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 무공해 한절골에 잔치판 연 젊은 이장 김대익(글/이미홍_객원기자)

산 설고 물설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심심산골을 우리는 흔히 오지라고 일컫는다. 길안면 대사리, 우리가 찾아가는 한절골도 한때는 그런 오지로 불렸던, 길안천변에 위치한 마을 중에서도 굽이굽이 돌아들어 깊은 계곡 속에 숨겨진 마을이다. 안동에서 영천방면 국도를 따라 가다가 왼쪽으로 청송 방면 이정표를 따라 2㎞ 정도 들어가자 대사1리 마을회관 현판이 보인다. 마을회관 건물에 떠억 하니 나붙은 『경축, ‘한절골 자연생태우수마을’ 지정』이라는 현수막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알려져 여름철이면 계곡이 몸살을 앓기도 하지만 그래도 청송 방면으로 다리가 연결된 것이 불과 10년 안쪽일 정도로 산세가 깊은 대신에 그만큼 물이 맑아서 그야말로 청정무공해 지역이 바로 한절골이다. 그 한절골에 와서 11년째 사과 농사짓고 살면서 한절골 사람들을 위해 잔치 한 번 하자고 판을 벌린 젊은 이장님이 있다. 귀농 11년차 김대익(47) 대사2리 이장이다.

가는 길을 묻는 기자에게 표지판 보고 따라오면 된다는 한 마디가 전부다. 대사1리 마을회관 앞에서 전활 했더니 길 따라 오다가 폐교 쪽으로 오면 된다고 하곤 그만이다. 길은 외통수지만 어디까지 가라는 건지 속으로 더듬이를 세우며 새로 놓인 다리를 건너 청송으로 가는 경계선까지 가자 그제야 왼쪽으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세워진 표지석에 ‘대사2리 한절골’ 이라 쓰인 글자가 보인다. 야호캠프라는 팻말을 한번 쳐다보고는 학교로 찾아들어가니, 이장님이 운동장 한쪽 나무 그늘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다 마중을 나왔다. 간단한 인사 후에 우리는 -1972년 3월 개교하여 졸업생 248명을 배출하고 2000년 폐교되었음-을 알려주는 길안대사분교 교적비를 지나, 운동장 가에 심어진 늙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 마련된, 조금 전에 이장님이 앉아서 우리를 기다리던 하얗고 둥그런 야외용 탁자에 마주앉았다. 여름 오후, 매미 소리는 높았고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학교 운동장에서는 마을도 집도 안 보이고 오로지 파란 하늘만 가득 들어차 보였다.





잘나가던 대익씨, 넥타이 풀어 던지고 촌으로 입성


1998년 그는 서울에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토지공사에 들어가 나름대로 인정도 받고 과장으로 승진도 하고 잘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사실 스트레스가 많은 조직 생활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느꼈고, 시간이 나면 언젠가는 시골 가서 흙 파서 농사지으며 사는 날을 꿈꾸며 산과 들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그는 그 시점에서 잘나가던 직장을 접고 농촌으로 인생 유턴을 감행했다. IMF를 겪으면서 그는 그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귀농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고, 회사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10% 인원감축을 해야 했을 때 동료들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조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겪으면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그로서는 언젠간 할 귀농을 생각보다 몇 년 앞당겨 한다는 것뿐이었고 우선적으로 명퇴를 신청하는 사람들에게는 퇴직금 외에 인센티브가 더 주어졌기 때문에 귀농자금도 마련이 된 셈이었다. 대학교 3년 후배인 아내(김종복, 44)는 오래 전부터 그의 꿈을 알고 있었기에 두말 하지 않고 그의 결정에 따라줬다.


