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길섶을 꾸미는 거리의 화가 이강준(글/이희수_프리랜서 작가)
미술, 커밍아웃하다
미술의 시작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갈까. 일반적으로 미술의 역사 개론서에서는 원시미술을 그 시작으로 두고 있다. 원시인들의 유일한 기록물인 동굴벽화에서는 그들의 삶과 삶에 대한 사상을 엿볼 수 있고 음식을 넣어서 먹거나 보관했었을 토기를 통해서도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동굴벽화도 토기도 미술작품으로서 남겨진 것이 아니다. 다만 후대에 평가하기를 그것 역시 미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작가의 의도가 들어간 작품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에 의해서 원시인들은 그림을 그리고 그릇을 빚었다. 하지만 그릇의 형체만 갖춰도 될 토기에 무늬를 넣은 세심함과 사냥의 의미와 방법을 기록했던 벽화의 묘사와 사실성을 예사롭게만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단순함 이상의 작업은 그들에게 어떤 감동을 선사했을까.
미술의 시작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말 그대로 삶 자체가 아니었을까. 물론 고대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근대에 이르면서 미술이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미술은 사실 그런 이미지가 더 크다. 여전히 생활보다 여가와 감상으로서의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술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낯설지만 본래 그 시작은 낯설지 않았던 미술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미술관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걷고자 하는 길, 가고자 하는 곳 어디든지 미술은 있다. 닫힌 문화가 아닌 열린 문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오기 위해 만들어진 것, 바로 공공미술이다. 캐나다나 유럽과 같은 외국에서는 일찍이 거리 속 숨어있는 미술작품을 끌어내어 도심이 하나의 미술공간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실시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의 대학로 인근에 있는 낙산공원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실시된바 있고 이미 그 외의 많은 지역에서 평범하던 마을길을 미술로 재해석해냄으로써 관광효과까지 얻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안동은 좀 뒤떨어져 있다고 해야할까. 물론 동네마다 문화재가 하나씩은 있는 지역적 특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월이 녹아있는 기와 단청의 해묵은 담벼락 아래에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문화 역시 안동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이미지들에 속해야할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이것은 신세동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공미술 사업을 더욱 주목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서 땡볕 아래 동료들과 열심히 벽화작업을 위해 ‘붓질’을 하고 있는 경상도 사나이. 이 달에 만난 사람, 2009 마을미술 프로젝트 당선자 이강준 소장이다.
신세동 거리를 예술의 거리로
요즘 한참 작업 중인 신세동 근처의 웅부공원에서 그를 보기로 했다. 공공미술을 하는 미술작가로서 이강준 소장의 사진 속 모습은 외곬처럼 보였다. 왠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끼 하나쯤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인터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처음 본 그는 예술을 하는 작가라기보다 마치 배낭여행을 하는 학생처럼 커다란 배낭에 캐쥬얼한 반바지 차림으로 넉살좋게 인사를 건네 금세 걱정을 덜게 되었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을 한 이강준 소장을 보니 공공미술을 하려면 저 정도 체격은 있어야 되는가 싶었다. 농담으로 자신의 일을 노가다라고 표현했지만 그만큼 공공미술이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강준 소장이 진행하고 있는 신세동의 공공미술 사업은 문화관광부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에서 주관하는 2009 마을미술 프로젝트 ‘길섶미술로(路) 가꾸기’ 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전국에서 길섶미술로 가꾸기 부문에 공모한 작품은 무려 143개. 그 중에서 단 9 곳만이 선정되었다.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막강한 대구지역 팀과 경합을 벌여 이강준 소장이 이끄는 팀이 뽑힐 만큼 전국에서 탐내는 자리를 안동이 가져오게 된 것이다. 올해 처음 실시되는 사업인 만큼 심사 또한 까다로웠다고 한다. 수준미달의 작품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첫 공모에서 당초12곳으로 계획했던 사업지에서 9곳 밖에 선정하지 못했고 다시 제 3차 공모까지 내어 추가로 3곳을 선정해야 했다. 공공미술 사업에 대한 수준은 물론 전국적인 관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길섶미술로 가꾸기 부문은 사업비 1억원이 지원되기 때문에 기대도 크다.
처음에 이강준 소장이 공공미술 사업지로 계획했던 곳은 고 권정생 선생의 생가가 있는 조탑리였다. 하지만 사업이 성사되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하던 찰나 뜻밖의 이야기를 가진 전망이 예쁜 동네를 찾게 되었고 이강준 소장은 망설임 없이 신세동 성진골 일대와 동부초등학교 입구 부근을 사업지로 최종결정하게 되었다.
