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 그 낮은 사람들의 삶도 기억하게 하라(글/장호철-안동여고 교사)

<사진:박종무>


타관사람이 낯선 땅에 깃들여 살며 거기 동화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쯤일까.
안동에 들어와 산 지 10년이 지났다. 아주 뿌리박고 살겠다고 이 도시에 들어온 때가 1997년이다. 그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뒷동네의 을씨년스러운 야산이 고급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그 너머 동네가 신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아파트 촌 주변이 시끌벅적한 유흥가가 되어 버린 변화가 있었다.
10년 동안 안동에서 살면서 나도 ‘안동사람’ 흉내는 얼추 낼 정도가 되었다. ‘-니껴’나 ‘-니더’ 식의 안동의 고장말을 자연스레 구사할 줄도 알고, 골골샅샅은 아니더라도 안동의 길거리나 골목길도 눈에 익혔다. 나는 ‘사장둑’도 알고, ‘구 농고’와 ‘구 교도소’ 자리는 물론이거니와 마치 전설 같기도 한 ‘나이아가라 식당’이 어디 있었는지도 알 정도가 되었다.
유택을 이 땅에 모시지는 않았지만, 2002년에 어머니께서 여기서 돌아가셨다. 타관에서 치르는 장례가 부담스러웠는데 각 지역에서 달려온, 벗들과 선후배들이 각별한 위로와 함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게 이 유서 깊은 소도시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 땅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다. 오래 대구에서 지내셔서 대구 사람과 그들의 인정을 아는 당신께선 “안동 사람은 대구 사람과는 다르니라. 노인을 보면, 지나가는 인사라도 할 법하건만, 안동에선 그런 이를 보지 못했다.”고 늘 말씀하셨다.
정작 안동에서 안동 사람과 어울려 살았던 내가 깨닫지 못했던 점을 어머니는 노인 특유의 감각으로 깨우치신 듯했다. 어머니의 지적이 안동 사람들의 ‘배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선 나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여전히 안동은 타관사람인 내게 그 속내를 잘 보여주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동의 아이콘 하회마을
그 안동을 온 나라사람에게 알리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곳이 하회마을이다. 요샛말로 하면 하회는 안동의 아이콘이다. 안동이라 하면 ‘퇴계’나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릴 법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성리학적’이지 않다. 고리타분한 왕조 시대의 유학자보다야 수더분하게 이웃 마실 가듯 들를 수 있는 ‘하회’가 사람들에겐 더 친숙한 것이다. 이 오래된 마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다. 1999년 그이의 방문 뒤에 봉정사가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뒷담화가 떠돌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회에 머물고 있는 바람과 햇빛이 고즈넉한 중세의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이 할머니의 덕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이를테면 ‘신라’는 경주와 그 인근 고을에, ‘백제’는 부여와 공주, 그 어름에 여전히 소슬한 바람으로 머물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 세기 저편의 조선 시대를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라님의 지엄한 영화가 머물고 간 왕궁과 그들의 능침(陵寢)이 서울과 인근에 널려 있지만, 아무도 거기에서 중세를 느끼지는 않는다. 숨 가쁜 밀레니엄 시대의 삶이 고궁의 고색창연을 압도해 버리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여왕의 발길을 좇아 하회의 고샅길과 양반집을, 마을을 둘러싼 초가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벽안의 손님 뒤를 따르면서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은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낯설고 주의 깊게 하회를 응시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고풍스런 중세의 유습을 고스란히 되밟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물돌이 마을에 서린 바람과 햇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으리라.