“집사람은 전부터 내가 언젠가는 시골 가서 살 거다 하고 노래를 불렀으니까 알고 있었죠. 반대해봤자 안 들을 거 같더래요. 그래서 그런지 별다른 말없이 아이들 데리고 따라 오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부모님이셨죠. 부모님께는 미리 말씀을 못 드리겠고 해서 팩스로 사표를 내고 그 주말에 집으로 내려가서 말씀을 드렸어요. 통보를 한 거죠. 사표내고 내려왔다고. 처음에는 회사 그만두고 다르게 한 번 살아보면 어떻겠냐고 아버지께 물어봤죠. 제가 우리 아버지를 참 좋아하는데, 그랬더니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엎으려면 지금 니 나이가 최고 좋다. -그때 큰 애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애들이 더 크면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게 대한민국의 가장들이기 때문이다. 시골에 오니까 학원 안다녀도 돼서 좋다던 첫째와 둘째는 어느새 고3, 고1이 되어 공부 때문에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다.-


“어머니가 많이 우셨죠. 우리 아들 어디 다닌다고 동네 나가서 목에 힘주고 다니셨는데 하루아침에 직장 때려치우고 농사짓는다고 하니 한마디로 억장이 무너지시는 거죠. 부모님이 마늘 농사를 지으셨는데 농사일의 어려움을 아니까 더 그러셨는지도 모르겠어요. 누나 셋에 남동생이 있고, 제가 집에서는 장남이니까 부모님이 거는 기대가 더 컸던 탓도 있고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은 받아들이시더라고요. 농사짓느라 고생하는 아들이 걱정되니까 괜스레 집사람이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을 때 더러 눈총도 주고 그랬나 보더라고요. 말은 안하지만 눈치가 그래요.”





사과꽃이 무슨 색이더라? 초보 농꾼, 첫해 사과농사 매출은 500만원


그렇게 귀농을 결심하고 그가 정착할 곳으로 택한 곳은 고향인 의성과 가까운 안동이었다. 처음에 그가 수소문 끝에 토지를 구입한 곳은 온혜면 토계리였다. 경매로 나온 2만여 평 부지를 유찰되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1차 경매에서 곧바로 120% 경매가로 낙찰 받아 구입했는데, 원주인이 1달 안에 채무를 변제하는 바람에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알아본 곳이 길안이었다. 길안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길안과 청송의 경계가 되는 지점인 이곳 한절골에 과수원을 구입했다.


“99년에 과수원을 사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처음 한 1년은 용상에 집을 얻어서 생활하면서 과수원까지 출퇴근을 했어요. 그때는 대사에서 청송 방면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놓이기 전이어서 저 혼자 산을 넘어 다니며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다가 이곳 학교 부지가 나왔다는 것을 알고 사택까지 달린 걸 매입해서 수리한 후 2000년도에 식구가 다 들어왔죠.”


그전부터 학교 부지를 구입하고 싶어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과수원 가까이에 폐교를 매각한다고 해서 얼른 구입을 했다. 본격적으로 한절골에 둥지를 튼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 종복 씨와 함께 과수원 일을 하면서 틈틈이 폐교를 손보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고 페인트를 칠하고 학교 주면 나무도 정리를 했다. 그러면서 폐교를 활용하여 시작한 것이 ‘야호캠프’ 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여름캠프장 운영이었다. 겨울에는 난방문제 외에도 수도가 얼어 캠프장 운영이 힘들뿐만 아니라 농사를 주업으로 하면서 여름 한 철 학교 시설을 캠프를 오는 사람들에게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간단한 취사도구나 이불, 베게, 모기장이 준비되어 있어 숙박도 가능하게끔 했다. 산골마을 시골학교의 정취가 서린 곳에서 개울에서 물놀이도 하고 다슬기도 잡고, 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그리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한바탕 신나게 풍물을 놀아도 좋다. 어설프게 캠프장을 시작해놓고는 사과 농사짓느라 바빠 홍보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 대익 씨를 대신해 그쪽으로 재주가 많은 친구가 ‘야호캠프’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주었다. 2002년의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농사짓는 사이사이 앉아서 오는 문의 전화를 받아서 캠프 운영을 했다.


“맨 처음에 온 분은 어떻게 해서 알고 왔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어떻게 우연히 얻어걸린 거겠죠. 시작은 그렇게 했어요.”


