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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치장이 필요 없는 사람 이지양(글/천남희_경기도 하남 사는 안동사람, 주부)

연세대 국학연구원 이지양 교수
한번 만났음에도 맘속 깊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과의 만남을 생각하면 맘이 저절로 따스해져 오고 왠지 모를 기운이 솟아오르며 입 꼬리가 어느새 위로 향하게 된다. 안동지에 소개할 고향이 안동인 분들을 만나고 난 후 한동안은 항상 그런 행복감에 젖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안동사람은 그 행복감이 좀 오래 갈 것 같다, 아니 언제고 그를 생각하면 맘이 따습고 든든함으로 행복감에 젖을 것 같다. 학문을 향한 열정 하나로 서두르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으며 선비정신을 오롯이 이어 학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맑은 정신의 소유자, 이지양 씨를 만난 것이다. 그가 안동사람임이 정말이지 자랑스럽다.

이지양(46세). 현재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며 한국종합예술학교 강사로 「홀로 앉아 금을 타고」 (2007) 와 「나 자신으로 살아갈 길을 찾다」 (2009)의 저자 -사랑방에서 내게 알려준 내용-이다. 전화를 받고 국학연구원의 교수라는 사실에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대학 졸업한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내 졸업논문의 제목조차도 기억에 가물가물한데 같은 계열인 국문학을 전공한 교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아마 교수님이라 예와 격식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하는 부담감도 더해져서 그랬던 것 같다. 사랑방에서 취재원에 대한 내용을 받고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을 미적미적 거린 것도 그런 부담감 때문이었다.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날 그 부담감을 짐작했는지 그가 먼저 내게 문자를 보내 왔다.

-불편하게 예의 갖추지 말고 도착하는 대로 전화주세요. 점심 같이 먹어도 좋고요. 오늘 편합니다.^^- 문자를 받고 바로 그가 사는 강남구 청담동으로 출발했다.

중요한건 머릿속에, 몸에 보물을 지니지 않는다
그의 아파트 거실에서 마주 앉았다. 그도 나도 에어컨이나 선풍기 바람을 싫어해 우리는 자연바람과 함께 한여름의 더위를 고스란히 즐기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 먼저 말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가 주로 책보고 연구하고 글 쓰고 그리고 잠도 자는 곳, 그곳은 그가 혼자 생활하는 공간이라서 그럴까. 단순하면서도 정갈했다. 그의 살림집에 있는 가전제품이라고는 냉장고와 컴퓨터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에어컨이 전부였다. 그리고 작은 방에 있는 이불 두 채. 거실을 제외한 그 외의 공간은 모두 미닫이 이중 책장을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베란다에도 책장을 짜서 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아파트 마당을 꽉 채우고 있던 각종 외제차들과 그의 방에 있는 고서들과 여러 인문학 책들, 한지 공예로 선과 색을 살린 단아한 찻상에 스타벅스 병 커피를 사이에 두고 앉은 안동사람 그와 나.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아파트에 예와 선비의 고장 안동을 고향으로 둔 그의 삶의 현장이다.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님께 귀에 딱지 앉도록 들은 얘기가 뭐냐 하면 사람 못난 게 꼭 집치장하고 몸치장 하고 그런다고. 겉보기에 치장만 한다는 거지요. 그럼 인간이 된 사람은 뭔 치장을 하느냐? 자기 정신치장을 한대요. 삶을 바로 세우고 의식을 똑바로 세우고 그런 치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늘 듣고 자랐지요. 어릴 때 들었을 때에는 에이 우리 집이 못살고 별것도 없으니까 괜히 여우 신포도 같은 얘기지 뭐가 그렇겠냐고 했는데, 도시 생활을 하면서 사회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고 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보니까 확실히 느껴요. 어 그때 하시던 그 말씀이 맞네. 사람이 그냥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자연스럽게 늙고 그래도 삶이 멋있고 인간 됨됨이가 멋있으면 훨씬 돋보이거든요. 얼굴 탱탱하고 고운 한복을 날아갈듯 입은 할머니 보다 주름살이 자연스럽고 푸근한 인상을 가진 시골 할머니가 더 믿음이 가고 좋은걸요. 그 말씀 따라 살려고 노력하죠. 또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말씀이 있어요. 몸에 뭔가 붙여 가지고 다니는 보물을 지니지 말라고 하시대요. 중요한 게 있으면 자기 몸속 머릿속에 넣어서 숨이 붙어 있으면 간직돼 있고 숨이 끊어지면 그냥 사라지는 그런 걸로 가치를 삼지, 뭔가 지니고 모으는 걸로 하지 말라고요. 그래 봤자 물질 지키는 파수꾼이나 창고지기밖에 안된다고요. 그래서 뭔가 재물 긁어모아 지키고 돈 긁어모아 지키는데 인생을 걸지 말라고 그런 말씀도 하시대요. 그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요. 또 그게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사실 살아가는데 자기가 해야 될 일과 관련된 최소한의 것들만 있으면 되는 것 같아요. 뭔가 물건과 물질에 신경을 쓴다는 게 싫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해요. 저는 집에서 책을 들어내고 나면 아무것도 안 남아요. 리어카 한 대에 실을 짐도 안 남을걸요. 그래도 필요 한건 다 있어요.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짐 나르던 아저씨가 책 때문에 힘이 드니까 그러대요. 책방하다 망했냐고. 그래서 헌 책방하다 망했다고 했더니 책을 처분해 버리지 왜 싸들고 다니냐고 되물으시데요. 억울해서 정리 못했다고 말씀드리고 말았죠.”

