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별을 묻던 날′ 작가 박기현(글/김영희_경기도 과천 사는 안동사람, 객원기자)
별을 묻던 날, 그 아련한 향수
바로 네 살 터울의 손위 형과 나는 그때만 해도 좋은 시겟도(스케이트) 하나를 정말 장만하고 싶어했다. 무지무지 타고 싶던 소문에만 듣던 양날 시겟도를 안동에서 처음 보던 날, 나는 오히려 그 괴상망측한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마도 시내에서 가장 갑부였을 듯싶은 K의원(국회의원 말고 병원을 이야기하는 거다)네 형이 그것을 처음 타고 무릉 암산 시겟도장에 나타났을 때 시겟도장은 부러움 반과 촌티나는 촌것들의 괴성으로 웅성거렸다.
그 가죽신으로 묶어 맨 날렵한 몸매며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광채가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부자유스럽다고나 할까. 하여튼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빼고 고개와 허리를 숙인 채 타는 모습에 나와 내 친구들은 아예 배꼽이 빠져라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창(지팡이)이 없는 시겟도라니. 우린 손을 허리춤에 놓고 두 발로 멀쩡하게 서서 얼음을 지치는 그 형을 보며 기가 막혀 했다.
“야들아, 저게 뭐고? 저게 시겟도라고? 멀쩡히 서서 타는 기 꼭 오짐 싸는거 같지 않나? 저게 서울식인가 보제? 아따 야, 거참 희한도 않데이.” (<별을 묻던 날> ‘시겟도’ 부분)
박기현의 소설 <별을 묻던 날>에는 1970년대 안동의 모습과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낙동강, 선어대, 암산, 법흥동, 도산서원 등 안동의 곳곳에 묻어 있는 10대들의 애틋한 청춘과 미래의 꿈 그 꾸밈없이 행복했던 한 때가 있다. 안동의 자연풍경과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과 하루하루 끊임없이 새로운 놀거리를 찾아냈던 십대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어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실제로 이 책은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되어 3개월간 방송되기도 했다.) <별을 묻던 날>은 전적으로 안동이 무대인 책이지만 정작 안동에서 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읽혀졌는데 저마다의 따뜻했던 고향의 기억을 추억하면서 향수를 달래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은 작가 박기현에게도 고향에 대한 지독한 향수이다. ‘27년만의 귀향’이라는 장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지겹디 지겨운 향수병은 내가 출장길에 오를 때마다 재발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만 내려가도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속이 후련해져 그만 어린시절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대구 근처만 가도 벌써 고향 사투리가 입에서 절로 튀어나오고, 역전에 나가면 <매일신문>부터 사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다 일을 마치고 상경할라치면 기차가 수원 근처에만 들어서도 벌써 가슴이 답답해지고 헛헛해지면서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그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왜, 그리 멀지도 않은 고향을 향수병이 생기도록 가보지 않은 것일까. 고향 친구의 부친상으로 27년 만에 안동에 가게 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들은 제 놈이 무슨 항일운동하러 떠난 독립투사도 아니고 외국 유학이라도 떠나 큰 공부하러 나간 놈도 아닌 터에 고향 가진 걸 뭐 그리 유세냐고 할 테지만 난 고향 가는 것을 내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기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선 고향을 밟아선 안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자 고집이었다. 다른 일에는 늘 두루춘풍이었건만 고향에 대해서만은 옹고집을 지켜온 셈이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렇긴 하지만 그는 왜 유독 고향이라는 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었을까.
“저의 정서적인 삶은 중학교를 마치고 안동을 떠나 서울로 오면서 끝이 났습니다. 인생이 거기서 멈춰진 것 같아요.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서울로 온 사람은 인생이 슬퍼졌어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죠. 어떻게 하든 안동에 있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랬다면 제가 잘났든 못났든 안동을 위해서 정체성을 가지고 생활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때는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 동기까지 설득해서 서울로 왔지요.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 서울로 오면서 안동의 문화와 헤어졌고 그 다음부터는 좌충우돌의 삶이 되었어요. 그래도 저에게는 안동에서의 삶이 풍요로운 정서로 남아서 이제까지 제 삶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너무 고마운 일이죠. 그래서 그것을 안동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안동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갖게 해 주었던 안동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썼던 소설이 <별을 묻던 날>이 아닌가 한다. 이 책 한 권만으로도 고향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기에 충분한 것 같은데 그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안동은 풀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있다고.
소설가의 꿈
그의 집은 안동군청 근처였는데 굉장히 호기심이 많아서 안동 시내는 물론이고 안동 인근지역도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고 의성이나 심지어 대구까지도 자전거로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해서 매일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며 크고 작은 일들을 벌였는데 모두 자신의 호기심 탓으로 돌렸다.
그나마 책읽기는 좋아하는 아이였던지 초등학교 4학년 때 경찰관인 아버지가 ‘황순원 전집’을 사다주셔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4학년이 읽기에는 너무 조숙한 책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독서에 눈이 뜨이고 자신의 독서경향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당시에 안동대교 건너편 뚝방 길에 이육사 시비가 있었는데 그 시가 크게 가슴에 와 닿아서 어렴풋이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지만 백일장에 나가서는 번번이 떨어졌다고.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이 초등학생의 동시 한 편을 보여주면서 잘 썼다고 칭찬했는데 자신이 초등학교 때 백일장에 냈던 시들과 다르지 않아서 뒤늦게 위로를 받았다고 웃었다.