한 번 왔다 간 손님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또 누군가의 블로그를 통해서 그렇게 알음알음 조금씩 야호캠프가 알려졌고 여름이면 그가 심심치 않을 만큼 또 캠프장에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중에서도 단체로 오는 팀들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라고 한다. 수련회를 오는 팀이나 운동부, 그리고 특히나 풍물팀들에게 인기라고. 산으로 둘러싸인 운동장에서 하루 종일 꽹과리를 치고 장구를 쳐도 민원이 들어올 걱정이 없어 마음 놓고 풍물을 놀아도 되니 알아서 다음해에도 찾아온단다. 올해도 풍물 팀이 어김없이 예약돼 있단다.


애초에는 사과 농사를 지을 생각은 아니었다. 밭농사를 좀 본격적으로 크게 지어보려고 2만여 평쯤 되는 덩치가 큰 땅덩어리를 찾다보니 과수원밖에 나온 게 없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던 사과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봄에 사과나무를 보면서 부부는 ‘사과 꽃이 무슨 색이었지? 분홍색이었나? 하얀색이었나?’ 하고 있었다. 그해 사과농사를 지어 약값이랑 인건비 등을 다 제하고 나니 500만원이 남았다. 두 사람이 250만원씩 번 셈이었다. 그것도 지인들에게 강매를 하다시피해서 사과를 하나라도 더 판 결과였다. 그때 만약 자신이 땅을 사지 않고 남의 땅을 빌려서 도지로 농사를 지었다면 아마 손 털고 도망을 갔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제는 사과농사에도 이력이 붙고, 인터넷을 활용해서 사과 판매와 사과즙 판매도 하고 사과 출하 시기도 조정해서 나누어 출하하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수익 관리도 할 줄 아는 제법 잘나가는 사과농사꾼이 되었다.


“다음 해 과수원에서 적과를 하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이 구멍에서 빠져나가지?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거라. 그래서 조금 있으면 길 안에 댐 생긴다고 하니까 그럼 수위 때문에라도 농사짓기 힘들 테니까 그럼 그때 도망가면 되겠다 싶더라고. 그래 그래 버티다가 도망 안가고 용케 살아남았지. 그때 도망갔다면 더 오래 헤맸겠지. 가끔씩 사람들이 후회 안 하느냐고 묻는데 난 한 번도 후회라던가 그런 생각은 해 본적이 없어. 그런데 가끔씩 자기들이 안 좋을 때면 그래. 구조 조정 시기이거나, 승진에서 누락 되었거나 그럴 때면 너 그때 잘 나갔다 그러지.”






귀농, 목가적인 삶만 꿈꾸다간 실패합니다


그가 귀농에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서일까? 기든 아니든 그가 한절골 이장 일을 맡으면서, 그리고 그가 친 사고 덕분에 한절골이 전국생태우수마을로 선정되면서 여기저기 더 알려진 게 사실이고 보니, 귀농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이들도 요즘 부쩍 늘었다.


어제도 귀농하러 온다는 사람이 조언을 구하러 찾아왔다. 개인 사업을 하다가 경기가 좋지 않아 귀농을 결심한 경우였다. 한절골 이장님 대익씨가 한 말은 섣불리 결정하지 말고 충분히 알아보고 그래도 각오가 서면 오라는 것이었다. 물론 첫째는 안 오면 좋고, 온다면 정말로 농촌 현실을 제대로 알고 오라는 것이었다.


IMF 이후 한창 귀농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귀농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농촌 현실에 두 손 들고 다시 올라간 뒤로 한동안 조용하다가 요즘 다시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그는 일단은 말리고 싶단다. 도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농촌에 정착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일 문제가 되는 건 주민들과의 융화 문제이다. 이쪽에서는 의욕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한다고 하는 게 주민들 눈에는 낯선 이가 들어와 동네서 설치고 다니는 걸로 못마땅해 보이기 일쑤고, 귀농했다고 해서 당장 그 동네 주민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일을 가르쳐 주는 이도 없는 데서, 이쪽은 이쪽대로 넉넉한 시골 인심은커녕 서러움만 커지는 꼴이다. 그 동네 어르신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고 스스럼없이 지내게 되는 데만도 몇 년이 걸리는 게 대부분이다.


