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와 피렌체에서 본 이태리 중세성당(글/시진/임세권_본지 편집위원, 안동대 교수)
2009년 7월 7일, 고속도로 출구를 놓쳐 약 3킬로미터를 돌아 피사 시내로 들어간 것은 세시나 되어서였다. 피사는 피렌체로 가는 중간 길목에 있어서 들러 가는 곳으로 정했기 때문에 피사의 사탑과 대성당만 보기로 했다. 중세도시 그대로를 간직한 피사 시내를 꼬불꼬불 돌아 피사 대성당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생각되는 어느 광장 옆에 간신히 주차공간을 찾아냈다.
차를 댄 곳은 고풍이 서린 광장이었는데 주차한 바로 옆에는 오래된 교회가 있고 그 옆으로 규모가 엄청 큰 건물이 붙어 있는데 마치 행정관서 같았다. 이 두 건물 말고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 모두 범상치 않게 보였다. 유럽의 중세도시는 모두 광장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고 광장에는 반드시 교회가 있으며 이 같은 광장들이 여러 개 모여서 큰 도시를 만들고 있었다. 이 광장은 그런 많은 광장과는 달리 품격이 느껴졌다. 그러나 빨리 피사의 사탑을 보아야 한다는 바쁜 마음에 그것이 무슨 광장인지 그 옆의 건물들은 또 무엇인지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사진만 꾹꾹 눌러 찍어 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궁금증이 일었다. 이 때 요긴하게 쓰인 것이 몇 달 전에 구입한 모토로이라는 스마트폰이다.
똑똑한 안드로이드 폰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나의 스마트폰에는 고글스(goggles)라는 어플리케이션이 깔려 있는데 이 프로그램을 실행시켜놓고 폰에 붙어 있는 사진기로 유명한 건물이나 그림 등의 사진을 찍으면 그 건물의 이름과 역사 또는 그림의 작가나 작품명 등을 알 수 있는 웹사이트로 연결이 된다. 여행 중에도 무선인터넷이 가능한 지역에서는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어 현장에서 그 건물이나 이름난 장소에 대해 정보를 알 수가 있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집으로 돌아와서 자료를 정리하면서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광장에서 찍은 사진을 컴퓨터 모니터에 크게 올려놓고 스마트 폰의 고글스를 이용해서 모니터의 사진을 다시 촬영했다. 스마트 폰에는 바로 “Piazza dei cavalieri” 즉, 카발리에리 광장이라는 글자가 뜨고 글자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니 관련 정보를 보여주는 인터넷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해서 이 광장이 1562년 조성된 카발리에리 광장이며 중세 피사의 정치적 중심지였음을 알게 되었다. 가장 큰 건물은 성 스테펜 기사단의 본거지와 교회였으며 1810년부터는 사범학교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도 피사대학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었다. 어쨌든 스마트폰은 이름 그대로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광장을 벗어나서 피사의 사탑을 향해 좁은 골목을 꼬불꼬불 지나가다가 갑자기 길이 넓어지고 시야가 훤하게 밝아져 하늘로 머리를 들었더니 골목 한쪽을 막아선 지붕들 위로 너무도 많이 보아 눈에 익숙한 피사의 사탑이 삐딱하게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탑의 사진을 수없이 보았으나 이렇게 다른 집들의 지붕 뒤에 서서 저잣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렇게 골목 속에서 만난 사탑의 인상은 여행을 다녀와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오른쪽으로 피사의 사탑을 보면서 골목을 벗어나 기적의 광장으로 불리는 대성당 앞 광장으로 내려서면 푸른 하늘과 초록색 잔디로 양분된 공간 한 쪽으로 흰 대리석의 거대한 건물군들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는 골목길에서는 별로 많지 않아 보였는데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 안을 꽉 메우고 있었다.
