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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항구 라로셀에서 폰드곰 동굴 유적까지(글/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카르냑의 거석문화 중 꼭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카르냑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4키로 떨어진 로크마리아케르(Locmariaquer)에서 거대한 선돌(Menhir)과 거석분묘를 보고 그래도 꼭 보고 싶은 곳이 한군데 있었다. 카브리니스의 거석분묘(Cairn de Gavrinis)라는 유적이었다. 로크마리아케르의 박물관에서 물어보니 바다를 바로 건너면 닿는 곳인데 차로 가려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미 시간이 12시 반이 다 되었는데 그래도 돌아봐야 얼마나 돌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가보자고 하니 욕심을 내서 차를 몰았다. 박물관 직원은 친절하게도 자세하게 알려주긴 했는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건성으로 듣고 마을 이름만 알아서 내비게이션에 입력을 했다. 직선거리 4킬로미터를 무려 27킬로나 돌아가야 했다.

어쨌든 꼬불꼬불한 해안 마을 골목을 돌아 유적이 있다는 라몰-바덴(Lamor-Baden)에 도착했다. 마을 안에 주차장이 있어 주차를 시켜놓고 지나가는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길 끝의 부둣가 사무실 하나를 손가락으로 알려주었다. 사무실은 점심시간이라 아무도 없었다. 30분이나 기다렸을까, 여직원 둘이 들어왔다. 거기서는 유적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팔고 있는데 문제는 유적이 배를 타고 가야하는 바다 건너 섬에 있으며 배 시간은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며 돌아오는 배는 또 두 시간 후에 있다고 하니 섬엘 갔다 오면 저녁때가 다 될 것이다.

아쉽긴 했으나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인 라로셀로 떠나기로 했다. 바닷가의 포장마차에서 큼직한 샌드위치를 사서 요기를 하고 라몰-바덴 마을을 떠났다. 밴스(Vannes)와 무지약(Muzillac)을 거쳐 낭트를 남쪽으로 우회하여 라로셀로 가는 길 양쪽에는 해바라기 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남쪽 바닷가의 천년 항구 라로셀에 들어간 것은 밤 9시 반이나 되어서였다. 290킬로미터를 몇 군데 쉬어서 천천히 오다보니 7시간이 더 걸렸다.

바다 위에 뜬 고성 - 라로셀
내비게이터의 번지가 정확하지 않아 같은 길을 몇 번을 돌아 찾아간 호텔은 좀 한적한 듯한 하천 옆에 있었는데 라로셀 구시가에서 1.5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간단한 식사를 하고 라로셀의 야경을 보러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다리가 그리 편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야경을 별로 보지 못한 터라 관광안내서에 나와 있는 라로셀 고성의 야경을 보는 것도 괜찮은 듯 했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바닷가로 나갔다. 도시는 완전히 암흑가로 변해 있었다. 바닷가 쪽으로 가는 길은 가로등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관광지라는 것이 전혀 실감나지 않았다. 대충 바닷가 쪽으로 방향을 잡고 큰길을 골라 걸었다. 중간에 라로셀 기차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차역이라기 보다는 무슨 오랜 성처럼 보였다. 바닷가에는 요트들이 많이 정박해 있고 해양박물관(MUSEE MARITIME)이라고 쓰인 큰 배 한척이 가까운 곳에 떠 있었다. 배를 그대로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듯 했다.

바닷가 벤치에 앉아보니 좁은 만의 건너편으로 라로셀 고성이 조명불빛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고색창연한 옛 성이 마치 무대배경처럼 보였다. 일렁이는 바닷물에 거꾸로 비친 그림자가 한껏 풍경을 보태주고 있었다. 순간 다리의 피로가 달아나 버렸다.

이튿날 아침 다시 본 라로셀의 구항은 좁은 수로가 이리저리 얽혀있고 작은 인공호수같은 부두시설에는 요트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옛 성은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성 위에 오르면 멀리 라로셀 외항 밖으로 펼쳐진 푸른 대서양의 수평선이 보였다.