천만관광객이 다녀간 하회마을의 오늘
하회마을을 새롭게 들여다보라는 <안동>지의 부탁을 받았다. 지난 8월 2일, 하회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그예 일천만 명을 넘긴 것이다.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1994년 이래 14년만이라 한다. 일천만이라면 우리나라 인구의 거의 1/5도 넘는 숫자다. 그건 단순히 하회를 밟은 사람들 수의 누적이 아니라, 하회가 안동의 아이콘으로, 혹은 아직도 옛 왕조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는 마을이라는 사실의 ‘전 국민적 승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안동>지의 백소애 기자와 함께 하회마을을 찾은 것은 시월 초순이다. 우리는 초면이었지만 나는 금세 주변 지인과의 관계를 통해 그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개인 ‘아무개’가 아니라 누구의 아들, 동생, 동기 등과 같은 가외의 변수들로 그를 이해하는 것은 이 땅의 오랜 풍습인 것이다. 거기다 안동은 얼마나 좁은 동네인가!일천만 명이나 다녀갔다고 해서 하회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회는 늘 거기 있고, 마을 어귀를 드나드는 사람이 날마다 바뀌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일천만 명이나 드나든 명승으로서 하회를 새롭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백 기자는 저널리스트다워 보인다. 그이가 소형 녹음기를 휴대하고 있다거나 현재의 신분이 기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한 인터넷 언론에다 가끔 기사를 쓰고 있긴 하지만, 나는 저널리스트 축에는 끼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내 방식으로 읽고 그것을 해석하느라 가랑이가 찢어지는 얼치기인 까닭이다.내가 사실(흔히들 말하는 팩트)보다는 해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때, 그이는 아주 재바르게 주변에서 팩트를 찾아내고 그것들에다 전념하는 순발력을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더 느긋하게 그녀를 수행하기만 해도 되었다.
하회마을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동시의 하회마을 관리사무소에서 하회마을을 새롭게 정비한 게 지난 6월이다. 마을 안에 군데군데 박혀 있던 가게와 식당 등을 새로 마련한 주차장과 마을 사이로 옮겨놓았다. 바로 음식점과 상가로 이루어진 ‘하회장터’다.
널찍한 광장 중앙에 앉힌 시멘트 정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선 것은 각종 식당과 기념품 가게다. 평일이어서인지 장터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집도 눈에 띈다. 매표소로 가기 위해서 장터를 반드시 거치게끔 이루어진 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동선은 마을에서 장터로 생업을 옮겨야 했던 사람들의 영업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가.


매표소에서 표를 산다. 지난 한 해 동안 하회마을의 수입이 7억 2천만 원이었다면 믿어지는가. 아까 만났던 관리사무소장의 의견도 그랬다. 현재의 입장료 수준으로는 운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수입의 40%는 하회마을보존회에 지원되고 나머지가 안동시 수입이다. 입장객 천만 명 돌파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소장이 입장료 인상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유도 같아 보였다. 매표소에서 옛 매표소가 있는 마을 어귀까지는 1Km 남짓. 안동시내 버스 회사 세 군데에서 교대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왕복요금은 어른 1천원. 주차장에서부터 치면 세 번째로 지갑을 열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회마을 홈페이지에 오르는 불평의 핵심도 이것이다. 게다가 주차료, 입장료, 버스 요금까지 ‘합치면’ 5천원이 넘는 것이다.합치면’과 ‘합쳐도’ 사이에는 꽤 간극이 넓다. 우리는 머리를 갸웃한다. 이름난 놀이공원은 입장료만 해도 일만 원이 넘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도 그리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걸 별로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기 투여된 노동과 자본을 읽어버리는 탓이다.그러나 멀쩡한(!) 마을을 막아두고 입장료를 받는 걸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마을과 거기 고인 삶을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탓이다. 하회는 마을 자체가 중요민속자료 122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족마을 하회가 품고 있는 값진 문화유산을 값으로 매길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상가가 말끔히 나간 마을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여전히 몇 개의 가게가 문을 열고 있었다. 골목길마다 민박을 알리는 입간판도 더러 눈에 띈다. 거기 삶이 오롯이 존재하는 한, 마을을 답사객의 구미에 맞게 꾸밀 수는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고풍스런 마을길에 생뚱맞게 섞여 있는 그런 광고물이나 집안의 편의시설을 굳이 나무랄 수 없는 까닭이 거기 있다. 오래된 마을을 찾은 ‘난뎃사람’들은 대체로 그 마을에서 ‘고색창연’을 읽고 가기를 원한다. 서투르게 분칠해 놓은 고가나 정자를 보자고 먼 길을 온 게 아니니 그들의 바람을 달리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마을에 ‘고색창연’을 지키라는 것은 그리 온당한 요구가 아니다. 한갓진 관광객들이야 탄성을 지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그것을 통해 한때를 추억하고 말면 그뿐이지만, 그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삶이니 말이다.하회마을은 여러 번 와도 늘 관광객들은 같은 경로로만 움직인다. 북촌댁을 거쳐 삼신당을 돌아 양진당과 충효당을 보고 나면 이내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가다. 강둑을 따라 만송정 숲과 부용대를 건너다보면서 내처 걸으면 하회를 한 바퀴 도는 마을 나들이는 끝나는 것이다. 하회가 낯설지 않은 우리의 이동 경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양진당은 한창 보수 중이어서 비계에 가려 고택은 잘 보이지 않았다.
정작 마을을 가로지르는 줄기 길 안쪽에 있는 남촌댁이나 담연재, 하동고택과 빈연정사는 지나치기 일쑤다. 문제는 그게 답사객들의 선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람들에게 마을 어귀의 안내판에 그려진 집들을 깡그리 머리에 넣고 마을 구경에 나서기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놓치지 않고 마을의 이름난 고택을 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위한 특별한 동선(動線) 계획이 필요한 이유다.




