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엔 석기인들의 발자국 소리 어렴풋이 들리고(글/이동백_시인)
마애교를 건너 망천 절벽에 서다
낙암정을 벗어난 낙동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다가 단호리 끝자락에 와서는 남으로 방향을 급하게 잡는다. 굽이돈 흐름은 마애교를 지나면서 서쪽으로 나아가기 위해 또 한 차례 몸을 급하게 뒤척인다. 급하게 전진하는 몸을 미처 다잡지 못한 강은 큰 동심원을 그리며 흘러간다. 그 동심원의 가장자리에 인간의 오랜 흔적을 간직한 마애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근년 들어 단호 마을과 마애 마을을 잇는 마애교가 놓였다. 마애교는 단호의 남쪽 산자락 끝과 마애의 동쪽 산자락 끝을 연결한 다리인데, 낙동강은 그 밑을 깊게 뚫고 지나간다. 이 다리를 건너 길섶에 발길을 멈추고 강을 향하여 서면, 문득 천길 단애가 날아와 이마에 부딪힌다. 안동 십경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망천 절벽이다. 이 암벽은 억년을 물에 시달리고 깎이어 이루어진 하식애(河蝕崖)이거니와, 물이 돌보다 강하다는 말이 전혀 헛말은 아닌 듯하다. 이 하식애는 수직으로는 봉우리를 이루고, 수평으로는 단층을 이룬다. 봉우리는 크게 셋인데, 단층은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다. 마을에서 바라본 봉우리는 준엄한데, 단층은 섬세하다.
나는 필력이 모자라 망천 절벽 경치를 형용할 수 없어, 「영가지」에 실린 옛 사람의 것을 여기 옮긴다.
‘망천 절벽을 마라(嗎螺) 마애(麻崖)라고 하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망라담(網羅潭)이라 했다. 냇물은 영호루로부터 흘러내린 낙동강이다. 이 강의 남쪽에는 적벽(赤壁)으로 된 세 봉우리가 있는데, 동쪽 것은 준엄하면서도 단정하고 서쪽 것은 구불구불하되 높고 끊는 멋이 있으며, 중간 것은 작으나 그 기운이 온전하여 가파르고 예리하므로 옥동봉(玉童峯)이라 일컬었다. 봉우리의 서쪽에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가운데 정사(精舍) 몇 간이 있는데, 이는 곧 박사 이돈(李燉)이 지었다. 세 봉우리 아래 깊은 소(沼)가 있고, 흰 모래가 금대(襟帶)같이 두르고, 옥같이 긴 수림이 둘렀으매, 그 경치가 매우 기이하였다.’
적벽은 옛 그대로인데, 강은 옛 그것이 아니다. 절벽 밑으로 물은 깊게 흐르건만 이미 소는 아닌 듯하고, 강가의 소나무 숲은 지금도 푸르건만 금대를 두른 듯이 길지는 않다. 송림은 듬성듬성 무리지어 섰으되 연치를 더한 탓일까 그 기품은 고아한 멋이 넘친다.
강의 남쪽은 석벽이고 북쪽은 모래톱이다. 지난 날 이 모래톱은 넓고 길었다. 지금은 모래톱을 길게 가르며 습지가 들어서고 둑이 쌓여서 너름새가 옛날 같지 않다. 거기다가 모랫틈을 비집고 자란 갈대가 무성해서, 계절은 바야흐로 봄인데도, 그 마름 대궁이 강바람에 시달리고 있어서 저으기 사위스럽다.
그러나 습지의 버드나무엔 이미 봄빛이 곱게 찾아들었다. 신록이라기엔 아직 도드라지지 않은 연초록빛이 꽃보다 아름답다. 버들가지 연초록 어린 싹이 사람의 가슴 깊은 곳을 흔들어 놓는데, 아슴아슴 피어난 품이 이내 같기도 하고 아지랑이 같기도 하다. 습지의 풀숲에는 참새의 울음이 찌르레기 짓는 소리에 묻히고 있다. 풀숲에는 지금 먹고 먹히는 자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짓들이 임리(淋漓)하리라. 연초록 버들잎 밑에서 땅강아지의 목숨을 노리는 후투티가 살는지 모를 일이다. 강도 이와 같아서 허기진 왜가리 한 마리가 긴 목을 빼고 날아간다. 이처럼 봄철의 낙동강은 생명으로 넘쳐난다.
