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됨의 터를 닦아 사람됨의 집을 짓다 -제3 소학도와 제4 대학도(글/이해영-안동대 교수)

우주만물의 생성 변화와 인간의 위상을 다룬 <태극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논한 <서명도>는 성인이 되는 학문의 근원이다. 소학과 대학의 목표는 그 근원의 실마리를 따라서 공부하고 배우며 노력하고 실천하여 성인이 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이황은 <소학도>와 <대학도>가 성학십도의 주축을 이룬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학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학과 대학을 통해서 배우고 공부하고 노력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배우고 공부하고 노력하고 실천하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공경스러움을 지니는 것이다. 나아가 공경스러움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황은 성학십도 모두 ‘공경스러움〔敬〕으로써 주장을 삼는다’고 하고 공경스러움은 성학의 처음과 끝이라고도 하였다. 성인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대로 스스로를 가꾼 진정 사람다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학문이란 사람됨의 학문이다.


마음의 날이 반듯하게 서면 진정으로 겸손해진다
이황은 <소학도>를 설명하면서 주희의 《대학혹문》을 주로 인용하였다. 주희는 대학과 소학이 사람됨의 도리를 닦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한가지인데, 학문의 크고 작음이 다를 뿐이고 배우고 익히는 선후가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어린시절 소학에서는 청소하고 응하고 대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기본교양을 익혀 그 흐트러지는 마음을 거두고 그 덕성을 길러야 한다. 자라서는 대학에 나아가 의리를 밝히고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서 살려야 한다고 하였다. 소학에서는 사람됨의 터를 닦고 재목을 마련하고, 대학에서는 잘 닦은 터에 마련한 재목으로 멋진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황은 소학과 대학의 공부는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지므로 소학과 대학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성인이 되는 학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은 공경스러움이므로 당연히 소학 공부도 대학 공부도 공경스러움을 지녀야 한다. 그러면 공경스러움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황은 <대학도>를 설명하면서 주희의 말을 빌려 말한 송대 성리학자들의 공경스러움에 관한 여러 설을 인용하였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 <대학도>의 설명에서 하기로 하고 우선 공경스러움이 무엇인가를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황은 내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고 이 마음을 주재하는 것은 공경스러움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공경스러움은 흐트러지지 않고 평안하게 마음을 가다듬는 일이고 그렇게 가다듬은 마음이 공경스러움의 마음가짐이다. 공경스러움의 마음가짐으로 내 한 몸을 주재하면 나는 몸과 마음에 공경스러움을 지닌 사람이 된다. 몸과 마음에 공경스러움을 변함없이 지니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성인이 하늘이 부여한 본성대로 자연스레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이란 내가 내 본성대로 실천하도록, 참나가 되도록 해주는 관건이다. 유학에서 내가 참나가 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욕망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공경스러움인데, 그 열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 그런데 욕망도 내 것이오, 공경스러움이란 열쇠도 내 것일진대 이 둘을 어떻게 할 것인가? 유학〔성리학〕은 욕망은 내 것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입장〔遏人欲存天理=욕망을 막고 하늘의 도리를 보존한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욕망이 내 것이 아니라면 버리고 가도 되겠지만 어차피 내 것이라면 힘들더라도 다독거리며 부둥켜안고 가야 한다고 본다. 다독거리며 부둥켜안고 갈 때 욕망은 삶의 몸짓의 범위로 다소곳해지고 점차 순수해지리라 믿고 싶은 것이다.


공경스러움은 대상에 대한 존중이다. 따뜻한 배려이다. 그러면 공경스러움의 대상은 무엇일까? 나와 만물은 모두 천지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았으므로 만물은 나와 같은 무리이다. 나는 만물과 더불어 사는 존재이므로 만물이 모두 공경스러움의 대상이 된다. 지난 번 글에서 논한 <서명도>의 뜻도 그러하였다. 대상을 존중하는 일은 나의 겸손함과 맞닿아 있다.  <서명도>에서 내가 만물 가운데 혼연히 있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만물의 존재가 경이로워지고 만물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의 겸손함은 대상을 존중하는 바탕이다. 겸손함은 나를 버림이 아니다. 오히려 내 마음의 날을 반듯하게 세우는 일이다. 스스로를 믿는 일이고 스스로를 아름답게 만나는 일이다.