광장의 이름은 본래 두오모 광장 즉 대성당 광장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미라콜리 광장이라 부른다. 미라콜리는 기적이란 뜻이다. 이탈리아 작가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1910년 발표한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라는 소설에서 이 광장을 피사의 영화로운 시절을 보여주는 놀라운 광장이라는 뜻에서 기적의 광장이라고 표현한 데 유래한다고 한다.
광장 앞의 상점이 몰려 있는 곳에 매표소가 있다. 입장권은 피사의 사탑과 대성당, 세례당, 납골당, 박물관 등을 패키지로 묶어 팔고 있었는데 일단 왼쪽부터 세례당, 대성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탑을 보기로 했다. 나머지는 시간이 있으면 보고 안 되면 그냥 가고.
광장은 잔디밭으로 되어 있는데 유럽의 여느 광장과 달리 잔디밭은 출입금지다. 경비원들이 잔디밭에 들어간 사람들을 내보내느라고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한다. 잔디밭이나 사람 다니는 길이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중국인들처럼 태극권이라도 하는지 무릎을 굽히고 팔은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은 곧게 펴서 팔과 직각을 만들어 무슨 기합이라도 불어넣는 것 같은데, 또 한 사람은 그 포즈를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태극권이 아니라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을 손으로 받치는 모양의 사진을 찍는 모습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니 무척 유머러스하게 보였다. 잔디밭 안에는 경비원들이야 호각을 불건 말건 느긋하게 누워 햇볕을 즐기는 연인들도 있고 샌드위치를 먹는 아이들도 있다. 경비원들도 그리 악착같이 내쫓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신의 소리를 내는 거대한 울림통 구실을 하는 세례당 건물
대성당의 왼쪽으로 오똑하게 서있는 세례당을 멀리서 보면 마치 길쭉하게 솟은 인도의 스투파처럼 보인다. 특히 둥근 돔형 지붕과 지붕 중심을 뾰족하게 다시 솟아오르게 처리한 모습은 불상의 육계를 떠오르게 한다. 1152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363년에 마쳤다고 하는 이 세례당은 둘레 107.24미터 높이 54.85미터로 이태리에서 가장 큰 세례당이라고 한다.
세례당 내부는 다른 이태리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단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득히 높은 곳에 뾰족하게 보이는 돔의 꼭대기 천정이 보이고 원형의 둘레를 따라가며 높다란 기둥들이 그 돔 천장을 떠받들고 있을 뿐 어떤 화려한 장식도 절제되어 있다. 건물 중간층 회랑에 설치된 창문으로 들어오는 광선이 성스러운 분위기를 돋아준다.
정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세례를 받는 세례반이 있다. 세 층의 기단부 위에 세워진 팔각형의 세례반의 측면부는 사각의 틀 안에 여러 겹의 원을 집어넣은 형태의 문양을 넣었는데 원들은 모두 연속 삼각형이나 파상문 등의 기하학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우리나라 선사 청동거울의 무늬를 보는 듯했다. 세례반 중심부에는 이태리의 세계적 현대 조각가 이탈로 그리셀리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세례 요한의 동상이 서 있다. 세례반 내부는 목욕탕처럼 물을 채울 수 있어서 세례 받을 때 물 속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세례반의 왼쪽으로 있는 설교단은 육각형으로 되어 있고 여섯 개의 기둥이 둘레를 받치고 중심부에 또 하나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측면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서 기둥 위의 설교단으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기둥은 사자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것이 있고 윗부분의 설교단 외벽은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장면들을 조각하였다. 1260년경에 제작되었다고 하는 이 설교단은 니콜라 피사노라는 사람이 1255년에서 1260년 사이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는 맞은편의 대성당 설교단을 만든 지오반니의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와 아들은 이태리에 르네상스 미술을 시작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태리 르네상스의 시작을 1260년으로 잡는 것은 이 피사 세례당 설교단의 완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 세례당의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특별한 음향효과이다. 세례반 앞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는 세례당의 벽면을 타고 올라가 천장의 돔에 부딪치고 다시 세례당 내부를 이곳저곳 떠돌면서 신묘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이층 회랑을 돌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서서 몇 가지 음의 소리를 노래하듯이 묵직한 저음으로 당 안에 내놓기 시작했다. 그 소리들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면서도 마치 여러 사람이 화음을 만들어내는 듯한 기묘한 울림으로 듣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그것은 인간의 소리를, 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소리로 만들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세례당은 거대한 신의 울림통이었다.
