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짧은 필리핀댁 울란 마라사(글/백소애_편집기자)
11년만에 만난 울란 마라사, 가족은 셋에서 넷으로
1998년 5월, 상큼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필리핀댁 울란 마라사는 11년이 지난 2009년 5월, 시원한 커트머리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안동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며, 강남초등학교 병설유치원과 상지유치원 영어수업 사이에 짬나는 시간이 있으니 그때 만나자고 했다. 그녀의 동선을 고려해 안동시내 새로운 쉼터가 된 문화공원에서 약속을 잡았다. 훤칠한 키에 깊은 눈매, 사진으로만 봤던 울란 마라사가 소형자동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제법 커리어우먼 테가 나보였다. 사무실에서 매번 1998년 당시의 표지사진을 봐서일까, 나는 그녀를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 착각을 하게 되었고 그녀의 스스럼없는 성격 덕에 하마터면 정말로 그렇게 믿을 뻔 했다. 항상 지나치기만 했지 이렇게 앉아서 쉬어가는 건 처음이라며 문화공원 주위를 천천히 훑던 그녀는 당시 취재를 했던 안상학 시인의 근황을 묻기도 했다. 서른한 살의 필리핀 새댁은 어느덧 마흔을 넘어섰다.
“와, 예전에는 힘이 펄펄 났는데 나이 사십 넘으니까 지금은 힘이 드네요.”
조금만 더 있으면 필리핀에서의 생활 기간과 한국생활에서 지낸 기간이 비슷해진다.
“내가 스물여섯에 왔어요. 맞나? 스물다섯? 여섯? 하이고 한국 나이는 이게 헷갈려. 하여튼 그때 왔으니 세월이 무섭네. 이래 확 늙어부네.”
밝은 성격만큼이나 하소연도 활기찬 그녀다. 6살난 아들 필원이가 벌써 고등학교 1학년, 그 밑으로 8살 난 늦둥이 딸래미 혜원이가 있다. 이목구비는 외탁을 하고 피부색은 친탁을 한 필원이처럼 혜원이도 남편 김현종씨를 많이 닮아 혼혈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외모란다. 피부만 보고도 다문화가정 아이라는 걸 금방 아는데 필원이와 혜원이는 그렇지 않다는 걸 다행스러워해야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당시 가톨릭상지대 유아교육과 다녔던 그녀는 이듬해 2월에 졸업해서 3월에 바로 취직이 되었다. 지금까지도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그녀는 현재 강남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상지어린이집, 상지유치원, 길주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 나가고 있다. 빠듯한 스케줄을 듣고 있노라니 그녀는 이젠 완전히 자리를 잡은 영락없는 안동사람이었다.
남편 현종씨는 필원이가 1학년 때인 2000년도에 가톨릭상지대 기숙사 관리 일을 그만두었다. 기숙사 밑에 있었던 산중턱 하얀 집에서 온 가족이 이사를 갔다. 와룡 이하에 집을 사서 들어가 지금은 염소와 개, 토종닭을 기르고 있다. 200마리의 개와 30마리의 염소를 키우자니 농장이 떠나갈 듯 시끄럽다. 염소는 풀어놓고 키우니 살 사람은 사고 아니면 말고 신경 안 쓰는데 개 키우는 건 매일 밥 주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현종씨 혼자서 그 일을 다 하니 몸살이 날만도 하다. 도와주고 싶어도 주중에 계속 일을 하니 바쁘기도 하고 사실 몸도 피곤해 미안하다는 마라사.
김치 없으면 밥 못먹는다던 필리핀댁
아직도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느냐 물으니 그녀는 당연한 걸 다 묻는다는 웃음을 짓는다. 옛날 취재진이 집을 방문했을 때 된장찌개를 끓여먹던 그녀는 여전히 청국장 좋아하는 토종 한국사람 입맛을 가졌다. 심지어 된장, 고추장 다 담고 배추김치며 열무김치, 김장도 직접 다 한단다.
93년도에 왔으니 결혼이주여성 1세대인 셈이다.엄마의 언어습득이 늦으면 아이들의 언어에도 영향을 미치니 자연 마라사의 노력이 컸다. 한국어, 영어, 필리핀어를 구사하는 마라사는 필리핀의 블라깐(道) 메까와야(市)에서 7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피아티대학교 사범대학에서 필리핀어를 전공했고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었다. 93년 5월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올린 올해 17년차 주부다.
필리핀은 5년 전에 다녀왔다. 돈이 많이 들어가서 자주는 못 간다. 교통경비야 비행기 왕복에 몇 십만 원이면 된다지만 식구들이 워낙 많다보니 선물값이 더 나간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만나는데 수건이라도 한 장 없으면 섭섭한데 그러다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에휴, 한번 다녀오면 일도 빠지게 되니 참 쉽지 않죠. 나중에 많이 벌어서 여유 되면 가든지 해야지 뭐.”
