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농사꾼 이승혁씨의 새로운 출발(글/백소애_편집기자)
1994년 이웃이야기의 주인공 이승혁 씨
전화선 너머 이승혁 씨는 사랑방 안동을 기억하고 있었고 십 수 년 만의 만남을 흔쾌히 약속했다. 만나기로 한 오후 3시가 미처 되기 전 멜론 농사꾼 이승혁 씨는 멜론 대신 새빨간 딸기를 들고 사랑방 사무실에 들어섰다. 15년 만의 만남이었다.
그동안 소개됐던 이웃이야기의 하 많은 주인공 중에,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멜론 박사가 다됐던 이승혁 씨의 근황을 편집실에서는 무척 궁금해 했었다. 멜론만큼은 전국 최고였던 이승혁 씨의 당찬 모습이 쉬 잊혀지지 않아서였다. 서른일곱 먹었던 이승혁 씨는 어느덧 오십 줄을 넘겼지만 당시 안동지에서 봤던 다부진 모습 그대로였다.
그동안 그는 외도 아닌 외도를 했었다. 농사에서 손을 떼고 사업을 했더랬다. 멜론농사에 도가 틀 세월인 10년을 넘긴 1998년에 농사를 접었다. 그해 큰 수해가 있었다. 일직, 풍천 일대가 태풍 때문에 쑥대밭이 됐다. 일직면 원호2리에 있던 그의 마뜰농장도 피해갈 수 없었다. 탱탱한 멜론은 한창 출하를 앞두고 있었다. 31동이 몽땅 물에 잠겼다. 그의 꿈도 함께 잠겼다.
“내가 욕심이 과했지요. 백화점에서 주문이 많이 들어왔었거든요. 그 주문만큼 멜론농사를 잔뜩 져놨죠. 수확만 하면 됐는데 그날 오전 열시쯤인가 몽땅 물에 잠겼어요. 손쓸 도리가 없었죠. 엉망인 농장을 보니 할 말이 없대요. 개당 만원씩은 했었으니까 한 1억 5천정도 손해를 본거죠.”
오래전 일이지만 그는 지금도 착잡하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의 욕심 탓을 한다. 욕심을 안 부렸으면 손해를 적게 봤다는 말인가. 이 농사꾼의 무던한 자기반성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수해 뒤 기름때에 절은 땅이 농사가 될 리 만무였다. 토질이 회복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빚은 더 늘어났고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거래를 하던 백화점에서는 다른 품목이라도 납품할 수 있으면 하라고 기회를 줬다. 마침 간고등어가 상품으로 막 출시되던 시기였다. 그렇게 농사를 그만두고 안동간고등어 총판사업에 뛰어들었다.
“아는 분 하고 너이서 어울려 회사를 차렸어요. 내 딴엔 농사꾼치고는 이치에 좀 밝다고 생각했는데도 사업할려니 택도 없대요.”
그렇게 그는, 아버지하고도 하지 말라는 동업을 시작했고 농사꾼이 아무리 해도 장사꾼 처세를 못 따라 간다는 소득만 얻고는 사업을 접었다. 결국은 빚 갚으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빚은 더 늘어만 났다.
사업을 그만두고 아직 일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았다. 이력서를 내도 나이가 많다고 튕겨나기 일쑤였다. 촌에서야 그 나이면 창창하다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더 까탈스러웠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멜론농사 짓던 시절의 백화점 바이어와 연이 닿았다. 당시 거래하던 그들이 어느덧 결정권이 있는 구매담당자가 되기도 하고 승진도 해서 그에게 멜론을 다시 거래하자고 권했다. 오래전 신뢰가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준 것이다.
그닥 헛살지는 않았지 싶었다. 그렇게 그는 10년 만에 다시 멜론 농사꾼으로 돌아왔다.
멜론박사의 귀환
멜론은 소위 얼굴마담격의 과일이다. 사과나 귤처럼 쉽게 찾는 과일은 아니지만 없으면 허전하고 나름 백화점 진열대에서 고고하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과일인 것이다. 예전에도 그래왔지만 품질만 좋으면 판로는 충분히 뚫을 수 있는 작물이기도 하다. 이왕지사 판로가 뚫렸으니 다시 멜론농사에 도전해볼 용기가 생겼다. 젊은 시절 맥없이 놓쳤던 것들을 다시 추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젊은 혈기에 이해득실 잘 안 따져보고 덤벼든 점도 많았다. 기름값만 년에 2천을 훌쩍 넘었다. 여름 농사해서 번 돈을 겨울에 다 쏟아 부은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멜론은 쉬운 작물이 아니다. 장사꾼도, 심지어 농가도 잘 모르고 멜론을 취급하는 경우가 많단다.
