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무늬를 가다듬는 솔뫼리 시인 조영일(글/백소애-편집기자)
솔뫼리 시인의 2008년 가을
소설가 심상대가 말하길, 고향에서 할 수 없는 직업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예수도 얘기했다시피 선지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각성, 해탈한 사람은 고향에 갈 수 없고, 또 하나는 웨이터다. 고향사람들에게 팁 받는 노릇을 할 수 없다고. 마지막 하나는 예술가다. 예전에는 같이 학교 다녔던 친구들도, 은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쓴다고 하면 그거 책방에서 파냐고 물을 정도라니 알만하다. 그런데 그 ‘노릇’을 30년 넘게 고향에서 하고 있는 ‘예술가’가 있으니 시월의 한낮에 육사선생의 생가에서 만난 조영일 시인이다.
근래 그는 더욱 바쁘다. 이육사문학관이 사단법인으로 발을 떼면서 초대관장으로 선임됐고, 향토문화 창달과 전통문화의 창조적 개발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경북문화상 문학부분의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네 번째 시집 <시간의 무늬>를 냈다.
1944년 안동시 송천동 솔뫼리에서 태어나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및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은 데뷔에 비해 늦은 1992년에 첫 시집 <바람 길>을 냈고 당시 4대가 함께 살았던 송천 집에는 이제 부부만이 살고 있다. 그해 3살이던 맏손자 우재군은 어느덧 고교생이 되었다. ‘녀석이 할애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자료며 책들을 잘 물려받아줬으면 좋겠는데 실현될지는 의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압력을 넣고는 있다고 한다.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은 게 행복일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내 삶에 많은 제약을 받은 부분이기도 하죠.”
평생 프라하를 떠나지 못했던 카프카처럼 조영일 시인에게도 안동은 애증의 도시일 터이다. 기쁨도 미움도 원망도 정도 함께 있는 도시. 그러나 어디 시인 누구로 불릴 수 있는 문학적 호칭은 사실 아무나 얻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느새 자연스레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안동시인, 향토시인, 솔뫼리 시인은 그의 문학행보를 가늠할 수 있는 호칭이 아닐 수 없다.
(사)이육사문학관 초대관장으로서 첫 걸음
그동안 이육사문학관은 안동시에서 도산서원관리사무소에 관리를 맡겼던 터였다. 4명의 공무원들이 근무했고 건물과 주변관리에도 바빠 업무에 어려움이 많았다. 전국에 있는 모든 문학관은 당연히 관리주체가 따로 있고, 육사선생에 대한 일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단체가 맡아야 내실 있는 운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에서 출발해 (사)이육사추모사업회가 발족하게 됐다. 초대관장으로서의 묵직한 부담감 때문에 고심을 했으나, 지역의 문인으로서 이육사문학관의 경영이 문학인의 눈으로 그리고 문학성을 담보로 한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밑돌을 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을 시작했다. 무보수 명예직 관장 자리이지만 육사선생의 뜻을 기리는 공간에서의 자긍심은 사명감을 가진 안동문인이기에 가능했고 그래서 더욱 그 의미를 더하는 듯하다. 또한 육사 선생의 따님이신 이옥비 여사가 아버지의 생가에서 남은 여생을 아버지의 삶을 반추하고 선양하는데 힘을 모으기로 해 더 든든하다.
법인으로 승인이 나면서 육사총서 발간과 육사 관련 논문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업과 미 정리된 육사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활동 등을 정리하는 작업을 할 참이다. 또 현재 대구TBC가 협찬을 받아서 운영하는 이육사문학상을, 안동시와 대구TBC, 육사문학관이 협의해 장기적으로는 육사문학관에서 주관할 수 있도록 시스템정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 구상이 세워져 있다. 궁극적으로는 육사의 정신을 넓게 확산시키고 일반인들에게 주지시키는 활동을 할 계획이다.
언제나 내 시의 화두는 사람과 그 삶
“시를 읽어서 이해가 돼야지 설명으로 이해되는 시는 시가 아니라고 늘 얘기합니다. 제자들에게도 설명하려면 시는 뭐하로 쓰노, 합니다.”
자유시를 쓰던 그가 시조시인들과 교류를 하면서 시조로 방향을 틀었지만, 그의 시는 여전히 유연하다. ‘시인’과 ‘시조시인’으로 달리 불리는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다. 간결함 속에서 절제의 미학이 나오는 것이 시조이지만, 기교의 문제보다는 시정신의 문제를 항상 강조한다.
그는 2001년부터 안동문화원 문예창작반을 지도하고 있다. 그네들 대부분이 주부들이다. 그는 주부가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성숙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인이 안 되더라도 시에 관심을 깊이 가지면 삶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직관력이 생겨요. 삶과 미에 대한 직관력을 가질 수 있는 점, 그게 중요하다고 늘 말해줍니다.”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시인의 삶이란 게 고되고 지난한 건데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의식을 가지고 시를 써야지 그저 말맞추기, 말 뒤집기는 시가 아니며 인간이 사회에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1980년대 그가 지도교사로 있었던 문학회 <반변천>은 당초에 20여명 내외에서 시작해서 안상학, 이영광, 피재현, 마창훈, 김경희 등이 활동했다. 시인의 기억 속에 철없던 제자들은 어느덧 가정을 일구고 괘씸하게도 스승과 함께 건강을 걱정하는 40대들이 되었다.