“지역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같은 지역주민이 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자리를 잡았다는 걸 의미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진짜 그 지역 주민으로서 활동을 하고 살아가는 거고. 나 같은 경우에도 처음에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죠. 시간을 두고 차츰차츰 마을 어르신들이 마음을 여시더라고. 물론 우리도 조심하면서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며 이곳 생활에 적응을 해 왔고. 어느 순간부터 제 입에서 경운기 좀 빌려달라는 소리도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동네 길 닦는 일에도 내가 먼저 나서게 되고. 그러다가 보니 이장 일도 맡기시더라고요.”


귀농해서 사과농사 열심히 지으며 알게 모르게 묵묵히 마을의 궂은일도 마지않던 야후캠프 촌장 김대익에게 한절골 주민들이 대사2리 이장직을 맡긴 것이었다. 2007년도의 일이니까 그가 한절골로 귀농한 지 팔 년째가 되는 해였다.






한절골의 새바람, 젊은 이장 사고쳤네


한절골(대사2리) 이장이 되고 나서 그가 크게 사고를 쳤다. 전국우수생태마을 선정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우리도 그거 한 번 신청해보자 싶어 선정 기준을 살펴보니 무엇보다 첫째 조건이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과 그런 자연생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가였다. <참고로 환경부가 실시하는 자연생태우수마을 및 자연생태복원우수마을 지정제도는 자연생태가 잘 보전되었거나 훼손된 생태계를 성공적으로 복원한 사례를 발굴해 지원, 홍보함으로써 지역 주민 스스로가 환경을 보전, 관리하는 자연보전의식 함양을 목적으로 2001년부터 시행 중에 있다.>


우수생태마을로 지정되면 환경부에서 지원금도 나온다고 했다. 해서 손해 볼 일이 없는 일이었다. 자연환경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곳이 한절골이었다. ‘한절팔경’이라는 한시가 전해질 정도로 빼어난 풍광에, 천연기념무로 지정된 수달, 하늘다람쥐, 부엉이, 올빼미 등 동물들과 다슬기 등 동식물 개체군도 많고 생태계 균형이 이상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거기에다 마을청년회와 부녀회가 주축이 되어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하천가의 쓰레기를 청소하던 일은 이전부터 늘 해 오던 일이었다. 일단은 가능성이 있다고 본 이장님은 길안면에 협조를 구해서 더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전공이었던 기획 업무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한절골의 우수한 경관과 잘 보존된 생태 환경, 그리고 하천을 지키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을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서 보고서를 만들어 환경부에 제출했다. 그리고 3개월간의 조사 끝에 한 해의 마지막인 2009년 12월 31일, 한절골은 전국15개 마을 중 최고 평점을 얻어 전국 최고 청정 무공해 지역이라는 명예와 함께 자연생태우수마을로 지정되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만세를 부른 날이었다.


자연생태우수마을 지정에 따라 지원금이 나온다는 사실에 고무된 마을 주민들은 이를 계기로 대사 1리(이장 이남주)와 2리 주민이 한마음이 되어 잔치를 열고, 앞으로 마을공동체로서 한마음으로 마을 일에 합심하기로 하는 계기가 된 것이 그로서는 무엇보다 기쁘고 보람을 느끼는 점이다. 비록 상금이 누군가가 착오로 잘못 알고 공언했듯이 3억이 아니라 3천만원 정도이고 그것도 올해가 아니고 내년인 2011년에 지급된다고 해서, 올 겨울에 하기로 한 한절골 마을 겨울축제 계획에 차질이 생겨 모처럼 의욕에 가득 찬 주민들이 조금 김이 빠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깟 착오쯤이야 해프닝으로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한 듯 3월, 한절골에 진짜 잔치판이 벌어졌다. 5부작으로 나누어 제작되는 EBS한국기행 안동 편 중 3부의 주인공이 한절골로 결정된 것이었다. 사실 방송국에서 처음 생각한 시나리오는 길안 천지갑산을 중심으로 길안의 이모저모를 찍어서 방영할 계획이었다고. 그런 것을 또 놓칠 한절골 이장님이 아니었다. 한절골의 내력에서부터, 천혜의 자연 환경, 영가지 수장고 등 역사와 당나무와 당제며 각종 이야깃거리, 찍을 거리 정보를 흘리며 제작진들을 설득했고, 마침내 방송국 사람들이 카메라를 메고 한절골 마을로 들이닥쳤다.



