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古無新) 박종우 시인을 떠올리며(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1.
경남 울주군 지내리가 고향인 고무신(古無新) 박종우 시인(1925~1976)과 안동의 인연은 그가 안동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으면서 시작된다. 안동의 현대문학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인물이지만 안동과의 인연이 길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기가 쉽지 않다. 특히 당시는 1950년대였고 이때 문학활동을 함께한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서 더욱 그러하다. 고무신 시인은 시집을 출판하고 그 후에 <사상계>의 신인상을 받았다. 고향사람 최이락 수필가에 따르면 고향의 앞뒷집에 살았으나 아버지 연배여서 얼굴 기억도 없다고 한다.


1950년대 후반 무렵 고무신 시인을 기억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따른다면 1957년에 안동고등학교에 국어교사로 오셨다고 한다. 이때 고무신 선생은 이미 40대였지만 독신이었다. 기인으로 유명한 일화가 많은 것도 그때까지 가족을 꾸리지 않은 것과 관계가 있을 것도 같다. 물론 가족관계를 떠나 개인의 기질도 있다. 1950년대 학교분위기는 아마도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떠올리면 되지 않을까. 이 영화보다 훨씬 규율이 강압적인 교실, 운동장, 학생의 인상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이미 푸코가 말했듯이 학교와 군대는 그리 다르지 않은 집단이다. 통일된 교복과 두발은 군인의 짧은 머리카락과 군복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도 얼마되지 않았으니 전쟁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두려움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고 학교는 더욱 강한 집단문화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대의 정서 안에 고무신 선생의 국어 수업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일탈을 꿈꿔도 좋을 시간이었다. 도저히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할 수 없는 단어를 교사의 입을 통해 들었던 학생들은 그 자체로 긴장된 분위기를 잠시나마 털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수업 자체를 매우 즐겁게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2.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고무신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그러나 1937년에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만주사변)으로 징병을 당해 만주로 가게 된다.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터에 끌려간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전장의 공포와 두려움을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극복했을지 추측하기 어렵다. 이런 체험으로 읽어본 몇 편의 시는 매우 우울하다. 「기도」라는 시는 당시 선생이 징병 당하고 겪게 된 집안사정이 잘 나온다. 징집영장이 나오면 도망가지 않는 한 명령에 따라야 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징집의 힘이랄까, 폭력이랄까. 전쟁 중의 징집령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도 보이듯 그냥 끌려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도 없다. 개인의 희망과 꿈, 가족과의 단란함, 부모님의 따뜻한 관심은 그대로 멈춰버린다. 이런 상태가 바로 징집의 현실이다. 시에서도 보이듯 식민지민으로 ‘용병’이 되어 가기 싫은 전쟁터를 가는 처참함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온전하게 받아낼 수도 거부할 수도 어쩔 수도 없었던 어린시절을 고무신 선생은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시는 그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상처를 보여준다.


내 어릴적 대륙에
용병(傭兵)으로 끌려가던 날


실성하여 춤을 추시던 어머니와
충혈된 눈으로 시종
한마디 말도 없으시던 아버지


이 작품에서 시인은 “참말이지 제발 이 땅에 다시는/전쟁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썼다. 어떤 명분으로든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벌을 줘야하며, 그것도 모진 벌을 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국가에 이익이 되는 전쟁이란 말이 설득력을 얻는다. 이 말은 전쟁을 구경할 때만 가능하다. 논리도 맞지 않고 휴머니티는 완전히 고갈된 말이다. 고무신 선생에게 전쟁은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실존이었고 현실이었기 때문에 가장 솔직하게 전쟁의 잔인함과 정치성을 꼬집어 말할 수 있었다.


