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 내딛는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글/이희수_프리랜서 작가)
지난 5월 17일은 권정생 선생의 기일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벌써 두 해가 지난 것이다. 선생의 지인들이 들으면 놀랄 일이겠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는 권정생이라는 작가를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들도 어린 시절 읽고 자랐던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의 저자라고 하면 그제야 무릎을 탁 친다.
작가는 작가로서의 이름보다 저자로서 책 이름으로 알려지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권정생 선생은 조금 다르다. 그는 책만 쓴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전의 그를 보고 실천주의자라 불렀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책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권정생이라는 작가를 논할 때 저서가 아닌 삶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많은 재산이 있었지만 5평짜리 단칸방에서 삶을 의지했고 전신결핵으로 고통스러웠지만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고 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아이들을 걱정했다.
선생의 장례식 때 전국에서 몰려든 추모객들을 보고 이웃에 살던 주민이 ‘이 집에 살던 어른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냐’ 고 물었다는 얘기도 있으니 그만큼 선생의 조용하고 소박했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올해 3월 (재)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 발족
올해도 어김없이 선생의 생가에서 ‘권정생 선생 귀천 2주기 추모의 정’ 이 열렸다. 150여명의 추모객이 그가 없는 빈자리를 찾아 생전의 모습을 추억하고 돌아갔다.
무언가 한 마디로 권정생이라는 작가를 표현해내기엔 부족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그를 몰랐던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알고 나서 ‘권정생’을 찾기 위해 흔적이나마 있는 안동을 찾는다.
그리고 그 흔적 뒤에는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지난 3월 발족된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이다. 선생의 유지를 따라 어린이를 위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재단이 세워졌다. 10억 원 정도의 유산과 인세를 관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다. 선생에 대한 모든 것은 남은 사람들에게 숙제였다. 남겨진 유산부터 쓰던 빨래집게 하나까지, 선생의 생가를 허물자는 의견에서 지켜야 한다는 반대까지 분분한 논쟁 속에서 속앓이를 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재단의 이사진이다.
심성이 착한 사람인 최완택 민들레교회 목사, 잔소리가 심하지만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한 정호경 신부,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 박연철 변호사, 이렇게 세 사람이 선생의 유언장에서 유산을 관리해줄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재단 설립 얘기가 확정시 되면서 정호경 신부는 건강상의 이유로 빠지고 대신 강정규 아동문학가와 이현주 목사 그리고 최윤환씨가 합류하여 5명의 이사진이 꾸려졌고 현재 최완택 목사가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재단의 투명한 운영을 위해 안동종합사회복지관의 최승근 신부와 안길성 회계사는 감사를 맡았다.
소외계층 어린이와 북녘 어린이를 위한 사업 진행
소수의 이사진이지만 가족처럼 소통하는 가운데서 일을 진행하기 위해 사무실은 선생의 생가가 있는 안동에 자리를 잡았다. 현재 안동에 살고 있는 안상학 사무처장과 최윤환 상임이사는 때문에 늘 할 일에 파묻혀 지낸다. 실무에 해당하는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사무실에 합류한 간사 배정욱 씨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선생의 유산과 인세로 사업을 추진하기 때문에 실무 잡비는 거의 자비로 해결한다는 최윤환 상임이사의 말에서 고인의 뜻을 기리는 일에 대한 남모르는 애환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을 위해 인세를 써달라는 선생의 유언에 따라 10억여 원의 유산과 앞으로 나올 모든 인세는 재단기금이 돼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돕는 사업에 쓰이게 된다.
추모 1주기를 맞던 지난해에는 안동에 있는 15군데의 농촌아동센터와 공부방 등 소외계층 어린이들을 위해 도서를 지원했다. 선생의 저서 40권과 출판사 선정 우수도서를 포함해 한 곳에 100권당 지원하여 1500권의 도서가 농촌지역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셈이다.
이사진의 올 상반기 사업에서 가장 큰 계획 중 하나는 아마도 북녘의 사과나무 심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선생의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북한의 아이들에게도 미친다. 다름 아닌 평양 어린이 사과농장 사업에 동참하는 것인데, 앞으로 3년간에 걸쳐 2000만원 씩 지원하기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재단 지원금과는 별도로 재단 사업을 통한 모금역시 사업에 보태기로 했다.
사과농장이 조성될 곳은 평양시 력포구역 능금동. 올해는 1만주의 사과 묘목을 10㏊의 땅에 심는다. 남쪽에서 사과 묘목, 농기구, 재배 기술을 전수하고, 북쪽에서는 땅과 노동력을 내놓는 일이 앞으로 3년 동안 지속된다. 그리고 그 3년 동안 선생의 유산이 차곡차곡 사과 나무의 밑거름으로 쌓이게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재단은 현재 많은 어린이 사업을 구상중이다. 벌써 300가구를 넘어서고 있는 지역의 다문화가정을 위한 교육사업과 국내를 벗어나 국외의 분쟁지역 빈곤지역을 위한 대외적 사업도 계획되어 있다.
