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 명옥대(글/윤천근)명옥대를 살펴보는 이유
올 해는 퇴계 탄신 5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10월 한달 동안 안동에서는 그 점을 기념하여 세계유교문화축제가 열렸다. 그리고 이 번 호는 내가 정자 이야기를 쓰는 마지막 회이다. 이제까지 2년 동안 정자 이야기를 썼으므로, 이제 나의 인내력이 한계치에 이르러, 정자 이야기 쓰는 것에는 더 이상 신바람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바람이 나서 쓰지 않는 글은 재미가 없다. 쓰는 사람의 열정이야말로 글의 생명력인 탓이다. 그러므로 신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글감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스스로를 고문하는 일이고, 읽는 이들을 괴롭히는 일이다. 열정이 실리지 않은 글은 읽는 이들에게 지루함 외의 어떤 무엇도 느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정자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김복영씨가 그렇다면 명옥대를 다루자고 제안을 하였다. 명옥대는 퇴계 이황과 관계가 있는 정자이므로, 퇴계 탄신 5백주년이 되는 해의 마지막 호에 다루는 것이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2년 전에 청량산의 오산당을 처음 다루는 것으로 정자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오산당은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었으니, 이제 정자 이야기의 마무리도 퇴계 이황과 관련이 있는 명옥대로 하는 것이 수미가 일관한 골조를 갖출 수 있어 제격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전혀 이의를 달지 않았다. 김복영씨가 제출하는 이유들이 마땅한 탓도 있었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이걸 다뤄야 한다, 저걸 다루는 것은 어떠냐, 내 의견을 찍어다 부칠 생각은 없었다. 김복영씨와 나의 관계는 그가 언제나 의견을 내는 역할을 하고 나는 그 의견에 따르는 역할을 하는 일방성을 갖고 있다. 그는 안동지역 문화에 대해서 취급하고 싶은 주제들이 많으며, 나는 그의 문화적 열정에 동행하는 글쟁이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다. 정자 역시 그의 주제이지 나의 주제는 아니었다. 나는 그의 주제를 따라다니며 감탄하고, 되지도 않는 감상을 글자로 옮겨놓으면서, 조금은 문화의 양식을 섭취하고 있다는 만족감에 빠져들곤 하였을 뿐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정자에 대한 열정은 그의 것이었고, 나는 그의 열정에 감염되어 들떠 있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내가 정자를 찾는 일로부터 놓여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정자에 대한 열정의 감염력이 내게서 시효가 마감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나는 편식주의자이다. 하나에 빠져들 때는 그것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편식주의는 쉽게 질려 버리는 약점을 안고 있다. 내가 하나의 주제를 3년 이상 끌고 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천등산 봉정사 영역
세월은 도깨비 방망이이다. 시간은 그저 흘러가기만 하다가도 갑자기 광폭하여져서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아 버리기도 한다. 천등산 봉정사 영역에서 시간은 이제 광폭한 흐름을 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등산 봉정사 영역! 명옥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물론 그 중심은 명옥대가 아니라 봉정사이다. 따라서 이 영역을 뒤집어 놓고 있는 시간의 광풍은 그 진원지가 봉정사이다.
봉정사는 좋은 절이다. 아니, 좋은 절이었다. 내가 굳이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여 달라. 그만큼 전에 내가 가 보았던 봉정사 영역은 환상적이라고 까지 할 만한 즐거움으로 내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봉정사는 조용한 절, 나무 숲 속에 숨겨져 있는 절이었다. 숨겨져 있는 절이므로 더욱 아름답고, 더욱 친근하기만 한 절이었다. 그 때도 봉정사에는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더 오래 된 목조건물이 있었다. 그 때 봉정사는 거의 방문객들을 만나지 않고 조용히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봉정사는 도회처럼 북적거리는 절로 변해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주차장도 산비탈 하나를 다 깎아서 넓게 마련하여 놓고, 매표소도 볼썽 사나운 가건물로 입구 한켠에 크게 지어놓은 것이겠다.