나무에 무엇을 새기는 일로 비유해보면 칼날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나무의 결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무딘 칼날로 결 따라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날이 무디면 칼이 결을 타지 못하고 미끄러져 방향을 잃고 자칫 손을 다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마음의 날이 무디면 대상의 결을 만나지 못하고 내 스스로 상처를 입는 것이다.
마음의 날이 반듯하게 서면 나는 진정으로 넉넉해지고 겸손해진다. 넉넉해지고 겸손해지면 만물의 결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그것을 빚어낸 하늘의 도리에 경외감을 갖게 된다. 결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로움과 하늘의 도리에 경외감을 느낄 때 나와 대상은 경건하고 밝고 아름다운 만남을 이룬다. 존재의 어울림을 이루는 것이다.


동네 어귀에 들어 서낭당에 돌을 던지는 순간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이 된다. 그 순간순간 누구나가 모두가 굳이 어떤 바람이 간절해서도 아닐 것이다. 그냥 경건해지는 것이다. 절에 가서 108배를 하는 순간도, 예배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에 몰입한 순간도 그럴 것이다. 허리가 아프고 무릎이 무거워지더라도 마음이 텅 비면 그 순간은 공경스러움의 상태일 것이다. 찬바람에 모은 손끝이 아려오고 꿇은 무릎에 감각이 없을 때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 또한 공경스러움의 상태이리라. 존재의 어울림 속에서도 내가 나를, 내가 대상을 의식하지 않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제3 소학도 -사람됨의 터를 닦고 재목을 마련한다-


《소학(小學)》은 주희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예기》《논어》등과 같은 유학의 경전 중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여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을 뽑아 책을 편찬하게 한 것이다. 《소학》은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었다. 내편은 뱃속에 든 아이의 태교에서부터 시작하여 교육 과정과 방법 등을 말한 입교(立敎), 오륜을 설명하고 있는 명륜(明倫), 몸가짐과 마음가짐, 옷차림과 식사예절 등 심신과 언행을 공경히 닦는 경신(敬身), 옛 성현의 사적을 기록하여 입교 ․ 명륜 ․ 경신을 설명한 계고(稽古)의 4항목으로 되어 있고, 외편은 한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는 옛 성현들의 도덕에 관한 격언을 기록한 가언(嘉言), 선인들의 선하고 바른 행실을 모은 선행(善行)의 2항목으로 되어 있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은 《소학》을 유학 교육의 기초가 되는 책으로 여겨 서울의 사학(四學)과 지방의 향교·서원 ·서당 등 교육기관에서 기초 과목으로 활용하였다. 초기 영남 사림파의 인물인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소학》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소학이 모든 학문의 기초인 동시에 인간교육의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으며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문인 조광조(趙光祖), 김안국(金安國)등도 교화의 수단으로 소학을 강조하였고 이황 등의 도학선비들도 소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제 3 소학도〉는 이황이 《소학》의 내 ․ 외편의 항목을 그려서 <제 4 대학도〉와 대조되도록 한 것이다. 〈소학도〉의 맨 위에는 내편의 입교 (入敎) ․ 명륜(明倫) ․ 경신(敬身)의 3가지 큰 항목을 배열하고 그 항목의 내용을 이루는 여러 작은 항목들을 그 아래에 두었다. 아래에는 외편의 가언(嘉言) ․ 선행(善行)의 2가지 큰 항목을 배열하고 그 밑에 내용으로서 작은 항목을 여럿 두었다. 중간에는 내편의 계고(稽古) 항목 아래에 소항목으로서 입교 명륜 경신을 두어 위아래를 연결하였다.


이황은 이처럼 〈소학도〉를 구성한 뒤, 주희가 《소학》의 서문 격으로 쓴 소학제사(小學題辭)를 싣고 이어 주희의 《대학혹문》에서 《소학》과 관련된 내용을 인용하여 적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설을 싣고 있다. 그러면 우선 주희가 지은 소학제사의 원문을 번역문의 형태로 적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자 한다.