세례당을 보면서 나는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떠올랐다. 가톨릭에서 하는 세례의식이나 불교에서 하는 수계의식이나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같은 것이다. 의식을 치르는 장소를 최대한 엄숙하고 경건하게 꾸미고 당시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답고 품위있는 건축과 조각의 장식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대성당을 비롯하여 이 세례당이나 피사의 사탑은 모두 지반이 약한 모래층에 세워졌기 때문에 건물들이 안정적이지 못하다. 피사의 사탑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세례당 역시 대성당 쪽으로 약 0.6도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전리품으로 지은 피사 대성당
세례당을 나서서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다시 눈을 길들인 후 앞을 보니 바로 정면에 대성당의 입구가 보인다. 대성당은 세례당의 동쪽에 있어서 정오를 지난 햇볕이 정면으로 대성당을 내리쬐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흰 색의 대리석 건물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속세의 모든 때가 벗어질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대리석 벽면은 처음에는 전부 흰색으로 된 듯한데 햇볕에 눈을 익히고 자세히 보면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 푸른색 등이 은은하게 어울려 밝으면서도 은은한 색채를 조화시켜 중세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현대적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광장의 중심을 이루는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아순타(Santa Maria Assunta)이다. 성모의 승천이란 뜻이다. 도시국가였던 피사가 남부 시칠리에 있는 팔레르모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064년에 공사를 시작한 후 1118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면 입구의 청동제 중앙문은 1180년에 만든 것이고 내부 설교단은 1302년부터 1311년 사이에 만들었다고 하니 부분적으로는 두고두고 오랜 기간을 거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표면에 청동조각이 장식된 육중한 문을 들어서면 다시 캄캄한 어둠이 있을 것 같은데 의외로 성당 내부는 밝았다. 성당 내부는 이층 회랑의 창으로부터 들어온 빛이 밝은 대리석에 반사되어 성당 내부를 간접 조명하고 있었고 멀리 중앙 제단은 돔의 창에서 내려온 광선으로 밝게 빛나서 공간 전체가 밝고 어둡고 은은한 빛으로 어울려 있었다.
성당 안에는 모두 예순 여덟 개의 원기둥이 있는데 이중 많은 수가 팔레르모의 회교사원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정면을 보면 중앙 제단이 보이고 그 위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을 양 옆에 둔 예수 그리스도의 모자이크 상이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본다. 성당은 1595년 큰 불로 인해 중세의 유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이 모자이크는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으로 가득 채워진 설교단과 함께 화마의 손길을 피할 수 있어서 지금까지 우리를 마주하고 있게 되었다.
유리관 속의 성자
중앙 통로로 제단을 향해 가면 커다란 원형 램프 하나가 천정에서 내려온 줄에 매달려 불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갈릴레이 램프다. 갈릴레이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이 램프의 흔들림을 보고 진자의 동작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고 전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달린 램프는 원래의 것이 아니고 원래의 그 램프는 캄포산토에 있는 아울라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램프가 매달린 천장을 올려보면 여러 가지 꽃무늬를 네모칸으로 둘러싼 황금색 격자무늬가 보인다. 그것은 마치 봉정사 대웅전의 연등천장을 연상하게 하였는데 메디치 가의 문장이 섞여 있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 사진을 확대해보니 메디치라는 글자가 보이는 것도 있었다.
