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팬티(글/김윤한_ 시인)엷은 꽃무늬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처럼 늦잠에서 일어난 김 교장은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한 사발을 주욱 들이켰다. 아내는 어디에 갔는지 집안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김 교장에게는 올해가 매우 특별한 해이다. 교직생활 35년만에 지난 3월 드디어 교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된 것이다. 김 교장은 ‘교장’이라는 직함이야말로 교직생활 최대의 영광이요, 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그동안 나름대로 점수 관리도 열심히 하고 아는 사람들을 통해 줄을 달기도 했었다.
비록 변두리이긴 하지만 중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집으로는 연신 축하 전화와 전보가 날아들었음은 물론 김 교장을 만나는 사람 모두가 ‘축하한다’, ‘잘 됐다’라는 축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김 교장도 왠지 어깨가 으쓱해져서 걸음걸이도 천천히 하고 가급적 어깨도 한껏 뒤로 젖혀 의젓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김 교장은 벽지근무 점수 때문에 잠깐 울릉도 근무를 한 것을 제외하면 줄곧 고향 근처에서 근무를 한 탓에 지금도 시내에 나가면 숱한 제자들로부터 인사를 받곤 했다. 더욱이 요즘은 길을 가다가 만난 중년이 된 제자들도 예전과 달리 ‘교장 선생님’이라고 호칭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제자들도 자신이 교장이 된 뒤에는 예전보다 더욱 더 자신에게 존경하는 눈빛을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 늠 여편네가 도대체 어디를 갔나?”
김 교장은 동쪽 창문을 확 열어 젖혔다. 멀리 강둑 위로는 아지랑이가 부지런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파트 앞 놀이터에 심어진 개나리도 활짝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김 교장은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책장 왼쪽 벽에 걸린 커다란 괘종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계는 벌써 여덟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아내는 어디에를 갔는지 남편, 게다가 ‘교장 선생님’의 진지도 차려주지 않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는 것이었다.
김 교장은 일단 바깥출입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터이지만 집안에서는 그렇지가 못했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단둘이만 함께 살고 있는 탓에 집에 들어오면 아내로부터는 존경은커녕 괜히 ‘존경’ 운운하다가는 ‘까탈스럽다’는 핀잔을 듣게 되기가 일쑤였다.
아내는 아홉 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들어온 아내는 얼마나 오래 사우나를 했는지 얼굴이 갓 구운 가재 등처럼 발갰다.
“지금 몇 시고? 밥도 안 채려 주고, 평소 긑으면 출근도 못하겠다.”
“아이구. 일요일이라 글치 언제 내가 밥 안 주는 거 봤소? 시래깃국 다 끓여 놨고 밥만 떠 자심 되는데 연세가 얼만데 아직껏 마누라 탓만 하는교?”
괜히 시비 걸다가 본전도 안 되겠다 싶어 김 교장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밥상을 받았다. 그러나 김 교장은 이래저래 아내에게는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학교에 가면 어느 누구나 자신을 존경으로 대하고 조회 때면 삼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두 자신의 훈시를 진지하게 경청하곤 하는데 유독 아내만은 그렇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사 아내에게는 애초부터 여성스러운 데라곤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야 일부러 내숭을 떨었는지 모르지만 결혼을 하고 근무지 쪽으로 딴 살림을 떠난 이후부터는 아예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조차 잊고 지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해버리는 건 물론이고 청소는 하는지 다른 집들과는 달리 집안은 항상 너저분했다. 오죽 했으면 언젠가 부부싸움을 할 적에 김 교장이 아내를 보고 ‘당신이 자식을 둘씩이나 낳은 게 신기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설거지 좀 하소.”
김 교장이 식사를 다 마치자 아내는 얼굴에 오이인지 뭐인지를 잔뜩 썰어 붙인 채 누워서 눈짓으로 밥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김 교장은 대꾸를 하려다가 말고 가만히 밥상을 들어내고는 목욕을 가기 위해 때수건과 면도기를 챙겼다. 그런데 옷걸이에는 목욕탕까지 입고 가야 할 운동복이 보이지 않았다.
“여보, 나 운동복 못 봤소?”
“아침에 빨래 했십니더. 내 꺼 입고 가이소.”
아내는 아침에 자신이 목욕 갈 때 입었다가 방바닥에 팽개쳐 벗어둔 검정색 운동복을 가리켰다. 하기사 나이 들면서 아내와는 때로는 친구 같기도 하고 또 흔히 김 교장의 운동복을 아내가 잘 입고 다니기도 했기 때문에 아내의 운동복을 김 교장이 입고 다닌다고 해서 서로간에 별 탈이 날 것은 아니었다.
운동복 바지는 벗을 때 팽개쳐진 그대로 뒤집어져 있었다. 김 교장은 아무 말도 않은 채 뒤집어진 운동복 바지를 다시 뒤집어 입고 윗도리를 걸치고는 동네 목욕탕으로 향했다.
