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을 따라 청량산 그림속으로 들어간다(하)(글/이성원)
고산정을 지나면 '농암시비'가 보이고 그 앞에 봉화로 가는 35번 국도가 나타난다. 농암시비는 강과 산과 배와 달과 시가 있는 농암의 풍류를 형상화했는데, 멀리서 보면 산, 배, 나비, 물고기 모양을 두루 연상하게 하는 매우 예술성 높은 작품이다. 한 번보고 가기 바란다. 시비 앞에서 봉화군 명호면까지의 길은 너무 아름답다.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 생각한다. 경춘가도가 결코 이 길보다 빼어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이 길을 따라 봉화-태백-사북-고한-정선-하진부-진고개-주문진의 길을 역으로 내려오는 길을 소리 없이 좋아한다. 나는 설악산 등산을 좋아하고, 귀가 길에 지나는 이 길의 여정을 좋아한다. 속는 셈치고 이 길로 한번 가보기를 권유한다.

청량산 섶다리

국도를 오르면 곧 청량산 입구가 나타난다. 지명이 너분들이다. 강변에 넓은 돌(廣石, 혹은 博石)이 있어서 얻어진 이름인데, 이 지역이 선성14곡의 제1곡으로 박석천博石川이며, 도산9곡의 9곡에 해당하는 청량곡이다. 돌, 강 구비, 단애, 그리고 백사장이 갖추어져 있어 도산9곡의 시발점으로 전연 손색없다. 요컨대 안동문화의 깃 점인 셈이다.


너분들을 건너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 김덕호씨가 근무하는 매표소가 있고, 그 앞에는 앞 강가에서 옮겨온 우아한 수석 하나가 전시되어 있다. 그 곁에  퇴계시비(退溪詩碑)가 있다. 지난 해 퇴계탄신500주년기념으로 봉화군에서 세웠다. 기존에 세워져 있던 청량산가는 그 진위논란 관계로 교체되었다.


나는 농암시비, 퇴계시비 제막식에 모두 참석하여 이의근 지사의 축사를 경청했는데, 지사의 축사는 두 번 모두 과연 도백(道伯)답다 라고 할 만큼 명연설이어서 참석자를 감동시켰다. 행정가로 원고 없이 퇴계, 청량산을 아우르며 2, 30분 정도 정연하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제까지 이 지사만큼 말을 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퇴계는 청량산에서 공부한 바 있다. 그리고 혹애(酷愛)한 나머지 드디어 우리 집의 산이란 뜻으로 吾家山이라 했다. 이를 기념하여 후손과 유림들이 힘을 모아 청량사 옆에 오산당(吾山堂)이라는 집을 지었다. 1832년 일이다. 그런 연유로 청량산은 지금도 그 소유가 퇴계종택으로 되어있다.


퇴계는 "산에 대한 소유는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하면서 그 욕심을 경계했다. 그런데 청량산과 더불어 도산에 대해서는 저 유명한 글 도산잡영(陶山雜詠)의 끝에는 산주기(山主記)라 하여, 도산서원 일대와 청량산의 소유권을 그 당시부터 결정짓게 했다. 산소유권과 재산개념이 희박했던 시대에 이런 표현은 매우 의례적이라 할 수 있다.


신재 주세붕이 말하는 청량산

그런데 청량산의 진가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1495-1554)이다. 김생, 최치원, 원효, 의상이 머물렀다지만 기록은 없다. 퇴계가 역시 이 산을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유산지처(遊山之處)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신재는 놀랍게도 이 산을 지리산, 금강산과 비견할 수 있는 명산으로 보았다. 그래서 거듭거듭 찬양했다.  


 


"우리나라 산중에 웅장함은 지리산이요, 청절한 것은 금강산이며, 기이하고 빼어난 것은 박연폭포와 가야산 계곡이다. 그러나 단정하고 엄숙하며 상쾌하고 경개한 산으로는 비록 규모는 적으나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산이 청량산이다."
"우리나라의 명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저 다섯 산을 이를 것이니, 북은 묘향산, 서는 구월산, 동은 금강산, 가운데는 삼각산, 남은 지리산이다. 그러나 적으면서 선경(仙境)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규모는 적으나 선경의 명산이 신재가 본 청량산이다. 사실이 그러했다. 여러 명산들을 계획적으로 등산한 신재의 안목이기에 이 평가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신재의 청량산 등반 또한 오랜 준비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신재가 청량산을 찾은 것은 1544년 4월 11일이고 하산은 17일이며, 글은 19일에 완성했다. 꼬박 일주일 동안 온 산을 몸소 밟아가면서 글을 썼다. 그때, 신재는 이 작은 산에서 무려 19개의 절과 암자를 직접 만났다. 문헌으로는 이 무렵을 전후하여 33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처음 이 기록이 의문스러웠다. 도대체 이 작은 산 어디에 그런 많은 절들이 지어져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차츰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유념해 살펴보니 조금 편편한 곳은 절터의 흔적이 완연했다. 청량산은 산 전체가 법당인 불가(佛家)의 산이고, 사찰, 암자의 바다였다.


