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살이 종착역에서 삶을 시작하는 백규화씨(글/노영옥)

사람이 죽을 때는 '껄껄껄(걸걸걸)하면서 죽는다'는 얘길 들었다. 이것이 웃음소리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바로 살아 있는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좀 더 잘할 걸, 좀 더 용서할 걸, 좀 더 베풀 걸……걸' 그러질 못해서 하는 후회의 소리란 말이었다. 아마도 그 중 가장 힘든 것이 '좀 더 베풀 걸'하는 맘이 아닐까.



꿈 속에서라도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향냄새 진한 복도, 눈보다도 흰 3단짜리 국화 화환의 행렬, '아, 이승길의 마지막이란게 이런 거로구나'하는 느낌. 세상에, 저렇게나 소담하고 아름다운 꽃을 왜 장례식에다 쓸까 하던 외국인의 의문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의 기억에 망자의 설움과는 대조적으로 국화꽃은 탐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으로 사랑방의 편집기자와 함께 찾아간 곳은 안동병원 영안실이었고, 우리가 만날 주인공은 그 속에서 원무과 소속 직원으로 근무하고 계신 백규화(56세)씨였다. 그나마 한가한 시간에 찾아온 것이라고 하는데, 연신 사람들이 찾아오고 문의하고, 하는 바람에 쉽게 인터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시신(屍身)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글을 읽기 전 나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게 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대상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기억이 있는가?! 라고. 각자의 대답이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면 시신(屍身)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볼지…? 그런 사람이 바로 우리가 만난 그였다.


   이번 만남은 사실상 편지 한 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사랑방『안동』지의 열렬한 독자께서 내가 이런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한 번 취재해 보면-아니 꼭 취재해 달라고 했다- {안동}지의 위상에 폐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다름아닌 안동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였다.
양복과 넥타이를 깔끔하게 챙겨 입은 모습과, 부드럽게 다가드는 핑클퍼머한 앞머리. 저런 사람의 인생살이에 과연 얼마만한 우여곡절이 있을까하는 의아함이 들 정도로 신사적인 모습이었다. 
   방금 막 친절 교육을 받고 사무실로 들어서는 백규화씨가 안동병원 영안실에 근무하기 시작한 것은 96년 6월부터다.(이전에는 하청을 줬는데 96년부터 병원에서 직영으로 운영을 하였다고 한다.)


   병원과의 인연은 이러했다. 원래 그가 삶의 터전으로 굳혀 살아온 곳은 영주인데(영주시 휴천2동) 신부님을 뵈러 사제관에 갔을 때(그는 천주교인이다) 마침 응접테이블에 경북북부신문이 있었고, 거기에 실린 안동병원직원채용 모집요강 공고가 눈에 들어 왔던 것이다. 그 때 그는 하던 일을 접고 잠시 쉬는 중이었다. 그래,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50이 넘은 나이에 입사원서를 넣게 됐는데 1차에 그만 물을 먹고, 같은 해 6월 다시 기회가 왔고 입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무려 16가지나 되는 서류를 준비해 가지고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데, 도무지 이름을 안 부르더란다. 그래서 아, 이번에도 물먹은 가보다 하고 거의 포기 상태에 있는데 면접관이 제일 마지막에 불러서는 "-정년퇴임 관계로- 합격이 되셔도 들어오자마자 일을 얼마 못하시고 나가야 하는데 다른 직장을 구해보는게 안 낫겠습니까?"하더란다.


입사하면서부터 안동병원 영안실에서 근무를 했지만, 그는 현재 55세 만기인 정년퇴임을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다시 입사해 일을 하고 있다. 다시금 일하기 시작한지는 이제 1년 반 정도가 된다 했다. 유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2000년 1월 병원 측으로부터 봉사상을 받을 정도로 병원 일에 열심인 그는 스스로를 영안실 적성(適性)이라고 할 만큼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하고 많은 적성 중에 하필 영안실 적성이 뭔가? 할 독자도 분명 있을 것이고, 아니 도대체 스스로를 영안실 적성이라고 저토록 당당하게 말할 정도면, 저 사람의 삶은 도무지 어떠했던 걸까 하는 의아심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의 인생여정을 들어보노라면 고개가 절로 끄덕거려진다


50여년 그의 인생살이

고향인 예천에서 살다가 집안이 극도로 쇠락한 까닭에 연세대 1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서울에서 내려오게 된 곳이 당시 큰누님이 살고 계신 영주 땅이었다. 그 때부터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난을 탈피코자 선택한 길이 상도(商道)의 길이었다. 때로 어쩔 수 없었다는 이유가 우리의 삶을 옥죄곤 하는 때가 있는 것처럼, 당시로서는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위로삼으며 "완전히 zero상태"에서 그렇게 초라한 장삿길로 들어섰다.