“멜론은 온도가 18도 이하면 안 되니까 악착같이 하우스에 기름 때며 농사 지었죠. 주유소에 갖다 준 돈만 해도 얼만 줄 몰라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련스러웠죠.”
비록 10년 손 놨지만 아직도 멜론 재배하면 일직 살던 이승혁을 최고로 쳐준다.
“최고는 뭐, 돈 잘 벌어야 최고죠.”
당시 수출도 하고 수입도 꽤나 괜찮았었지만 속앓이도 많아 별 실속 없었다는 승혁 씨. 어디서 듣고 왔는지 그의 농장으로 멜론농사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었다. 그중엔 그때 멜론농사를 시작해 아직도 하고 있는 이가 있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농사짓는 당시엔 참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떠나가 있으니 알겠더라고, 승혁 씨 눈앞에 실한 멜론이 아른거렸다
94년 당시는 우루과이 라운드로 시끄러웠고 지금은 한미FTA 문제로 시끄럽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건 발전이 있어야 할텐데 농촌 현실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 10년 만에 다시 땅으로 돌아와 준비를 하면서 그동안 꾸준히 농사지은 사람들을 만나보아도 그들의 생활이 별로 나아진 바가 없다고 한다. 특별하게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도 더러 있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고 대부분은 힘들게 생활한다.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지요. 내가 여전히 농사를 지었어도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판로나 여러 가지는 여전히 힘들고 빚만 쌓여간다고 하더라구요.”
농사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다. 먼 길을 돌아온 그의 마음가짐 매무새가 남다르다. 이젠 매사 욕심 부리지 않고 내 한 몸 요행 바라지 않고 부리면서 최선을 다해볼 작정이다.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봤으니 이젠 슬며시 자신도 있다. 생산자가 다르면 맛도 다르다고 그는 생각한다. 과일이란 게 맛이 없으면 소비도 안 되고 단가도 안 오른다. 최근엔 작목반도 많이 있으니까 그가 경험했던 멜론에 대한 정보와 애정을 고스란히 쏟아 부어 멜론을 상품화해서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 적어도 멜론만큼은 최고로 자신 있는 일이니까. 일단은 그의 고향인 용상에 7동, 백 평 정도로 시작해볼 참이다.
그때 소망이나 지금 소망이나 매한가지
농사를 그만두던 그해, 그는 자신이 이젠 농사를 짓기에는 세상의 때가 너무 묻었다고 느꼈다. 또 안 되려고 그랬는지 농장엔 불도 한번 났었다.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도 힘든 점이 많았다.
“내가 별난 모양이래요. 동업도 쉽지 않았고 언론에도 호의적이지 않았거든요.”
94년 그의 멜론 농장을 방문했던 당시에도 취재차 온 방송국 카메라에 냉담했던 그였다. 재료값도 안 빠지는 특수작물을 모양 좋게 찍어가서는 고소득 작물로 수익을 부풀려 방송하니 괜한 피해를 보는 이도 많아 호의적이지 않았던 터이다. 안동 간고등어가 출시되던 초창기라서 언론과의 관계도 중요했다. 그걸 다 소화하기엔 승혁 씨 성격상 힘들었고 그러한 처세도 부족했다.
지나고 나니 일직 하우스에서 농사지었던 그때가 좋았고 재밌었다. 당시엔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았었는데 멜론이며 가족이며 사는 재미가 제법 있었더랬다. 한창 멜론농사에 재미 들렸던 그때 그의 소망은 ‘아이들 잘 크고 농사 잘 돼서 빚 갚는 것’이었다.