<심호섭 하회마을 관리사무소장>


하회마을관리사무소는 문화재 원형 보존, 매표, 검표, 시설물 관리 등의 업무를 보고 하회마을보존회(회장 류한승)는 주민자치기구이다. 관리사무소에는 현재 14명의 인원이 근무하고 있다. 올 7월 하회마을관리사무소장으로 부임한 심호섭 씨를 만나보았다. 관람객들이 주차비, 셔틀버스비, 관람비를 따로 징수하는 것을 가장 불만으로 여기고 있다고 하자 “당초 주차료는 별도로 받는 부분이었고 셔틀버스는 관람객들의 선택사항이다. 현재 안동, 경안, 동춘버스에서 교대로 들어와 운행하며 왕복 천 원씩 받는다”고 했다. 하회마을의 원형보존을 위해 관리사무소며 음식점을 이전시킨 건 이해하지만 관람객들이 셔틀버스 비용에 대해서는 사실 쉽게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그 부분도 요금징수를 통합하는 방안을 지금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불편하신 분들은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했고, 휠체어도 준비되어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사항도 갖추어놓았다고 한다. 지역 주민, 구성원들에 대한 입장료 할인혜택은 “관람료 징수조례를 개정하면서 의회랑 얘기 중이며 안동시민에게는 50%정도 할인하는 건도 의견 조율 중”이라고 밝혔다. 작년 입장료 연간 수익이 7억 2천만 원이었다. 수익 전체를 시로 다 보내면 40%는 운영경비로 보존회에 지원된다. 관리사무소의 인력관리비용도 물론 시 재정에서 나온다. 생각보다 수익이 많지 않다고 하자 “인위적으로 조성한 관광지가 아니고 전통관광지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편이며 단순히 입장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동에 온 관광객들이 안동에 머무르면서 이뤄지는 경제효과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마을 안에 식당은 없다지만 민박집에서 아침 정도는 제공해주는 걸로 파악하고 있다고. 현재 운영이나 관리와 관련해서 달라지는 점은 매표소에서 마을입구(옛날 구 관리사무소)까지 오솔길 복원사업을 한다는 것. 관람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1km 구간을 걸어갈 수 있도록 기존의 오솔길을 복원하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내년 봄쯤이면 오솔길에서 호젓하게 걸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서 들어오는 하회마을 홈페이지(http://www.hahoe.or.kr/) 에는 비난 일색이다. 하회마을 관리사무소 홈페이지(http://www.andong.go.kr/hahoe_city/)는 안동시청 홈페이지를 거쳐 들어가게끔 만들어져 있다. 자연,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러니까 대외적으로 알려진 홈페이지는 하회마을보존회에서 관리하고 있음에도 관리사무소에 대한 불만은 물론이거니와 하회마을 관광의 전반적인 불만 모두 이 홈페이지에 토로되고 있다. 대다수 관광객이 불만사항을 하회마을보존회 홈페이지에서 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 불만사항에 대한 내용은 시, 관리사무소, 하회마을보존회 모두가 관리하고 참고해야할 사항인 것이다. 홈페이지가 통합되던가 명확하게 관리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 누리꾼들의 전파력을 무시했다간 하회마을에 대한 이미지만 나빠질 뿐이다. 심호섭 소장은 보존회와 연계해서 그 관계를 정리해나가겠다고 했다.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 아쉬운 하회마을 풍경
하회가 풍산 류씨 등 양반들의 세거로 이루어진 마을이지만, 이 마을을 여며온 이들은 양반만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하회가 이름난 반촌으로서 자라온 이면에는 양반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외곽 초가의 주인인 소작인들과 타성받이 상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회별신굿놀이”의 전승자들이었다.
이들은 하회에 세거해 온 풍산 류씨 가문의 경제력을 떠받치는 주요한 노동력이었고,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가문의 위엄과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이들 피지배 민중들은 비록 양반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하회별신굿놀이라는 걸출한 민중연희를 창안·전승해 왔다. 또 그들은 그 탈춤 속에 양반·선비·승려들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풍자로 그들 삶에 똬리 튼 한과 슬픔을 녹여내기도 했다.
하회에는 국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하회를 상징하는 정치가 서애 류성룡의 문집인 “징비록”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회탈 및 병산탈”이다. 이 두 가지 국보는 하회가 이룬 문화와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표지들이다.
마을 안에 전적과 고택 등 1점의 국보, 4점의 보물, 10점의 중요민속자료 등을 남긴 양반들과는 달리  무지렁이 민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문화재 하나만을 남겼다. 그게 중요무형문화재 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다.
그러나 이 피지배 계급의 백성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은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하회에는 113동의 기와집에는 미치지 않지만 초가 84동이 전한다.(2000년 통계) 그러나 아무도 그 초가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다. 당연히 거기 희미하게 남은 그들 삶의 자취도 덧없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하회가 ‘민속마을’이되 그게 양반들의 민속에 그치는 이유다. 사람들은 마을에 들러 내로라하는 명문가 후손들의 삶의 모습을 멀찍이서 기웃대다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가녘에 쏠린 초가집들은 마치 날아갈 듯한 고택들을 위한 들러리처럼 맥없고 쓸쓸해 보인다.
과문한 탓에 나는 이러한 문제 제기가 얼마만큼 실현 가능한 것인지, 합리적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시방도 남아 있는 초가가 얼마만한 민속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거기 살았던 이들의 삶을 어떤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러나 하회가 온전한 민속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반상과 지배·피지배계급을 모두 어우르는 형식을 갖추는 게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하회마을이 하회별신굿의 주인이었던 민중들과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하회에 머문 중세의 기억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상명대 학생들의 하회마을 답사>