박정희 통치하의 70년대 처음으로 영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성원의 3분의 2가 가난한 환경을 비관하는 결손가정의 아이들, 폭력배, 전과자, 소매치기 등으로 구성된 버스노점을 하게 된 것이었다. 노점 시절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백규화씨는 그들을 선도하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이 어렵게 살아온 경험도 얘기해 주면서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그 상간에 결혼한 집사람은 학교 앞에서 등하교하는 학생들한테 물건을 팔고, 자신은 거리의 잡상인을 하면서 보낸 시간이 18년이었다. 가난을 탈피하고자 그렇게 이를 악물고 돈을 번 덕에 드디어 노점상 장사에 종지부를 찍고, 84년 3월 한옥 한 채를 살 수 있었다. 마침 영주주공아파트에 점포 입찰이 돼서 한옥을 판 돈으로 89년 6월부터는 슈퍼를 경영하게 됐지만 그 일을 하면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참 많았다고 했다.


"아파트 슈퍼란 것은 자존심이 상할 때가 많습니다. 아이스크림 하나,  맥주 한 병 조차도 배달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전부 심부름을 시킵니다. 물론 싫어도 내색하지 않고 전부 배달해 줬지요. 그렇게 일단 돈이 나한테 들어왔다 하면 일체 나가질 않습니다. 내가 술 담배를 모르고 살아요. 악착같이 해가지고 점포 3개를 경영하게 됐지요."


당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새벽 네시에 장을 봐서는 보기 좋게 진열해 논 후에, 그리고 나서는 딱, 샤워를 하고 꼭, 즐거운 마음자세로 손님을 대했다. 매일 아침 모든 일에 앞서 목욕재계를 했고, 그처럼 준비된 자세와 근면, 성실, 부지런의 힘으로 그는 그렇게 일어설 수 있었지만 슈퍼를 벗어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으로 한 것이 중간유통업이었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아 약간의 손해를 보고 접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는 50이 넘은 나이에 차에 기름을 넣는 주유원으로 일하기도 했단다.


   "생활력이 참 강하신가봐요?" 란 편집기자의 말에 "우리는 걸어 온 길이 그렇기 때문에, 안 강할 수가 없었어요" 란 답을 듣는데, 이 순간 필자는 솔직히 참 많이도 슬펐다. 삶이라 그렇게 가혹한 것이고,  흔히들 가난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가난은 너무도 불편하고 때로 짜증스럽기까지 한 일이란 것을 아는 때문이었다.


24시간 곡성소리 끊이지 않는 일터

   24시간이 울음바다요, 곡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 현재 그의 직장이다. 침울하기 그지없는 곳, 참상(慘喪)과 역상(轢傷)이 빈번하고 때문에 사람들의 표정이 죽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곳. 부검실이니, 시체 안치실이니 하는 무거운 말들만 보여지는 곳. 그래서 인생살이의 종착역이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그가 하는 일이란 장례물품 판매, 및 거래처 관리, 각종 안내, 시신모시기 등이며, 3일마다 돌아오는 야근 당직도 선다. 참으로 바쁜 하루다.
   그런데 시신모시기라니, 뭔 말이지? 바로 염사자격증을 소지하고 각종 전문상례기술을 교육받은 3명의 직원들이 한 달 평균 약 50여 구 정도의 시신을 모시는데 그러니까 1년 평균 약 4200여구의 시신을 분담하여 닦는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그의 에피소드 하나를 듣게 되는데, 참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싶다. 간호사에게서 환자가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게 되면 거리의 부랑자라거나, 급작스런 사고 환자 같이 보호자가 없는 경우는 당연 백규화씨 같은 영안실 직원들이 시신을 모시러 가게 된다. 그 때는 엘리베이터 안에 죽은 시신과 규화씨 자신 오로지 이 단둘만이 있게 되는데 그 때의 인간적인 공포감이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그 때면 백씨는 당연히 기도하는 마음이 될 수 밖에 없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면서 눈을 감고 성호를 긋고, 그가 믿는 신에게 죽은 영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곤 한다고 했다.(나는 이를 종교적인 의례로 생각하고 싶진 않다. 이것은 분명 인간대 인간의 사랑이다. 죽어서나마 좋은 곳으로 가 평안히 살길 바라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이다.) 입사 초기에 그렇게 시체들과 지내다 보니 눈을 떠도 시신이 보이고 눈을 감아도 환영이 떠나질 않으니, 어떻게 하면 시신들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시체 안치실 옆에 붙은 샤워장에서 늘 하던 생활 습관대로 아침마다 샤워를 하기로 한 거였다.