입장료를 받기 시작하면 그곳은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사람 구경하는 것 외에 별로 할 것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입장료 받는 절은 더 이상 절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수양도 부처와의 만남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시장 한가운데서도 수양은 가능한 일이지만 입장료 받는 절집 안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봉정사를 이렇게 시장터로 만들어 놓은 것은 영국 여왕 탓이다. 영국 여왕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말하든 문화적 수치가 될 일이지만, 한마디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으므로, 낯 뜨거워지는 걸 감수하면서라도 말하여야겠다. 영국 여왕이 왔다 간 곳이라 해서 방문객들이 줄을 잇는 것은 한심한 우리 문화의식의 현주소이다. 우리 문화조차 서양적 상징으로 덧칠하지 않으면 위대해 보이지 않는 우리의 의식은 얼마나 초라한가? 더욱 한심한 것은 이곳 산 쪽으로 크게 세워 놓은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한켠에는 영국여왕과 절집의 스님이 담소하며 걷는 사진이 대문짝 만하게 붙어 있다. 영원히 봉정사 영역을 영국여왕의 문화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자 하는 심산인 것인가?
천등산 봉정사 영역은 그렇게 씁쓸한 웃음을 띄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고즈넉하고 정감 가득한 자연의 미학은 이제 그곳에서 퇴장하고 없는 것이다.
명옥대로 올라가다
명옥대는 봉정사로 오르는 처음 산기슭의 초입에 있다. 봉정사 영역 속에 있는 것이다. 봉정사도 명옥대도 다 같이 한가로움 속에 놓여져 있었을 때에는 봉정사의 고적함이 명옥대의 한가로움에 빛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그 둘의 미학은 서로 상승작용을 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봉정사가 번잡하여지자 상황은 일변한다. 이제 봉정사의 번잡함은 명옥대를 여전히 한가로움 속에 놓여있지 못하게 한다. 봉정사와 명옥대는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탓이다.
봉정사로 올라가는 숲 속의 폭 좁은 길은 그대로 명옥대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봉정사는 초입에 쇠줄을 걸쳐 놓고 그 옆에 입장료를 받는 안내소를 바짝 붙여세워 놓고 있다. 정상적으로 명옥대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하면 이 안내소를 통과하여 입장료를 지불하여야 한다. 가로 걸쳐진 쇠줄 하나가 이 지역 전부를 봉정사 영역으로 묶어버리는 것이다. 명옥대는 명실상부하게 봉정사 영역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봉정사를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명옥대 영역만을 가 보고자 한다면, 정상적인 길을 버리고 샛길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주차장의 한켠에는 계곡을 타고 나있는 비좁은 샛길이 있다. 이 길은 논의 한 켠으로 나 있는 것이므로 농부들이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고, 등산객들이 돈 내지 않고 이용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은 그 길은 입장료와는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왕 돈 받고 산에 들어가게 하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 이러한 샛길을 언제까지 방치하고만 있을 것인가? 다른 곳의 예에 따르면, 이 천등산 봉정사 영역에는 조만간 산기슭을 따라 높은 울타리가 쳐질 것이고, 주변 산으로 오르는 모든 샛길은 봉쇄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결국 명옥대도 입장료를 내고서야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것이야 어찌되었든, 명옥대로 오르는 샛길은 봉정사 앞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개울이 주차장 쪽으로 떨어져 내리는 한 옆을 타고간다. 개울은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다. 올해는 봄가뭄이 심하더니 여름에도 변변한 태풍 한 번 없이 지나고, 가을가뭄 또한 심하므로, 거의 모든 계곡이 말라버렸다. 그것은 전국적인 상황이니 봉정사 앞 계곡이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다. 계곡의 물은 겨우 흔적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길은 주차장 영역을 지나면서 한 사람의 발걸음을 용납할 정도의 좁은 사설 시멘트 다리를 통하여 계곡 저쪽 논의 한켠으로 달라붙는다. 그 논길이 산의 기슭으로 오르는 지점, 계곡 아래 쪽이 환하다. 팔뚝만한 초들이 세 개씩 네 개씩 묶여져 여기저기 어지럽게 세워져 있고, 박하사탕 두 봉지가 위쪽만 뜯긴 채 서로 두어걸음 사이를 띄우고 놓여져 있다. 초들은 별로 타지도 않고 꺼져 있다. 한 쪽 작은 나무 가지에는 현란한 색깔의 천들이 묶여 있기도 하다. 계곡의 위쪽에도 그런 천이 또 하나 보인다. 정성을 들인 흔적들이다.