성당 안에는 중앙 돔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성모의 승천이나 1226년경의 베르링기에로 디 멜라네세의 작품으로 알려진 아기예수와 성모마리아 등을 비롯한 많은 성화들이 있었는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중앙 제단의 오른쪽 익랑에 모셔진 황금색 시신이었다. 시신은 ‘라니에리’라는 이름의 성자로 피사의 수호성인이며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성인은 황금색 옷을 입고 조용히 유리관 안에 누워 참배객들의 경배를 받고 있었다. 많은 유럽의 교회들이 성인들을 비롯해서 대주교나 또는 권력자들의 무덤을 겸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자신의 몸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하는 경우는 별로 경험하지 못한 것 같다.
대성당을 나와서 마지막으로 이름만으로도 익히 들었던 피사의 사탑을 보기로 했다. 입장권에는 피사의 사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서 매표소로 갔다. 관람료는 앞에 본 두 건물의 입장료의 두 배나 되는 12유로, 엄청 비싼 가격인데 이 탑을 유지하기 위해 들인 비용과 시간을 생각하면 그래도 볼만 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사탑은 언제든지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은 다섯시가 되었는데 그때 표를 사면 6시 반이나 되어야 입장이 가능했다. 사탑은 30분 간격으로 몇 십 명씩 끊어서 입장시키기 때문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탑 입장권부터 끊어놓고 다른 곳을 볼 걸’ 하는 후회가 됐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피렌체로 이동해야 하므로 사탑은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여기서처럼 대성당과 세례당 그리고 종탑이 하나의 조합을 이루면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프랑스에서는 보지 못했다. 이는 이태리 중세 교회의 전형이며 피사 대성당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한다.
피사를 떠나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사전 계획은 시에나도 들리고 산지미냐노도 들리는 것이었는데 이미 다섯시가 훨씬 넘어 그냥 피렌체로 갈 수 밖에 없다. 그래도 피렌체에서는 이틀이나 묶도록 계획을 짜 놓았으니 거기선 좀 쉴 수 있으려나?
내비게이터도 찾을 수 없는 좁은 골목길
피사에서 피렌체까지는 대략 100킬로미터 정도, 길은 올 때 왔던 길을 다시 9킬로미터 정도 거꾸로 올라가서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계속 달려야 한다. 편도 이차선의 고속도로는 자동차도 많지 않고 유럽의 어느 도로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긴 하지만 길 양쪽의 농촌 풍경도 보기 좋아 운전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목적지는 피렌체 시 중심 지역의 비아 구엘파 골목길에 있는 호텔 바실레아이다. 주소를 내비게이터에 입력하여 놓았으니 길 찾기에 대한 걱정은 없다. 쉬엄쉬엄 피렌체에 들어온 것은 7시가 거의 되어서였다. 그런데 네비게이터가 바실레아 호텔을 찾지 못하고 같은 지역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모든 골목길은 일방통행인데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길 한쪽에는 주차된 차들이 도열해 있어서 소나타 급의 차도 통과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겨우 길 한쪽 빈 곳을 찾아 차를 대놓고 비아 구엘파 골목을 찾아들어 호텔을 묻기를 몇 차례 한 끝에 겨우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호텔이 있는 위치는 위쪽에서는 자동차가 들어오기 어렵게 되어 있고 자동차가 접근하기 쉬운 곳에서는 거꾸로 올라가야 해서 호텔 앞으로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내비게이터도 주변만 맴돌았던 것 같다.
자동차는 호텔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공영주차장에 넣었다. 하루에 20유로 정도로 그리 싼 편은 아닌데 호텔 값이 아침 포함해서 45유로고 인터넷도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하니 다른 호텔보다 오히려 싼 편이었다. 게다가 5분만 걸으면 피렌체 두오모(대성당)를 비롯해서 유명한 볼거리가 몰려 있어서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관광을 해도 느긋하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으니 이정도면 일류라 할 만했다.