유가의 산

그런데 불가의 산 청량산은 신재를 만나면서 일거에 유가(儒家)의 산으로 변모되었다. 한마디로 혁파해버렸다. 신재는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를 육육봉(六六峰: 12봉우리)으로 새로 작명하고 나머지 허탄한 불교적 잔재를 그야말로 쓸어버렸다. 천하의 명산 청량산이 올라와 보니 온통 불가의 산임이 신재는 불만이었다. 이는 16세기의 극심한 숭유억불책과 맥락을 함께 하는 일이었다. 이를 결산하는 글이 이미 언급한 유명한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이다. 이 글은 아마 청량산기행문으로는 전무후무한 최고의 명문이라 단정한다. 이런 까닭에 이 글을 읽어본 퇴계는 발문을 쓰면서 청량산의 신재의 만남을 산의 일대 만남이라 했고, 그 표현을 산지일대우(山之一大遇)라 했다. 청량산이 임자를 만나 그 진가를 비로소 얻었다는 뜻으로, 퇴계는 이 글의 빼어난 문장력과 심미안을 극찬하며 위대하시다(偉哉)라고 했다. 퇴계는 나아가 자신의 소백산 산행에서 기행문(遊小白山錄)을 직접 쓰고 그 효용을 역설했다.


 


"내가 그 시문(유청량산록)의 뛰어남을 감상하니 곳곳에서 읊은 것이 마치 홍안의 백발노인과 더불어 말하고 서로 수창(酬唱)하는 듯했다. 이에 힘입어 감흥을 일으키고 정취를 얻은 것이 진실로 많았다. 진실로 유산(遊山)을 하는 자는 유록(遊錄)을 남겨야 한다. 왜냐하면 기행문은 등산에 유익함을 주기 때문이다."


 


유산(遊山)은 등산이며 유록(遊錄)은 기행문이다. "유산하는 자 유록을 써야한다"는 퇴계의 언급은 하나의 등산지침이 되었다. 그래서 신재의 기행문은 이 후 수많은 선비들의 청량산  기행문 저술의 전형이 되었다. 필자가 본 청량산기행문만도 50여 편이 넘는다. 최근 국학원의 임노직(林魯直) 선생을 만나니 그는 이미 80여 편의 글을 보았고 정리하는 중이라 했다. 따라서 청량산등산과 청량산기행문을 쓰는 것이 유행처럼 전파되었다. 이로써 불가의 산 청량산은 유가의 산으로 급격히 변모했으며, 이 후 퇴계의 명성과 함께 영남유교의 메카와 같은 성지로 인식되었다. 선비들의 청량산 등산과 기행문작성은 일종의 성지순례와 순례보고서 제출의 의미마저 지녔던 것이다.


응진전

지금 청량산 등산은 2-4시간 정도 소요되며, 4개 정도의 코스가 있다. 매표소에서 2분 가량 차로 오르면 두들마을, 새미터로 오르는 최초의 등산로가 있고, 여기서 조금 오르면 청량사를 바로 오르는 계곡 코스가 있으며, 여기서 또 조금 오르면 웃청량골 아래의 등산로로 응진전-입석으로 오르는 코스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남청량산 축융봉을 향해 산성, 공민왕당, 가송리를 전망하는 코스가 있다. 저마다 특색이 있으니 두고두고 오르기를 바란다.