고무신 선생처럼 당시 학도병으로 징집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우리가 잘 아는 문익환 목사도 징집되었다가 목숨 건 탈출을 하고 광복군에 합류한다. 일제저항기의 상처들, 수난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백년도 안 된 이야기라 현장감이 강하게 다가온다. 그때,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일본 동경으로 가서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학도병에 지원하기를 요청하는 강연을 했다.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우리 역사였다. 상상하기 싫으나 국익 운운한 것처럼 전쟁은 누군가에게 이익을 주는 모양이다, 또 누군가에게 죽음 혹은 죽음보다 못한 상처를 남긴다. 결국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건, 누구의 이익 때문인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만주에서 귀국을 했으나 꿈 많던 청춘은 인생의 주소를 잃어버렸을 거다. 그 방황과 좌절의 실마리를 헤아릴 수 있는 시가 있다. 삶을 두고 쓴 「인생론」이란 시를 보면 부도덕한 권력에 밀려 개인의 인생이 막연해져버린 것이 잘 드러난다. 막이 오르는데 사람들은 이미 다들 보고 간 연극을 맨 뒷자리 끼어 앉아 본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요약해 제시한 명사들, “사랑, 밀어, 고뇌, 희열, 슬픔, 미움” 이 모든 것이 시인에게는 “끈이 떨어진 연(鳶)”이 되고 말았다. 팔목에 묶다가 놓쳐버린 풍선은 어느 하늘을 떠다니는지 알 수도 없다. 누구의 인생이든 심각한 한편의 드라마로 진행되는 것이야 동일하지 고무신 선생이 인생은 끈을 놓은 연과 풍선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시 「소」를 통해 착하디착한 소의 운명을 그리면서 시인은 “나처럼 너무 슬픈 짐승”이라고 했다. 소는 평생을 일한다. 또 눈이 그렇게 크고 맑을 수 없다. 그 맑고 순한 눈으로 힘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소는 보통사람들의 삶살이와 닮았다. 송아지를 지나면 코뚜레를 하고 어깨에는 길마를 얹고 일꾼, 짐꾼으로 평생을 산다. 다큐멘터리 <워낭소리>에도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일하는 소가 나온다. 우시장에서 눈물 흘리던 소가 떠오른다. 비육소가 되어 고기가 되는 일보다 일하는 편이 행복하다고 추측할 수 있는 장면이다. “코따라 귀로 뻗은/어쩌면 罪를 닮은 고삐/등엔 꼬탈 모를 業錄같은 길마”를 얹어 짐을 끌고 일생을 산다. “슬픈 선조의 유산으로/웃음을 잊은 습성”은 시인의 처지 그대로이다.


쪽닥눈 주인의
심각하지도 않은 매질에
연방 겁질린 표정(表情)을 하고
거품문 어금니로 씹는 인고(忍苦)


돌아가도 매일 말뚝에
목을 맡긴 긴 밤이 새면
어느 모진 손아귀 쥐어진
도끼의 불안(不安)


이 시를 읽자니 쓸쓸한 마음이 인다. 놀이공원에서 어머니를 졸라 풍선을 사고, 그것을 힘껏 불어서 팔목에 매다가 놓쳐버린 아이가 떠오른다. 풍선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을 날아오르고 다시는 볼 수도 없다. 고무신 선생의 꿈은 이렇게 아쉽게 날아올라 사라졌을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방황도 적합하지 않고, 모험도 말이 안 되고, 결국 폭력이 빼앗은 개인의 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식민지민으로 놓인 조건을 덧붙이면 깊은 슬픔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羊 한 마리/나처럼 울고 섰다”(「羊」), “달빛이 죽어 넘어진 푸른밤엔/엉엉 고독을 소리내어 운다”(「噴水」), “팔목에 묶다가 놓쳐버린/풍선같은 지난 날”(「休日」) 등 시를 읽다가 보이는대로 아픈 상처를 뽑아내보니 안타까움만 더 짙어진다.




3.
안동체류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고무신 선생과의 인연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 가운데 벌써 불귀의 객이 된 분도 계셨다. 신세훈 시인께 연락을 드려 당시를 회상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무신 선생이 안동고등학교에서 국어 과목을 가르칠 때 신세훈 시인은 고3이었다. 당시 학교에 국어교사는 고무신 시인 한 분밖에 없어서 직접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1년 후배인 김용진, 이두형 두 분이 개인지도라고 해도 무방하게 문예반에서 공부를 했다. 김용진 시인은 지금도 문인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두형 시인은 동아일보에 시로 등단을 했고 시나리오 작업을 주로 해왔으나 작고하셨다. 이 둘은 전국백일장, 응모현상공모를 휩쓸고 다녔고 문학장학생으로 대학에도 진학하였다.