박하사탕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거기 사탕 봉지에 손이 가지는 않았다. 나는 신령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또 안 믿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날 선 의식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다. 이런 곳에 이르면 공연히 마음이 쭈뼛거리며 멀찌기 피해가곤 한다. 남의 정성 드린 곳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미상불 마음 깊이에서는 정성의 현장에는 신령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탓이리라. 나는 그게 우리 민족이 갖는 신앙의 원적지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곳에서 사선으로 시선을 올려다보면, 몇 그루 나무들의 성긴 둥치 사이로 명옥대가 어른거린다. 비탈진 면을 타고 오르면 대 여섯 걸음이면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나는 그것을 택하려 하였으나 김복영 씨는 그게 길이 아니라 한다. 이 양반! 의외로 따지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상당한 엄숙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도 수백년 세월을 등에 지고 있는 한 가문의 주손이니, 나같이 당대의 가계와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는 의식의 차원이 아주 다른 것이다.
나는 그의 말을 따른다. 위쪽으로 좀 더 올라가자, 과연 그의 말대로 명옥대로 이르는 오솔길이 수평으로 열린다. 한 10여미터쯤 되는 거리의 길이다. 폭은 30센티 정도 될까? 산 기슭을 가로지르는 길이니 위로 아래로 나무가 늘어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그리고 때는 만추!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다. 오솔길 위에는 떨어진 나뭇잎들이 쌓여있다. 소나무는 길의 초입에 서너그루가 어울려 서 있고, 그중 하나 마르고 초췌한 모습의 소나무가 길위 하늘을 가로질러 사선으로 기우뚱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의 소나무는 길의 끝, 명옥대 영역에도 하나 있다. 그 소나무는 사선으로 가지를 흘려 내려서, 명옥대의 지붕이 가지 사이로 어른거리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물론 오솔길 쪽에서 볼 때만 그렇고, 명옥대 영역 쪽으로 가면 소나무는 그 영역의 한 끝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명옥대 영역은 삼각형의 폭 좁은 분지 형상으로 다듬어져 있다. 오솔길은 명옥대 영역의 서쪽 끝을 타고 휘돌아 뒤로 나아가고, 뒤에서 바위들 사이로 사라지면서 계곡을 건너고, 계곡 저편 바위 위로 해서 건너편 소나무 숲 사이로 난 봉정사 올라가는 길과 만난다. 그 길이 명옥대로 오르는 원래 길이다.
정자가 앉아 있는 곳은 길보다는 조금 아래로 주저앉아 있는 평면이다. 정자의 뒤쪽은 높고 아래쪽은 낮다. 그러므로 정자의 나무판 아래 쪽은 아주 낮은 경사면을 타고 앞 부분은 30센티 정도의 기둥에 의해 들려있고 뒤쪽은 땅에 늘어붙어 있다. 그 뒤쪽, 정자의 뒷면은 좁은 둔덕이다. 둔덕 위에는 가는 낙엽송이 서 있다. 앞 쪽에 서 있는 두 그루는 허리 높이에서 잘려 있고, 뒤 쪽에 서 있는 두 그루는 멀쑥한 키를 자랑한다. 아마도 그것도 잘려나갈 운명일 것이다.
명옥대
명옥대는 봉정사로 오르는 사람들의 소란을 한켠에 밀어두고 조용하게 홀로 서 있다.
"경북 문화재 자료 제 174호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산 72호
이 정자는 1665년에 사림에서 옛날 퇴계선생이 후학들에게 강도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누각형 정자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닭다리 형상)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사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내진주와 주상(기둥 표면)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원래 뒤쪽 두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이 전면적으로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판의 기록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였으나 육사형(이름은 기)의 초은시에 나르는 샘이 명옥(소리치는 옥바위)을 씻어 내리네라는 글귀를 따라 명옥대로 개칭했다고 한다. …맞은편 바위 표면에 명옥대라는 암각서(바위에 새긴 글자)가 남아 있다. 초서 현판은 창암정사로 퇴계선생 몰 후 94년 만인 … 개곡 이이송 등이 곡식과 재물을 모아 지은 건물이다."
《안동의 문화유산》 속에 보이는 일절이다. 이 책의 짧은 기록 속에는 이 건물이 1665년에 지어졌다고 쓰여 있기도 하고 1664년에 지어졌다고 쓰여 있기도 한데, 어느 편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명옥대의 정면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동쪽에는 명옥대라 씌여 있고, 서쪽에는 창암정사라 씌여 있다.
명옥대는 마루판과 석가래, 지붕은 개수한 것이라 한다. 그 형상과 기둥만이 옛 것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기둥은 파이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여 세월의 흔적이 흠뻑 느껴진다. 개수한 곳들은 세월을 느낄 수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명옥대가 완벽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지붕의 양쪽은 무너져 있는 것이다. 주인이 없는 문화재의 개수와 보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알려주는 사례라 하겠다.