작년에 오빠가 한번 다녀갔었다. 친정어머니 연세가 여든일곱이라 기후도 다르고 무리가 있어 못 오고 그녀의 오빠는 석 달을 쉬다가 갔다.
“엄마랑은 자주 통화하는데 이젠 귀도 어두워요. 그리고 내가 필리핀말을 하다가 자꾸 한국말을 섞어서 하다 보니 헷갈려요. 옆에서 듣던 애기 아빠가 옆구리 찌르며 ‘한국말이잖아, 한국말!’ 그러면 버뜩 필리핀말로 돌아와요.”
훤칠한 그녀는 대학에 재학 중 미인대회에 나가서 입상한 이색 경력도 갖고 있다. 필리핀에서 대학 다닐 때 장난삼아 되나 안 되나 나갔는데 되더라며 웃는 그녀. 매사 말이 많고 낙천적인 성격의 울란 마라사는 되건 안 되건 일단 시작해보는 결단성도 갖고 있었다.
이주 여성들의 언니, 울란 마라사
울란 마라사는 예전에 이주여성들의 자발적인 모임을 주도해 활발히 활동했었다. 다음 카페 ‘이주여성자모임’운영자가 되어 가장 가까이에서 이주 여성들의 고민 상담자이자 언니가 되어주었다.
“결혼하고 처음에는 나도 애먹었으니까, 한국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될까 싶어서 모임을 가졌어요. 별다른 거 없고 그냥 한 달에 한번이라도 만나서 수다나 떨고 스트레스 풀라고 모였더니 와서는 도와달라고 우는 사람도 있었어요.”
처음에 그렇게 많이 모일줄 몰랐다고 한다. 한 10여명쯤 모일려나 생각하고 나갔는데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50명이 나왔다.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고 문제 있으면 같이 해결하려고 했고, 그런데 문제는 돈인 거에요. 한 달에 한번 만나 모임 가지면 회비도 모으고 해야 하는데 사실 쉽지 않았어요. 몇 만원도 아니고 몇 십만 원인데 맨날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도 그렇게.......한번은 우리 집에 모이라캐서 돼지 한 마리 잡아줬어요.”
어떤 후원자가 매월 50만원씩 지원도 해주었는데 불경기라 것도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은 종합사회복지관이나 여러 단체에서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을 체계적으로 가지고 있고 관리하고 있어서 자발적인 모임을 주도했던 마라사는 자연히 손을 뗀 상태다. 하지만 아직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서 상담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겐 여전히 열성을 다해 도와주는 그녀다. 한글 교육, 컴퓨터 교육 등의 체계적인 사회적응교육도 물론 필요하지만 뭣보다 심리상담 등의 안정적인 상담과 장기적인 관심이 더욱 절실하고 필요하다고 믿는 울란 마라사. 이제 안동에서도 다문화가정이 300가구를 넘어섰다. 그녀는 한창 모임을 가졌을 때혼자 오지 말고 가족들도 데리고 나오라고 독려했었다. 사는 게 힘이 들어 덜컥 남편이랑 애들을 놔두고 도망가는 사람도 많이 봤다.
“그런 경우는 보통 누구 혼자만의 잘못이 아녜요. 모임을 가지면 이주여성 남편들도 나한테 상담하고 그래요. 말도 잘 안 통하니 도와달라고요. 필리핀 사람들도 그렇고 같은 나라 사람들끼리만 만나면 말이 절대 안 늘어요. 서로 간에 노력을 많이 해야 돼요.”
한창 모임을 가졌을 때는 안 나오면 안된다고 일주일에 전에 전화를 일일이 했던 그녀였다. 이젠 주중엔 일을 하고 일요일엔 성당, 그나마 쉴 수 있는 토요일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통을 붙들고 이리저리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다. 주위의 이주여성 대부분 직업은 주부이거나 영어 강사, 공공근로하는 이들도 있고 농사 돕는 이들도 있다. 마라사 같은 경우는 솔직히 아주 잘 풀린 경우다.
유아교육과 나와서 유치원 하고 싶은 꿈이 있었던 그녀는 당시의 꿈을 기억하냐는 물음에
“그런가? 이젠 꿈마저 가물가물해요.” 한다.
당시 학교 다닐 때만해도 시험에 레포트에 많이 힘들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졸업도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 안동에 왔는걸 잘했다 싶으냐는 물음에 역시 마라사 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사람들은 원래 그러나봐요. 한국뿐만 아니고 어느 나라를 가도 무조건 하고 싶은 일 열심히 할뿐이죠. 다른 사람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다 할 수 있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또 어느 나라에서 왔어도 열심히 해야 돼요. 뭐든 그렇게 하면 안 될 것도 돼요.”