강둑에 올라서니 내가 강보다 높아 보인다. 사람이 둑을 쌓은 것은 강보다 높아지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둑을 쌓아 강의 것을 앗아버렸다. 강가의 땅은 원래 물의 것이다. 강이 홍수를 이룰 때 강은 물로써 자신의 소유를 가늠하고 확인한다. 이것은 강의 오랜 권리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람이 나타나서 둑을 쌓아 강의 권리를 자기 것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둑은 담이다. 담은 소유욕의 구체적 상징물이다. 담은 합법적인 소유의 범위를 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둑은 그러하질 못했다. 강의 동의도 얻지 아니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은 소유의 표식으로 둑을 쌓아 버린 것이다. 그 둑이 낙강과 마애 마을을 갈라놓고 있고, 그 위에 내가 서 있다. 사람의 탐심(貪心)에 홍수가 졌다.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공유하는 마애
마애 마을은 낙강이 큰 활처럼 돌아나가는 북쪽에 자리를 잡은 배산임수의 지형이지만 앞이 높고 뒤가 낮아 전형에서 좀 빗겨난 모습을 취한다. 뒷산은 낮은 구릉을 이루어 강에 이르는 면이 아주 완만하다. 그 완만한 사면(斜面)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 앞으로는 수령 수백 년의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섰는데, 강바람을 막기 위한 비보(裨補) 성격의 송림이다. 지금 숲은 ‘마애 솔숲 문화공원’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진성 이씨 집단 부락인 이 마을엔 선조 때 호조 정랑을 지낸 호봉(壺峰) 이돈(李燉)이 세워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가르치던 정자, 산수정(山水亭)이 있다. 이 정자에 들어 마루에 앉으니, 푸른 솔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검은 석벽이 푸른빛과 묘하게 어울린다. 정자의 처마 끝을 따라 절벽의 능선이 지나간다. 꽤 넓은 정자 앞뜰엔 잔디와 나무를 심어 조경을 가지런하게 해 두었다. 넓게 트여서 앞을 조망하기에 딱 좋다. 저어되는 바는 뜰의 나무가 자라서 솔숲을 가리고 적벽의 조망권을 앗아가지나 않을까 하는 일이다. 시판(詩板) 걸렸던 자리에 그 시판을 찍은 사진이 대신 걸렸다. 분실의 위험 때문인 줄은 알겠으나, 정자에 어울리진 않았다.
마을 뒤편 높은 곳에 오르니, 산하와 마을이 안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절벽과 물은 검어서 둔중하고 긴 모래톱은 갈대와 한 빛으로 따스한 느낌을 준다. 습지는 벌써 봄이어서 살아 퍼덕이는데, 절벽은 아직 겨울에서 깨어나지 못하여 생명의 기운이 먼 듯하다. 그러나 절벽은 마을 앞에 다락처럼 높이 솟았으되, 마을을 겁박하지 않아 시원하다. 그래서 절벽에 의지하지만 마을은 전혀 옹졸하지 않다. 마을은, 완만한 비탈을 따라 신구(新舊)가 섞인 가옥을 거느리고, 강을 사이에 두고는 토지가 마을을 에워두르고 있다. 또한 마을은, 동쪽은 높고 협소하지만, 서쪽은 탁 트이고 너르다. 그 너른 어름에 풍산들이 아득하다.
마애 마을은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를 공유하는 마을이다. 안동 지방에서 청동기 유물이 더러 발굴되기는 했으나, 석기 시대 유물이 발굴되기는 마애가 유일하다. 이런 점에서 마애는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마을이다. 마애 선사 유적지는 ‘마애 솔숲 문화 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하안 단구(河岸段丘) 지층에서 발굴된 이 유적지에서는 3~4만 년 전 후기 석기 시대로 추정되는 주먹 도끼, 찌르개, 몸 돌, 망치돌, 긁개, 찌개 등의 유물들이 다량 나왔다. 이를 보전하기 위하여 ‘마애 선사 유적 전시관’을 세웠다.
선사 시대에 연원을 둔 마애는 역사 시대로 넘어 오면서도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데, 우선 살펴볼 만한 사적(史蹟)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마을의 동쪽 솔숲 속에 자리 잡은 이 불상은 팔각 조대 위에 좌정하고 있으며, 비록 광배는 유실되었으나 그 형체는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오랜 풍상을 겪어오는 과정에서 나발이나 얼굴 등에 마멸이 심하다. 비록 마멸이 심하여 볼품없이 보이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결가부좌한 자세, 팔각 연화 좌대 등에서 넘치지 않는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주변에 와편(瓦片)이 흩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데, 예전에 ‘망천사(望天寺)’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자리에 무덤 두 기가 차지하고 있다.
이 석불과 더불어 마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성 이씨 문중이다.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 공이, 말이 달리는 형상으로 후대에 자손들이 오래도록 번성할 터라는 풍수의 권유에 따라, 진보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진성 이씨는 이 마을과 인연을 맺는다. 고려 말 사람인 이자수는 밀직부사를 지낸 이석의 2세로서 홍건적 토벌로 공을 세워 송안군으로 봉작된 사람이다. 이로부터 이 마을은 오랜 진성 이씨 집성촌을 이루어왔다. 송안군의 후손으로 이 마을에 세거하면서 이름을 낸 사람은 이돈과 이회보 부자이다. 석병(石屛) 이회보(李回寶)는 인조 때 초시, 복시, 전시에서 모두 장원 급제를 하여 당시 조야를 놀라게 한 사람이다. 좌랑 벼슬을 지낸 그는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하고, 김상헌과 더불어 척화를 주장하다가 삼전도 나루에서의 치욕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우율(牛栗) 문묘 배향에 관여한 노론이던 그는 김자점을 논척(論斥)하고 남한산성에서 겪은 일을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로 남겼다.
