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동 성진길>골목대장이 없어진 골목길 풍경(글/백소애_편집기자)

신세동 혹은 성진길, 성진골, 성지골

인적이 드문 골목길, 하필 빗방울이 똑 떨어졌다. 비는 분무기처럼 한번 흩뿌려졌다가 멈추길 여러 번, 언제 비가 왔었냐고 묻는 이가 몇 있었던 날이었다. 카메라를 둘러매고 살방살방 나선 길, 때로는 빗방울을 피해 처마 밑에 섰다가 때로는 시멘트 담벼락 사이에 핀 작은 풀꽃 앞에 앉았다가 또 때로는 남의 집 대문도 흘끗거리며 성진길 일대를 돌아다닌다. 이 일대는 법흥교 다리 위에서 보면 흡사 혈관 줄기가 나뉜 것처럼 어지러이 갈라진 여러 골목 중에서도 언뜻언뜻 지붕만 보일 뿐, 부러 찾아오지 않는다면 굳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골목길은 모두 시멘트 마감을 해놓아서 흙먼지 하나 일지 않는다. 언제나 큰 길로만 스쳐 지났지 성진골 일대를 작정하고 나서보긴 처음이었다.




숨바꼭질도 안하는데 전부 어디로 숨었을까?

골목에서 만나는 이에겐 목례라도 건네야 할 것처럼, 후미진 골목에 들어서기 전에도 좀체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부초등학교 인근을 지날 때 늦은 하교를 하는 아이 하나가 걸어갈 뿐, 골목에는 리어카, 우체통, 나무, 모든 것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동부초등학교는 신세동에 속하지만 바뀐 주소로는 동부 새싹길에 해당한다. 조무래기들이 없는 골목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학교 인근, 연탄불에 구워먹던 쫀듸기나 국자에 소다를 부풀려 끓여먹던 파짜꼼을 파는 구멍가게는 양철 덧문을 굳게 닫았고 여기저기 주차된 차들만이 길을 점령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골목길을 지나 성진길에 접어든다. 제법 가파른 언덕으로 집들이 총총 붙어있다. 성진길은 새 도로명이 부여되면서 신세동 일대 구간이 성진1길, 2길, 3길 등으로 주소명이 변경되었다. 신라시대 성지 도사가 법흥사 창건 후 4개의 암자를 만들었는데 그중 북암에서 기거하였다 하여 성지골이라 일컬었으며 현재의 성진골로 불리게 되었다. 옥정동과 율세동, 법흥동에 둘러싸여 있고 행정구역상 이 일대를 중구동이라 통칭한다.


그 옛날 숨바꼭질 하던 골목길에는 숨을 곳도 많았건만, 지금은 어디 하나 숨을 곳도 없는데 사람들은 보이질 않는다. 골목을 지나쳐 만난 사람은 채 열도 안 되었다.


“어예 거서 나오노?”


“네, 여 막힌 줄 모르고요.”


성진골 여기저기를 훑다가 마침내 할머니 두 분을 만났다. 고깔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막다른 골목을 되돌아 나오던 차였다. 할머니들은 노인정으로 향하던 참이다. “거는 막혔어. 길이 없어.”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한다. 성진3길이라는 팻말이 법흥동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었고 제법 널찍한 공터에는 신세동 노인회관이 번듯하게 세워져 있다. 현관에는 신발이 소복하다. 기척도 없는 동네에 기척 내는 곳은 따로 있었다. 회관 안에는 남녀가 따로 방을 잡아 논다. 큰 행사가 있을 때면 60명까지도 모이고 평시에는 스물 남짓이 모여 담소도 나누고 화투도 치고 논다.




성진골 노인회관 앞에서 만난 이계향 할머니

노인회관 공터에는 한 여름 거뜬히 날 정자가 한 채 서 있고 그 옆에는 솥단지가 걸려있었음직한 드럼통이 엎어져 있다. 마침 어디선가 꺾어온 나뭇가지를 드럼통 아궁이에 집어넣고 있는 이계향(74세)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넣으신 게 뭐예요?”


“응....탱자나무가 영 어정시러워서....”


이곳 신세동에 산지 50년이 넘은 경주이씨 이계향 할머니는 첫째 딸이 올해로 쉰하나, 돼지띠다. 그 밑으로 마흔 다섯 된 아들이 있는데 다들 타지에서 가정 잘 일구며 지내고, 할머니는 학원 하는 서른여덟 막내이랑 같이 살고 있단다.


“노인회관 들어서니 그나마 차가 이까지 오지 안 그럼 택도 없어.”


마침 공터에 들어서는 택배차량을 보며 할머니가 입을 뗀다. 집 여섯 채를 떼내고 마을회관을 지은지 4년이 됐다. 옛날엔 왕왕하던 동네도 이젠 노인네들만 남아있고 빈집도 많다고 한다.


“시내만 해도 빈집이 좀 많어? 여 아래도 봐, 집이 비니깐에 텃밭 가꾸는 이가 따로 있어.”