학교 수업시간에 모든 학생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수업을 한 교사였다. 어원까지 따져가며, 시 쓰기도 직접 지도하고, 살아있는 문학수업을 했다. 당시 수업을 직접 들은 신세훈 시인은 신들린 사람처럼 신명나게 수업을 하셨다고 시를 쓰면 직접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자작시를 가지고 와서 낭송도 하셨다. 이러고 보면 <말죽거리 잔혹사>와는 거리가 먼 교실풍경이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고무신 선생이었으므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해방이 되고 만주에서 귀국할 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고무신 시인은 최현배 선생이 조직한 한글강습회의 강사로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강의를 했다. 최현배 선생과 고향이 같았다.


고무신 선생은 기인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제자나 문우, 선후배들이 기억하는 그분은 상식과 일상을 벗어나는 일화가 많다. 이미 기록되어 전하는 내용 중에서 조지훈 시인과 얽힌 것도 그렇다. 차마 여기에 옮길 수는 없으나 지면으로 확인하시기 바란다. 고무신 선생은 안동고등학교 재직 시 이미 40대였으나 독신이었고 학교 숙직실에서 지낼 때가 있었는데 그런 시간에 문예반 학생들은 고무신 선생께 직접 글쓰기 지도를 받았다. 술을 너무나 즐기는 고무신 선생은 당시 사범학교 교사였던 성학원 소설가를 거의 매일 만나서 술잔을 기울였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새벽까지 안동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법흥교를 건너 용상동에 이르면 파출소에서 잡히기 마련이다. 순경이 파출소로 끌고 들어가면 도리어 순경 멱살을 잡고 바닥에다 패대기를 칠 정도로 힘이 좋았다. 파출소 순경들은 고무신이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즉결처분으로 넘겨져도 곧 훈방되는 일이 많았다.


정민호 선생이 정리한 글에 따르면 고무신 시인의 시비는 시문학사에서 모금한 기금으로 문학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한 경주에 시비를 세웠다고 한다. 학창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여러 일화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 어떤 것은 매우 낭만적이지만 또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보인다. 보통 세수는 잘 안했고 부스스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학생들은 인사로 세수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날 수업하다 말고 화장실 간다고 나간 사람이 삼사일이 지나고 비행기를 타고 운동장에 나타났다. 운동장에서 전체조회가 한창인 때에 군복을 입은 고무신 선생이 헬리콥터를 타고 내렸던 것이다. 수업하다가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싶어진 고무신 선생은 친하게 지내는 해병장교에게 가서 비행기 타기를 원했고, 그래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뭐든 하고 싶으면 곧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학생들이 단체로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고무신 선생은 기차표를 사지 말라고 하고선 무임승차를 유도해 벌어진 일에서도 그의 특별한 면모가 드러난다. 기차 타는 일은 군인전용 개찰구로 들어갔으나 역을 빠져 나가는 일을 학생 각자에게 맡기는 웃지못할 일이 일어났다. 무임승차로 특실에 앉았다가 검표하는 사람을 기세 좋게 눌리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런 일화는 모두 학생과의 소통이 가능했기에 전설처럼 남은 이야기가 되었다. 수업내용에 얽매이지 않고 한없이 자유로운 수업을 했던 것 같다. 책 없이 교실에 들어와서 무조건 몇 페이지를 펴라고 하고 잡담과 패설을 먼저 꺼냈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면 교실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데 담배를 일부러 두고 가면서 ‘담배 손대지 말라고’ 광고까지 하고 나간다. 그 광고에 나이 들거나 혼인까지 한 학생들은 담배를 대신 다 피웠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와 미소를 지으며 그 빈 담배갑을 휴지통에 버렸다. 별 걸 다 배려하는 선생님이지만 사실은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준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다. 학생들과 같이 축구를 하기 위해 고무신 선생이 선택한 방식은 낯설다. 방송실에서 각반 실장들을 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해놓고 모인 실장들의 따귀를 한대씩 때리고 축구를 했다는 것이다. 따귀를 맞은 학생들은 순간 판단이 정지되어 이전 일에 대해 어떤 생각도 없어져 완전히 머리를 비우고 운동을 할 수는 있다. 그런데 가해자든 피해자든 이유없는 폭력에 길들여지는 일은 너무 위험하다. 또, 소풍 때 술을 좋아하는 고무신 선생을 위해 학생들이 막걸리를 가져갔다. 덕분에 하루 종일 취해 있던 고무신 선생이 왜 맥주, 위스키는 없냐며 호통을 치다가 갑자기 학생의 머리를 막대기로 때려서 피가 나는 일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에 있을 당시 유치환 선생과는 각별하여 전해지는 일화를 소개한다. 여러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데 고무신 선생이 술잔인지 재떨이인지 둘 중 하나를 유치환 선생의 이마에 던져 피가 줄줄 흐르는데 유치환 선생은 호탕하게 그대로 앉아 웃었다고 한다. 청마선생의 배려는 고무신 선생이 어린날 학도병으로 끌려간 체험이 주벽과 관계있을 것이라는 데 까지 닿아 있었던 것일까. 고무신 선생은 경주, 포항, 안동, 울산 등지에서 교사로 지내시다 서울로 간다. 서울에서 늦게 혼인을 했고 김동리 선생이 주례를 섰다.