2009년에 다시 만난 그에게 ‘소망이 뭐냐’는 우문을 던지자 그는 그때와 같은 대답을 했다. 변하지 않은 소망을 안고 나이만 먹은 사내 덕에 실없이 코끝이 찡해진다. 더불어 생각해보면 수십 년 전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 또한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다행히 애들은 다 컸으니 큰 걱정은 덜었다. 용상초등학교 3학년이던 맏딸 상미는 어느덧 스물다섯이 되었다. 지금은 서울에서 여느 대학생들처럼 졸업이 두려운 4학년, 이런저런 사정으로 1년 정도 졸업을 늦춰둔 상태다. 그래도 총명하고 당찬 딸내미가 미덥다. 일곱 살이던 막둥이 상번이는 군 입대를 했다.
지금은 젊지도 늙지도 않은 부부 둘이서 용상에 살고 있다. 용상은 그의 고향이다. 그래서 당시 일직에 있던 그의 농장 이름도 ‘마뜰’이었다. 농사를 등진 10년이었지만 그는 고향에 발을 붙이고 살 작정이다.
사업이 안 풀렸으니 당연지사 부인 황금란 씨는 취직을 했다. 지금 농산물 공판장 일을 하고 있는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빨리 거기 일 그만두고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늘 가득한데, 멜론농장이 자리 잡힐 때까지는 우예든동 버텨주기를 기다릴 밖에.
“식구보고 5년만 기다려라, 5년만 기다려라 한지가 몇 번 돼요. 이제 고생을 그만 시켜야 되는데......”
1988년 황금란 씨가 상번이를 가졌을 때 적성에 안 맞던 직장에 돌연 사표를 내고 이틀을 연락 없이 절에 들어가 고민을 한 후 시작한 농사였다. 흙 밟지 않고 살림만 고이 시켜줄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경상도 사나이 이승혁 씨가 여러워 표현은 잘 못하지만 두 손 꼭 붙잡고 ‘여보 고생 많았소. 조금만 더 참아주오’하고 미친 척 말할 날도 오겠지 싶다.
여전히 순리대로 살고 싶은 사람, 이승혁
“좋아하는 일 걱정 없이 하며 살고 싶은데 사업한다고 이래저래 저지레를 많이 해놨어요. 내가 다 해결해야 하지만 참 미안한 사람들이 많지요.”
참았던 담배를 피워 무는 그의 얼굴이 그늘 졌다. 알차고 실한 멜론을 들고 사랑방 표지를 장식했던 이승혁 씨를 생생히 기억하는 방장님이 한마디 하신다.
“어려울 때 신세 지거나 피해를 준 사람들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건 맞는데, 살아가는 동안 내 능력껏 보답을 해야지, 그걸 마음에 두고 위축 되서 기 못 피고 살아서도 안돼요. 그러면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까. 도움이야 대체적으로 친인척이나 아는 사람들한테 받았을 거 아냐, 열심히 사는 걸 보여줘야 그 사람들도 마음이 놓이지.”
다른 세계에서 10년을 살아봤다. 하지만 이제 무엇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로 다시 시작해볼 요량인 이승혁 씨. 농사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도무지 신비한 일도 거창한 일도 아닌 그에겐 그저 생존의 방법이다.
젊은 날보다 더 신중하고 영글게 해나가야 한다. 판로가 확보됐으니 뚝심 있게 한번 해볼 참이다. 그래도 가끔 한 번씩은 마음 속 갑갑증이 일기도 하지만 세상살이 언제 그리 호락호락 했던가. 세상풍파 겪고 돌아온 그를 지긋이 기다려주는 것은 끝판에는 가족과 땅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그렇게 얘기를 나누자니 강산에의 노래 한 소절이 떠오른다.
수없이 많은 걸어가야 할 내 앞길이 있지 않나
그래 다시 가다보면 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
어느 날 그 모든 일들을 감사해 하겠지
보이지도 않는 끝 지친 어깨 떨구고
한숨짓는 그대 두려워 말아요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걸어가다 보면 걸어가다 보면
농산물은 주인의 발자국을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마뜰 사나이 이승혁 씨의 건실한 발자국이 15년 전 그때만큼이나 굵직굵직하고 맛난 멜론을 키워낼 것으로 믿는다.
용상 하우스에 놀러오라는 말로 만남을 갈무리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사무실을 나가던 이승혁 씨가 뒤돌아서서 한마디 한다.
“내 빚 갚고 여유 좀 생기면, 언제 소주나 한잔 합시다.”
그날이 얼른 오기를 기대한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