한눈에 봐도 오래 방치된 집 공터에는 원산폭격을 하는 파를 비롯해 푸릇하게 채소가 자라고 있었다.


“예전 되면 집이 어예 비노. 여 전문대생들이 시험만 쳐놓면 마구 방 얻으러 댕겼는데.... 요새는 기숙사가 잘 되있어서 그런동 자취도 잘 안하대.”


더러 자취생이 있어도 보증금 없이 열 달에 백만 원, 팔십만 원 정도에 방을 얻을 수 있다고. 대부분은 혼자 사는 노인네들이 그나마 있는 성진골의 자취생들이다. 공터 한 켠에는 빈 박스가 차곡히 묶여있었는데 이계향 할머니의 주전부리값을 벌어주는 효자다. 한동안 쌓아둔 뒤 고물상을 부르면 실어간다고 한다.


탱자나무 꺾어 넣은 드럼통을 물끄러미 보자니 솥단지를 걸어놓고 주로 뭘 즐기시는지 궁금했다.


“여 솥에는 꼼을 꽈. 보통 소대가리 사가지고 푹 꼬지. 나무는 여기 산에서 구하고 아니면 집 뜯고 남은 나무 갖고 하면 돼.”


친정 고향은 월곡, 시집 고향은 와룡인 할머니는 동네가 옛날 같진 않아도 불편한 것 없다고 하신다. 자식들 건사하고 살아온 세월이 이제 변두리의 골목길처럼 다소 잊혀진대도 그닥 억울할 것도 없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이왕지사 좋으면 좋다고


“할머니, 만약 여기 허물고 아파트라도 들어선다면 좋으시겠어요?” 여쭈니 밉지 않게 눈 한번 흘기시곤


“아, 좋지! 우리사 좋고 말고지. 개발이 안 되이 문제지 된다면야 좀 좋나.” 하신다.




골목대장이 없는 골목길

아파트촌이 아닌 주택가에는 젊은 부부가 살지 않는다. 자연, 골목대장은 없다. 더러는 똥도 밟고 더러는 느닷없이 퍼붓는 대얏물에 신발도 적시던 골목길 풍경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 주택가는 노인들만 사는 동네가 되어버렸다. 노인들은 마당이며 옥상, 이사 간 옆집의 공터에 텃밭을 일궈 파, 고추, 상추 등을 심어놓고는 잘 자라는 녀석들의 생명력에 감탄하곤 한다. 저절로 자란 것 같이 어느 날 훌쩍 큰 자식들처럼, 텃밭 채소는 노인들에게 생명력을 주는 유일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층간소음에 시달리는 자식들이야 알 턱이 없다.


성진골에서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본다. 쇼펜하우어란 철학자는 “일몰을 바라보는 것은 감옥에서나 궁궐에서나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후미진 골목에서 안동의 전경을 보노라니 어쩐지 차분하고 겸손해지는 것만 같다.


성진길을 내려와 화랑로를 거쳐 돌아오는 길, 골목 어느 집 대문에는 무슨 사연인지 ‘CCTV 작동 중이라는 엄중한 문구가 붙어있다. 문득, 언젠가 한 커피숍에 갔을 때의 화장실 경고문이 생각난다. 변기에 아무것도 넣지 말 것을 강력히 경고하는 문구였는데 “변기에 휴지를 포함, 이물질을 넣었을 경우 경보음이 울려 망신을 당하며 수리비 5만원을 청구할 것”이라는 경고문이었다. 그걸 보며 이런 걸 커피숍에서 발명하다니 세계특허라도 내셨나 하고 비웃었지만, 내심 이런 걸 개발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살짝 들기도 했다. 여하튼 그 경고문은 효과만점이었다. 이후 커피숍 아르바이트생은 변기를 뚫지 않아도 됐다고 한다.


CCTV가 있건 없건 골목 안 사람을 괴롭혔던 건 뭘까. 술 취한 이들이 배설을 해놓고 간다던가, 좀도둑이 들었던가, 엉뚱한 대문에 발길질을 했을 그 누군가에게 하는 경고였을 거라고 홀로 추측해본다.


인근에서 친구들 몇이 자취를 했던 기억도 난다. 주인집 마당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변을 볼 때마다 똥물이 튀어 올라 괴로워하던 친구는, 그 시절 네이버가 있었다면 지식검색으로 끝냈을 문제를 몇날며칠 고민하다가, 철지난 잡지를 뜯어 변기 아래로 몇 장 깔고 난 후 똥물이 튀지 않았다는 다소 지저분한 경험담을 들려주곤 했었다. 또 입대를 앞둔 선배가 친구의 자취방 창문에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다가 찬물 한바가지 덮어쓴 사연, 밤새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면 주인의 신경질적인 발길질이 벽을 타고 왔다며 다음날 자신도 소심한 발길질을 했다는 친구의 사연이 있는 골목길 일대를 추억에 잠겨 둘러본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자취하는 친구들에게 따순 밥 한 그릇 대접은커녕 갈 때마다 라면이나 축내곤 했었다. 그 시절 친구는 섭섭했을까.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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