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보이차로 맺어진 부부 김화종, 손용매(글/이희수_프리랜서 작가)
안동시내에서 풍산읍 오미2리로 향하는 42번 버스를 탔다. 예천군 호명면 오천리가 목적지였지만 마침 우리가 탄 42번 버스는 오미2리까지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루에 배차가 대여섯 대 밖에 없는지라 시간에 맞춰 우선 오미2리까지만 들어가 마중나올 것을 부탁하기로 했다. 창밖을 보면서 한참을, 동행한 사랑방 편집기자와 수다로 시간을 보내니 금세 30분여가 지나갔다. 버스로는 초행인지라 기사 아저씨께 물었더니 내려야할 정류장을 친절히 알려준다. 우리가 내린 곳은 안동과 예천의 경계지역이었다. 표지석에는 ‘본리’라 표기되어 있었다. 호명면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예천과 안동의 경계가 되는, 예천군 호명면과 안동시 풍천읍 일대에는 곧 도청 신도시가 들어설 예정이다.
한겨울의 농촌은 썰렁했다. 버스정류장이라고 쓰여 있는 낡은 간판이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칠이 다 벗겨지고 녹이 슨 버스정류장의 동그란 간판이 왠지 농촌에 몇 남지 않은 골동품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일 년의 농사를 마치고 벼 밑둥만 남은 논 위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지나갔다. 추위를 눅이려고 발을 동당거리는 새 멀리서 구형 지프차 한 대가 우리를 알아보고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그이는 생각보다 젊었다. 심성이 법명따라 가는지 온화한 표정의 인애(忍愛)보살, 손용매(35) 씨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백련다원의 인애보살, 중국에서 온 손용매씨
용매 씨는 2년 전부터 예천군 호명면 오천리에서 백련다원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중국 야생차공장 직매장을 운영 중이다. 야생차와 재배차에 따라 고수차니 보이차니 차 종류도 많다. 지난해에는 안동의 옥동에 왕다원이라는 찻집을 열어 동시에 두 군데를 운영하느라 바쁘다. 오미2리에서 차로 십 여분을 달려 멈춰선 곳은 폐교된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인근에 몇몇 농가가 보였고 그 중에 단연 백련다원이라고 현수막을 내 건 용매 씨의 가게가 눈에 띄었다.
사실 농촌 복판에 그것도 농가만 드문드문한 곳이라 찻집이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다. 용매 씨네 가족은 본래 살던 곳에서 찻집을 열기 위해 지금의 백련다원으로 이사를 했다. 폐교의 부속건물을 빌려 살림과 찻집을 함께 버무려 놓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이네 집은 딸이 셋이 있다. 우선 아이들이 많고 한적한 농촌에서 때맞춰 맡길 곳도 마땅찮기에 살림과 함께 둔 것이다. 사실 물어물어 소문을 듣고 차를 사러 오는 사람 외에 백련다원에 항상 손님이 북적이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그녀가 옥동에 찻집을 따로 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연일 한파가 계속되던 날씨라 바깥에서 지체하던 잠시 동안에도 몸속까지 얼어버린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무섭게 그녀는 찻상보를 걷었다. 이내 찻물을 끓이고 다관에 찻물이 우러나 향이 올랐다. 우리는 그 날 보이차와 고수차를 고루 마시며 몸을 녹였다.
북경에서 맺은 인연 예천에서 정착하다
사실 그녀가 찻집을 운영하고 있어서 만나러 갔다면 찻집 운영 경력이 적어도 수 십 년은 되어 차 도사라도 되어있던가 다도에 있어서 지역에서 꾀나 알아줄 만큼 명성을 떨쳐야 그녀를 만나러가는 명목이 그럴듯한데 그녀가 차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작 2년이다. 안동도 아닌 예천까지 굳이 그녀를 만나러 간 데에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의 조부모는 울진과 영덕이 고향인 조선족이다. 그녀 역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이십 평생을 살았다. 그리고 안동이 고향인 남편 김화종(48) 씨와 결혼을 해서 예천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가 한국과 그리고 안동과 예천과 인연을 맺고 산 데에는 사실 둘째고모가 많은 연을 엮어줬기 때문이다. 지금은 출가하여 스님으로 살고 있는 둘째 고모가 중국 윈난(운남)과 하이난(해남)에서 차를 재배하고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조카인 용매 씨에게 차를 공급해주고 운영하던 찻집은 그만 뒀다고 한다. 둘째고모는 한국에서 결혼을 했는데 그때 만났던 용매 씨의 고모부 고향이 다름 아닌 예천이었다. 인연이 기막힌 것이 고모는 예천에 정착해 살면서 서울, 부산도 아닌 중국 북경에 살고 있는 조카 용매 씨의 짝으로 예천 총각 화종 씨를 점찍었다. 둘의 나이 차이가 띠를 한 바퀴 돌고도 한 해 더 차이가 나니 적은 차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카사위로 둘도 없이 고모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임신해서 힘든 몸을 이끌고 농사일을 하던 고모에게 살갑게 일을 도와주던 성실하고 따뜻한 화종 씨의 모습 때문이었다고 한다. 둘째 고모는 반강제로 화종 씨에게 북경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 한 장을 손에 쥐어줬다. 반신반의했던 화종 씨는 그렇게 용매 씨가 있는 북경으로 가 첫 만남을 가졌다.