그래도 골목은 좁고 지저분하고 또 어두워서 마치 슬럼가를 연상케 했고 쓰레기통을 피해서 무거운 가방을 끌고 건장한 사내들이 여기저기서 떠드는 사이를 지나 100미터도 더 떨어진 호텔까지 오는 것이 힘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음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호텔 정문도 우리나라 삼류 여관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깨끗하고 접수부의 직원도 친절하고 인상도 좋았다. 2층으로 가방을 들고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니 방도 깨끗하고 널찍한 편이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피렌체의 밤길에 산책을 나섰다. 이미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은 시각이라 골목은 거의 캄캄해 혼자라면 겁이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충 대성당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골목을 이리저리 빠져나가니 갑자기 길이 넓어지고 불빛이 환하게 비쳤다. 어디서 모여들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 여기저기에 끼리끼리 앉고 서서 여름 밤의 서늘함을 즐기고 있었는데 눈을 들어 위를 보니 어마어마한 건물들이 조명을 받아 밤 하늘에 거대한 몸집을 드러낸 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바로 피렌체 두오모였다.
유럽의 건물들은 밤에 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것은 수많은 인파를 피할 수도 있거니와, 아름다운 조명에 입체감을 뚜렷이 드러내는 건물을 보는 것은 낮에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신비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24시간 문을 여는 슈퍼마켓이 있어 아침거리 빵과 과일을 사고 다시 어두운 골목을 돌아 호텔로 돌아왔다. 친퀘테레에서 피사를 거쳐 피렌체까지의 긴 여정 끝에 맛본 피렌체 두오모의 야경은 하루의 마무리로서는 최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등산이나 다름없는 성당 구경하기
7월 8일 피렌체의 둘째 날이다. 피곤하긴 했으나 대성당을 보려면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시간을 피해서 아침 일찍 서두르는 것이 낫다는 어느 여행안내서의 글이 생각나서 여덟시 좀 넘어 호텔을 나섰다. 다시 어젯밤의 그 대성당 앞 광장으로 갔다. 예상과 달리 사람은 많지 않았고 대성당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문 앞의 안내판에는 대성당의 입장이 오전 열시부터로 게시되어 있었다. 건물 외관을 둘러보다가 성당 옆에 붙은 종탑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들어가니 막 표를 팔기 시작하였고 그래서 종탑부터 보기로 했다.
종탑은 높이가 82미터다. 전탑에 관심이 많은 나는 중국을 여행하면서도 전탑을 만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탑에 올랐다. 전탑의 높이는 대체로 50~70미터로 한번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면 다리와 허리가 뻐근했다. 그런데 유럽 특히 이태리의 성당을 돌아보는 데도 그에 못지않았다. 종탑에 한 번씩 오르내리려면 심호흡부터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경도 젊어서 해야 해’라는 말이 이때처럼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한살이라도 나이가 적을 때 여행을 즐기시도록. 그러나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하는 내가 미안할 따름이지. 종탑 위에서 보는 피렌체는 정말 아름다웠다. 맞은편의 대성당 돔과 그 뒤로 펼쳐진 시가지는 보는 이를 그대로 중세의 한 가운데 있는 양 느끼게 한다. 연분홍 벽체에 붉은 기와를 이은 고풍스런 집들이 멀리 보이는 산 밑에까지 이어지고 지붕들 사이사이로 우뚝 우뚝 서있는 이름난 성당 건물들이 도시 전체를 중세적 분위기로 조화 시켜 놓았다.