4.
고무신 선생은 장수하지 못했다. 청년시절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진 영향이었을지, 시 쓰는 일로 마음이 몹시 힘들어서 그런지 쉰 넷(1976.4.)으로 돌아가신다. 그 이유를 알고 보면 허무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잘 받아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고무신 선생은 자꾸 정신이 혼미해져 약 먹은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거듭 약을 많이 먹었다. 퇴원을 하루 앞두고 약물 과다복용으로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그것이 사인이 되었다. 당시 병원에서 간호를 한 사람은 누님이었고 사모님은 바빠서 돌볼 수 없었다고 한다.


너무 허무하게 바삐 돌아가신 고무신 선생을 기리는 시비는 경주에 있다. 당시 시문학사가 주도한 시비건립위원회는 고향보다 문학활동의 무대를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김유신장군 묘가 있는 선두산 근처에다 세웠다. 유치환 시인이 경주에 있을 당시, 김동리 선생을 모시고 청맥동인을 이끌었고, 문학행사와 활동을 했던 주 무대가 경주였다. 시비에 새겨진 시는 「鍾」으로 일부를 소개한다.


기다리는 아침
아직 새벽은 멀었다


峨峨한 山脈
마을과 고을
봄이 올 때까지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설움을 터뜨리지 말라


고무신 선생이 제자인 황종찬의 수필 「古無新」에 따르면 “이름보다 호 고무신으로 알려져서 구두닦기 소년과 신문배달부는 물론 술집 주인들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호탕하신 성격과 정이 물씬 풍기는 서민적인 태도가 사람들에게 깊이 어필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이렇듯 제자들이 쓴 일화는 한결같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던 시인혼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떤 대목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어 유별난 주벽이라고 해두면 될지 모르겠다.


5.
기행에 걸 맞는 글이 아니다. 길을 나설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김유신장군 묘가 있는 곳에서 어슬렁거리며 사진 몇 장 찍고 돌아와야 하는 허무함 때문에 마음을 내지 못했다. 기행의 글이 되자면 울산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서 전화로 대신했다. 물론 전화는 울산에 쉽게 닿았고 그곳 이야기도 물어올 수 있었으나 현장감은 하나도 없다. 안동과의 끈을 찾아보니 신세훈 시인에 닿았고, 이 통로로 여러 제자분, 고향분과 연결이 시작되었다. 경주에서는 이미 고무신 선생의 일화가 글로 정리되어 있어서 쉽게 참고를 할 수 있었다. 안동의 현대문학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상징인 고무신 선생의 이야기를 고향과 연결시켜 제대로 구성하지 못한 점은 숙제로 남겨놓는다. <안동>


-도움을 주신 신세훈, 최이락, 정민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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