필자는 여기서 입석의 코스를 소개한다. 돌 층 벽을 따라 얼마를 오르면 문득 시원한 전망대와 함께 서편 까마득한 바위 아래 그림 같은 암자가 보인다. 응진전(應眞殿)이다. 옛 명칭은 상청량암(上淸凉庵)이다. 나는 100번도 넘게 청량산을 올랐고, 그 대부분을 이 코스로 지났다. 손님이 오면 안내했고 틈이 나면 올랐으니, 아마 가장 많이 오른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서 이 암자의 근황을 20여 년 정도 지켜보았고, 그 변모의 모습이 우리 조국의 발전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보았다. 10년 전까지도 이 암자를 찾는 신도는 없었다. 뜨내기 중들이 어쩌다 출몰하는 정도였다.



그런 한 때, 고적한 이 암자에 적음(寂音)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님이 있었는데, 나는 그를 만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는 매월당(梅月堂 金時習)이 환생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사발로 소주를 폭음하며 시국에 비분강개하는 모습은 바로 무도한 수양대군에 대항해 악전고투하며 방황하는 영락없는 매월당이었다. 적음은 자신이 기관에 끌려가 당했다는 고문의 상처를 보여주며 이제 끝장을 내야합니다라고 포효하며, 곧 올라가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때 서울 도심을 누비는 소위 넥타이부대의 출현 의미를 한국의 오지 청량산의 한 암자 속에서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독재정권이 곧 멸망할 것도 확신했다. 적음은 자신이 경주최부자의 후손이라 했고, 중광(重光)을 형편없는 사이비라 하며, 자작의 시화집(詩畵集)도 보여주었고, 자신의 애인이 자주 이 곳을 찾아온다고도 했다. 실로 파격적인 스님이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다람쥐 때문이었다. 5월 어느 날, 평소처럼 응진전을 지나가는데 전에 보지 못한 눈빛 형형한 마른 중이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그들은 가족이었다. 다람쥐는 부르면 오고 만지면 안기곤 했다. 그는 다람쥐에게 이년, 저년 한 것 같았는데 정말 부녀 같았다. 야생의 다람쥐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지 신기했고, 한편으로는 인간과 동물이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도 그 광경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데, 적음 역시 어느 날 수수께끼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후 다시는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당시의 건강상태와 자학적인 자세로 보아 아직까지 생존해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응진전을 지나면 곧 천 길 낭떠러지 석벽을 지나게 된다. 아래에서 보면 도저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수직절벽에 길이 있다. 이 석벽의 길이야말로 청량산의 압권이다. 소위 입석(立石)이고, 석 벽의 길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이 곳을 지나면서 한 번도 아래를 바로 내려다본 적이 없다. 지금은 조금 다듬어졌지만 예전에는 매우 가파른 곳이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이곳에서 추락한 사람이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6년 전인가, 고산정 앞에서 수술을 하고 요양중인 김용걸(金容傑) 교수에게 은어를 잡아 대접하고 다음 날 이 길을 올랐다. 그 때 나는 "퇴계의 이선기악(理善氣惡), 이존기비(理尊氣卑), 이귀기천(理貴氣賤)의 이론은 사림집단이 훈구집단을 악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대응하기 위한 이론무장의 논리가 아니겠습니까"하니, 교수께서는 "정치적 관련으로는 가능하나 학술적 논리는 더 따져봐야 한다"고 하며 이 곳에 오니 건강이 회복되는 것 같다고 하셨다. 또 3년 전에는 80대의 장인어른 내외분을 모시고 구경욕심으로 무리하게 이 길로 안내했는데 아이처럼 좋아하시어 나 역시 흐뭇했다. 하긴 산 전체가 법당인 청량산 입석의 길에 석가모니의 자비와 인도가 왜 없겠는가!


오산당

입석을 지나면 청량사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되는 지점에 이른다. 어풍대(御風臺)이다. 바람을 몰아오고 몰아가는 그런 우뚝한 한 지점이다. 여기서는 누구든 쉬어간다. 하긴 요즈음은 쉬지 않고 가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유산의 여유보다 등산의 조급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풍대는 청량사에서 보면 동남방향으로 금탑봉(金塔峯) 아래에 위치한다. 이 사이에는 동석(動石), 풍혈(風穴), 총명수(聰明水)등의 명소들이 있다. 어풍대에서 잠시 육육봉의 산세를 가늠해보며 청량사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아래로 내려가면 오산당이 나온다. 오산당은 이미 언급한 바, 입구의 퇴계시비와 더불어 퇴계의 청량산 입산공부를 기념해서 지어진 건물이다.