   "눈을 떠도 아른, 눈을 감아도 아른……, 무서워서 눈을 감는다고 감으면 맹 보이고, 다시 뜨면 비눗물 때문에 다시 (눈을) 감아야 되고, 그래도 아침마다 거기서 샤워를 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시신들과) 친해질 수 있었죠." 참 기가막힌 노릇이다. 시체들이 가득한 방에서 그것도 죽은 시체들과 친해지기 위하여 샤워를 하다니, 아니 시신하고 어찌하면 더 친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심정이란 도무지 어떤 것일까. 그런데 그걸 에피소드라고 얘기할 정도이고보니, 이제는 시신을 깨끗이 제 손으로 닦아주고 나면 오히려 개운하고 홀가분한 마음마저 든다고 했다.


시신을 닦아 주고 그처럼 천차만별의 양태로 죽어간 시신들을 보면서 그는 오히려 인생을 새로 배우고, 자신의 일 속에서 지금까지의 인생길을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하며, 인생을 돌아보고 인성을 가다듬는 장으로 활용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과연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도 했다.


어떻게 사자(死者)와 좀 더 친해질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러면서 세상을 향한 강한 건재 의식을 이룩해 내는 그의 모습은, 세상의 끝에서 이 세상의 시작을 보고,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가장 환한 삶의 의지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 지닌 고귀한 가치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대하면서도 매번, 밝은 베이스톤의 씩씩한 목소리로 "백규홥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체화된 그의 매너가 그가 있는 공간에서는 참으로 빛나 보였다.  예식장에서 결혼도 그냥 치루는 하나의 일에 불과할 뿐인 것처럼 그의 일 역시 죽음도 하나의 일거리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것이었지만 백규화씨가 일함으로 해서 일에 생명감이 심어 지고, 극한 분위기마저 역전되고 있었다.


점심시간 쪼개어 시작한 교통봉사활동

그렇게 험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스스로는 전혀 험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지만-, 그는 여가를 쪼개 점심시간에 교통정리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작년 11월부터 많은 활동을 했으니 오래다. 영안실에 있으면서는 순간의 부주의로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간 사람들을 수시로 보게 되고, 느즈막한 나이에 근무하게 된 직장에서 이렇게 있어선 안되겠다는 자각이 들었단다. 종교를 가진 신자로서의 가책도 당연 뒤따랐다. 그래서 뭐를 해볼까 하던 끝에 생각해 낸 것이 교통정리를 해보자는 거였다. 계기가 이러했지만, 그는 이미 영주에 있을 적부터 영주현대아파트와 영주역 앞에서 17년간 교통정리를 해 온 베테랑이었다.


   점심시간 1시간을 쪼개어 식사를 남들보다 빨리 하고 12시 30분부터 그 날의 교통상황에 맞게 안동병원 앞의 진입로나 안동여성병원 앞에서 교통정리를 한다. 매일 30분씩 하는 그의 봉사가 큰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이 운전자들에게 있어서는 교통사고에 대한 얼마간의 각성제 역할이 될 것으로 백씨는 기대한다.
   그의 봉사 정신은 give and take다. 내가 베풂으로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내가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줬기 때문이고 따라서 내가 베풂으로 해서 남들도 무언가를 얻게 된다는 마음이다.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내가 봉사함으로써 또 따른 새로운 봉사자가 태어난다는 자세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니, 저사람 윗사람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저러는 거 아닌가," 하는 따가운 시선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 세상에 아무런 대가 없이 봉사할 사람은 없다시피 하니까. 사람들의 오해는 무리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 쑥덕공론 후에도 그의 봉사가 꾸준히 이어지니까 사람들은 그의 본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처럼 옳은 근본은 드러나기 마련인 것이 아닐까.


   나는 언젠가의 TV인터뷰를 떠올렸다. 어느 자원봉사자와의 인터뷰였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봉사를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니, 자신이 생각하는 일을 봉사라고 생각하면 그 일을 오래 할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 것이고, 봉사를 봉사한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봉사가 아니요, 그건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말에 나는 절대 공감을 아끼지 않았다. 그처럼 백규화씨에게 있어서는 봉사는 그의 생활이었다. 대가성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학창시절 웅변으로 상도 여러 차례 받은 터라 그 덕에 웅변조가 된 그의 말투엔 씩씩함이 스며 있고, 활달한 성격인지라 병원에서 객원인사나 외부초청강사 강연회가 있을 때라든가, 월례회 때면 MC끼를 발휘해 웃음을 유발하고, 직원들의 피곤함을 가셔주는 이도 그다. 직원간 체육대회 때 응원단장으로 활동하는 것도 당연한듯 그의 몫이 되고,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특선에 입상한 작품이 사무실에 걸려 있기까지 했다.
알고보니 그는 감투도 많다. 뭐가 생겨서, 뭐가 짭잘하고 하는 그런 부류의 감투가 아니라 남들 열심히 도와준 덕분에 생긴 감투다. 새마을 지도자로, 방범위원으로, 라이온스 회원으로 일하는 봉사감투다.