신안동에서 유년을 보낸 퇴계선생 16대손
그는 안동시 신안동에서 자랐다. 고향 떠나온 후 누가 물어보기 전에는 절대로 고향이며 선친에 대해 얘기를 안 한다는 그는 퇴계선생의 16대손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사업을 하다가 잘못된 후 귀향해서 자리 잡은 곳이 신안동이다. 도산에 작은 집이랑 농사지을 땅이 있었지만 6남매 공부를 위해 안동시내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안동으로 내려간 게 네 살에서 다섯 살 무렵인데 동네 아이들이 ‘서울내기 다마 내기 맛좋은 고래 고기’ 하면서 짓궂게 놀리고 다릿거리에서 길을 막으며 텃세를 부렸다. 그래서 밖에 나갈라치면 대문 틈새로 동네 애들이 있나 없나 살피고 나가거나 나갔다가도 다리에서 막고 서있는 아이들에게 밀려들어오곤 했다. 동내 아이들이 무서웠던 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였다.

“학교 들어가서 1학년 때 부반장도 하고 시험 몇 번 보니까 평정이 되더라구요. 그때 공부야 단순히 아이큐로 하는 거지 노력이고 뭐고 없었으니까. 그냥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 몇 개만 잘 외우면 되더라구요. 내가 뭐든지 잘 외우거든요. 그땐 뭔가 다른 애들보다 두어 개 더 맞추면 특혜가 쏟아지고 하니까. 학기 초에 처음 받았던 책이 제 가방에 모두 다 들어가 있었어요. 책가방을 따로 챙기지 않고 매일 그냥 가지고 다니며 시험지라든가 종이 등을 그대로 구겨 넣고 다니다가 지저분한 게 많이 쌓이면 책만 꺼내고 쓰레기통에 가방을 툭툭 털어 내곤 했어요. 그래서 가방이 늘 무거웠는데 시험 몇 번 보고 나서는 동네 애들이 당번이 되어 내 가방을 들어주더라구요. 쬐끄만 자기 애가 가방2개씩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부모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생각해보면 많이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렇게 중학교까지 올라갔어요. 엄마가 43세에 낳으셨는데다가 막내라서 위에 오빠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공부에 관한 정보를 별로 얻지를 못했어요. 학교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좋아하던 내가 조용하고 얌전한 반장 대신 어느 모임에 갔는데 아이들이 문제지 얘기랑 사회시간에 배운 내용들을 외우고 있길래 그걸 왜 외우냐고 물어 봤죠. 그랬더니 시험에 나올 거라고 넌 안 배웠냐며 되묻더라구요. 전 그때 처음 알았어요. 배운 거는 외워야 되는구나를. 수업시간 외에도 공부를 해야 된다는 사실을 ”