명옥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오르는 곳은 북 서쪽이다. 나머지 부분은 빠짐없이 난간이 둘러쳐져 있는데, 그 부분만은 난간 만큼의 넓이로 안으로 들어앉아 있다. 중앙과 양쪽으로 3개씩, 아홉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좁은 평면이다. 중간에 세 개의 기둥을 박았다는 것과, 기둥의 위 아래로 각진 구멍에 틀어막은 사각나무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은 안내판의 기록대로 이 곳에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을 암시한다.
동북면 천장 아래로는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
"명옥대(대의 옛 이름은 낙수이나 이제 육사형의 시 나르는 물이 명옥을 씻어내리네라는 것을 취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절의 골짜기 입구에는 기이한 바위들이 여러층 쌓여 있는데 높이가 몇 장이나 된다. 물은 그 위로부터 아래로 쏟아져 내려 하나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지난 병자년 봄에 나는 종제인 수령과 같이 절에 머물러 책을 읽으며 여러번 이곳에 나와 놀았다. 권민의와 강한 등도 함께였다. 떠난 뒤에는 다시 올 기회가 없었는데, 나의 아우는 불행히 일찍 세상을 뜨고, 권 강 두 사람도 죽은지 이미 오래이다. 나는 지금 여정의 틈을 이용하여 혼자 여기 이르러 지난 일을 더듬어 보며 회상에 잠겨 본다. 어찌 느낌이 없겠는가? 이렇게 시를 지었다.
50년전 이 곳에 노닐 적에는
꽃에 뒤덮여 봄에 취하였다네
같이 노닐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푸른 바위만 흰 물줄기 걸어놓고 혼자 남았네
흰 물줄기 푸른 바위 경치는 더욱 기험한데
와서 즐기는 이 없는게 물과 숲의 슬픔일세
다른 때 좋은 일 있었는가를 묻는 이 있다면
계옹이 예 앉아 노래하던 일을 들려 주게나
(이 두 시는 퇴도 선생의 것이다. 옛 현판은 선생의 친필로 현종 병오년에 처음 걸었으나 4갑 병인 후 16년에 없어졌고, 신사년 4월에 다시 새겼다.)"
현판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명옥대 안에서는 그대로 물소리에 파묻힌다. 바로 옆이 계곡이고, 누각의 동편은 정면으로 바위를 타고 내리는 짧은 폭포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거리가 3-4미터 정도는 될까? 진실로 명옥대라는 이름은 이 정자가 아니라 그 바위의 것이라는 점을 그 자리에 서 보기만 하여도 우리는 실감할 수 있다. 정자는 다만 그 명옥대를 감상하기 위한 장소일 따름이다.
명옥대 바위는 크고 듬직하다. 마치 황소가 둔중한 몸체를 드리우듯, 명옥대 바위는 계곡을 가로질러 무겁게 주저앉아 있다. 위쪽은 갈라진 솥뚜꼉 같은 바위가 한 층으로 놓여 있지만, 그 외에는 하나의 펑퍼짐하고 둥그런 모양의 바위이다. 높이는 4미터 정도 되지만, 옆으로는 그 세배 네배 길이로 퍼져 있다.
명옥대 위쪽에서 계곡은 밋밋한 경사면을 타고 수평을 그린다. 그 위 5-6미터 쯤까지 정자에서는 계곡을 볼 수 있다.
봉정사 앞쪽을 타고 내려온 물길이 오래 유영하다 작은 관목 사이를 헤치고 나타나면, 거기서부터 명옥대 영역이다. 물은 계곡을 타고 걸터앉은 바위면을 좁게 비집고 흐르며 작은 낙차를 이르는 바위 사이를 뛰어내리고, 경사진 바위면은 골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여러 개의 작은 낙차를 뛰어내려서 결국 명옥대에 이르므로, 계곡에는 명옥대를 뛰어내리는 낙차 큰 물소리 사이로 작은 바위들의 단층 사이에서 마련하는 낮은 음조의 물소리가 뒤섞여 울린다. 촤르륵 착 착 하는 것은 작은 음조의 물소리들이고, 쏴 쑤아 하는 것은 큰 음조의 물소리이다.
