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소박한 금곡동 골목길(글/사진/백소애_편집기자)
서당골 산책
땡볕 속을 걷는다. 한낮의 금곡동은 성소병원 나무그늘에 앉고 싶은 유혹을 일게 한다. 성소병원과 약국 사이의 길을 걷는다. 성소병원이라는 대형병원 덕에 인근에는 여러 개의 약국이 포진해 있다. 어느 골목이 다 그러하듯 골목에는 차들이 빼곡히 주차되어 있다. 주차된 차 유리창에는 차주의 연락처를 남긴 메모 한 장이 눈에 띈다. 십자수로 숫자를 새겨 달랑이거나 명함을 꽂아둔 것이 아닌 초등 저학년 아이가 괴발개발 써놓은 연락처 메모가 재미있다.
새로 짓는 성소병원의 공사현장에는 인부들이 바삐 움직이고 바로 옆 가정집 담벼락에는 공사 피해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담장은 소보루빵처럼 금이 가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거리를 걸어 오르니 현기증이 난다. 금곡동 길은 약간의 오르막길이다. 길은 금곡편의점에서 경안고등학교 방면과 용마맨션 방면으로 갈라진다. 각각의 길은 금명로에서 맞닿아 있다.
금곡동은 행정구역상 서구동에 속한다. 사장뚝 서쪽에 있는 안흥동과 안동여고가 있는 법상동, 그 아래 광석동, 당북동, 대석동, 옥야동, 화성동까지 신시장 인근에 위치한 8개 법정동이 모두 서구동이다. 금곡동에는 100여년 전통의 성소병원을 비롯 1954년 설립된 경안고등학교, 1995년에 준공된 2개동의 경안태성맨션, 1950년대 건축되었던 옛 안동서부교회 건물(현재 광성교회), 용마맨션 등의 터줏대감 건물들이 있다. 금곡동에는 현재 790여 가구에 2,0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한자리에서 20여년 장사를 한 올해 예순일곱의 금곡편의점 여주인은 서당골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 기껏해야 금명로가 새로 닦였을 뿐. 서당골은 금곡동의 옛 이름이다. 1885년(고종22년) 지금의 성소병원 뒤편 언덕에 안동권씨 추밀파(樞密派) 권영준 선생이 금곡서당(金谷書堂)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는데, 그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골로 불리게 되었고 후에 금곡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노인회관의 주차금지 안내문, 여기는 아닐세!
법상동 노인회관을 지나다 주차금지 표지판을 보곤 웃음이 나왔다. “여기는 아닐세!” 점잖은 경고문은 노인회관 맞은편 가정집 앞에도 세워져 있다. 어르신들의 쉼터인 듯 의자들이 죽 놓여 있다. 그 옆으론 때 더위에 지친 개가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목줄을 하고 엎드린 개집에는 타이어 하나가 당그랗게 올려져 있다. 마당에 있어야 할 개가 대문 옆 길가에 있는 풍경 또한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이사 간 미용실 건물 유리벽에는 새로운 위치를 적은 ‘찐빵가게 옆으로 이전’이라는 정겨운 안내문구가 붙여져 있고 이곳이 서당골이 분명했음직한 옛 간판이 ‘서’자는 떨어져나간 채 ‘당골’만 남아있다. 금곡편의점 옥상에는 고추며 각종 채소가 화분에 심어져 있다. 옥상 조경이 따로 없다. 어느 집 창문에는 김밥말이 발 같이 생긴 대나무발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고, 개조된 한옥집 철제대문에는 ‘입춘대길’이 붙여져 있다. 담쟁이덩굴이 우거진 집 앞을 지나가다 저절로 발길이 멈춰졌다. 경험상, 한옥집은 거주하기엔 불편하나 운치는 그만이다. 비오는 날 마루문을 열어놓고 마당을 지긋이 바라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운치를 알고도 남을 것이다.