“그네들이 고등학생 때부터 뻔질나게 오길래 공부하라고 막 쫓아 보냈어요. 시 쓰느라 공부를 안 하니 머리 줘 박으며 그만 나오라 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래도 반변천에서 여럿의 시인을 배출한 점은 시인에겐 뿌듯한 기억으로 남는다. 또 시조시인 <오늘>동인이 결성된 점과 초중등 교사들이 만든 안동아동문예연구회를 14년 정도 이끌었던 기억들, 이 모든 것이 안동의 문학적 풍토의 씨를 뿌린 중요한 자료이고 활동이었다.
아, 오골계는 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시인이라는 직업이 타인에게는 멋진 존재지만 가족에겐 ‘웬수’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시집을 내고 출판기념모임을 했을 때 그는 글을 쓴다는 구실로 가까운 분들에게 진 빚이 많다. 이 시집으로 용서를 대신하겠다고 인사말을 했더랬다. 아들은 여느 아들처럼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글을 쓴 사람에게 누적된 피해가 있다는 결과 아니겠냐고 한다. “시인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내 강의에 귀 기울이며 부러워할 때 말을 해주죠. 내게도 귀하보다 글이 훨씬 못할 때가 있었다. 날 선망의 눈으로 보지마라. 집으로 가면 나도 참 별게 아니다.”
정희성 시인의 시 중에서 ‘시인 본색(本色)’이 딱 솔직한 표현인 것 같단다.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도 오골계(烏骨鷄)!’
한참을 하지 말아야 할까와 해야 할까, 약간의 고민을 가졌던 질문을 해본다. 대체적인 시인의 직업이 교사이고 공무원인 현실에서, 반듯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시가 과연 얼마만큼의 감동을 줄까. 학창시절 시를 가르쳤던 선생님 한분이 시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직업은 ‘포주’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조영일 시인의 삶이 유복했던 것이 오히려 좋은 시를 쓰는데 장애가 된 적은 없었을까.
“군대 가기 전의 방황과 젊은 날 고생했던 경험이 내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지. 그러한 생활 속에서 내 정신의 자유로움이 많으니까 현실 비판적인 시가 자연스레 나와요. 많이 체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의 가난하고 핍진한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것이라고 봐요. 문학의 대상은 인간이에요. 가장 좋은 글은 인간을 가장 많이 이해하는 것. 사실 그 문학적 성과가 꼭 직접 경험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곤 생각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 경험이죠.”
시의 화두는 삶, 수많은 유형의 사람들의 삶 속에 있는 그들의 정직하고 순수한 삶을 노래하는 것, 그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향을 주는 시를 쓰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밤이 길어도
잠이 모자랐다
그런 밤 지새고 나면 뜰에 감꽃이 졌다
하얗게 내려 아프게
발에 밟혀
들었다
-감꽃
시인의 마을에서 시인과 함께 걷다
네 번째 시집이 나온 감회가 남다를 거라 생각했으나 그는 오히려 덤덤하였다.
“내가 문단경력을 따지면 30년을 넘었는데 참 뜨문뜨문 내는 거잖아. 요새는 시집을 내는 것보다 안내는 용기가 더 필요해요.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내지 말아야하지 싶어요.”
평균 하루에 3권 정도의 책을 받는데 따지면 1년에 천권정도를 받게 된다. 사람들을 만나도 인사말이 ‘시집은 언제 나오냐’는 것, 이제 한권 정도는 갚아줘야지 싶은 마음이 들었고 나와도 괜찮겠지,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느덧 안동문학계의 어른이 되었다. 그가 바라보는 안동문단의 아쉬운 점은 많은 문인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문단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성과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건 문학에 대한 치열성이 부족한 걸로 본다.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 그러한 결과물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문단선배의 일침이다.
가을이 퍽 가을답지 않다. 세상이 변해 계절뿐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지 않기도 하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일수록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시인이 느슨한 문학정신을 곧추 세우며 후배들을 다독여 안동을 지키고 있다. 사람과 그 삶에 대한 이야기가 곧 시가 됨을 여전히 믿고 있는 그는, 수십 년간 변하지 않은 헤어스타일로 바람처럼 훌쩍훌쩍 안동의 곳곳을 오늘도 누비고 있을 것이다.
육사선생의 따님인 이옥비 여사가 손수 끓여준 수제비로 점심을 하는 호사도 누리고, 거기다 이옥비 여사와 조영일 시인과 나란히 시내로 나오면서, 조근조근 따라오는 오후의 햇살과 왕모산의 기운 때문인지 그날 ‘시가 내게로 왔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