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봄이 오는 태화동 말구리재(글/장호철_안동여고 교사)

 

가난한 사람들이 고단한 살림을 부리던 골목길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골목(길)’을 ‘큰길에서 들어가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더 볼 것 없이 그것은 사람들의 ‘날것의 삶’이 똬리를 틀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왕조 시대의 문자로 쓰면 ‘누항(陋巷)’이다. 여기서 ‘누(陋)’란 ‘좁고, 낮고, 천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골목길이라면 내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의 중학교로 진학했을 때, 한 해 남짓 살았던 신암동의 산꼭대기로 오르는 좁고 얼기설기 엉킨 길이다. 그 산꼭대기는 먹고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도시로 스며들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고단한 살림을 부리던 곳이었던가 싶다.


꼬불꼬불하고 가파른 비탈길에는 가끔씩 분뇨 수거차가 머물렀고 주변에서는 분뇨를 가득 담은 나무통을 양쪽에 매단 지게를 들고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던 인부들을 언제든 볼 수 있었다. 그때 골목에 고여 있던 구린내, 대문간마다 쌓여 있던 연탄재 따위의 풍경이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떠오른다.


더 서글픈 기억들로는 그 산동네에도 아침이면 두레박만한 깡통을 들고 동냥을 다니던 거지들에 관한 것이다. 형수는 식은 밥이 든 사발을 얌전하게 엎어 그들의 깡통을 채워주었다. 웬 거지들이 그렇게 많았던지. 칠곡 태전교에서부터 팔달교에 이르는 천변에 거지들의 움막이 죽 이어져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골목길은 예전과 다르다. 그 시절의 신암동 산동네로 가는 골목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골목이란 굳이 어둡고 고단한 삶의 표지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골목은 예전에 비기면 훨씬 넓고 밝아졌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이 나아진 탓일까.




말구리, 포도골, 월남골, 고만고만한 동네들

내가 살고 있는 태화동(太華洞)은 모르긴 몰라도 시내에선 그 규모가 제법인 동네가 아닌가 싶다. 안동에 처음 들어와 살 때,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조그만 도시에 무슨 동네가 이렇게 많으냐는 것이었다. 크기로 소문난 대구 대명동 한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크기의 조그만 시가지에 고만고만한 동네가 무려 마흔둘이다.


강변에서부터 안동공고가 있는 말구리재까지 길쭉한 형태의 이 동네의 골목길도 만만찮다. 특히 관왕묘와 서악사가 있는 ‘공원마’ 쪽은 제법 길이 어지럽다. 그러나 일요일 오후 사진기를 들고 내가 어슬렁거린 곳은 그 위쪽, 약수탕 앞의 옥동으로 올라가는 길부터 안동공고 사이의 월남골과 3택지, 그리고 포도골 주변이다.




‘포도골’은 태성아파트에서 길을 건너면 시작되는 마을이다. 안동의 숱한 동네들이 그렇듯 밋밋한 언덕바지에 자리한 이 동네에는 도산면 원천리에 있다가 옮겨 복원한 육사의 생가가 있다. 지금은 문을 닫은 약수탕과 KBS로 오르는 길 가운데 낀 골목길로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게 육사의 생가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옮겨왔지만, 정작 집안에 들어서지 않는 이상 이곳이 육사의 생가임을 알 수 있는 단서는 없다. 육사 생가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표지석 등은 집 안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조금 떨떠름하긴 하지만 그건 그리 나무랄 일은 아니다. 시방 거기 살고 있는 이들의 처지로 보면 육사의 자취를 본답시고 날마다 문전을 어지럽히는 이들은 성가신 틈입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대문간 왼쪽에 붙은 ‘포도길’이라는 길 이름과 호수가 묘하게 육사의 시 ‘청포도’와 이어진다. 그러나 이 마을은 육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마을이 포도골이 된 것은 이곳이 일제 말엽까지 포도나무 단지로 유명한 마을이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포도골 언덕배기에서 바라보는 태화동은 오후의 햇살 속에 안존해 보인다. 이 일대를 통칭하는 이름이 ‘말구리길’이다. 옥동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면 만나는 태화동 삼성아파트, 월남골과 바투 붙은 태성아파트를 빼면 이쪽 골목은 대부분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성아파트 뒤쪽에 있는 월남골은 베트남 파병 전사자 및 울진 무장공비 소탕 전사자 유가족을 위해 세운 시영 주택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처음 이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나는 그게 ‘원남골’의 와전인 줄 알았다. 나는 지금도 월남골에 사는 베트남전 참전 상이용사 한 분을 알고 있다. 그는 월남전에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고, 정년 때까지 기능직으로 근무했다. ‘자린고비’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그는 여기다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러나 70년대에 지어진 이들 주택들은 이미 낡을 대로 낡았다. 그 너머 말구리재에 이르는 비탈에 새로 조성된 3택지 부근의 슬라브 주택가에 비기면 몇 채 남지 않은 시영주택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무릇 모든 것들은 낡고 늙어가는 것이다. 삶뿐 아니라, 마을과 길도 마찬가지다.

