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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철 별미, 안동식혜(글/조필출)

학교에서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갔지만, 학교에 도착하니 정오가 지났다. 먼저 온 친구들이 반갑게 손을 잡는다. 먼길 오느라 배고프겠다며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탁에는 애호박 부침개, 싱싱한 배추 겉절이, 날콩가루를 무쳐서 찐 풋고추 무침이 있었다. 고향에서 즐겨먹던 음식이 상위에 가득 차려져 있었다. 그리고 후식으로 안동식혜가 나왔다. 우리는 환성을 지르면서 식혜 맛에 푹 빠져들었다. 한 공기를 단숨에 비우고 그릇을 내미는 내게, 고향친구는 더 먹으라며 다시 채워주었다.

안동식혜는 그 이름처럼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지방에만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요즈음 흔히 사 먹을 수 있는 식혜와는 우선 무를 넣는 것이 다르고 고춧가루를 넣는 게 또한 다르다. 깨끗하게 씻은 무는 채를 썰거나 얇고 조그맣게 깍둑썰기를 한다. 고춧가루는 고운 삼베 주머니에 넣고 엿기름물에 주무르면, 마치 오미자를 우린 물처럼 고운 고춧가루 물이 우러나온다. 그 물에다 생강즙과 식혜밥 그리고 무채를 버무려서 항아리에 담는다. 항아리를 담요에 싸서 뜨거운 아랫목에 두고 서너 시간 숙성시킨 후, 급히 꺼내서 찬 곳에 하루쯤 두면 먹을 수 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만 있는 식혜인 것이다.

안동식혜는 함경도 지방의 가자미 식해처럼 담백한 맛은 아니지만,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난 뒤처럼 개운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잘 발효시킨 식혜의 맛은 매콤하면서도 새콤한 단맛과 무의 시원한 맛이 잘 어우러진 겨울철의 별미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료가 어우러져 가장 조화로운 맛을 내는 것이 안동식혜가 아닌가 한다. 서울식혜도 그렇지만 안동식혜는 겨울에 만들어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요즘에는 자주 먹을 수 없지만 이따금 맛보게 되면 아련한 향수에 젖게 하는 고향 음식이다.

모든 음식이 다 그렇듯이 안동식혜도 어려서부터 먹으면서 자란 사람이 아니고는 얼른 그 맛을 알지 못한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세배를 온 사위에게 친정 어머니는 별식이라며 식혜를 내 놓았다. 남편은 처음 보는 음식에 놀란 듯, 맛을 보고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배가 부르다는 핑계를 대면서 나박김치 같은 빨간 고춧가루 물에 무채와 밥알이 섞여 있는 모양이 생소하고 맛이 너무 매웠다고 했다.

처음으로 안동식혜를 먹어본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사람도 쉽게 사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처음엔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한 번 사귀고 나면 그런 사람의 깊은 우정을 느낄 때가 있듯이, 안동식혜도 처음엔 인상이 좀 그렇지만 일단 그 맛에 젖어들기만 하면 잊을 수 없는 연인처럼 연연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먹을 때의 거북함을 삭이고 나면 안동식혜의 진정한 맛에 젖어 들 수 있다. 오묘한 맛의 세계는 빨리 열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지금도 나는 겨울이 되면 식혜를 담가놓았다는 언니의 전화를 기다린다. 그러나 남편은 그런 식혜가 무에 그리 맛이 있느냐며 먹지 않는다.

언제쯤이던가, 차가운 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는 추운 겨울 저녁, 살짝 얼음이 도는 식혜 한 그릇을 먹으며 몸으로 저려오던 오싹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쌀로 만든 식혜는 부드럽지만, 좁쌀 식혜는 작은 알갱이가 입안 가득히 퍼지는 까실한 맛이 좋았다. 건더기를 다 먹고 난 후에 후루룩하고 식혜국물을 마시면, 목을 타고 넘어가며 톡 쏘는 자극이 안동식혜의 잊어버릴 수 없는 맛이다. 쉽게 단 것을 먹기 어려운 때 맛보았던 식혜의 달짝지근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지금의 아이스크림보다 더 좋은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다.

사람에겐 어려서 길들여진 맛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있는 것이다. 지독한 냄새 때문에 창문을 다 열어놓고 끓여먹어야 하는 청국장, 외국사람들이 즐기는 치즈에 대한 향수가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맛의 향수는 동서가 다르지 않다. 처음엔 역겹던 치즈를 지금은 얼마나 맛있게 먹고 있는가. 모두가 자기들이 즐겨먹었던 음식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외국에 사는 친구가 다니러 왔다. 오랜만에 조국을 찾은 친구가 고향음식을 먹을 수 있게 우리는 도토리묵이며 총각김치 같은 음식을 해 가지고 모였다. 그 중에서도 집안의 맏며느리인 친구가 식혜를 만들어 왔다. 네모난 통에 가득 담아 온 식혜, 우린 모두 군침을 삼켰다. 고향을 떠나 살면서, 우리들은 고향에서의 삶도 두고 온 듯,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그는 고국에 온다고 생각하니,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안동식혜였다고 했다. 어려서 먹었던 식혜의 맛을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의 마음을 헤아려 준 친구에게 고맙다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는 식혜가 아니라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고향의 정을 먹었던 것이다.
오늘따라 식혜가 먹고 싶다. 안동식혜가.[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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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출씨는 안동이 고향으로 올해 3월 수필로 '한맥문학'에 등단했으며, 현재 서울 중량구 면목동에 살고 있는 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