소학제사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우주 질서와 작용의 일정한 법칙이오,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간 본성의 벼리이다. 사람의 본성은 처음에는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아름다운 사단(四端)이 느낌을 따라 드러난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공손하게 대하는 것, 이것을 타고난 본성[秉彝]이라고 하니 본성의 결을 따르는 것이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은 타고난 본성대로 하는 사람이라 널디너른 천리(天理)이니 털끝만큼 더하지 않아도 온갖 선이 가득하다. 일반 뭇 사람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어 물욕에 가리워져 인의예지의 벼리를 무너뜨리고 자포자기에 빠지게 된다. 오직 성인이 이를 측은히 여겨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세워 그 뿌리를 배양하며 그 가지를 뻗어나가게 하였다.
《소학》의 방법은 물 뿌리고 쓸며 다른 사람을 대하는데 예의를 지키고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 행동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없게 한다. 이처럼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며 노래 부르고 춤추고 즐기며 생각이 혹시라도 넘침이 없도록 한다.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고 몸을 닦는 것은 이 학문의 큰 것〔大學〕이니 밝은 명(命)이 환하게 빛나서 안과 밖이 없다. 덕을 높이고 공업(功業)을 넓혀야 그 처음〔인간 본성의 선함〕을 회복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은 옛날에도 부족하지 않았고 지금인들 어찌 남음이 있겠는가?
세월은 아득히 흘렀고 성인도 돌아가시니 경전이 손실되고 가르침 또한 느슨해졌다.  어릴적 배움이 반듯하지 못하여 자라서는 더욱 경박하게 되었다. 고을에는 착한 풍속이 없고 세상에는 훌륭한 재목이 부족하다. 이익과 욕심으로 뒤엉켜 다투며 이단의 말이 떠들썩하다.
다행히 타고난 천성이 하늘이 다하도록 실추하지 않아, 이에 옛적에 들은 것을 편집하여 후예들을 깨닫게 하기를 바란다. 아아! 어린 사람들이여, 경건히 이 책을 받들어라. 나의 말이 늙은이의 혼몽함이 아니라 곧 성인의 법도인 것이다.


본성의 도덕원리
하늘의 도는 형상이 없지만 그 질서와 작용은 만물에 미친다. 만물이 비롯하고〔元〕 무성하게 자라고〔亨〕 열매 맺어 거두고〔利〕 완성되어 저장되는〔貞〕 작용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하늘의 도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떳떳한 법칙이다. 인간도 만물의 하나이므로 하늘의 도에 따른다. 인간은 신령스러운 존재로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작용은 인간에게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덕원리로 나타난다. 인은 사랑의 원리, 의는 마땅함의 원리, 예는 공경의 원리, 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원리이다. 이 도덕원리들은 하늘의 도가 인간 안에 들어와 본성을 이룬 것이므로 인간 삶에 있어 큰 벼리를 이룬다.