낭만적이지 않은 촌로들의 삶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이 마을은 현재에도 진성 이씨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전씨와 신씨네가 몇 집 들어와 살고 있을 뿐이다. 마을엔 종가를 비롯해 오랜 와가 몇 채가 낡은 한옥과 어울리지만,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말쑥하게 지은 양옥도 여러 채 들어서 있다. 노란 민들레, 꽃다지와 흰 냉이 꽃들이 봄바람에 살랑거리는 골목길을 걷다가 땔감을 톱으로 켜는 이장희(87) 옹을 만나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귀가 먼 그를 대신해서 부인인 권오란(76) 할머니가 말 상대를 해 주었다.
대두서 독점 마을에서 마애로 시집왔다는 그녀는
“처음 마을에 들어오니 저 층이 곧장 이마에 와서 대는 것 같더라고…….”
했다. 그녀는 절벽을 ‘층’이라 지칭하였다. 층이 있어 마을이 아름답다니까, 뜸금 없이 요새 같으면 이 마을로 시집올 일은 없었으리라며 말을 받아치고 나왔다. 또 왜냐니까,
“내가 뭐 하로 여 왔을니껴.”
반문하고 만다.
“옛날에 홍수가 지면 마을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어. 우리 종가 마당까지 물이 들기도 했니더. 또 옛날에는 모래가 훤하게 물가를 덮었는데, 지금은 쑤가 됐니더. 물도 예전 같잖고. 그때는 참 맑았잖니껴.”
댓 마지기의 땅을 후답하기 힘들어 콩이나 심어야 하겠다며, 그녀는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마을에 피어나는 복숭아꽃처럼 사람들의 삶은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멀리서는 겨울인데 가까이엔 봄이 왔다
다시 마애교를 건너 마애 절벽으로 이어지는 임도로 길을 잡았다. 마애를 높은 곳에서 보면 어떠할까 해서였다. 6Km의 산길 섶으로는 살구, 산수유, 생강나무의 꽃들이 겨울 동안 묶어두었던 생(生)을 풀어 꽃을 흠뻑지게 피워내고 있었다. 분홍빛 참꽃은 기슭에 기대어 봄바람을 희롱하고 자줏빛 제비꽃은 얼다가 풀린 땅 냄새에 취했다. 길섶엔 봄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산버들의 연초록 꽃이 솜처럼 피어서 아름다운데, 벌써 그것을 알아보고 벌들이 찾아와 진을 치고 있었다. 멀리서는 겨울이던 산이 가까이서는 이미 봄이었다.
봄을 완상하며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니 천길 밑으로 검은 낙강이 모래톱을 휘감고 누웠고, 마애 마을엔 구름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이따금씩 햇살이 구름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었다. 마을 뒤로는 낮은 구릉이 학가산 근처까지 미치는 듯했다. 세상이 발밑에 머무는데 멀리 학가산 무리가 산악으로 아미(蛾眉)에 와서 걸린다. 절벽 높은 곳에 이르러 시를 생각하지만, 내 것이 아닌, 옛것의 대구(對句) 한 절이 문득 가슴을 울리고 올 뿐이다.
두로(杜老)의 곡강(曲江)이 응당 멀지 않고,
소선(蘇仙)의 적벽(赤壁)에 또한 부끄럽지 않네.
杜老曲江應不遠 두로곡강응불원
蘇仙赤壁也無慙 소선적벽야무참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의 시이다. 구름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능선 길을 내려오는데, 검은 바위에 기대어 도화 한 가지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여러 갈래로 나뉜 가지 가운데 유독 바위에 의탁한 가지에만 꽃이 피었다. 따스한 햇볕과 검은 바위와 분홍 꽃의 조화가 길손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가고 만다.
산길은 내려서니 남후면 하아 마을이었다. 하아는 아곡의 북쪽 끝, 낙동강에 접한 마을이다. 어느덧 낙동강은 길손이 가는 길의 복쪽에 머문다. 지금 하아 마을과 마애 마을 서단의 하수 종말 처리장을 잇는 다리가 놓이고 있다. 2011년에 완공될 다리라 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차량과 사람들이 작업하느라 분주한데, 강도 더불어 분주하다. 교각이 들어서고 높다란 크레인이 강심에 들어섰다.
하아 마을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엔 비닐하우스 몇 채가 강 쪽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는 딸기 수확이 한창이다. 작은 마을을 벗어나면 깊고 긴 골짜기가 길손의 발길을 이끈다. 골짜기를 재우쳐 고갯마루에 이르니, 아스라이 먼 곳에 낙동강이 눈 안에 비쳐든다.
골짜기는 높은 데로 이르는데, 강은 낮은 데로 흘러간다. 골짜기야 사람의 입장에 매여 높은 데로 이를 수도, 낮은 데로 이룰 수 있건마는, 지금 내가 깨우친 우주의 섭리는 높은 데로 닿은 것은 골짜기이고,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은 강이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