그래서 처음 공부라는 걸 하고 시험을 치렀다. 사회시험 끝난 후 화장실에서 많이 틀렸다고 우는 친구들보고 ‘난 한 70점 맞았는데’ 하며 속으로 의기양양해 하기도 했었단다. 나중에 전 과목에서 서너 개 틀렸었다고 말하는 그들의 배신감에 정말 울 뻔했다며 박장대소를 한다. 중앙초등학교와 안동여중, 길원여고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그의 어린 시절의 얘기다. 살다 보면 우연찮은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이 생길 때가 있다. 그에게 그때의 깨달음이 삶에 좋은 자양분이 되었나 보다. 아이큐가 곧 실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말이다.

나 자신으로 살아갈 길을 찾다
지난 봄 그가 책을 한권 냈다. 「나 자신으로 살아갈 길을 찾다」 로 조선 여성 예인의 삶과 자취라는 부제를 붙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예인들 12명의 삶을 재조명 해놓은 책이다. 노래, 춤 ,악기연주, 우스개, 재담, 시 등에 두루 예술적 재능을 가진 기녀들의 삶을 연구자의 시각으로 접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그들을 기생이라도 부르며 그들의 재능이나 예술적인 능력을 폄하하고 그들이 처한 삶의 환경적 굴레에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낮고 험하고 천한 자리에서 자기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성공한 예인으로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조선시대의 역사기록이나 여러 고전문학 속에 나와 있는 산발적인 자료들을 한권에 모아 정리해 놓아서 여성 예인들의 활동상에 대한 맥락을 더듬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자의 힘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 계획하여 쓰고 싶은 교양서도 여성의 힘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몇 년째 생각하면서 준비하는 단행본이 있는데 여성의 힘에 관한 거예요. 만약에 여성이 없으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류가 끝장났을 겁니다. 인류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여성의 인고의 세월과 맞붙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일까, 그는 부친에 관한 얘기를 더 많이 하면서도 정신적 지주는 그의 어머니라고 했다. 봉화 닭실마을에서 안동으로 시집온 그의 어머니를 그는 한평생 정한수 떠 놓고 기도하며 사는 삶에 비유했다. 가난에 대해서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시댁식구들 사이에서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너어 집은 별나, 아는 게 많아 골치 아파’ 라고 말할 뿐 절대 남 탓을 하거나 남의 나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부지런하고 상냥한 분이었다고, 여자가 손으로 해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신념하나로 힘든 세월 보내신 낙천적인 분이었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무슨 일이 있던지 엄마 생각을 2~3분만 하고 나면 심각한 것도 없고 기죽는 것도 없고 어두침침한 것도 없어진다고 한다.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어릴 때 엄마가 잠을 자면 죽은 줄 알고 울고 늙을 까봐 애면글면하던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그에게 제일 큰 유산이 되어버린 것이다. 막내와 늦둥이와의 사이 그는 그것을 4차원의 세계라 말한다. 얼마 전 몸이 좀 아팠는데 혼자 생각에 ‘우리엄마가 어떤 엄마인데 진짜 잘 낳아 주셨을 건데. 정결한 분이 불량품을 낳아 줬겠냐?’ 하고 생각하니 그 다음날 정말 씻은 듯이 나았단다. 이제 어머니를 향한 그의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된 셈이다. 생전에 어머니께서는 늘 그의 선머슴아 같은 모습을 아쉬워 하셨단다. 허리가 잘록한 치마에 예쁜 블라우스 입고 귀걸이 목걸이 하고 뾰족구두 신은 모습을 보시기를 원하셨지만 거추장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에 늘 같은 차림 같은 모습만 보여드린 것이 가끔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신발장을 보니 무채색의 낮은 단화와 운동화만이 놓여 있었다. 외제차가 즐비한 그곳에서 유일하게 차 없이 뚜벅이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는 그런 편한 신발이 더 필요했나 보다.