월남골 옆 노인대학에서 간선도로에 이르는 비탈 지역은 원래 야산이었다. 안동시가 여기다 이른바 ‘3택지’를 개발한 건 90년대 중반이다. 3택지에는 도시계획에 따라 조성된, 잘 구획된 골목길에 빨간 벽돌을 쓴 비슷비슷한 형태의 단층 혹은 2층 슬라브 집들이 죽 이어져 있다. 대부분 1층은 세를 주기 위한 점포고 살림집은 2층이다.


3택지 쪽은 온전한 주택가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상가나 사무실이 모인 곳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간선도로가 가까운 쪽은 그나마 한 집 건너 사무실이나 점포가 눈에 띄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대부분의 1층 점포는 셔터가 내려져 있다. 주변에 그나마 문을 열어 놓은 점포는 세탁소, 우유배급소, 전력회사와 건설사 사무실 등이 고작이다.


며칠 간 봄날 같은 날씨가 계속되는데도 골목길은 한산하기만 하다. 퇴락한 담벼락에 붙은 바겐세일 광고 전단지가 곳곳에서 외롭다. 전단지는 ‘이 시대의 눈물’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그 아래 ‘살아남고 싶습니다.’라는 부제를 달아놓았다. 폭탄세일 광고 속에도 유례없는 불황의 그림자는 짙어 보인다.




도시와 시골의 중간즈음 되는 모양새의 안동

노인대학은 월남골과 말구리길 인근 동네사람들에게 공회당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나는 태화동에 살면서 이곳에서 모두 대여섯 번의 선거를 치렀다. 마땅히 투표소로 활용할 공공시설이 인근에 전혀 없는 탓이다.


노인대학 옆으로는 시에서 관리하는 약수터와 어린이 놀이터, 광덕정이란 이름의 재실이 이어진다. 재실 담을 끼고 오르면 나지막한 야산이 펼쳐진다. 고개에 올라서면 곳곳에 부지런한 주민들이 일군 자투리 텃밭이 계단을 이루고 있다. 시에서는 산비탈 텃밭 농사로 산이 허물어지는 걸 우려하여 경작을 금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부지런은 손바닥만 한 땅도 남겨두지 않았다.


태화동 말구리길 주민들은 이 야산을 넘어 송현동 시장을 가거나 옥동으로 나들이를 한다. 야산의 잘룩한 허리 부분에는 각각 송현동과 옥동으로 넘어가는 들길이 나 있는 것이다. 새벽녘에는 이 조그만 야산에 운동하러 나온 주민들의 발길이 적지 않다. 잘 개발된 대도시였다면 이 야산은 도심 녹지로서 각광을 받았겠지만, 반농반도(半農半都)의 시골이어서 산은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셈이다.