종탑을 내려오니 열시가 좀 넘었다. 대성당 안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있었다. 이 성당의 정식 명칭은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즉 꽃의 산타마리아 성당이란 뜻이다. 여기서 꽃이란 백합을 말한다고 하는데 백합은 피렌체의 상징이면서 성모 마리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니 ‘꽃의 산타마리아’는 산타마리아를 더욱 아름답게 강조한 말이다. 성당의 건축은 1292년에 착공하여 1436년에 완공하였다고 하니 14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유럽의 성당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이들이 하나의 건물을 짓는 것은 100년에서 200년을 작정하고 짓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대에 업적을 완성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200년 걸려 짓는 집은 적어도 2천년은 내다보고 짓는 것이 아니었을까? 참으로 몇 십 년에 삶을 끝내는 인생으로는 하기 어려운 생각인데 보는 성당마다 그러니 기가 차지 않을 수 없고 급하게 살다가 서둘러 인생을 끝내는 우리 삶을 생각하면 공허한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백합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가 이 이태리 최대의 건축물인 피렌체 두오모에 대해 무슨 설명을 단다는 것은 정말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너무 엄청나고 위대해서 이 책 저 책 뒤적여 건축의 구조가 어떻고 미술사적 의미가 어떻고 하는 것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그래도 돔 이야기는 좀 하고 가야겠다. 성당을 다시 나와 왼쪽으로 돌아가면 돔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 돔은 필리포 부르넬레스키라는 건축가가 만든 것으로 1420년에 착공하였는데 부르넬레스키는 돔의 둥근 지붕만 완성시키고 죽었고 그가 죽은 뒤인 1461년에 완공되었다. 돔의 무게만 3만 7천톤이고 4만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으며 100미터 가까운 높이까지 자재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특별한 도르레까지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의 최상의 건축기술이 모두 발휘된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부르넬레스키는 작업 인부들이 밑에까지 내려가지 않고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돔 내부에 식당을 만들어 건축기간을 단축시켰다고 한다.
돔을 올라가면서 우선 가슴을 뛰게 만드는 것은 돔의 천장벽화다. 이 벽화는 조르조 바사리라는 16세기 이태리의 대표적 작가에 의해 제작된 ‘최후의 심판’인데 완성은 추카피라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닥도 한다. 돔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따라가다 보면 돔 천장 바로 밑에 설치된 계단으로 가게 되는데 이 계단은 천장화 최후의 심판의 밑바닥에 해당되는 곳이어서 그림 속에 나오는 지옥의 모습이 바로 코앞에 펼쳐진다. 그림들은 손을 뻗치면 만질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거대한 붓자국과 거친 필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뒤틀린 손과 발들이 마치 나를 잡아먹을 듯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 위대한 작품을 이처럼 코앞에서 대할 수 있다는 것이 도대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천장화를 보고 나가면 돔의 이중 구조를 내부에서 볼 수 있고 마지막으로 돔 꼭대기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아침에 올랐던 종탑과 함께 피렌체 시가지를 또 한 번 조감하게 된다. 내부의 박물관까지 훑어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이미 열두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종탑과 돔를 합치면 200미터 가까운 높이인데 계단도 거의 천개는 되지 않을까? 이 높은 곳을 오르내렸으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다. 이쯤 되면 세상 어떤 좋은 것이 눈앞에 있어도 보고자 하는 의욕이 나지 않는다. 대성당 앞의 세례당을 간단히 둘러보고 성당 앞 계단에 앉아 쉬면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웠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대성당의 뒤쪽으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전시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은 1891년 개관되었고 성당에 소장된 작품들을 전시한 미술관이다. 주로 조각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곳에 소장된 작품들은 세계 최고의 걸작들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이 미술관을 대표하는 걸작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다.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표현한 작품을 말한다.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양 옆에서 부축하고 있고 예수 뒤에는 예수 제자로 알려진 아리마테아 사람 요셉이 예수의 팔을 들어올리며 받쳐주고 있다. 삐쩍 마른 다리가 직각으로 꺾여지고 팔은 뒤틀린 채 축 늘어진 예수의 몸은 너무도 처절하게 보이는데 얼굴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하게 보인다. 예수를 중심으로 배치된 세 사람의 자세와 표정 또한 당시의 비장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8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하다가 갑자기 예수의 왼쪽다리를 망치로 부수었다고 한다. 제자들이 말려서 아주 부서지지는 않았으나 이 작품은 그렇게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만들 때는 여든이 거의 되어서였다. 그는 스물 넷에 처음 피에타 상을 제작한 이후 피에타 상에 많은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여든 아홉의 나이로 죽을 당시에도 네 번째의 피에타 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피에타 상 가운데 가장 강렬한 작품이 바로 이 피렌체 대성당의 피에타 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대성당 앞의 큰 길을 남쪽으로 약 삼백 미터 내려오면 시뇨리아 광장이 나온다. 이 광장은 중세 이래 피렌체의 정치 중심이었다. 광장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비롯해서 많은 조각 작품들이 도열해 있는데 대부분 복제품들이다. 광장 동남쪽 모서리에 베키오 궁전이 있고 궁전과 연결되어 우피치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대성당 돔의 천장화를 그린 바사리가 설계한 것으로 본래 메디치 가의 궁전이었는데 우피치란 말은 사무실이라는 뜻이다.