폐교된 일직남부초에 강아지똥 동화나라 세우고파
선생의 유산과 인세만으로 지속하기보다 수익 창출 사업을 통해 재단의 자구력을 갖추자는 이사진의 포부는 가칭 ‘강아지똥 동화나라’ 라는 이름으로 키워져가고 있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진행되어오고 있는 한티재 문학기행 역시 선생의 유산이 아닌 참가자의 참가비를 받아 진행되는 수익사업이다. 강아지똥 동화나라는 어린이를 위한 캠프장으로 새롭게 태어나겠지만 그 성격은 한티재 문학기행과 약간 다르다.
강아지똥 동화나라는 선생의 유품 전시장과 어린이를 위한 공연장, 캠프장, 야생화단지, 들꽃 교육장 등 다양한 어린이 생태 학습장이 조성되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무료로 개방될 예정이다. 한 가지 먼저 준비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얼마 전 폐교된 안동의 일직남부초등학교가 바로 캠프장이 들어설 곳으로 교육청에서 불하받는 일을 남겨두고 있다.
이 숙제만 잘 해결된다면 강아지똥 동화나라는 배고픔과 가난함에 기울지 않고 어린이들이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아이들의 꿈의 동산이 되는 것이다.
기척 없이 생가에 들러 선생을 만나고 간다
선생의 생가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잇고 있다. 겨우 몸 하나 뻗으면 꽉 차는 방이지만 그 곳에서는 선생의 많은 글들이 창작되었다. 때문에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생가는 그의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평생을 안고 살아야 했던 전신결핵은 그를 단 다섯평짜리 우거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낮고 오래된 책상에 앉아 고통스럽게 글쓰기를 했다.
비단 전국의 독자와 그를 알았던 지인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에게 권정생 선생의 생가는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보수를 마치고 말끔하게 단장된 집은 여전히 선생이 앉아 글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사실 현재 생가의 모습은 선생이 살아계실 때보다 더 말끔한 상태이다. 건축사가 마당의 나무 하나에서 집의 서까래 하나까지 20여장이 넘는 도면에 생가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보수를 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집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 보수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재단에서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현재, 권정생 생가를 방문할 수 있는 특권(?)이 만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살아계실 적에 고통스러운 모습을 감추려고 손님보기를 저어했던 선생의 집에 지금은 문지방이 닳도록 이곳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선생을 가슴속에 안고 돌아간다. 이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경험이 될 만한 일이다.
안동시 명륜동에 위치한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 사무실에 가면 자그마하게 선생의 유품 전시실이 있다. 사무실을 방문한 날 문을 열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최윤환 상임이사였다. 바쁜 와중에도 운이 좋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권정생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했던 그였기에 선생과의 인연은 더 질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이렇게 상임이사 자리에 앉아 선생의 유품을 관리하고 사업을 도모하는 것이 제 자리가 아닌 듯 하다는 그의 노파심에서 재단을 꾸리기 위해 고생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최윤환 이사는 조금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안동시 공무원 노조위원장 출신이다. 현재는 재단의 상임이사직에 충실하고 있어 매일 아침 사무실로 출근해 안상학 사무처장과 함께 실무를 나눠 본다.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보수의 많고 적음이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보람을 넘어설 수는 없다’ 는 것이 재단을 꾸려가는 그의 마음가짐이다.
그가 이사직을 맡게 된 데는 곡절이 있다. 선생을 마지막으로 병원으로 모셔가 임종을 지켰기에 장례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정호경 신부가 건강이 좋지 않아 유품정리위원회에서 빠지게 되면서 최윤환 이사가 추천되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함께 치렀기에 이사진들의 설득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물론 감투를 쓰게 되면 고초는 따른다. 하지만 그는 재단을 세우기까지 있었던 많은 성과에 대해 함께했던 주변분들에게 그 공을 돌린다. 특히 장례 후 담당했던 유품 정리를 하던 때를 떠올렸다. 안동주부문학회의 김명자 시인이 지금 사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 2층을 흔쾌히 무료로 내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탈 없이 꼼꼼하게 유품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드러나지 않게 도움을 줬던 동화읽기모임 ‘물아낙’도 기억해 냈다.
발족하고 이제 사업의 초석을 다지고 있지만 그 자리가 꽤 단단해 보인다. 5명의 이사진은 물론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자처하는, 선생을 기리는 따뜻한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물질적인 도움을 떠나서 모든 어린이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하고 싶다는 이사진의 바람처럼 닻을 높이 올리고 권정생 어린이 문화 재단이 순항하기를 바란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