죽는날까지 그리고 근무가 허락되는 한 그는 계속해서 봉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 자신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의 건재를 확인하는 일이고, 백 여 만원 정도의 월급일 지언정 자신한테는 천 만원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지금 백씨는 다시 태어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이제 봉사는 그의 남은 삶의 목표이자 사회 행동 목표가 되어 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힘에 넘친다.


죽음의 공간에서 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

나는 많은 시간 인간만이 지니는 고귀한 가치에 대해서 고민했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며 존중 받는 것인가. 지식적인 이해가 아니라, 지혜로운 답을 구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 나에게 이번 만남은 그 구체적인 답을 얻은 기회였다. 다른 이의 삶에 각성제가 되고,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였다고 하겠다.


죽음을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할 백씨께 나는 인터뷰 시작부터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조심스레 여쭸다. "저-어, 죽음을 많이 봐 오셨을 테니까 꼭 하나 여쭤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저…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잘 죽는 걸까요?" 참 어렵다. 세상에, 잘 죽는 방법이라니?! 묻고서도 스스로 겸연쩍음은 어쩌지 못하겠는데 그는 무색함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단번에 대답한다.
"얼굴이 편안한 죽음이예요!"라고.


"죽는 사람 두고, 에이 저 놈 잘 뒈졌다, 하면 되겠어요.(모두 웃음) 죽어 가는 분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의 상처 없이 가시도록 해 주는 것이 좋아요. 좋은데 가시라고 잘 위안해 드리구요. 그리고 절대 부모를 두고 자식 앞세우는 죽음은 하면 안돼요. 부모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심장에 묻히는 거니까요."


죽음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의 당위성이 오히려 더 확실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生)에 있어 죽음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부터 삶의 운용이 달라지고 삶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삶에 애착이 생겨날 때 죽음을 생각하면 그처럼 허허로운 일도 없을 것이지만 죽음의 당위성은 인간을 한층 성숙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인생을 가장 잘 말해 주는 것 또한 죽음이지 않은가.
때문에 항상 농담인 듯 진담처럼 말하기를 나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었던 탄생과는 달리 죽음만큼은 참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의 죽음 뒤에는 이 세상을 참 잘 살다 간 사람이라는 글귀가 남기를 바랐다.


   삶처럼 죽음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떠한 삶이 참으로 잘 살다 간 삶이라고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적어도 오늘 만난 백규화씨만큼은 거기에 어느 정도 근접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에 비록 신을 향한 종교적 의지가 많이 가미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말하듯이 그의 인생여정에서 신앙의 힘이 컸다고 보여지는 일들이 많다고 하더라도…말이다.
   나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위선 속에서 가짜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종교는 필요한 것이지 진실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필요 없는 것이라고 했다.는 글귀에 적극적인 공감을 표방하던 나이지만 시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 성심껏 기도했을 백규화씨의 삶 앞에서는 이런 말을 감히 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만 나 역시 타작(惰作)에 물들지 않은 삶을 살길 원한다. 적자 인생의 서글픔 속에서도 내가 적극 경계하는 것은 바로 타작에 물드는 삶이다. 백규화씨는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가르침이란 가르치는자 스스로가 본보기가 되어 실천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학문의 최고봉이 실천학문이 되는 것이며, 고로 그것이 깬 교육이고,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의 옳은 의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감흥을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감흥을 유지시키고 더불어 생활에 접목시켜 체화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던져주는 것은 세상의 몫이요, 그것을 내껏화 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때문에 성장시켜야 할 것은 우리의 의지력이다. 그리하여 일회적인 감동을 꾸준히 유지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한 해를 마감하는 시기에 다시 새로움으로 생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 백규화씨가 서 있다. 생활에 지쳐갈 때 쯤이면 아, 지금쯤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 삶이 참으로 궁금해지는 사람이 되어 있다. 그리고 적어도 이 분 만큼은 돌아갈 때 걸걸걸(껄껄껄) 하시지 않으리라는 굳은 믿음이 아깝지 않다.


   공교롭게도 취재 전날 혼자 사는 집에 도둑을 맞았다. 물론 도둑님(?)이 와서는 되레 성을 내고 갔을 법하지만 아무런 수고없이 불로소득을 취하는 도둑의 삶과, 아무런 대가없이 봉사하는 백규화씨의 삶이 참으로 대조적이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씁쓸함…   어느 한 사람을 향해서만큼도 모든 것을 주는 그런 사랑을 할 자신이 없는 나였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온 날부터 내 기필고 노력은 하리라고 다짐했다. 백규화씨는 그런 사람이다.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주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 얼마나 바람직한 변화인가.[안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