우피치 미술관 매표소에는 표를 사기 위해 늘어선 기다란 줄이 오십미터는 되어 보였다. 그래도 기다리면 줄어들겠지 하고 물을 한 병 사들고 아내와 함께 줄 뒤에 섰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은 별로 줄지 않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몇 십 명씩 들여보내는지 한꺼번에 줄이 줄어들곤 했다. 한 시간 쯤 지나서 겨우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표를 산 후에도 또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 입구에서는 가방조사를 하고 있었다. 비행기 탑승 때처럼 가방에서는 액체가 든 병들을 수색하여 압수하고 있었는데 아차, 우리도 방금 전에 산 물병을 빼앗겨야 할 듯 했다. 왜 하필이면 물병도 큰 병으로 샀는지. 참고로 여기 물 값은 장난이 아니어서 작은 물 한 병도 1유로 정도 하며 2009년도 당시 환률로 하면 1,800원에 해당한다. 3,000원짜리 물병을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고 버려야만 했다.
메디치 가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개관된 미술관은 중학생 때부터 그림책에서 보아온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비롯해서 너무도 유명한 중세이후의 작품들이 꽉 들어차 있는데 어마어마한 건물이나 미술작품들을 단시간에 보아치운 이야기야 이곳에 글로 쓰기가 부끄러울 뿐이다. 광고에 나오는 말대로 ‘참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다’.
미켈란젤로의 언덕에서 붉게 물든 아르노 강을 본다
우피치 미술관을 나와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를 건너 미켈란젤로 언덕을 오른다. 19세기 들어와서 피렌체 시민들이 그들의 정신적 영웅이었던 미켈란젤로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산 위 공원이다. 언덕은 완만한데 다리가 너무 무겁다.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은 모두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힘은 몇 배로 드는데 길옆에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서 있다. 갑자기 아내가 이 조각상들이 십사처를 뜻하는 것 같다고 했다. 십사처? 처음 듣는 말이니 되물을 수 밖에. 교회를 다니다가 안동에 와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 가톨릭 신자 덕에 생각지도 못한 지식 하나를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 구원을 실현코자 한 예수가 자신이 매달려 죽을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면서 멈추어 선 자리를 말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몇 군데에서 멈추어 섰는지 알 수 없었는데 교황 클레멘스 12세(1730~1740)가 열네 군데 즉 십사처로 정하고 각각의 자리에 복음서에서 묵상의 내용을 선정하여 신도들이 예수의 정신을 되새기며 묵상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뒤에 이 자리에는 묵상의 내용에 맞는 조각상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성당이나 가톨릭교회에서 지정한 자리에 십사처를 만들어 신도들이 묵상기도를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아직도 언덕 위가 가맣게 멀리 보이는데 그 끝에 교회 건물이 보였다. 아르노 강가에서 교회로 올라가는 길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길로 되어 교회를 가는 사람들은 모두 열네 군데에서 발길을 멈추고 묵상을 하며 올라갔을 것이다. 그러면 다리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었을테지.
언덕 위에는 광장이 있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이 높은 받침대 위에 올라서서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들어가는 피렌체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아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르노 강에 물드는 석양을 보려고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8시 15분 뿌연 안개 속에 붉은 원반이 아르노 강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다. 피렌체를 꽉 채운 붉은 기와지붕들이 저녁 햇볕에 불타듯이 이글거리고 서쪽으로 난 유리창마다 또 다른 태양들이 넘어가고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 장엄한 파노라마가 아르노 강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