야산 언덕배기에서 태화동 쪽을 바라보면 말구리길 근처가 한눈에 들어온다. 3택지에 들어찬 슬라브집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간선도로 안쪽으로는 여전히 퇴락한 옛집이 많다. 적지 않은 주택들이 비워둔 1층 점포처럼 곳곳에 놀고 있는 땅도 많다. 그게 안동이고 태화동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미끈한 도시가 되기에는 뭔가 미진하지만 그렇다고 시골이라고 하기에는 좀 닳아버린 어정쩡한 모양새가 곧 안동일지 모른다.

야산은 옥동의 롯데슈퍼 옆에서부터 안동공고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밋밋하게 이어진다. 이 야산의 끝부분 아래 안동공고 앞에서 사단 쪽으로 넘어가는 완만한 고개가 ‘말구리재’다. 말구리재는 안동과 만만찮은 인연을 엮고 있는 후삼국 시기의 역사와 닿아 있다.


‘말구리’라는 지명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다른 데는 어떤지 모르지만 태화동 말구리는 ‘말이 굴렀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말’에 ‘구르다’는 동사의 어간(‘구르-’)에 명사를 만들어주는 접사 ‘-이’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이 ‘말구리’가 된 듯하다.


후삼국 시대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경상도를 두고 다투었던 역사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른바 ‘고창(古昌, 안동의 옛 이름)전투’다. 고려는 후백제와 겨루기 위해 신라와 친선관계가 필요했고,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경상도 일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공산(公山, 팔공산)과 의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백제는 여세를 몰아 930년(태조 13년) 고창군을 포위·공격했다. 이에 왕건은 대군을 이끌고 고창군 병산(甁山, 지금의 와룡)으로 진격했다. 격전을 거듭한 끝에 그는 지방호족의 지지를 받아 후백제군 8,000명을 섬멸하고 승리를 거뒀다. 이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왕건은 경상도 지역에서 견훤 세력을 몰아낼 수 있었다.


이 고창 전투 가운데 지금의 송현 네거리쯤에서도 격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싸움에 밀려 쫓기던 견훤이 말에서 굴러 떨어진 고개가 바로 말구리재다. 이 고개 서쪽에 성창아파트와 안동공업고등학교가 있는데 거기서부터 송현동이 시작된다.


야산 이쪽의 아직도 경작하고 있는 밭 주변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퇴락한 축사 건물 등으로 어지럽다. 안동공고가 내려다보이는 야산 이쪽 비탈에도 허술한 집들이 듬성듬성 들어차 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살림살이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말구리재에 이어진 야산 등성이 부근이 안동에서 가장 먼저 봄이 오는 곳이라 여기고 있다.




 

태화동 말구리재에 바야흐로 봄이 온다


지지난해였던가. 3월 중순께였다. 봄소식에 대한 갈증으로 사진기를 둘러메고 태화동의 야산을 어정거리다 나는 거기서 노랗게 핀 생강나무 꽃을 만났다. 그 아래 지붕 낮은 집들의 마을에서는 만개한 매화를 만나기도 했다. 나는 오래 거기 머물며 마을보다 더 이르게 온 봄을 들여다보았다.


안동은 늘 봄이 늦다. 봄인가 하면 어느 새 날씨는 여름으로 접어들고 만다. 꽃소식도 다르지 않다. 꽃구경에 목말라 하다 보면 어느 날, 꽃은 아파트 담장 아래서, 골목길 한쪽에서 무연히 활짝 피어 있곤 했던 것이다.


쓸쓸한 골목길 끝에 서서 나는 실눈을 뜨고 야산 등성이를 바라보았다. 바야흐로 봄이 오고 있다. 봄은 시방 그 더딘 발걸음으로 저만큼에서 숨을 돌리고 있다. 봄을 느끼고 싶으면, 피어나는 봄꽃을 즐기고 싶으면 태화동으로 오라. 태화동 말구리재 근처, 막 우썩우썩 깨어나는 봄의 대지, 생강나무와 함께 하얀 매화가 벌이는 황홀한 봄의 향연으로.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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