계곡의 물들은 그렇게 다양한 화음을 이루며 명옥대 영역을 선언한다. 그런 물소리들이 주변을 포위하여 우리의 마음 속 티끌을 수도 없이 씻어내린다. 솔 잎 사이를 불어 온 가을 바람도 그 점에서 한몫 넉넉히 담당한다. 나무들과 풀 사이에 지천으로 날아내린 온갖 화사한 자연의 색깔들도 빼놓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퇴계 선생이 즐겼다는 봄 꽃들 속의 명옥대 영역도 이랬으리라. 그 때는 약동하는 봄날의 기운이 가져다주는 따사로움이 더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갔을까? 그러나 만추의 가라앉은 기운이 가져다 주는 차분함도 그 이하라 할 수는 없으리라.
저 봉정사 영역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소리와 차소리만 없었다면 진실로 나의 그러한 감상은 오래 계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봉정사 영역이 여전히 자연 속에 남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다시 나래를 폈다.
어쨌든 명옥대 위의 물들은 가닥져 흐르며 작은 소리들을 만들어내고, 명옥대의 거대한 몸체를 만나서는 한데 뭉쳐서 그 힘으로 명옥대의 몸체를 일선으로 파 홈을 내면서 정자 쪽을 향해 치달려 나간다. 그것은 이끼 낀 명옥대의 둥근 몸체를 타고 촤르륵 흘러내리다 그 끄트머리에 이르러 날쌔게 뛰어내리며 쏴아 하는 세찬 음조를 토해낸다. 그리고 계곡 바닥에 이르는 것이다.
계곡 바닥은 명옥대를 따라 좌회전한다. 명옥대의 끝까지 나아가서 아래쪽 경사면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린다. 명옥대의 끝에는 바위면을 긁어 한자로 글자를 써 놓았다. 큰 글자는 명옥대, 읽을 수 있다. 작은 글자는 돌이끼가 끼기도 하고, 세월이 마모시키기도 하여 읽기 어렵다.
계곡이 바위 명옥대 아랫면을 타고 회전하는 것은 정자가 서 있는 영역을 침범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바위 명옥대 위 쪽에서 정자 영역을 보면 그 이유는 금방 설명된다. 정자가 서 있는 바닥 전체가 한덩이 넓은 너럭 바위 위인 것이다. 산기슭을 잘라서 그 너럭 바위 위에 덮고, 그 위에 정자가 들어앉은 것이다. 그러니 계곡은 이쪽의 바위 명옥대와 저쪽의 정자가 앉은 너럭바위 사이의 틈을 비집고 휘도는 것 외에는 선택할 방법이 없었던 셈이다.
자연, 그리고 정자
정자는 분명히 인간의 공간이다. 정자를 만든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조선 중 후기의 선비들이 있다. 조선 중 후기의 선비들이야말로 정자의 문화, 그것도 자연 속 정자의 문화와 잘 어울리는 것이다.
정자는 자연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간다. 그것은 어쩌면 쉼의 공간, 놀이의 공간이 될 수도 있는 속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쉼이나 놀이의 의미만을 중심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면, 정자의 미학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그 쉼과 놀이의 의미를 수양과 자연 배우기의 의미로 전환시켜 낸다.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 자연이 되는 지점으로 정자의 의미를 완성시켜 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자 주변에서 자연의 아름다움 외에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중첩시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비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가장 중요한 공부처이다. 퇴계 이황의 공부처가 봉정사였고, 명옥대 영역이 그가 자연과 만나는 전진기지 였다는 점을 우리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퇴계 이황은 명옥대 영역에서 맨몸으로 자연과 만나고, 자연을 닮아갔다. 퇴계의 후학들은 그런 퇴계의 길을 좇아 훨씬 더 의식적으로 자연에로 다가가는 길을 만들어 낸다. 정자 명옥대는 그 상징물이다. 명옥대에서 우리는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퇴계 이황의 그림자를 보고, 그의 발자취를 뒤따라 자연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했던 그의 후인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누가 누구를 뒤따르는가를 구분해 보는 것은 헛된 일이다. 문제는 그들의 목표점이다. 자연닮기라는 그들의 목표점이야말로 우리의 시선이 머물러야 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우리 또한 자연을 닮은 인간으로 되어 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이 점에서 엇갈린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도 자연을 보지 못하고, 자연이 되지 못한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 속에서도 인위의 성시를 보고, 도회의 번잡스러움을 소망한다. 봉정사 영역! 그곳은 명옥대 영역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그곳을 도회로 바꾸어 가고 있다.[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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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천근 교수의 자연속의 선비문화연재는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청량산과 오산당을 시작으로 고산정 백운정 만휴정 방호정 석천정 창암정 초간정 애일당과 긍구당 겸암정 그리고 명옥대까지 2년여동안 직접 답사취재해 주시고 《안동》지에 귀중한 원고를 보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