인간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원리이므로 선악 판단의 기준이 되는 순수한 선이다. 이 아름다운 원리는 외부의 사물에 감응하여 4가지 마음으로 그 실마리를 드러낸다. 사랑의 원리는 안타깝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드러나고, 마땅함의 원리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이 여기고 남의 잘못에 의리로써 분노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공경의 원리는 서로 배려하고 사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분별의 원리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이 본성의 도덕원리는 4가지 마음의 실마리에서 실타래 풀려가듯 가까운 관계로부터 점차 먼 데로 흐르게 된다. 그러므로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섬기는 일은 내 마음 속 본성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본성의 아름다운 결 따라 흘러나오는 것이오,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성인은 하늘의 도가 안에 들어와 이룬 그 아름다운 본성의 결 그대로 언행과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늘의 도를 따르는 이이기에 그 본성은 바로 하늘이다. 티끌 하나 없는 착하고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어리석은 중인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그 노예가 된다. 아름다운 본성은 가려져 어두워지고 그 벼리인 인의예지는 무너지고 만다. 이는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을 스스로 내버리는 것이다. 기꺼이 스스로 주인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오, 스스로 사람 되기를 버리는 짓이다. 이를 스스로를 해치고 스스로를 버리는 짓〔자포자기〕이라 한다. 맹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진리를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진리를 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자포자기는 두려움이다. 스스로 안 된다고 믿는다. 자포자기는 게으름이다. 스스로 하려하지 않는다. 밖에, 남에게 의지한다. 이는 내 마음 안에 있는 아름다운 본성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밖에서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려움과 게으름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어찌 내 자신을 포함해 한둘이랴? 성인은 이 두려움과 게으름에 물든 자포자기들을 안타깝게 여긴다. 이에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고 스승을 세워 그 뿌리를 북돋워 밑바탕을 다지고 그 줄기와 가지들이 뻗어나가도록 하여 아름다운 사람이 되도록 하였다.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일
배움의 터전을 마련하고 스승을 세워 구체적으로 할 일은 무엇인가? 소학은 사람됨의 터를 닦고 재목을 마련하는 일이오, 대학은 그 터에 미리 마련한 재목으로 멋진 집을 짓는 일이다. 터를 닦는 일은 청소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청소는 깔끔하게 해야 하며 사람을 대하는 일은 공손한 마음으로 인사하는 일이 시작이다. 집안에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해야 한다. 사랑의 원리는 어버이에게 펼쳐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밖에 나가면 어른들께 공손해야 한다.


이를 요즘 말로 풀이하면, 나는 스스로 크는 것이지만 내가 잘 클 수 있도록 결정적으로 도움 주는 두 축, 어버이와 사회에 보답을 하는 것이다. 부모는 나를 키워주시는 분이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잘 크는 것이 효도요, 부모님께 보답하는 일이다. 효경에는 부모로부터 받은 몸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오, 스스로 바로서고 올곧은 사람이 되어 ‘아무개의 자식’이 훌륭하다는 이름을 얻어 부모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라고 하였다. 사회 또한 나를 키워주는 한 축이다. 사회는 내가 사람으로서 커나가는 장이오, 내가 나를 실현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듯 마땅히 사회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에 보답하는 일이 유학적으로 말하면 바로 어른을 편안히 모시는 일이고 벗에게 신의로써 대하는 일이고 어린이를 사랑으로 품어주는 일이다. 그 행동이 바로 사랑의 원리, 사람됨의 도리에 맞는 행동이다. 사람됨의 결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으로 실천을 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지적 역량을 쌓고 감성의 폭을 넓히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몸과 마음으로 실천을 하는 일이 터를 닦는 것이라면 지적 역량을 쌓고 감성의 폭을 넓히고 사유의 능력을 키우는 일은 재목을 마련하는 일이다. 배움의 터를 닦고 재목이 마련되었으면 이제 그 바탕 위에 마련한 재목으로 튼실하고 멋진 집을 지어야 한다.




제4 대학도 -반듯한 재목으로 사람됨의 집을 짓다-


<제 4 대학도〉는 원래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인 권근(權近, 1352 ~ 1409)이 만든 대학지장지도(大學指掌地圖)로 《대학장구》 경 1장(經一章)을 풀이해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주희는 《예기》의 한 편이었던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傳十章)의 체제로 새로이 구성하였다. 이것이 《대학장구》인데, 그는 전 10장은 경 1장을 풀이한 것이라 보았다.


대학은 대인의 학문이란 뜻이다. 소학이 어린아이의 학문이라는 뜻과 같다. 소학이 사람됨을 위한 기본적인 행동양식과 교양을 습득하여 몸과 마음을 반듯하게 가다듬는, 사람됨의 터를 닦는 것이 목적이라면 대학은 대인의 학문으로서 유학의 본래의 목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 및 실천 내용을 말하여 사람됨의 집을 완성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대학》 경 1장은 수기치인의 목표로 이른바 3가지 강령인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 지극한 선의 경지에 머무른다.〔止於至善〕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8가지 실천요목, 이른바 8조목인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서술하고 있다.