구항(舊港)의 입구에 위치한 옛 성은 14세기에 세운 2개의 육중한 탑인 생니콜라 탑과 라셴 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탑이 마치 라로셀을 지키는 육중한 대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보였다. 성에서 나와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시가지로 들어가려면 14세기에 처음 지었다고 하는 라그로스 오를로즈 문(La Porte de la Grosse Horloge)을 통과해야 한다. 그로즈 오를로즈는 큰 시계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성문 위에는 거대한 시계탑이 세워져 있었다. 성문 안으로 깊숙이 연결된 길 양쪽으로 중세풍의 건물들이 도열해 있었다. 길의 폭이 좁은데 비해 양쪽의 건물들이 풍기는 위엄은 길을 걷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했다. 이 건물들은 주로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지어졌다는데 당시 라로셀이 무역항으로서 얼마나 번창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도로 쪽으로 회랑이 있어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긴 회랑 안쪽으로는 명품 상점들이 관광객의 발길을 끌고 있어 중세와 현대가 묘하게 어울려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라로셀은 그저 하룻밤 묵어가는 곳이었으나 유럽의 작은 도시 하나하나가 스쳐 지나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들이다. 그래도 어쩌랴, 맛보기라도 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중세와 현대의 절묘한 조화 - 보르도
정말 그냥 스치기 아까운 곳은 보르도였다. 보르도는 포도주의 고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으나 로마시대 원형극장, 프랑스 최고의 건축물로 알려진 18세기 후반의 대극장, 몽테스키외와 몽테뉴의 고향, 생탕드레 대성당과 109미터 높이의 종탑 등 이 오랜 도시의 상징들은 열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다. 그러나 보르도 하면 역시 포도주인데 나는 활명수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는 알콜거부증으로 인해 보르도는 과감히 옆으로 비켜가기로 했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어느 보르도 시내로 들어와 버렸고 눈앞에는 시커멓게 때가 묻은 생탕드레(Saint-Andre) 대성당이 보였다. 기왕 들어왔으니 성당이나 보고 가기로 했다. 주차장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다가 겨우 성당에서 약 300미터쯤 떨어진 보르도 대학병원 앞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고색창연한 대학병원 건물은 그곳에서 현대의술이 행해진다고 생각되지 않았는데 보르도 대학이 1441년 창립되었다고 하니 고개가 끄떡여졌다.

성당의 외관은 시커멓게 쩔어 있었다. 이는 대리석이 오래되면서 표면이 검게 변하는 현상 때문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오랜 도시들에 서있는 대부분의 대리석 건축물들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11세기라고 하는데 이미 천년이나 지났으니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증 ․ 개축이 되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은 것이다. 성당 정문 쪽은 수리중이라 울타리가 쳐져 있고 뒷쪽 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다.

안으로 들어서면 멀리 중앙 제단이 아득히 보이고 뒤쪽으로 몸을 돌리면 은색의 파이프오르간이 뒷 벽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성당 입구에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니 한 남자가 안내 팜플렛을 주며 어디서 왔느냐고 하길래 한국이라고 하였더니 우리를 데리고 중앙 제단의 옆에 있는 어떤 성화 앞으로 갔다. 화면의 외쪽에는 중국 청나라의 고위관리처럼 보이는 비단옷을 입은 사람이 의자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다. 화면 중심에는 손목이 묶여있고 상체는 벗겨지고 흰 바지를 입은 두 남자가 나무기둥에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데 칼을 든 두 명의 망나니가 막 목을 내려치려 하고 있고 오른쪽 앞에는 목이 잘려진 두 구의 시신이 눕혀져 있고 잘려진 목이 나무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아마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잡혀 참수를 당하는 그림인 듯 했다. 우리를 안내한 남자는 그 선교사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한국사람이라고 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특별히 한국인의 순교를 묘사한 그 그림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림 속의 인물들은 유럽인처럼 보였으며 처형을 명령하는 사람은 중국인처럼 보였는데 뭐라고 말할 수도 없어 그냥 고맙다고 하고 성당을 나왔다.

성당 옆으로는 15세기에 지었다는 페베르랑 종탑(Pey-Berland Tower)이 높이 솟아 있다. 일반적으로 성당의 종탑은 성당 윗부분의 일부로 세워지는 것인데 생탕드레 성당은 성당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했다. 탑 아래 붙어 있는 설명문에 의하면 보르도 대학을 세운 페베르랑 대주교가 세5세기 중엽 세웠다고 하며 종의 울림이 건축에 영향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성당건물과 분리하여 세웠다고 한다. 표를 사가지고 탑 위로 올라갈 수 있었으나 예정했던 시간이 훨씬 넘어 있어서 생략하기로 했다.
성당 옆으로 전차길이 놓여 있고 도시형 첨단 전차가 다니고 있었다. 참으로 중세와 현대의 절묘한 조화였다.