마을사람 손 걷고 나서니 한절골 복터졌네!


첩첩산중이었던 마을 ‘한절골’이 전국 방송을 탄다는 사실에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아줌마 아저씨도 다들 신이 나서 발 벗고 나섰다. 미리 마을 회의를 하고 협조를 구했지만 주민들이 저마다 신이 나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일 줄은 이장님도 마을 사람들도 몰랐었다. 한절 골의 잔치 마당과도 같았던 촬영 현장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한절골의 자연 환경인 한절팔경도, 당나무도, 디딜방아도, 영가지 수장고도, 한절골 주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주인공들이었다.


영가지 수장고를 촬영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영가지를 보관하던 서고였던 수장고가 아니라 그 속에 있던 영가지 목판본이었다. 그런데 영구보관을 위해 현재 영가지목판본은 국학진흥원에 모셔져 있는 상황, 국학진흥원에서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 길안면소로, 안동시청으로 여기저기 SOS를 쳤다. 그리고 국학진흥원에서 결국 목판본 중 일부를 학예사들의 인솔 하에 공수 받아 무사히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정월대보름이면 당제를 지내는 오백년은 예전에 넘어 천 년을 바라보는 윗한절골에 있는 당나무를 찍기 위해 카메라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들은 뒷산을 올라야 했다. 당나무가 너무 커서 카메라 안에 전체 모습을 담을 위치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서 한절골 할매가 만들어주는 두부, 조포를 만드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 부분인 어처구니가 부러져 동네 남정네들이 솜씨를 발휘해 맷돌 손질을 한 뒤에야 아짐씨들이 맷돌에 콩을 갈아 가마솥에 불을 때서 조포(두부)를 만들 수 있었다. 누구는 맷돌 돌리는 재주도 두부 간수 맞추는 재주도 없어 불 때는 담당에 만족해야 했지만 다들 즐거운 얼굴들이었다. 그날 저녁은, 촬영을 마친 방송국 팀들도 마을 사람들도 다 한 방에 둘러 앉아 조포 두부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었다. 촬영을 마치는 날까지 열심히 밥을 해 준 아낙네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카메라 앞에서 이래저래 주인공이 촬영에 임하며 주민들은 자신들도 몰랐던 제 안에 숨겨져 있던 끼와 흥을 발견하고 울고 웃었다. 한절골 사람들이 진짜로 한마을 공동체로 가까워지게 만들어준 선물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EBS한국기행 안동편 3부 ‘한절골 복 터졌네!’는 4월 7일에 전국 방송을 탔다.


그리고 5월 어버이날을 맞아 한절골의 두 이장과 마을 주민들은 마음을 모아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를 벌이고, 어르신들의 건강을 빌고 마을의 안녕과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지신밟기를 했다. 이제는 전처럼 몇 사람이 나서서 설득을 하고 크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주민들 모두 별 일이 없는 한 되도록 동네일에 참여하려고 노력을 한다. 자연생태우수마을지정과 한국기행 한절골 촬영 등 큰일들을 함께 모여서 이루어 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가 형성이 되었다. 지금 한절골 주민들은 어떤 큰 잔치라도 거뜬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 마음이 맞고 의욕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의 마을 사랑에 어르신들도 뜻을 보태주고 있어 보는 이들이 다 흐뭇하다고 제작진이 제목을 ‘한절골 복 터졌네!’로 했다고 한다.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한절골 잔치 만들 터