10년 후에도 여기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나는 경험도 많고 보는 것도 많고 문화도 더 많이 알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좋게 되게 해주고 싶어요. 어차피 결혼해서 여기 왔으니까 남편이건 누구건 잘살려고 하는 거잖아요. 또 스스로 여기 결혼해서 왔으니까 열심히 배우고 알아가야 해요. 지금 당장 생각하지 말고 10년 후에도 20년 후에도 내가 여기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생각해야 돼요. 남편에게 불만 있어도 일단 열심히 최선 다하는 건 보이잖아요. 본인이 노력 많이 해야 돼요. 그러면 남편도 노력해요.”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언니 도와달라, 언니 만나자.”하는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예전에 한 번은 옹천 새댁이 전화가 왔는데 농촌남자들이 그렇잖아요. 입도 짧고 안 나서고 부끄러운 것도 많고.......글세 매월마다 나오는 양육비를 못 받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말이 잘 안 통하니 내가 나서서 얘기해줬죠. 그래서 지금은 18만원씩 받고 있어요. 어린이집에도 무료로 보내고. 남편들은 옆에서 그런 것 좀 잘 챙겨주지.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데 남편이 왜 못해. 남편들도 마누라 위해서 좀 나서서 해줬으면 좋겠어.”
울란 마라사의 안동남자 타박이 잠깐 이어졌다. 얼마 전에는 장애가 있는 남편을 둔 새댁에게서 전화가 와서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국적취득과 관련해서 변호사한테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해주기도 했다. 또 어머니가 베트남에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해서 이리저리 도움을 받아 50만원 부쳐서 줬다. 다행히 그 어머니가 수술이 잘 되서 퇴원했다고 한다.
“그 50만원이 그런 사정 알게 된 이들이 도와줘서 가능하지 나 혼자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 그래놓이 만날 때마다 날 안아줘요, 고맙다고.”.
걸한 웃음소리. 안동 아줌마 울란 마라사의 정과 열정을 누가 따라갈까. 이번 주 토요일의 일과를 물으니 역시나 약속이 잡혀있단다.
“송천에 있는 베트남 사람 만나러 가요. 내일 만나자고 전화가 와서. 무슨 일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니, 언니하면서 전화가 오면 달려가는 마라사씨에게 가끔은 나이가 더 많은 필리핀댁들도 ‘언니, 언니’ 부른다면서 웃는다.
이젠 안동 아줌마 울란 마라사
그녀의 꿈은 영어 학원을 갖는 거다. 기존의 영어수업방식이 못마땅한 그녀다. ‘공부’에 집중하는 것보다 ‘놀이’로 배우는 영어를 가르쳐서 어렵다는 생각을 버리고 쉽게 다가가는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영어수업만 기다린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아,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게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녀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하나. 원래 그녀의 이름은 ‘우리안 마리사’다. 그런데 결혼 후 서류를 만들고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담당자의 실수로, 또 한국식으로 이름을 줄이다보니 최종적으로 ‘울란 마라사’가 되었다.
전에는 걸어 다니며 수업시간 맞추고 무거운 가방 들고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지금은 능숙하게 운전도 잘한다. 3년 전에 면허를 땄는데 필기시험을 3번 만에 붙었다.
“억지로 짬을 내서 시험을 쳤는데 첫 번째 시험에 떨어지니 힘이 빠지더라구요. 그래서 지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해서 3번 만에 붙었지. 근데 영어로 된 필기시험이 있다고 하더라고. 하이구 난 그걸 나중에야 알았네. 세 번째 안 되면 다음에는 영어로 할려고 했었는데 붙더라구요.”
이하에 집을 마련한 이후로 마라사의 차는 마라사에게도 아이들에게 편한 이동수단이 되었다. 큰 욕심 없이 아이들은 아프지 말고 잘 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 마라사. 고생 많은 남편에겐 미안함도 많다고 한다.
문화공원 정자에 앉아 그녀와 얘기를 나누자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하루가 짧은 그녀에게서 받은 에너지가 오후의 나른함을 떨치게 한다.필리핀사람다운 여유와 한국사람다운 부지런함을 두루 갖춘 그녀지만 지금의 생활은 후자쪽에 좀더 무게가 있지 싶다. 가끔은 쉬엄쉬엄, 이렇게 공원에 앉아 수다도 떨고 쉬어가는 여유도 부리는 그녀가 되었으면 한다. 울란 마라사의 앞으로의 10년이 더욱 기대된다. 그녀는 또 어떤 도전을 하고 또 어떤 멋진 아줌마가 되어 있을까?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