문화재안내문을 보면 가끔 잘못된 글이 보인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몇 년이 흘러도 고쳐지지 않는 점이다. 이곳이 그런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안내문에는 "이 건물은 송재 이우(松齋 李 )가 지었고, 퇴계가 여기서 청량산가를 지었다"고 썼다. 빨리 고쳤으면 한다.


퇴계와 청량산

그렇다면 퇴계에게 청량산 유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퇴계는 13세에 숙부인 송재 이우(松齋 李 )의 명령으로 청량산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64세까지 6회 정도 입산했다. 13세, 15세, 25세, 33세, 55세, 64세로 평균 10년에 1번 정도 입산했다 할 수 있다. 많은 입산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결코 적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퇴계는 이 사이에도 청량산과 꾸준하게 교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교감은 다름 아닌 청량산 관련의 시문 저술이었다.


 


이것은 퇴계 자신이 산행=공부의 등식인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의 신념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퇴계는 "독서가 유산과 같다고 하지만 이제 보니 유산이 독서와 같네(讀書人說遊山似 今見遊山似讀書)"라고 하기도 했다. 퇴계는 또한 산행의 의의를 "나무들이 어려움을 참고 갖은 고생을 하여 싹이 자라 성장하는 것을 보면 인간이 살아가고 생물이 자라 움직이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알기 쉬운 표현을 하기도 했다.



조상들의 이런 산행관련의 문헌들을 보노라면 등산이라는 용어는 자연정복을 전제한 서양의 개념이며 유산은 자연합일의 동양적 자연관을 나타낸 용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산에 오르다와 산에 논다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신재가 산에서만 무려 일주일 정도 머문 것도 지금의 등산과는 그 방식이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렇다면 유산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퇴계는 청량산 유산에서 12가지 일을 시로 표현했다. 먼저 입산에 해당하는 등산(登山)과 바람의 만남인 치풍(値風), 달을 구경하는 완월(翫月), 나그네에 감사하는 사객(謝客), 농부를 위로하는 노농(勞農), 도를 논하는 강론(講論), 사람을 그리워하는 회인(懷人), 금강산 유산을 거절하는 내용의 권유(倦游), 책을 엮는 수서(修書), 조용히 앉아 사색에 잠기는 연좌(宴坐), 그리고 산을 내려오는 하산(下山)과 집에 돌아오는 환가(還家)로 이어진다.


만행(卍行)=득도(得道)가 불가의 등식이라면, 유산은 유가의 경(敬)사상과 연관되며 그 실천인 거경(居敬)의 행위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불가가 득도하여 부처가 되고자 했다면, 유가는 경의 구현에서 성인(聖人)이 되고자했다. 경이란 유가 최대의 개념이고 목표였다. 경은 선(禪)과 흡사한 측면이 있는데, 위의 조목 가운데 연좌는 더욱 그러하다. 마음(心)이 명제이다. 다만 경이 예(禮)로 드러나는 몸가짐을 중요시한다면 선은 마음가짐에 깊이 들어가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득도(得道)의 피안은 다같이 저 멀리에 존재한다. 그 득도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과제는 하나의 화두, 간단(間斷)의 문제로 귀착된다. 간단이 무엇인가? 경 사상의 구현은 유자들의 일생의 목표였고, 그 구현은 간단없음이 요체였다. 그래서 퇴계는 끊임없이 경을 말하고 경 공부에 간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간단은 직역하면 사이 끊어짐으로, 필자는 경 공부에 간단을 잔잔한 의식의 긴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이라 보고 있다. 퇴계는 옷깃을 여미는 일이라 한 바 있는데, 옷깃을 단정히 하고 잔잔한 긴장을 잃지 않음이 곧 경이다. 요컨대 집중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공부의 요령이고 지혜이며 첩경이었다. 인재안동(人才安東)의 결정적 배경이 바로 이 간단없음의 자세였고, 그 공부에 유산의 이러한 과정이 그 효용성을 배가해 주었던 것이다.
사실 청량산 유산은 퇴계에게 그 자체로 이미 일정하게 유익함을 주고 있었다. 환가(還家)의 내용은 이러하다.


遊山何所得  유산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如農自有秋  농부와 같이 추수가 있다내.
歸來舊書室  돌아와 서실에 앉아,
靜對香烟浮  고요히 향 연기를 바라보니,
猶堪作山人  오히려 나도 산 사람인 듯,
幸無塵世憂  속세 근심이 없어 지내. 