자존심으로 자존심을 감추는 안동사람의 성정
고향 떠난 이후 공부에 매진하다 보니 안동 사람과의 만남이 거의 없다고는 말하지만 그 역시 안동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식지 않은 것 같았다.
“안동이 진짜 독특한 곳이에요. 그런데 나는 안동이 편하지가 않아요. 전통의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것이 그게 불편해요. 안동이 가지고 있었던 유교문화 같은 것이 그 당대에 최첨단이었다고요. 당대 학문의 중심지야 말할 것도 없고. 그 당시 안동사람들의 의식이 굉장히 혁신적이었거든요. 역사의 고비 고비 마다 안동사람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들이 고루하거나 시골의 모습이 아니라 핵심을 파고드는 최첨단의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 주었어요. 그래서 안동이 되고 퇴계가 된 거예요. 군더더기들을 쫙쫙 잘라버리는 거 그런 게 정신력인데 옛날에는 안동이 조용하지만 생물의 발원지 같은 새로운 기원을 열었던 곳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안동은 이 시대의 그만큼 중심지인가 그만큼 혁신적인가 생각해 보게 돼요. 지금은 그저 전통이라는 것을 한 가닥 붙들고 이 시대의 변두리에 붙어 있는 소도시로 전락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지금 시대에 혁신적인 기수로 치고 나가려면 치렁치렁한 느낌을 싹 떨쳐버리고 방향을 좀 더 선명하게 가다듬었으면 해요. 안동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향들이 참 많아요. 저도 그 점을 참 좋아하는데 무뚝뚝하면서도 정직해요. 거짓말로 둘러대느니 차라리 안하고 만다. 아 두말 세말 하느니 입 다물고 내가 하고 만다 그러잖아요. 어디 나가서 내가 잘났다 나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를 함부로 허수히 처신하지도 않는 것, 그게 자존심인데 안동사람들은 그 자존심이 창자 안에 있어요. 그래서 그 자존심을 안 드러내는 자존심 그런 게 있어요. 그런 독특한 점들이 하루아침에 길러진 게 아니라 안동사람의 역사성이랄까 품위 같은 것인데 좀 더 힘 있게 새로워질 수 없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이 시대의 물결에 빨리 휩쓸리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 안도감을 가져요. 너럭바위가 웬만한 황토 물에도 꿈쩍도 안하네! 이런 굼뜬 느낌이 미덥고 좋다가도 한편으로는 어휴 답답해 이렇게 생각되기도 하거든요. 바위로써 존재하는 그대로 두고서 그것에 사람의 정신적 가치나 새로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 역시 안동사람이었다. 현재 안동에서 실행하고 있는 문화체험이나 선비체험도 하나의 쇼맨십이 되지 않게 옛날 것을 가지고 첨단에 대응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가치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고향 떠나 살면서 신문이나 방송매체에 안동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반갑고 맘이 간다. 고향 이야기에 맘과 귀를 열어 놓고 관심가지는 건 타향살이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맑은 정신 유지해서 학술서 집필할 계획
그는 좀 더 단정하게 생활해서 맑은 정신을 유지 하여 학술서 다운 학술서를 한 권 쓰고 싶다고 한다. 그 학술서 한권을 쓰는데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언제라도 변형이 되고 활용할 가치가 높아진다고. 학문하는 사람들 중에 정리하고 발표하는데 조금 더 부지런한 사람도 있고, 자기 내면에 농축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전자를 택한 것 같다. 사실 그는 공부를 시작한 후 굉장히 많은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우리나라 인문학이 남아 있는 자료들을 연구하고 다른 관점에서 재조합 재해석하는 과정들이 밑에서부터 먼지가 쌓이듯이 켜켜이 쌓여서 화석화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아무돌이나 퍽 깨어서 내 필요한 부분만 쓰는 격이라고 말한다. 실제로는 지금이 인문학의 블루오션이라고, 사회가 황폐화 되어갈수록 정신이 건강하다면 그 블루오션을 느낄 수 있다며 그 자료의 화석화 작업에 그도 조만간에 합류를 할 것임을 밝혔다. 그가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나 쓸쓸함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그 외로운 감정을 더 좋아 한다. 사람이 자기가 쓸쓸하고 막막하여 아무 곳에도 기댈 때가 없을 때 정신이 또렷해지고 집중이 잘된다고 했다. 외로운 느낌이야 말로 자기 정신을 똑바로 세우게 만들고 자기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다며 그가 집에 들어오면서 아무도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다. 어릴 때 엄격하던 부친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 ‘바깥이 집보다 편해야 된다.’ 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매를 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군대 훈련시키듯이 쉬는 날 하루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고 한다.