자동차 기름 넣는데 두 시간 반
시간이 오후 여섯시가 넘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구석기시대의 폰드곰 벽화동굴로 레이지드타약이란 곳이다. 이제 부지런히 달려서 인터넷에서 확인해 둔 뻬리에레 캠프장으로 가야한다. 보르도에서 레이지드타약까지는 지도상 대략 보아둔 거리가 170킬로미터가 넘는다. 캠프장이 있는 곳은 거기서 약 20여키로미터 더 가야한다. 대충 3시간이면 갈 것으로 생각하고 차에 속도를 약간 붙였다. 길은 고속도로처럼 곧게 뻗어 있었고 차도 별로 없어 계속 이런 길이면 두시간에도 가지 않을까 싶었다.

출발하여 한 20분쯤 지났을까 무심코 연료계를 보니 바늘이 밑바닥 가까이 내려가 있었다. 보르도에서 기름을 넣을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아무데나 가까운 곳에서 기름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도로의 출구를 찾았다. 보르도에서 90여키로미터 왔을 때 도로의 출구가 나타났다. 어딘지 모르는채 차를 도로 밑으로 내려 마을을 찾아 계속 달렸다. 얼마 가지 않아 그리 크지 않은 읍 정도 규모의 마을이 나왔다. 내비게이터에서 가까운 주유소를 찾았다. 주유소는 마을에서 머지 않은 외곽에 있었다. 주유소에는 사람이 없었다. 유럽에도 많은 주유소가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아 신용카드를 꺼내들고 주유기 앞에서 내렸다. 주유기에는 불어로 된 안내문이 붙어 있었는데 대체로 기름종류를 선택하고 카드를 넣으면 주유기로 기름을 넣도록 되어 있으므로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카드인식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갑에 있는 카드를 종류별로 넣었다 빼도 기계는 작동되지 않았다. 혹시 도움받을 사람이 있을까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차를 움직여 다른 주유소가 있는가 찾아보았더니 인근에 또 하나의 주유소가 있었는데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어느 수퍼마켓에서 나오는 젊은 청년 둘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내려 뭐라고 했는지 청년들이 도와주겠다고 오토바이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들은 간단한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는 처음 갔던 주유소에서 내렸고 청년들이 우리 카드로 이리저리 해보더니 실패하자 자신들의 카드로 다시 시도했다. 그래도 기계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유소는 본래 무인주유소가 아니었지만 시간이 여섯시가 넘어 주인이 퇴근을 해버렸기 때문에 무인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한시간 가까이 흘러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일이 이러다 크게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청년들은 잠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는 우리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자기들이 일하는 상점에 가서 주인에게 주인차의 기름을 조금 얻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반신반의 했으나 별 방법이 없었다. 청년들을 따라 마을 안으로 가 길에서 기다리는 동안 청년들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작은 음식점이었는데 안은 매우 복잡했다.

청년들을 기다리는 동안 비로소 마을을 살펴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작은 수로가 지나고 있었는데 비록 시멘트로 만든 수로이긴 했으나 물은 맑았고 물가에는 예쁜 꽃들이 풀밭에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수로 중간에는 작은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장식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인 줄았으나 찬찬히 살펴보니 물레방아 옆에 방앗간으로 보이는 작은 나무집이 한 채 있고 물레방아에는 철제 축봉이 끼워져 있고 그 끝에 조그만 바퀴가 달려 있는 것이 이 바퀴에 피댓줄을 걸어 방앗간 안의 기계와 연결하여 방아를 찧는 것으로 보였다. 매우 재미있고 간단한 방앗간인 셈이었다. 맞은 편으로 길게 뚫린 길의 끝에는 성당이 보였는데 성당의 시계가 여덟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온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셈이다. 청년들이 다시 나왔으나 주인의 도움은 실패였다.

퇴근 시간 지나면 경찰서도 문을 닫는 나라
이번에는 경찰을 찾아보기로 했다. 경찰서가 있다는데 찾아가보니 여섯시가 넘어 문이 닫겨 있었다. 퇴근시간 지났다고 경찰서가 문을 닫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청년이 아는 경관이 있는지 전화를 했다. 티셔츠 바람의 한 남자가 나왔는데 자기는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경찰서 문에 달려있는 비상벨을 누르면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당신도 경찰인데 도와줄 수 없는데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하니 자기는 영어가 안되어 더 못도와준단다. 자동차 기름좀 구하자는데 영어가 무슨 문제인지 알 수 없었으나 도리 없어 비상벨을 눌렀다. 무인응답기에서 불어 안내가 나오더니 드디어 영어 안내가 나왔다. 누르라는 번호를 누르니 스피커에서 무엇 때문에 눌렀는지 영어로 물었다. 더듬거리며 사정을 말했더니 거기 꼼짝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이제 겨우 해결되는구나 하고 기다리길 10여분이나 했을까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하나가 나왔다. 또 똑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도 영어는 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보고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서있던 자리를 보니 열쇠꾸러미 한 뭉치가 담장 위에 놓여져 있었다. 안으로 간 경관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경관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우리를 도와주던 젊은이도 없고 그냥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사람 틀림없이 열쇠찾느라고 안나오는 걸 거야’ 아내가 투덜거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경관이 골목 입구에 나타났다. ‘헤이 이거 당신 거지?’ 하고 열쇠뭉치를 흔드니 그는 반색을 하고 뛰어왔다.