그가 이장이 되고 한 일 중 또 다른 하나는 네이버에 ‘한절골 잔치’라는 카페를 만든 것이었다. 카페의 주 회원들은 물론 한절골 주민들이다. 크고 작은 마을 행사에서부터 봄부터 가을 추수까지 주민들이 농사짓는 과정과 정경도 틈틈이 기록하고 무엇보다 작은 일이라도 함께 기쁨을 나누며 서로 소통하며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마련한 공간이다. 그게 마을 행사등 관광객들을 위한 축제든 일단은 마을 주민들이 즐거워야 한다는 게 이장님 생각이다. 한절골 주민들 스스로가 즐거운 마음으로 판을 벌여야 그곳을 찾는 사람들도 진짜 한절골 잔치를 즐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올 겨울 한절골에서는 한절팔경 중의 하나인 천상암 석벽 인공빙벽을 중심으로 한 겨울 잔치 한 마당을 계획하고 있다. 우수생태마을 예산집행이 미루어져 계획에 일부 차질이 생기기는 했지만 계획을 일부 수정해서라도 되도록 이면 겨울 잔치 마당을 펼쳐볼 생각이다. 농한기인 겨울에 잔치판을 벌려서 재미도 느끼고 고사리며 묵이며 동동주며 먹거리도 팔고, 말려둔 고사리나 묵나물도 팔고 사과까지 팔 수 있으면 다 팔아서 잔치 구경 온 손님들 구경에 즐겁고, 동네 사람들 주머니도 소소히 챙길 수 있다면 그 아니 좋을 건가 싶다. 그러나 역시 큰 잔치판을 벌리려니 주머니 사정이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요즘 한절골 이장님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일이야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마을 회의에서 토론을 통해 결정되지만 자신에게서 시작된 일이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마음이 쓰이는 탓이다. 거기에다 뭔가 일을 시작했으면 끝을 보아야 시원한 그의 성격상 누가 말린다고 그만둘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아내 종복씨도 한쪽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이 궁리 저 궁리에 한창인 그를 그냥 두는 눈치다. 면이나 시청을 찾아가서 호소를 하든, 어디 가서 후원을 글어내던 주민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던 방법을 찾으면 될 때가지 부딪쳐 볼 것이고, 그러다 보면 길은 생겨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한마음만 있다면, 그리고 천혜의 자연이 눈을 더해준다면, 오는 겨울 우리는 ‘한절골 겨울 잔치’에 가서 얼음과 눈 속에서 빨간 사과로 팽이를 치면서 한 판 흥겹게 놀다 올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쯤에서 이장님의 한 말씀,


“사과는 꼭 먹어 없애야만 하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사과농사를 짓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쨌든 사과를 많이 소비시키는 게 좋은 거거든. 이탈리아의 토마토 축제나 프랑스의 포도 축제를 보면, 밟고 던지고 바르고 그렇게 해서 축제에 온 사람들은 온몸을 던져 즐기고 농장주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토마토와 포도를 소비시키는 거지요. 우리는 먹을거리 가지고 장난친다고 뭐라 하는 데, 사과농사는 짓는 사람도 좋고 축제에 오는 사람도 즐거우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다음에 우리 마을에서 잔치판을 벌인다면 우리는 한 번 바꿔볼려구요. 그런데 잔치는 잔치고 우선은 부지런히 사과농사나 지어야지요.”



잔치는 잔치고 부지런히 농사 먼저 지어야죠


여름 폭염이 뜨거워야 사과가 잘 익어가는 법이다. 더위가 물러가고 사과가 빨갛게 익어갈 때쯤이면 아마도 한절골 겨울잔치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가고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우리 이장님 내일은 사과밭에 약도 치고 여름사과 아오리 수확도 해야 한단다. 6학년이라 여름방학 방과후 학교에 갔다 온 막내 영후와 포즈를 잡으며 하는 종복 씨의 말을 들어보니 동네에 누구네는 벌써 아오리 첫 수확을 해서 팔았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 한 낮, 차를 타고 농촌 들녘을 지나노라면 일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농사짓는 이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구슬땀 범벅을 흘려가면서 고추도 따고 옥수수도 따고 사과도 딴다. 선우후락, 자고로 사람은 옛 부터 일을 먼저 하고 나서 놀아야 하는 법, 사과 농사에, 캠프촌장에, 인터넷 홈페이지와 카페 관리에다가 동네일까지 하는 한절골 김대익 이장님 앞에서, 덥다고 그늘만 찾는 이 몸은 참 염치가 없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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