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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풍산장에서(글/권혁모-시인)

1988년 봄 「안동」지 창간호에 <시인 권혁모의 장구경>으로 풍산장이 소개되었다. 떠돌이 약장수의 이만원짜리 감로주를 사들고 돌아가는 시골 노인의 모습을 취재수첩에 담은 채 싱싱한 고등어 천원어치를 사서 발 디딜 곳 없는 시내버스에 올랐던 권혁모 시인이 20년이 지난 2008년 다시 풍산장을 찾았다. 20년 만에 찾은 풍산장은 많이 변해있었다. 확성기를 든 약장수가 떠들고 난장이 부부의 서커스가 한창이었고, 수2동서 수수 스물닷말을 가지고 왔다가 거래시세가 맞지 않아 서운한 발걸음을 돌렸던 예순살 김원성 씨가 있었던 떠들썩한 20년 전의 풍산장. 그러고 보니 지금은 여든이 되었을 그니의 근황도 궁금하다. 차도를 가득 메운 많은 사람들이 풍성한 시골장을 느끼게 했던 1988년의 풍산장, 그때를 추억하며 20년만에 다시 풍산장을 둘러본다. -편집자 주-

그야말로 사람들로 넘쳐나던 1988년 2월의 풍산장

추억이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이거나 기계적인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정감을 포함한 기억인 것이다.
조선 중종 때, 농암 이현보 선생이 만년에 고향인 이곳 안동 도산의 농암에 돌아와 인생의 허무함과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읊은 <농암가>가 그런 것이고, “~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지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렇게 노래한 정지용 시인의 고향에 대한 향수의 시가 추억 속으로 화두를 몰아가게 한다.

현대식으로 말끔하게 정비된 풍산장터. 그러나 썰렁하기만 하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지가 탄생된 지 어언 20년 성상을 손꼽게 되었으니, 앞으로 돌아올 20년이면 아무래도 아득한 세월일 것 같은데 반하여, 지나간 20년 세월은 이렇듯 쉬운 손바닥 뒤집기인가? 필자는 오늘 비록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활짝 열린 34번 국도를 따라 시원하게 달린다. 동행하는 김복영 편집장의 머릿결이 은회색으로 곱게 흘러내린다. 편집장도, 나도, 다시 봄 오는 산천 그리고 스무 해 추억을 더듬는 그날의 풍산장을 반추해 보고자 한다.

봄비 내리는 풍산장, 20년 전과 달리 정적만이
봄비 촉촉이 내리는 풍산장에 들뜬 가슴으로 도착한다. 시장 광장을 단숨에 바라보는 첫 느낌은 정적뿐이다. 그때 덤블링하며 춤추던 약 장수와 고등어 파는 사람의 확성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장날 하면 당연히 딴따라 약장수가 있고 주변엔 구경꾼도 많이 모여들련만, 그리고 온갖 농기구와 계절에 맞는 생활필수품들이 좌판을 넘쳐나게 하련만, 그게 아니었다. 내리는 보슬비의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썰렁하다는 말 이외에는 어떻게 달리 표현할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는 풍산장의 산증인들
시장 한 곳의 집 추녀 끝에 비닐 포장을 둘러친 곳으로 머리를 들이민다. 여기서 ‘들이민다’는 뜻은 ‘염치 불구하고’라는 심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장사꾼에게 재미없는 장일 것이라는 선입관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튀밥기계를 한가로이 내려다보고 있는 할아버지(이재화, 74세)는 거부감이 없는 듯하다. 어쩌면 사람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그의 본연(?)인 듯 반가이 맞아준다.
아마도 이 분이 풍산장의 산 증인쯤이 될 것 같아 더욱 다감하게 접근하여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본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한 45년 쯤 됐니더, 옛날에는 일거리가 참 많았지요. 설이나 추석 명절이 가까울 땐, 하루에 100판도 튀겨 본 적이 있거든요. 한 번 생각해 보소. 당시에는 이런 거 이외에는 먹을 과자가 별로 없었지요? 그런데 요즈음은 이런 거 아이들이 별로 안 먹지요.”
부연되는 그의 설명에 의하면 45년 전엔 한 판 튀기는데 옥수수를 20원에 사서 50원에 팔았고, 20년 전엔 150원에 사서 500원에 팔았다고 한다. 요즈음은 중국산 옥수수가 1,500원이며, 튀기는 값이 3,000원으로 옥수수 뻥튀기 한 되 값이 5,500원이니, 20년 전과 비교하면 모두 10배가량 올랐다며 물가를 계산하여 준다. 재미있게 설명하는 그의 손은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다. 철근을 잘라 만든 그의 쇠막대기는 닳고 닳아서 뻥튀기와 함께한 세월을 대변이나 해 주고 있는 듯, 쇠막대기의 요철 부분이 지워지고 반들반들하게 빛난다. 요즈음은, 명절 무렵 아니면 장날만 나온다는 그는 슬하에 6남매를 두어 모두 다 걱정 없이 산다고 한다.