최근 들어 김 교장은 대중 목욕탕을 가는 것 자체가 왠지 쑥스럽게 느겨졌다. 한 삽십오 년이나 교직에 있었던 탓에 목욕탕에 가면 제자들이며 아는 사람과 인사를 나눌 수밖에 없었고 점잖은 사람이 보여줄 것 다 보여주며 벌거벗고 인사를 나누는 게 ‘교장’이 할 노릇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이곳 목욕탕은 학교 근처에 있어서 김 교장의 학교에 다니는 중학생이며 학부모, 게다가 교사들까지도 목욕탕 안이나 탈의실에서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뻔히 아는 사람이나 제자들을 외면한 채 목욕을 계속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어떨 때는 모른 척하고 구석에 앉아서 때를 밀고 있노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착한(?) 제자 녀석이 다가와 제법 알이 굵어진 그것을 탈랑거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할때면 참 쑥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더욱이 한창 감수성 예민한 제자들이 목욕탕에서 교장을 만난 다음 나중에 학교에서 조회 시간에 교장이 점잖을 뽑으면서 학생들을 훈시할 때면 그들은 교장의 벗은 몸과 튀어나온 배를 연상하고 킥킥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저들끼리 모여서 교장 선생님의 그것이 어떻게 생겼느니 종알거리며 토론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대중탕을 두고 사내가 집을 들어앉아 남 모르게 물을 홀짝홀짝 뒤집어쓰며 목욕을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보면 목욕 행사는 김 교장에게는 여간 체면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목욕탕은 무척 붐볐다. 탈의실에 들어서자 전에 같은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는 권 선생이 겸연쩍게 인사를 했다. 아마도 목욕을 마치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권 선생은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그도 벌써 교장 진급할 때도 지났건만 아직도 평교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탈의실 한 구석에는 전자식 체중계가 놓여 있었다. 뚱뚱한 몸의 한 사내는 체중이 늘어나는 게 몹시 신경이 쓰이는 듯 연신 체중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머리칼이 거의 없는 한 사내는 거울에다 번쩍이는 이마를 비추며 빗질을 하고 있었다. 머리칼을 말리기 위해 틀어둔 선풍기가 저혼자 털털거리며 힘겹게 돌아가고 있었다.
목욕탕 안에는 오십 명도 더 되는 듯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열심히 때를 밀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남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연신 목욕탕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짜증나는 일이었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여러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청년이 인사를 하며 자리를 권했다. 물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릴 적에 김 교장에게서 배웠던 제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는 무심코 서로의 아랫도리를 힐끗 건너다보았다.
교장 체면에 벌거벗은 몸으로 체통 없이 이리저리 다니기가 쑥스러워서 김 교장은 어느 때부턴가 탕 안이나 사우나 실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고 수도꼭지 앞에 앉아서 그대로 목욕을 마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 교장이 앉아 있는 대각선 쪽에는 유난히 바싹 마른 한 아이가 이쪽을 흘깃흘깃 돌아다보다가 김 교장과 눈길이 마주치자 금방 고개를 돌리곤 했다. 김 교장의 생각에 아마도 김 교장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일 거란 생각을 했다.
목욕탕 구석에 걸린 시계를 보니 목욕탕에 들어온 지도 벌써 한 시간여가 지난 것 같다. 김 교장은 천천히 샤워를 하고는 목욕탕 문을 열고 탈의실로 나왔다. 탈의실에도 십여 명은 넘게 몸을 닦거나 머리를 빗고 있었고 목욕을 마치고 나가는 사람 숫자 못지않게 새로 목욕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연신 들어왔다.
김 교장은 타월을 한 장 집어 들고는 천천히 몸을 닦았다. 체중계에 몸을 달고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거울 앞에 섰다. 번쩍거리는 이마가 형광등 불빛에 비쳐 오늘따라 유난히 빛이 났다. 비록 벗은 몸이긴 하지만 천천히 한껏 점잖은 걸음걸이로 옷장으로 향했다.
김 교장은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기 시작했다. 운동복 바지를 입고 천천히 윗저고리를 껴입었다. 그 순간에도 제자인 듯한 아이가 두 명씩이나 김 교장의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했다. 김 교장은 억지로 인자한 미소를 띠며 답례를 했다. 동네 목욕탕이라 그렇지만 그곳에는 김 교장이 아는 사람만 해도 네댓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모든 옷을 다 걸쳐 입고는 때밀이 타월과 면도기를 주머니에 넣으려고 무심코 주머니를 뒤졌다. 그 순간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탈의실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부시게 빛나는 분홍색 팬티 한 장이 김 교장의 주머니에서 나와 탈의실 바닥에 툭 떨어진 것이었다.
너무도 놀라 부리나케 그 분홍빛 팬티를 집어들었지만 김 교장을 존경하는 제자 아이들도, 한 동네에 사는 때밀이 아저씨도 그밖에 김 교장의 인품과 덕망을 존경하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가 바닥에 떨어진 김 교장의 분홍빛 팬티에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아, 가정에서만 빼고 학교에서 동네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또한 죽을 때까지 위엄과 권위를 잃지 않으려 했던 김 교장의 체면은 형편없이 구겨지고 졸지네 변태로 몰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순간 김 교장의 뇌리에는 조회 시간에 훈시를 하고 있는 자신을 두고 어린 제자들이 이 상황을 이야기하며 깔깔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김 교장의 아내가 목욕탕에서 갈아입고 운동복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그 분홍빛 팬티가 지금 막 김 교장의 주머니에서 나와 탈의실 바닥에 눈부시게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 팬티에는 빨간 장미꽃 무늬가 하트 모양으로 예쁘게 수놓아져 있었다. 목욕탕 안에서보다 더 심한 땀줄기가 김 교장의 번쩍이는 이마를 타고 콧잔등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