키 작은 용마맨션
금곡편의점 갈래길에서 오른편 용마맨션 쪽에는 금곡아랫길이 있다. 왼쪽으로 5층짜리 용마맨션이 작은 키를 하고 서있다. 지금은 외국에 나가 있는 내 오랜 친구의 집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친구의 부모님이 이곳에 거주하리라. 고등학생 시절 근처 비디오대여점에서 19금 비디오를 빌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몰래 봤던 기억이 난다. 맨션 앞 놀이터에서 친구를 가끔 기다렸던 기억도 있는데 입구 앞의 작은 공터엔 그네와 시소가 여전히 있다. 이젠 금곡동도 아이들이 뛰노는 풍경이 흔치 않는 동네가 되었다. 타는 아이 하나 없는 그네와 시소가 무료하게 서 있고 담장에는 만고불변의 낙서가 있는데 뜨악한 낙서가 아닌 ‘사랑’ 이란 단어와 하트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착한 낙서가 더 당황스럽다는 건 익명에 기댄 악플에 익숙해진 세태 탓일까.
맨션 입구에는 정갈하게 손본 화분이 줄서 있다. 오랜 거주자들의 공간은 이렇게 가꾼 화분들을 주민들의 공동 공간에 내놓는 것으로 삶의 여유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일반 아파트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풍경이 아니던가. 아파트에서 금명로 쪽으로 올라가니 법상쉼터가 보인다. 마을 주민들을 위한 정자에는 사람 하나 없고 비타민 음료수 빈병 하나만 쉬고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여기 어디쯤인가 갓 결혼한 언니가 살았던 신혼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하다. 전셋집에 신통찮은 신혼살림이었는데 가끔 용돈을 갈취하러 들렸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을 나만 하고 있길 바랄 뿐이다.
담장 밖으로 목을 꺾어 내린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평일 낮의 금곡동은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다. 생생한 장미 외엔 도무지 생기가 없어 어쩌다 사람이라도 만날라치면 서로가 흠칫 놀랐다. 단층, 혹은 2, 3층 양옥집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에는 좁은 마당 안에 나무 하나씩은 꼭 서있다.
금곡동에서 가장 활기찬 곳, 경안고등학교
법상동 골목길이 안동여고로 가는 골목이라면 금곡동 골목길은 경안고등학교로 향하는 길, 하늘은 옛날 포스터물감에서 보았던 코발트블루 같기도 하고 만화가 이우일이 가장 좋아한다던 코발트블루와 스카이블루사이의 ‘옥수수빵파랑(Dodgerblue)’ 색깔 같기도 했다.
금곡동에서 가장 활기찬 곳은 역시 경안고등학교다. 1954년 2월에 개교한 경안고등학교는 현재 530여명의 재학생이 있는 기독교 종립학교다. 운동장에는 공놀이를 즐기는 학생들이 있었다. ‘옥수수빵파랑’ 하늘 아래서 공을 따라 움직이는 아이들의 동선을 보자니 모든 것이 한없이 평화롭게만 보였다. 아이들은 교복의 움직임이 허락하는 한에서 ‘세미’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무보다 더 푸르러 보였다.
학교 담장을 돌자 야자수처럼 키가 큰 나무가 하늘로 뻗어있다. 근처 공터에는 버려진 소파가 처마 밑 옹색한 그늘 아래에서 행인을 기다린다. 텃밭을 가꾸는 손길이 꽤나 부지런한 듯 제법 이것저것이 많이 심겨져 있다. 마실을 가는 것일까? 마침 할머니 한분이 지나간다. 더위에도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다. 생각해보니 여름 한낮에도 긴 소매 옷을 입고 다니는 촌로들을 많이 본 기억이 난다. 나이가 들수록 추위를 많이 타서인가, 농사일로 뜨거운 햇빛에 노출되기 때문일까. 홀로 미루어 짐작해보아도 통 알 길이 없다. 할머니는 비녀를 꽂지 않은 긴 머리를 당그랗게 묶어 실핀으로 고정시켰다. 꽤 묵직한 비닐봉투를 들고 등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어간다. 이른 더위에도 할머니는 주눅 들지 않고 금곡동 골목길을 휘적휘적 내려간다.
소박한 금곡동 골목기행
금곡동은 인구 20,000여명의 옥동이나 8,800여명의 정하동이나 23,000여명의 용상동처럼 큰 규모의 동네는 아니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도 않고 맨션 앞에 내놓은 화분처럼 작고 소박한 동네다. 안동시내 중심가에 있어도 여전히 조용한 동네, 금곡동 골목길. 개조된 한옥집의 담쟁이덩굴처럼 오랜 세월 뿌리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금곡동 골목길에 푸르고 시린 햇발이 계속 내리쬐고 있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