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내용

꽃 빛 속으로 딱따구리 소리가 찾아드는 마을, 쇠실(글/이동백_시인)

봉화군 재산면 쇠실 마을 가는 길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선 한 없이 넓어지다가 사람이 드물게 사는 마을에서는 한 줄기 가느다란 선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길이다. 그래서 길은 휴머니즘이다. 아니, 길은 영원으로 드는 현자(賢者)이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에베레스트이든, 범람하는 아마존이든 길은 묵묵히 그 산을 넘고, 그 강을 건너기 때문이다. 나는 길을 좋아해서 그 길 위를 헤매기를 자주 소망한다. 오늘도 길을 가기 위해 들메끈을 조이고 나선다.

쇠실 마을로 가는 길섶의 작은 마을에, 장에 갔다 돌아오는 어머니를 마중 나와 선 아이들처럼 회나무 몇 그루가 섰다. 회나무 노란 꽃이 떨어진 길이, 길손에게 다정스럽게 손을 내밀 것만 같다. 엉덩이를 달싹이며 차의 꽁무니에 따라붙는 꽃들이 앙증맞다.

자연이 인간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무심스럽지만 자못 경이롭다.

“저 계절의 변화를 좀 봐. 기가 막히지?”

“제 눈엔 그 변화가 감지되지 않습니다만…….”

“자네 눈은 뚝눈일세 그려.”

“…….”

“저 밤송이하고 신문지에 싸인 수박을 보게나, 바로 두 달여 전에 우리가 맡은 밤꽃 냄새 기억나지 않는가? 그 때 비닐하우스에서 어린 순을 내밀던 수박이 아니었나? 언제 봐도 자연은 경이로워.”

방장이 자연의 ‘경이(驚異)’를 무심스레 이야기할 때, 나는 방장의 혜안(慧眼)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차는 벌써 쇠실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다다르고 있었다. 17년 전에 굽이굽이 흔들리며 밟아온 비포장 길을, 오늘은 포장이 잘 되어서 구경할 것 다하고, 이야기할 것 다해가며 편안하게 왔다.

차에서 내려 사진 몇 장을 찍고 있는데, 고개를 넘어온 버스가 노파 하나를 태우고는 이내 모롱이를 스르륵 돌아 나간다. 오전 열한 시에 이 길을 지나가는 버스는 오후 네 시에 이곳을 돌아 나간다.

쇠실에 부는 씁쓸한 변화의 바람

쇠실로 들어가는 길도 말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한 2Km를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자 산발치를 따라 꽤 너른 개활지가 펼쳐진다.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쇠실 마을이다.

마을 들머리의 바위 위에 웬 노인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았는데, 느닷없이 찾아든 길손을 반기는 기미가 역력해 보였다. 희미한 미소로 길손을 맞는 그에게 17년 전, 이 마을에서 만났던 안분희 할머니와 정구일 씨의 안부를 불으니,

“그이들은 다 고인이 되었어.”

돌아오는 대답이 무척 쓸쓸했다.

“그 때 쇠실은 아홉 집이 디딜방아 찧어가며 살던 마을이었지요, 아마?”

“그 땐 그랬을 걸. 한때는 셋 집으로 줄었다가 지금은 일여덟 집은 되게 살지.”

수양삼아 삼십여 년 전에 이곳에 들어와 붙박이가 된 전금록(74) 할아버지가 마을의 내력을 간략히 전해준다.

“옛날엔 이 마을에 대추나무와 호두나무가 많더라구요.”

“아직 호두나무는 더러 있지만 대추나무는 많이 없어졌다오. 한창 때, 집집이 대추를 따서 외지 사람들에게 팔았지. 특히 전라도 사람들이 와서 많이 사 갔지 왜.”

노인과 이야기를 대충 끝낼 무렵에 그랜저 한 대가 노인 곁에 와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건장한 사내 둘이 전 노인에게 마을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매물(賣物)을 탐색하고 나섰다. 이 두메산골에 그랜저가 와서 땅을 다 찾다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곳에 왜 투자하시려고요?”

단도직입으로 묻고 나서는 나에게 사나이 하나가 나서면서

“투자라니요?”