총 15개의 벽화와 약 20개 가량의 소품으로 구성된 이강준 소장의 성진골 일대의 공공미술 작품은 마을 주민들과 소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동네에 있는 많은 폐화분을 활용한 소품장식은 주민들의 참여를 유도시킬 수 있고 작품의 시작이라할 수 있는 동부초등학교 담벼락 역시 동부초등학교 학생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참여 작가들과 함께 진행하게 된다.
그림이 하나씩 채워지면서 주민 반응도 달라져
벽화가 시작되는 곳에는 담 하나 전체가 안내도가 된다. 단순한 설명식 간판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내도 하나까지도 주변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한 부분은 이강준 소장이 생각하는 공공미술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실제로 계획서에는 총 15개의 벽화가 그려지기로 되어 있지만 현장을 가보면 계획에 없던 곳에도 벽화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곳이 있다. ‘꿈이 있는 공간’ 이라는 제목의 벽화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벽화마다 제목과 이야기가 있어 동네를 잘 표현해내는 특징과 위트 역시 벽화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다.) 계획된 곳에만 그리다 보니 벽화가 완성될수록 바로 이웃해있는 집의 낡고 허름한 벽과 비교가 되어 보기 싫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강준 소장은 주변과의 조화가 곧 완벽한 완성이라는 소신에 과감히 이웃집 벽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획된 것 보다 이상을 해 나가게 되면 짜여진 예산을 벗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업비가 지원되더라도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이강준 소장과 팀원들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본인들의 인건비를 반으로 줄이면서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신세동 성진골 일대를 사전 조사차 나왔을 때 주민들은 썩 반기지 않았다고 했다.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초반에는 심지어 마을을 보수하려고 온 사람들로 알고 ‘우리 집 벽은 왜 안 해주냐’는 타박 아닌 타박도 들었단다. 오래된 벽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일단 오래된 벽을 새 벽처럼 만들어야 한다. 때문에 물청소에서 수번의 벽 칠을 한 후에야 그림을 그리 수 있게 된다. 정작 그림을 그리는 일 보다 벽을 청소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간다.
넉살좋은 이강준 소장이 동네를 방문할 때 마다 인사하며 살갑게 동네 어른들을 대했던 턱일까 처음에는 물과 전기를 끌어 쓰는 일만으로도 애로가 많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협조 덕에 잘 해결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점차 그림이 완성되어가면서 처음에 눈살을 찌푸렸던 동네 어른들도 ‘그림 잘 그린다’, ‘보기 좋다’는 말로 힘을 실어주면서 신세동 성진골 일대는 공공미술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
특히 벽화 말고도 20개 가량의 소품에 개와 고양이 화분, 전반적인 테마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조형물이 가득하다. 벽화 하나에 테마가 있는 만큼 성진골의 특징도 많이 담고 있다. 특히 예전에 성진골에서 많이 보였다는 반딧불이를 벽화에서 어떻게 재현해 낼지 가장 궁금했다. 7월 마지막 주에 찾은 작업현장은 비가와 잠시 중단된 채 팀원들이 쉬고 있었는데 거의 마무리된 벽화를 둘러보니 계획서에서 봤던 사진보다 훨씬 근사했다.
특히 이강준 소장은 재료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데 보통 벽화의 유지기간을 2년으로 보지만 이강준 소장과 팀원은 벽화가 10년은 족히 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많은 공공미술에 있어서 벽화의 실패 사례로 들어지는 가장 큰 이유가 유지가 되지 않는 다는 점에 있다. 처음엔 예뻤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주민들의 무관심함 속에 방치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강준 소장은 최상의 재료를 쓴다는 데에 많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강준 소장이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었다. 이강준 소장과 팀 일원 모두는 안동대 출신인데, 사업계획서를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그는 직접 발로 뛰면서 서울과 지역의 지인을 찾아다니며 많은 도움을 구했다고 한다. 덕분에 예산을 줄여 프로젝트시안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건 그가 평소 품앗이 활동을 잘해둔 덕분인 모양이다. 작업현장에서나 예산을 계획하면서 도움을 청했던 주변인들을 챙기는 모습에서 평소 그의 지인들에 대한 많은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고액의 아르바이트를 해도 인맥 관리(?) 때문에 지출이 많아 늘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도움을 구하기 전에 이미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강준 소장은 요즘 행복한 곤욕을 치르고 있다. 모두들 그가 프로젝트에 선정되자 상금 1억원을 받은 줄 알고 오해를 받는다고 한다. 실제로 이강준 소장은 실무에 쓰이게 되는 사업비로 지원을 받은 것이라 일반대회의 상금처럼 현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쓸 수도 없다. 그래도 그는 식사자리나 술자리에 가면 아무 말 없이 꼬박 계산서를 들고 나간다. 이것도 앞으로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 아깝지 않다며 그는 이 일을 하다 보니 사람이 재산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는 얘기를 했다.