 


그러나 퇴계의 청량산에 대한 입장은 학문과 인격수양의 보조적 장소를 넘어서지 않았다. 퇴계는 청량산에 대해 그 인식 한계를 뚜렷이 설정해놓았다. 그 인식 한계는 어디까지나 유상지처(遊賞之處)로서의 청량산이지 경 실천을 일상화할 수 있는 가거지지(可居之地)는 아니었다. 퇴계는 이를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해 도산잡영(陶山雜詠)에 누가 묻는 형식을 취해 글까지 지었던 것이다.


 


"그대는 청량산에 은거하지 아니하고 왜 도산에 사는가? 하니, 내가 답하기를 ....요산요수(樂山樂水)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는데, 비록 낙천(洛川)이 청량산을 지나가나 산 속에서는 물이 있는지 알 수 없다네. 내 본래 청량산에 갈까 했었지. 그렇지만 저것을 뒤로하고 이것을 먼저 한 것은 산수(山水)가 겸하고 있어 늙고 병든 몸을 편하게 하기 위함이네."


 


뒤로한 저 것은 청량산이고, 먼저 한 이 곳은 도산(陶山)이다. 퇴계에게 살만한 가거(可居)의 터전은 산과 더불어 물이 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런 곳은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있는 상계(上溪)와 도산서당이 있는 도산일 뿐 청량산은 아니었다. 도산에 대해서는 "산수가 맑고 기이하여 구하던 바에 꼭 맞아 몽매간에도 (마음이) 여기에 있다"라고도 한 바 있다.


 


지금 상계종택과 도산서원은 퇴계의 안목으로는 경을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가거지지였고, 청량산은 이들 가거의 터전에서 다하지 못한 인생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눈앞의 조밀하고도 아름다운 자연정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 자연정원은 학문과 경 사상 구현의 궁극인 천인합일의 경지에 일정하게 유익한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 오산당 옆에는 옛 관리사를 산꾼의 집이라 하고 길손들에게 이른바 청량산무료약차를 제공하는 이대실(李大實)씨가 있다. 이대실씨는 산사나이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다. 아니 모든 것을 가진 사나이다. 그는 청량산을 통째로 가진 부자이다.


아무리 빼어난 집이면 무엇 하나? 사람이 거기 살고 있어야지. 아무리 빼어난 산이면 무엇 하나? 거기 사람이 있어야지. 산이 있고 그 산을 정녕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명산이 된다. 청량산은 이미 불자와 유자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명산이다. 온 산이 법당이며, 온산이 서원이다. 지금 또 수많은 등산메니아들로 덮여 있는 산이다. 실로 신비의 산이며 수수께끼의 산이다. 그곳에 이대실씨 같은 불(佛도) 아니고 유(儒)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俗)도 아닌 산인(山人)이 있으니 이 또한 청량산의 명성을 더하게 한다.


청량사

오산당을 지나면 청량사(淸凉寺)가 나온다. 옛 청량사(上淸凉庵, 下淸凉庵) 와는 관련이 없는 건물이나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불려졌다. 청량산청량사(淸凉山淸凉寺)라고. 새로 누각을 짓고 한자로 그렇게 현판을 붙였다. 그러나 지금 청량사는 청량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손색없다.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오는 고찰의 유리보전이 있고, 그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종이를 녹여 만든 특이한 지불(紙佛)이다. 그 앞 너른 바위 위에는 전설이 얽힌 세 가지가 뻗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전설은 "옛날 어떤 중이 이 절을 짓고자 죽어서 뿔 셋 달린 소, 즉 삼각우(三角牛)가 되어 재목을 실어 날랐고, 그 수고로움이 너무 커서 어느 날 죽자 돌을 쌓아 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청량산록에 나오는 기록인데, 말하자면 삼각우의 한이 세 가지 뻗은 소나무로 환생해 그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신재가 당시 이미 중들과 이 전설을 두고 설전을 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나는 이런 정도로 요약한다. "오직 절을 짓고자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죽은 어느 이름 없는 중의 애환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 절묘한 세 가지의 소나무다. 오랜 세월, 암반 위의 모진 고행을 견디고 자라난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는


지금 청량사의 운치를 빛내는 너무나 멋진 그림이다.