이황은 〈대학도〉의 설명에서 먼저 《대학》의 경 1장을 적고, 이어 주희의 《대학혹문》에서 공경스러움〔敬〕에 관한 설을 인용하여 대학의 뜻을 풀이하였다. 이는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원래 유학〔성리학〕의 공부론에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서로 떠날 수 없는 두 축이다. 거경은 공경스러운 마음가짐 공경스러운 몸가짐을 지니는 것이고 궁리는 나와 사물의 결을 탐구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주희는 궁리를 잘하면 거경의 공부가 나날이 진보하고 거경을 잘하면 궁리의 공부가 점점 깊어진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황이 특히 ‘공경스러움’ 을 드러내 《대학》의 경 1장을 풀이한 것은 두 측면 중에서 거경을 강조하여 방점을 찍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이황 학문의 특징으로 ‘공경스러움의 철학’을 드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선 《대학》 경 1장의 번역을 싣고 이어 그 의미를 찾아보자.


 대학경


《대학》의 도는 밝은 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선(至善)에 머무르는 데 있다. 머무를 데를 안 뒤에 정(定)함이 있으니, 정한 뒤에 능히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능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능히 얻는다. 물(物)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사(事)에는 종시(終始)가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옛날에 명덕(明德)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루고, 그 마음을 바루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앎을 지극하게 하나니, 앎을 지극하게 하는 것은 물(物)을 격(格)함에 달려 있다.
물(物)이 격(格)한 뒤에 앎이 지극하게 되고, 앎이 지극하게 된 뒤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 집안이 가지런하게 되고, 집안이 가지런하게 된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지게 된 뒤에 천하가 평정된다. 천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 근본이 어지럽고서 말단이 다스려지는 자는 없으며 후하게 할 것에 박하게 하고 박하게 할 것에 후하게 할 자는 있지 않다.


성실로 결을 알고
《대학》 경1장을 요즘 식으로 풀이하면 3강령 중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성실하게 자신의 본성을 각성하는 것,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성을,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는 다른 이에게 성실한 것, 즉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지극한 선의 경지에 머무른다.〔止於至善〕는 자기 성실성과 다른 이에 대한 성실성으로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성실하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을 성실히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 선한 본성이 다른 이에게 존중과 배려로 확산되는 과정이 바로 다른 이에 대한 성실이 될 것이다. 사람 모두가 스스로에 성실하고 다른 이에게 성실하다면 그 세상은 저절로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에 성실한 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보면 수기에 해당한다. 8조목으로 표현하면 수신(修身)이다. 3강령을 실천하는 요목인 8조목의 중심은 수신에 있다. 수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가도 치국도 평천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수신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마음이 반듯해야 한다.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것은 분노, 두려움, 욕망, 걱정 등이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비뚤어져 있다면 자기 수양은 저 멀리 달아나고 만다. 마음이 반듯하려면 뜻을 성실하게 갖추어야 하는데 뜻을 성실하게 갖춘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않아야 상대에게 성실할 수 있다. 뜻을 성실히 갖추려면 내 마음의 결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의 결을 안다는 것은 내가 성실하게 나의 결인 본성을 만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천지만물의 결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천지만물의 결을 알면 내 마음의 결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결과로써 말하면 내 마음의 결과 사물의 결을 알게 되면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지면 마음이 반듯해지고 마음이 반듯해지면 수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수기이다. 수신이 이루어지면 자연스레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해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천하가 평안해진다. 이것이 치인이다. 치(治)는 다스린다는 의미인데, 치인은 남을 다스린다. 즉 내가 우월한 입장에서 지도하고 이끌어간다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치인은 성실해진 자신을 말미암아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치인의 치를 다스림이 아니라 섬김〔事〕으로 해석하였다. 치인은 다른 이를 섬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소학은 물론 대학의 3강령 8조목을 관통하는 것은 공경스러운 마음가짐, 몸가짐이다. 소학에서는 자신을 공경스럽게 함〔경신(敬身)〕 항목 아래 작은 항목으로 마음 씀, 행동거지, 의복, 음식 등 일상생활에서 공경스러운 몸가짐이 강조되었고, 대학에서는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이 더 강조되었다.