여전히 이강준 소장의 얼굴에는 일을 도와준 많은 지인들에 대한 고마움이 젖어있었다. 실무에 들어서면서 좋은 재료를 쓰기위해 아는 사람에게 최소의 비용만 지불하고 재료를 구해오는 것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삼천포 청년, 안동 삼천포에 빠지다
이강준 소장은 95년에 사천군과 통합되어 사천시가 된 삼천포 출신이다. 경남 삼천포가 그의 고향인 것이다.사실 그가 미술에 발을 들인 것도 안동에 오게 된 것도 모두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매일 스프링 연습장 한권씩 그림을 그릴만큼 재주가 있었지만 그가 미술을 전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재능은 누군가 알아보기 마련인가. 진학할 때마다 이강준 소장의 그림을 본 학교 선생님들이 수차례 미술을 제대로 배울 것을 권유했지만 엄격한 집안 탓에 이강준 소장 역시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취미로 드나들던 미술부 동아리에서 그를 알아본 미술선생님으로 인해 이과에서 미술을 하기위해 예체능으로 전과하게 된 계기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니 미술을 시작하기에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늦은 셈이 되었다. 이미 재수를 하리라 마음먹은 그였지만 이강준 소장은 계획에도 없었던 안동대 미술학과에 덜컥 합격을 했다.
안동대에 입학했을 때를 회상하는 이강준 소장은 그 때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슬며시 웃음을 지었는데, 그때는 그림 하나는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있었던 오만한 학생이었기에 안동대 미술학과에 온 학생들은 거들떠도 안봤단다. 처음 두 달간은 말도 하지 않고 지낸 괴짜 이강준은 하지만 그의 자만했던 생각과 달리 그림을 잘 그리는 동기들이 많은 것을 보고 내가 여기서 크면 되겠구나, 하고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 그의 안동살이 십여 년을 버텨온 길이다. 안동대와 대학원을 거쳐 조교를 지내고 현재 안동대 미술학과 강사로 나가고 있으니 어찌 보면 대단히 질긴 인연이다.
이렇다 보니 안동이 고향보다 더 편하다는 그의 말에서 안동에서 십여 년을 살아온 안동사람 테가 제법 나 보였다.
처음에 벽화그리기는 미대생의 고액 아르바이트로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공공미술이라든가 벽화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아르바이트와 팀원으로 참여하면서 안동에서 공공미술을 할 수 있는 많은 장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렇게 그의 새로운 도전을 열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지역민과의 소통, 바로 공공미술의 지향점
공공미술의 어려운 점은 함께 소통해야 할 주민과 눈높이를 맞춰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작가의 눈에 맞게 하면 주민과 소통할 수 없으므로 공공미술로서의 의미가 없고 작품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일반인들의 생각에만 맞출 수도 없다. 그래서 이강준 소장은 이런 위화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안이 나올 때 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보여주고 묻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무심코 지나가버릴 수 있는 거리에서 한번쯤 웃을 수도 있고 뒤돌아보면서 어떤 인상으로 남는 다는 것이 그가 생각 하는 공공미술의 매력이다. 그 주체는 바로 작가가 아닌 공공미술에 이웃해있는 주민들이기에 작가로서의 책임을 가진 이강준 소장의 어깨는 늘 무겁다.
“지금껏 소속원으로 참여한 적은 많았지만 내 이름을 걸고 대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적은 없었어요. 이번 작품이 내 이름을 걸고 진행되는 것이니만큼 의미도 크고 이런 사업을 시작으로 안동의 공공미술 수준이 격상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아직도 열에 여덟, 아홉은 동네 벽에 붓칠을 하고 있는 광경을 ‘쓸데없는 짓’ 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한 해 두해 길을 걸을 때마다 늘 같은 자리에 있던 동네의 벽화가 없어진다면, 열에 여덟, 아홉은 그 낯설음에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지 않을까. 안동거리에 그의 작품이 더 많이 넘쳐나길 기대해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