이어령 선생은 그가 30대 기자 시절에 쓴 <이어령 문화주의>로 인연이 되어 현재까지 스승과 제자처럼 이어오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한 명인데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이어령 문화주의>란 책을 쓰고 당시 장관이던 이어령 선생과 독대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에게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어서 몇몇 책을 얘기했더니 ‘시간이 그렇게 많으냐’고 하면서 20대까지는 다양한 책을 읽지만 그 이후로는 관심 있는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서 당시 가장 미약한 분야인 ‘가야사’를 선택했다. 3~4년 정도 공부하니 가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중국, 일본의 역사까지도 꿸 수 있게 되었다. 그 일로 공부하는 기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전남일보에 가야 관련 장편역사소설 ‘신들의 고향’을 연재하게 되었다. 기자에게 연재소설 의뢰가 들어온 것을 의아해 했더니 당시 좀 팔리는 추리소설 작가였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 영향을 준 또 한 명은 신문기자 시절 그를 가르쳤던 선배인데, 글을 제대로 못 쓴다고 늘 퇴짜를 놓다가 3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고 한다. ‘정말 칼럼을 잘 쓴다’고 칭찬을 했는데 그때는 정말 눈물이 다 났다고.
이제까지 그가 쓴 책은 스물여섯 권 정도 되는데 자신이 기획해서 쓴 것보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서 쓰다 보니 이것저것 산만한 것 같지만 역사와 실용서로 요약이 된다. 그 중에서 많이 팔린 책은 <조선의 킹메이커>로 3만부 가량 팔렸고, <이십대에 해야 할 마흔여섯 가지>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독자 투어를 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TV에 방송되었던 것은 고두심 씨가 진행을 했던 <HD역사스페셜>이 있고 인기는 많이 없었지만 공을 많이 들였던 <우리 역사를 바꾼 귀화 성씨>도 주목할 만하다.
올해는 너무 바빠서 책을 내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두 세권 정도 책을 낼 준비를 마쳤고 의뢰를 받아 집필하기로 계획하고 있는 것이 6-7권 정도 기다리고 있다. LG그룹을 시작으로 대기업, 신문사, 출판사 등 한 곳에 있기보단 늘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며 나아갔지만 언제나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 흐믓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써야 할 책이 밀려있다는 것도 행복한 고민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친구들처럼 모든 것을 갖춰놓지는 못했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부러워하는 면이다.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있다면 작가이다 보니 본능적으로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별을 묻던 날>과 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책을 쓰는 것이다. 안동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정체성을 고민하며 살았다지만, 단절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처받지 않고 온전히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그것이 삶의 동력이 된다니 더욱.
또 다른 삶
그의 명함을 보았을 때 작가와 저널리스트라고 되어있는 건 당연하게 여겼지만, 성경구절과 함께 OO교회 담당교역자와 노바스터디 교장이라고 되어 있어 의아해했다. 자신이 크리스천인 것을 알리는 것인가 보다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목사라고 해서 적잖이 당황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처음 시작은 대부분 그렇듯 크리스마스 때 사탕 얻으러 간 것이 발단이었다. 그 후로도 교회는 열심히 다녔으나 믿음이 크지는 않았는데 IMF때 아내가 하던 사업이 실패를 하면서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잊고 있었던 믿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의 구슬들이 가지런하게 꿰어지는 것을 경험했고 인문의 숲과 성경의 숲을 조화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워낙 늦게 신학을 해서 나이가 많아 받아주는 곳이 없는 탓도 있지만 나름의 철학이 있어서 안산에 조그만 교회를 개척해서 개척교회 목회자라는 명칭을 하나 더 가졌다. 신도수가 30여명 정도이나 그는 교회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자비량 목회자이다. 그러다보니 생활을 위해 더 열심히 뛰어야 하지만 오히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 크고 진지하다. 주말에는 교회를 돌보고 성도들을 심방하고, 화요일에는 서울에 노바스터디라는 성경모임을 이끌고 있다. 모두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라 예수님을 따르기 쉽기 않지만 이제까지 그 자신이 궁금했던 것, 자신이 지금까지 파악한 것을 솔직하게 나누니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사람들과 영적인 교류를 나누는 일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부터는 ‘상록의 아침 묵상 편지’를 원하는 지인들에게 발송하고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새벽시간에 묵상한 것들을 메일로 보내고 있다. 자신의 부끄러웠던 삶을 고백하게 되지만 메일을 받는 사람들이 좀 더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게 되기를 기도하게 된다. 취재 이후 글쓴이에게도 보내주고 있는데 그의 진솔한 고백이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지금보다 나은 모습을 지닐 나이, 육십을 기다리며
하루에 두 세 시간의 잠밖에 자지 못하면서 자기 자신만이 아닌 타인의 삶을 걱정하며 위로하기를 원하는 그를 생각할 때 그냥 감사한 생각이 든다.
이제야 비로소 인생의 틀을 갖춰가게 되었다는 그는 육십을 기다린다.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모습이 되어 있지 않을까 설레며 기다린다. 더 풍성해질 자신을 기대하며 기다린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