 


결따라 가다듬다
이황은 대학도를 설명하기 위해《대학혹문》의 공경스러움〔敬〕에 관한 성리학자들의 말을 인용하였다. 그 내용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흐트러지지 않게 함〔主一無適〕,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마음을 엄숙하게 함〔整齊嚴肅〕, 늘 맑게 깨어있음.〔常惺惺法〕,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체의 바깥 사물을 용납하지 않음〔其心收斂 不容一物〕’이다. 이는 모두 마음이 집중되거나 몰입된 상태, 혹은 각성되거나 엄숙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데 몰입, 긴장, 각성, 엄숙 이런 용어들은 자칫하면 긴장의 뜻으로 풀이될 염려가 있다. 공경스러움은 결코 긴장만은 아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 모두 날선 긴장과 느슨한 이완이 오가는 것이 정상이고 건강한 것이다. 긴장만이 계속되거나 이완만이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고무줄로 비유하자면 한없이 팽팽한 긴장이 지속되면 줄이 끊어지고 이완의 상태로 오래 놓아두면 탄력을 잃는 것과 같다. 공경스러움은 스스로에 대한 각성, 대상에 대한 존중과 배려이다. 공경스러움은 아마도 긴장과 이완을 넘어서는 맑고 밝은 평안의 경지일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공경스러움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소학에서 추구하는 공경스러움은 몸가짐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의 바탕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추구하는 공경스러움은 마음가짐이 위주가 된다. 이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고 대상의 결과 아름답게 만나는 것이다. 마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에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에 이르기 위해 앉아서 고요히  명상하는 것〔靜坐〕을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도덕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유학의 특성상 정좌만으로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에 이른다고 보기에는 좀 아쉬운 점이 있다.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요할 때나 움직일 때나 마음을 일삼아 집중하여 모아가면서도 지나치게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 마음에서 잊지는 말되 서둘러서는 안 된다. 그저 결 따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흘러가도록 가늠하고 가다듬으면 될 일이다.


공경스러움은 마음을 주재하며 모든 일의 근본이 되므로 《소학》공부도 공경스러움에 의지해 시작하여야 하며 《대학》의 공부도 공경스러움에 의지하여 완성해야 한다. 공경스러운 마음이 되면 내 마음의 결과 사물의 결이 아름답게 어울린다. 이는 내 마음에 있는 아름다운 본성을 높이는 일이며 학문을 말미암아 모든 사물의 결을 깨닫는 일이다. 공경스러움으로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그 몸을 닦는다면 내 마음이 맑고 곱게 세워져 욕심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공경스러움으로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평안하게 한다면, 이는 바로 자기를 닦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修己以安百姓]이오, 공손에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정되는 것[篤恭而天下平])이다.


수기치인이라는 큰 사람됨의 뜻을 이루려면  공경스러운 몸가짐, 공경스러운 마음가짐은 어느 때, 어느 곳이라도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경스러움은 성인이 되는 학문의 처음이자 끝을 이루는 요체가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마무리로 쇠귀 신영복 선생의《처음처럼》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목수의 집 그림〉이라는 글을 빌린다.


〈목수의 집 그림〉


노인 목수가 그리는 집 그림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반대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도리·들보·서까래……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사람됨의 집을 지으려면 소학 공부와 대학 공부의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야 한다. 노인 목수가 집을 짓듯, 터를 닦고 재목을 마련하고 주춧돌을 놓고 기둥·도리·들보·서까래의 순서로 차근차근 지어야 한다. 그런데 터를 닦는 일도, 주춧돌을 놓는 일도 지붕을 올리는 일도 공경스러움이 그 바탕이다. 공경스러움은 집짓는 일을 배우듯 ‘몸으로 배워야’ 한다. 소학의 의미는 거기에 있다. 주춧돌과 기둥이 제대로 만나고 기둥과 들보가 정확하게 어울리고 지붕은 빈틈없이 덮여야 한다.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어야 한다. 대학의 의미는 그것이다. 사람됨의 집을 짓는 일은 몸으로 배우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 지어야 하는 것이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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