‘조금 기다리면 내 친구들이 와서 도와줄겁니다’ 고 그가 말했는데 이거 도무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릴 도와주어야 기름을 넣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잠시 후 젊은 여자 둘이 작은 승용차를 타고 나타났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몸짓을 보니 자기들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차에 올라 그 여자들을 따라갔다. 골목을 한바퀴 돌아 찾아간 곳은 처음 도착했던 주유소였다. 주유소에 내려 여자들에게 카드가 안된다는 설명부터 반복해서 설명을 했다. 우리 카드가 안되는 것을 확인 하고는 자기들 카드를 넣어보았다. 기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그래서 그 여자들 카드를 이용해 기름을 채우고 사용한 돈만큼을 여자들에게 현금으로 주었다. 마을에 들어온지 두 시간도 훨씬 넘어 겨우 기름을 넣을 수 있었다.

우리가 실수 한 것은 낮에 도시에서 기름을 채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시간여 동안 시간을 허비하고 알게 된 것은 시골의 주유소는 여섯시가 넘으면 직원이 퇴근을 하고, 신용카드는 프랑스 것만 되는 경우가 많고 그것도 일부 카드는 안된다는 것이며 퇴근시간이 넘으면 경찰 도움을 받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을 도와주려고 애쓰며 결국 기름을 넣었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얻은 소득이었다.
아,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내비게이터를 보니 무씨당(Mussidan)이라고 써 있었다.

마지막 구석기시대 벽화동굴 - 폰드곰 유적
아홉시가 훨씬 지난 시각이라 해는 지고 하늘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부지런히 가도 사를라까지는 밤이 깊어야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차는 산길로 들어섰는데 양 옆으로는 숲이 우거지고 캄캄한 숲속에서는 불빛 하나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아무데나 잘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 잤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가도 길가에 캠프장도 여관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꼬불꼬불 산길을 돌아가다가 드디어 레이지드타약에 도착했다. 호텔이 몇 군데 보였으나 이름난 관광지여서인지 값은 비싸고 잘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기왕 늦은 거 캠프장이 있는 사를라까지 가기로 했다. 사를라 마을의 뒷산에 있는 페리에레 캠프장에 도착한 것은 밤 열한시 반이나 되어서였다.

캠프장은 캄캄했고 사무실도 불이 꺼진 채 잠겨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데나 텐트를 칠 수도 없어 불꺼진 사무실 문을 탕탕 두드렸다. 조금 지나 이층 창문이 열리고 젊은 여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정을 말했더니 다행히도 나와서 잘 곳을 지정해주었다. 캠프장은 모녀가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딸이었다. 어두운 잔디밭에 겨우 텐트를 치고 밤이 늦었지만 간단히 저녁식사를 끓여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캠프장은 텐트도 치고 방갈로도 있고 풀장과 어린이 놀이터, 사우나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늦잠을 잔데다가 아침에 게으름을 좀 피고 짐을 꾸려 캠프장을 나서니 시간은 아홉시 반이 넘었고 구름이 낀 하늘은 바로 빗방울이 떨어질 듯했다.