나는 삼각우의 전설이 있고, 옛날 연대사(蓮臺寺)가 자리했던 유리보전 앞 너럭바위에 앉아서 운무가 올라가는 청량산 봉우리들을 둘러본다. 저 봉우리들 아래에 저마다 자리한 제비집 같은 암자들과, 그 암자에서 인생의 그 무엇을 찾고자 정진했을 수많은 영혼들을 떠올려 본다. 그 영혼들이 지금 운무가 되어 피어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청량사는 바야흐로 중흥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청량한 산사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지현 이라는 주지스님의 역량 때문이다. 그는 신도와 주민이 함께 하는 사찰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지현은 영주에 장애인복지회관을 운영하며 부처의 가르침을 속세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지현은 시를 쓰는 매우 낭만적인 정서를 지닌 사람으로, 비가 오는 올미재 강변을 걷기 좋아하며, 청량사 앞에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이라는 예쁜 찻집을 지었고, 지난해에는 일반 사찰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이른 바 심야의 산사음악회를 개최하여, 좁은 청량산 골짜기에 모인 6천여 명의 관객을 열광케 했다.


 


올해는 소리를 주제로 한 음악회를 기획하여 청량사 골짜기를 메어터지게 했다. 필자는 도저히 현장에 갈 수 없어 멀리서 화상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내년에는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벌써 그 날이 기다려진다. 지현은 33개의 암자 가운데 27개의 암자 터를 직접 확인했다고 했고, 김생암(金生庵) 등 몇 개의 암자를 복원하고 싶어했다. 받는 절에서 베푸는 절로 변모하는 포교자세는 신도들의 폭발적 증가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청량산은 다시 불가의 산으로 급속히 변모하고 있다.


 


우리 안동은 문학만이 폭발한 고장이 아니다. 문화가 폭발한 고장이다. 고려 이전에 안동 사람들은 불교를 받아들여 그 유래가 드물게 발전시켰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봉정사 극락전이 그렇고, 전탑으로 국보 16호인 법흥동 7층전탑이 그러하며, 그 외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사찰, 암자들이 그러하다. 청량산은 그런 안동불교문화의 보고였고 신화였다.



왕조가 바뀌면서 또 다시 들어온 외래문화 유교를 안동사람들은 창의적으로 발전시켰다. 아니 안동의 유교문화는 조선500년을 선도했다. 경상북도 유교문화권개발이란 사실 안동문화를 염두에 두고 나온 개념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도산서원, 병산서원을 비롯한 수많은 서원이 이를 증명한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자 꼭 청량산을 올라보기를 권유한다. 유교에 관심이 있는 자 꼭 청량산을 올라보기를 권장한다. 청량산은 웅장한 산은 아니지만 엄청난 마력을 지닌 산이다. 왜냐하면 안동문화는 이 청량산을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문화는 민족의 문화 창달에 적지 않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안동의 산야를 가고 또 갔다. 고향을 두고 고향을 찾았다. 귀거래의 터전을 찾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올미재를 찾기 전에는 그 적지로 길안의 대사계곡을 주목했다. 그래서 계곡 곳곳을 배회했다. 그러나 끝내 포기했다. 산수의 풍광이 도산과는 결코 비교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해 우연히 대사계곡을 가보고 너무 놀랐다. 분명 그 계곡을 갔건만 계곡은 없어졌던 것이다. 계곡을 짓누르며 건설된 도로의 위압으로 인해 그 풍광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문명은 무엇이고 길은 무엇인가? 그 아름다운 계곡에 이토록 위압적인 시멘트 범벅의 도로가 무어 그리 필요한지? 나는 너무 실망하여 다시는 그 곳을 찾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안동시에서는 퇴계종택에서 육사생가까지의 길을 확장하고, 다시 단사-백운지-올미재-가사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든다고 한다. 도산서원, 도산온천, 청량산과 연계한 관광벨트 구축의 일환이라 한다. 길을 만든다고 하니 우선 그 결정을 환영한다. 그런데 안동에 이제 마지막 남은 이 비경을 대사의 길처럼 개발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옛날 퇴계 선생이 청량산을 들어갈 때의 길, 그 그림 속의 예뎐길을 다시 만들기를 제안한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이 그 길을 걸어가며 퇴계를 얘기하고 안동을 얘기하게 되기를 바란다.



필자는 전임시장 당시 이를 건의한 바 있었는데, 다행히 얼마 전 안동시에서는 이 길을 차량통행이 제한되는 폭 4m의 흙길로 만든다고 하니 그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 안동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어 500년 전 선인들이 걸었던 예뎐길이 500년 뒤의 후손들에게도 온전히 전해지기를 정녕 희망한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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