학교에 가는 날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경전도 읽고 먹을 갈아서 붓글씨도 써서 검사를 받아서 아버지 마음에 들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고 학교에 다녀와서도 펌프질해서 텃밭에 물 주기며 마당에 있는 커다란 회나무 아래 떨어진 벌레 잡기며 막내인 그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했어야 했다. 편지 써 놓고 가출 해 버릴까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었는데 아버지가 ‘인간 안 된 거 쌀도 안 축내고 일찍 잘 나갔다며 눈도 깜짝 안하실 것 같아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단다. 그렇게 불편하던 집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바깥보다 집이 훨씬 더 편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 남에게 멋있고 좋은 말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렵고 또 실천을 하려고 노력하다가 보면 자기 자신에게 헷갈릴 때가 있어 되도록 꼭 필요한 말만 하고 산다고.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굉장히 엄격하다. 남에게 죄를 지으면 피할 곳이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지으면 도망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자기 혼자 있을 때 더 조심하고 긴장을 한다는 얘기다. 예부터 군자는 신기독야(愼其獨也)라 했다. 그는 퇴계선생의 후손답게 선현들의 말씀 따라 발자취를 따라 군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짜는 특별한 치장이 필요하지 않아요
어릴 때 그의 꿈은 소설가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때 사람이면 한문공부를 해야겠구나 싶어 학문의 길로 꿈의 방향을 바꾸었다. 고전문학 공부가 재미있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에서 보기 힘든 굉장히 특이한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지금시대의 허점도 보인단다. 또한 현재의 일들이 길게 보면 별것이 아니고 가치 있고 없음이 한눈에 보여 정신적으로도 안정되고 정서적으로도 안 흔들리는 또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지양 씨.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정신세계는 전혀 다른 시대에 가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배추전과 무전을 즐겨 부쳐 먹고 안동에 내려가면 건진 국시와 꼬신 배추 쌈 싸먹는 식당엔 꼭 들린다. 또 초등학교 1,2학년 때 20원 들고 구시장가서 사먹던 증편(기지뗙) 맛도 아직 그에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해서 잘 안보이면 경전 두 권만 남기고 다 정리할 것이란다. 그런데 그 두 권이 논어와 성경이다. 공자가 인을 말하고 사람에게 예의를 차리고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나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의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이 같은 맥락이란다. 물론 그는 무신론자이다.

지금 이 시간 그는 그가 가장 편하다는 그의 집에서 책을 보며 연구하거나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강의를 위해 학술 발표를 위해 집을 나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을 나서고 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무런 꾸밈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안동 사람의 모습일 게다. 그가 내게 말했다.
“어디서든지 진짜는 특별한 치장이 필요하지 않아요. 진짜는 진짜이니까.”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