삼신당에서 만난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학생들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모두 소원을 적느라 여념 없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다. 바로 중국에서 유학 온 안이슈이(사진) 학생이었다. 안이슈이는 탈박물관에서 본 하회탈이 가장 인상 깊었으며 전통마을임에도 중국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 모든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다른 학생들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충효당과 삼신당 느티나무가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들은 셔틀버스요금에 좀 억울해했고 하회마을이 상업적으로 변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돌아가면 주위사람들에게 추천해줄 것이냐 묻자 “워낙 유명한 곳이라 웬만하면 한번쯤 와보지 않았을까요?” 반문했다.




부용대에서 하회의 속내를 살핀다
내겐 안동을 찾은 지인이 있으면 그들과 늘 함께 밟는 안동 구경 코스가 있다. 쓸 수 있는 시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로다. 먼저 화천서원을 거쳐 부용대에 오른다. 산에서는 산을 볼 수 없다. 부용대에서의 하회 조망은 운치도 운치려니와 하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까닭이다.
그 다음은 병산서원이다. 못다 나눈 회포를 푸는 데는 만대루가 제격이다. 사람들의 발길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누마루에 앉으면 역시 거기 고인 중세의 기억도 아스라하다. 하회는 맨 나중에 찾는 곳이다. 주변의 풍광을 이해하고 난 연후에 비로소 공들여 하회의 속내를 살피는 것, 그게 바른 순서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들면서였는지, 나면서였는지 모르겠다. 백 기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런 경로를 하나의 답사 모형으로 제시하는 것도 하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 되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10월은 해가 짧다. 6시가 가까워오면서 이내 날이 어둑해진다. 올 때와 달리 우리는 매표소까지의 호젓한 찻길을 걸었다. 안동시에서는 길을 따라 흐르는 낮은 산에 ‘강섶 오솔길’을 복원한다고 한다. 내년 봄이면 사람들은 셔틀버스 대신 오솔길을 따라 하회에 들거나 날 수 있겠다. 좋다, 하회에 머물고 있는 옛 시대의 기억들을 찾는 길은 셔틀버스보다는 오솔길이 훨씬 더 어울리는 일일 터이니 말이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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