하고 반문을 한다. 마을이 운치가 있고, 사위가 산으로 둘러싸여서 포근한 게 그저 좋은 곳이란다. 그러면서 건강관리 차원에서 이곳에 들어와 살려고 땅을 물색하는 중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그는 말했다. 그들의 행색으로 보아 이런 곳에 들어와 살 위인은 아닌 것 같아서 좀 뜨악한 기분이 들었다. 봉화군에서 수목원을 만든다더니, 혹시 쇠실이 그 예정지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들에게 발설은 하지 않았다.

내 갈 곳은 산뿐이래도 꿀릴 거 하나 없네

마을은 비스듬한 개활지를 이루었으나, 사위를 에워싼 산 속에 들어앉아 있는 형국이다.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실개천이 마을을 둘로 가른다. 집들도 실개천을 두고 나뉘어져, 몇 채는 개천에 바투 붙어 있고, 또 몇 채는 서편 산기슭에 달라붙어 있다. 그러고 보니, 쇠실은 산촌(山村)의 산촌(散村)이다. 17년 전에 모를 던져 모내기를 하던 논들은 이제 거의 밭으로 바뀌었다. 밭에는 사과나무가 심기고 고추가 자라고 있다. 파란 호두열매를 단 호두나무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전 할아버지가 가리키는 김영기(80) 할아버지 댁을 시멘트로 포장된 길을 걷고 개천을 건너 찾아가니, 할아버지가 봉당에 나와 길손을 맞아주는데, 그 품새에 얼음설음이 없다. 체구 자그마한 사람이 여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젊고 건강했다.

이따금씩 길손의 얼굴께로 길게 늘인 목을 들이밀고 풀어나가는 그의 말에는 더운 김이 서리었고 거침이 없었다.

“마을길이 훤히 뚫리고 깨끗이 포장되어 있네요?”

“아무렴, 우리 마을 출신, 춘양 파출소장 하는 사람이 힘을 써서 낸 길이야. 나도 이 마을에 보탠 게 있네. 저 아래 승강장 짓고, 마을 도랑 정비는 내 힘으로 된 것이여.”

자신의 업적과 말솜씨에 감탄이라도 하듯이 할아버지는 손바닥으로 길손의 무릎을 마구 친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야기에 신명이 나 있을 적에 오십 대 후반의 그의 아들이 길 떠날 차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아들의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할아버지는 ‘내 자식과 새 할마이 자식들이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염주 마을에는 사람이 삽니까?”

“안살아. 정감록을 믿고 염주에 들어와 살던 정구일, 그 사람이 기차에 떨어져 병원에 갔다가 중풍이 들어 죽은 후에는 마을이 비었지 뭐.”

적적해도 갈 데가 어데 있니껴?

할아버지 댁을 나와, 마을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은 것은 실개천 빨래터에서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빨래를 하는 정춘강(64) 아주머니가 적적해 보였다

“외로우시겠네요?”

“적적해도 내가 갈 데가 어데 있니껴?”

“댁은요?”

그는 손으로 전금록 할아버지 댁을 가리킨다. 그와는 부부 간인 모양이었다.

다시 전금록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대뜸 김영기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더냐고 물어왔다. 대답 대신에 벌 농사가 어떠냐니까,

“별 신통치 않아. 호두 농사도 그렇고. 내 농사는 그저 그래. 그냥 농사라고 흉내만 내다보이 그래 되네.”

그의 집 뒤에 안분희 할머니가 살던 집이 빈 채로 서 있다. 사람의 냄새가 아직은 느껴지는 집이었다. 예수님 얼굴을 담은 액자 하나가 말끔한 모습으로 바람벽에 기대고 선 모습이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아마 안 할머니의 후손들이 들락거리며, 아직은 사는 듯했다. 뜨락에는 여름 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노루오줌, 참나리, 황매화, 달개비, 깨꽃들이 분홍으로, 주황으로, 노랑으로, 짙은 쪽빛으로, 흰 빛으로 피었다. 꽃을 바라보며 내 눈의 깊이를 재고 있는 찰나, ‘딱딱 딱따그르’, 호두나무 마른 가지에서 날아온 딱따구리의 부리 소리가 꽃 속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호두 철에 다시 찾으리란 약속을 전 할아버지에게 남겨 놓고 우리는 마을을 빠져 나왔다. 점심나절, 검은 포도(鋪道)를 달리는 차창 너머로 ‘딱딱 딱따그르’, 맑은 소리가 세상에 찌든 귀를 씻어준다.

산 넘어 먼 산을 바라보는데, 이유도 없이 슬퍼진다. 아득하면 슬퍼지는가.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