영주에서 와서 파라솔 아래에 스티로폼 박스 몇 개를 올려두고 고등어를 파는 중년(임노국, 49세)을 만난다. 그는 이곳을 비롯하여 안동장 등 매일 인근의 장을 돌아다니며, 고등어와 조기만 팔고 있다. 그이 역시 19년이나 이곳 장을 다녔다고 한다. 처음 시작할 땐 간고등어 값이 한 손에 500원 정도에서 지금은 5,000원 정도로 10배가량 올랐단다. 이렇게 값이 올라도 남는 것은 전만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옆의 봉화에서 온 아주머니가 팔고 있는 2마리에 5,000원 하는 생닭(노계) 파는 일을 잠시 대신해 주고 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손님이 원하는 대로 잘라서 비닐에 담아주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이런 것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하였던가? 가까이에서 같은 처지의 행상을 하며, 잠시 옆 주인이 비운 사이에, 그 집 물건을 손질하여 팔아주는 모습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진솔한 모습 아니던가.

묘목을 팔기 위하여 현대식 비 가림 천막 아래 널따랗게 자리 잡은 곳이 있다. 오늘 나와 있는 수종은 부사를 비롯하여 모과, 천중도, 청매실, 자두, 대봉(감나무), 깎아먹는 대추 등 종류가 다양하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렇게 사람이 없는 날, 정적이 감도는 여기에서 주인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보랴? 오늘 나와 있는 묘목만 잠시 돌아보고 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취재의 의무감은 강해도 무기력해 진다. 순간 주인의 푸념이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 장사 끝났네. 이거 뭐 장사되나? 사람이 나와야지~”

예쁜 초가 한옥으로 단장한 불고기 식당 앞에, 인생은 석양에 머물어도 봄나물을 펼치고 앉은 할머니들 몇이 앉아 있다. 가까운 산양에서 농사도 지으며 풍산장에 30년 동안 나왔다는 할머니(임씨, 70세) 앞에 펼쳐진 봄나물의 가짓수가 꽤나 많다. 보들보들한 쑥이며 달래, 상추, 깐 도라지, 원추리, 어린 열무, 어린 배추 등이 구미를 당기게 한다. 이런 봄나물과 된장, 고추장으로 비빔밥 한 그릇 비워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군침이 돈다. 임씨 할머니는 요즈음 장사가 잘 되지 않는다며, 그렇지만 자식 4남매를 출가 시키고 영감과 둘이 재미있게 산다며 웃는다.

바로 곁의 비녀를 꽂은 할머니는(금씨, 84세) 무와 파를 가지고 나왔다. 20년 동안 이곳과 안동장을 다녔는데, 하루 오면 만원부터 많으면 5만원도 벌어서 살림에 보태 쓰고 있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고향이 봉화라는 것, 봉화 금씨라는 것 밖에는 모르지만, 이만한 연세에 장을 다닐 수 있음은 진실로 행복이리라.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철망 상자에 넣어 가지고 왔는데, 한 상자의 예쁜 강아지들은 평화롭게 앉아 있고, 또 한 상자의 강아지들은 고요한 풍산장의 정적을 깨우듯, 다투어 짖고 있다. 비좁은 상자에서 털이 비에 젖은 강아지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그리고 1톤 차 적재함에는 토종닭이 철망 상자에 가득 들어 있어서 팔려갈 순번을 기다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신발을 길가에 길게 펼치며 사람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대구에서 6시에 출발하여 빵게, 새우, 대구, 낙지, 오징어, 고등어, 조기, 굴비, 바지락, 갈치, 동태, 쭈꾸미, 소라, 말뚝상어, 마른 멸치, 북어채 등 온갖 해산물을 다 가지고 와 펼친 곳도 있다. 남여 노소의 겉옷을 비롯한 의류를 옷걸이에 길게 걸어두고 손님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이런 옷 점은 몇 곳 더 나와 있다.

행상들에 다가가 그들의 삶의 애환을 듣고, 시골 장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지만, 접근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소위 마수(?)도 하지 않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물건을 구매하려는 과정의 이야기가 아니고선 어찌 말을 붙일 수 있으랴! 이야기를 건네는 중 행여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길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풍산장에서 20년을 기약해본다
어쩌면 단숨에 20년을 건너온 오늘, 다시 선 추억의 풍산장! 눈 감으면 금방 되살아나는 사람 사는 동네같이 떠들썩하였던 정겨움이 적막으로 덮인다. 요즈음 다투어 초대형 마트가 손님을 한 곳으로 불러 모으는 시점에서, 지방 행정 당국은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하여 온갖 열정을 다 쏟아 붓는다. 시장을 아름답게 조명할 가로등이며, 장꾼들이 모여들었을 때를 대비한 비 ․ 해가림 시설, 반듯하게 정리된 좌판과 거리 정리, 그리고 특화 사업을 위하여 몇 채의 한식 초가와 와가를 지어 놓은 것, 쉬어갈 정자, 주차장 확보 등 참 많이도 변해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곳 풍산장에서는 한우를 특화 테마로 앞세워 풍산장의 경기를 활성화시키려고 가을 한우축제를 준비한단다.

예쁘고 아늑하게 단장한 몇 곳의 한우 식당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보신탕집에는 아직 사람이 보이지 않다. 좌판에 봄나물을 가지고 와서 앉아있는 몇 분의 할머니 장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신의 차량을 가지고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생업을 영위하고 있다.

옛날 그 아기자기했던 풍산장 취재에 나섰던 마음으로, 스무 해 지난 오늘 추억의 장터에 다시 올라 흑백 사진으로 간직된 시침을 되돌려 본다. 여기에 소원을 더한다면, 다시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아득한 미래의 2028년 4월 어느 날, 풍산장 취재의 날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때, 동서고속도로 타고 가서 초현대식 재래시장 빌딩을 돌아올 날! 북청에서, 청진에서 왔다는 소문난 장꾼도 만나 볼 날을 기다리며.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