전날 밤에 온 길을 다시 거꾸로 올라갔다. 사를라에서 약 23킬로미터 떨어진 레이지드타약 마을 채 못미쳐 도로의 남쪽으로 폰드곰 동굴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건물이 보였다. 건물은 기념품 상점을 겸한 매표소였다. 매표소는 아홉시 반에 개장하며 하루에 관람인원은 170명, 그리고 한 번에 동굴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열두 명으로 제한되는데 이는 동굴이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뿜어내는 탄산가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열시가 좀 넘었는데 오전 표는 매진되고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오후 두 시에 들어가는 표를 구입하였다. 아침에 왔으니 망정이지 점심을 먹고 왔으면 내일 표 밖에는 못 샀을 것이다.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레이지드타약 마을로 가서 박물관을 보기로 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우산 없이 다니기 어려울만큼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물관은 완전히 구석기 전문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유물도 유물이려니와 특이한 전시방법이 볼만했다. 진열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발굴된 370만년 전 인류의 발자국을 바닥에 찍어 우리가 구석기시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했다. 진열실 안에는 수없이 많은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되는 세석기들이 마치 예술품처럼 벽면에 박혀 있었고 액정모니터를 통해 보여지는 각종 자료들이 유물과 유물 사이에 마치 실제 유물처럼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었다. 구석기시대의 많은 석기 종류들과 돌에 새겨진 그림들 그리고 사람들의 삶과 자연, 또 구석기 조사의 방법이나 연구사 등과 관련된 자료들이 방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었는데 진열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석기 사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전시는 너무 훌륭해서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구석기 유물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안다면 이들의 전시가 얼마다 뛰어난 것인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발길을 막아야 보존이 되지
박물관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마을로 내려왔을 때는 비가 그쳤다. 비 개인 산골 마을에는 마치 물로 씻은 듯이 투명한 햇살이 산간마을 예쁜 빨간 지붕에 내려앉고 반짝이는 시냇물과 시냇가 조그만 레스토랑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벽화동굴이 있는 절벽 위 나무숲에는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산 위에서 구름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개울 위 농산품 마켓에는 주민들이 직접 만든 빵과 치즈, 그리고 각종 먹을거리들이 가득 있었는데 무얼 산다는 것이 여행길에 오히려 부담이 될까봐 구경만 하고 나왔다. 주차장에서 아침에 준비해 온 점심을 가볍게 먹고 시간 맞춰 동굴로 올라갔다. 동굴 앞에는 두시 입장권을 가진 사람들이 열명 남짓 있었는데 두 명의 여성 안내원이 일행을 인솔하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에는 일체 휴대품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모든 짐은 별도의 동굴에 마련된 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유적을 설명하는 전문 해설가가 맨 선두에 서서 안내를 하고 나머지 안내원 한 명이 일행의 맨 뒤에서 사람들을 통제하였다. 해설사는 직접 동굴 문 자물쇠를 열고 들어갔는데 깊숙이 들어갔을 때 이미 다른 팀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보아 한 팀이 들어오면 문은 다시 잠기는 듯 했다. 뒤에 있는 안내원은 사람들이 동굴에 기댄다든지 옆 사람에게 방해될 정도로 이야기를 나눈다든지 동굴 벽에 손을 댄다든지 하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그 때문에 동굴 속에서는 해설사의 목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굴 속은 캄캄하여 옆 사람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는데 한참 지나서 어둠 속에 익숙해지면 그런대로 사람들 얼굴과 벽면이 어렴풋이 보였다. 설명을 할 때는 조명을 켰으나 조명이 너무 희미해서 동굴벽에 그려진 그림의 형체가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일만 오천년 전에 그려진 사슴과 들소들이 살아 꿈틀대는 듯 눈앞에 선명히 살아났다.

동굴의 보호는 인원수 조절 뿐 아니라 동굴 내부 조명의 밝기나 사람들의 손짓 하나하나까지 일일이 통제함으로써 훼손을 최소화 하도록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정도 방문객들의 수용도 동굴을 보존에는 무리가 많이 갈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벽화동굴 중 실제 동굴을 직접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했다. 다른 유적들은 실제 동굴은 폐쇄하고 인근에 모조 동굴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관람시키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있으면 이 동굴마저 폐쇄할 것이라는데 나에게는 어쩌면 이번이 벽화동굴의 실제 모습을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지드타약 일대에는 많은 구석기시대 벽화가 있는 동굴들이 있는데 유명한 라스코 동굴도 여기서 동북으로 직선거리 약 50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라스코 역시 실제 동굴은 들어갈 수 없으며 1972년부터 1983년까지 11년에 걸쳐 복제 동굴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관람시키고 있다. 라스코 동굴의 벽화 복원을 주도한 사람의 하나가 파리에서 돌아가신 이응로 화백의 조카 이희세 화백이라는데 이응로 화백의 손자 이종진 선생이 오랜 친구이기도 해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애초 계획에 들어있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폰드곰 동굴을 보고 나오면서 갑자기 반구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암각화 가까이까지 와서 보고 갈 수 있도록 도로의 개설과 유적 인접지역에 전시관을 건립하고 계곡을 훼손하는 등의 일을 오로지 관광객 유치의 차원에서 벌이고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반구대 유적을 구하기 위한 울산시와의 지루한 줄 당기기가 언제나 끝날는지.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