접는 주머니칼, 담배 빨뿌리, 그밖에 알 수없는 남자들의 기호품이 즐비하고 구경하고 있으면 아저씨왈 “애덜은 가라!”고 야단친다.
아이들은 약장수 구경이 그만이다. 오늘도 장거리 귀퉁이에 포장을 치고 고약 파는 서커스단이 왔다는 소문이 들렸다. 말 타는 광대, 재주 넘는 꼬마아가씨, 차력하는 무시무시한 아저씨! 그중에 약 돌리는 누나가 제일 이쁜데 내게는 그런 누나가 없어 볼 때마다 부러웠다.
장거리가 끝나는 곳엔 묘한 곳이 있었다. 바로 무 씨네 색시집이다. 친구덜 소문에 그 집에는 얼굴은 이쁜데 항상 입술에 인주 같은 거 칠해서 보기에 묘한 아지매가 있었지. 그 아지매 가끔 어린애를 잡아 먹는다고 친구 아부지가 그러면서 친구더러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에~구! 오늘도 아~ 잡아 먹었나. 대문간에 서있는 아지매의 입술은 왜그리 빨갛노, 무서워라. 가까이 가니까 그 입술이 웃는다. 아이~고 무시라, 앞 뒤 분간도 못하고 도망갔다!! 언뜻 그 집 대청마루에 보이는 게 철이네 아부지가 아인가? 오늘 밤에 철이는 잠 다 잤다. 철이 어무이 밤새 야단하고 울게 생겼으니, 우엘꼬!!
장거리를 얼추 지난 외진 곳에 쇠전(우시장)이 있었다. 몇 년 전 흉년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여 아부지께서 멕이던 누렁이 황소를 팔려고 장날 아침에 누렁이 치장을 하시면서 아쉬워 눈물이 그렁하시던 기억이 떠올라 그곳을 지날 때는 측은한 아부지가 생각났다.
오늘도 그런 저런 사연으로 팔려고 나온 소가 많았다. 쇠전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터놓고 반말하는 관습이 있었다. 열아홉 살의 종탁이와 칠십의 원두들 할배가 서로 이름을 부르며 이놈 저놈 하는 꼴을 보면 집안에서 학교에서 배운 윤리 도덕는 어디에 쓸꼬? 참마로 알 수 없데이~.
소득 없는 장날을 쓸쓸하게 뒤로하고 소꼴 베고 마늘밭에 풀 뽑으라는 아부지 말씀과 선생님이 벌로 주신 산수숙제며 할일이 태산 같은데 장거리에서 시간 다 죽였으니 조급한 마음이다. 발길에 불나도록 달려서 동구 밖에 당도하니 친구녀석 들이 쇠똥으로 양잿물 놀이를 하고 있구나. 또 그거 안보고 갈수가 없재!
양잿물 놀이의 내용인즉, 장날에는 빨래를 삶는데 필요한 양잿물도 구입했다. 맹독을 지닌 물건이라 항상 따로 챙겨 들고 다녔으니 길거리에서 흘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쇠똥을 양잿물과 비슷하게 포장하여 장꾼이 가는 길에 놓아두면 주위를 살피며 속아 주워가는 인심을 구경하는 못된 놀이지만, 그 시절에는 서로가 이해하고 웃는 장난이었다.
그러다보니 해가 벌써 서쪽 산에서 손가락 두 마디 남았네. 에고 큰일났다! 부리나케 꼴망태 둘러메고 보니 호미는 어디갔노! 깔딱낫은 갈지도 않아 무뎌서 꼴 베기 힘들걸 하는 핑계를 찾을 틈이 없다. 들판으로 나서니 부지런한 친구는 벌써 집으로 오네. 언제 꼴 베고 숙제하노!
오늘은 장거리서 소득 없이 시간 보내고 대책이 없다.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오늘 할일을 미루지 말고 시간을 아껴라. 딱 맞는 말이재!
그날 깔딱낫에 손 베이고, 아부지께 야단맞고, 숙제 못해 선생님께 손바닥 줄 가게 맞았다. <안동>
1956년 임동면 무실 태생인 류옥열 씨. 지금은 그가 자랐던 고향도, 다녔던 학교도 모두 임하댐에 수몰되어 고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아련한 그 시절 기억을 더듬어 고향의 장터풍경을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