용매 씨네 가족을 다문화가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살아온 날 중 절반을 서로 다른 나라에서 보냈으니 만남에 대한 설렘이나 걱정이 반반씩 있지 않았을까 싶다. 북경으로 향하는 화종 씨의 마음이 어땠을까. 화종 씨의 대답은 의외로 서운함이 가득했다. 그래도 미래의 남편이 될 사람이 멀리에서 힘든 걸음을 했는데 공항에서 마주한 용매 씨는 고모만 챙기고 자기는 안중에도 없었단다. 결혼한 지 십 여 년이 지났는데도 그때의 얘기를 꺼내니 서슴지 않고 서운했다고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그랬나 보다. 하지만 쌍꺼풀이 없는 용매 씨는 화종 씨의 그윽한 쌍꺼풀에 반했다고 얘기한다. 스무 살 갓 넘은 아가씨인 용매 씨는 필시 부끄러워서 화종 씨의 눈도 못 마주쳤던 것은 아닐까.
11남매 여섯째,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모님 모셔
산 지 십 여 년 된 부부 치고는 이 두 부부, 좀 극진하다 싶다. 하지만 거기엔 다 이유가 있다. 물론 얼굴에서 풍기는 용매 씨의 단아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아도 남편과 가족을 잘 섬기는 것이 타고난 심성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북경이라는 큰 도시에서 예천이라는 작은 시골로 그것도 농촌 총각에게 시집와 욕심 한 번 안 부리고 살고 있는 용매 씨가 사실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화종 씨는 안동의 임동면 마리, 수몰지역인 된 곳이 본래 고향이다. 고등학교까지 안동에서 마치고 이후 예천으로 가족 모두가 이사를 했다. 그리고 화종 씨는 죽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그는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누나, 형이 있고 남동생과 여동생도 있어 형제 복 하나는 고루고루 타고 났다. 하지만 그 곁에 산 용매 씨 속은 사실 그 속이, 속이 아니었다.
화종 씨 말대로 부모님을 모시고 산 게 아니라 얹혀살았다고 할 만큼 용매 씨는 시부모님과 함께 화목하게 가정을 꾸려왔다. 그러다 3년 전 큰 위기가 닥쳤다. 시부모님 두 분이 한꺼번에 갑작스레 위중한 병환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 막내 시은이가 아직 어려 손이 많이 갈 때였다. 자식 셋에 아픈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까지는 잘 할 수 있었다. 늘 중국에 있는 가족에게도 마음 써주는 화종 씨의 배려가 있었기에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용매 씨는 기꺼이 화종 씨에게 먼저 어머님을 병원에서 집으로 모셔오자고 했다. 당시 화종 씨의 어머니는 의식도 불분명했고 거동도 혼자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모든 수발을 용매 씨가 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용매 씨도 집안 일, 아이들 돌보기에 시어머님 병 수발까지 제법 익숙해질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아버지까지 몸져눕게 되었다. 당시 용매 씨에게는 선택이 없었다. 시아버지 역시 고스란히 용매 씨의 품 안으로 모셔야 했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용매 씨는 많은 울음을 참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이틀에 한번 꼴로 투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용매 씨는 시어머니 수발에도 몸이 모자랄 지경인데 거기다 더 위중한 시아버지 수발까지, 게다가 하루 종일 온 신경을 쏟아야 하는 혈액 투석까지 집에서 하게 되었다.
천당과 지옥은 생각 한 끗 차이
용매 씨는 원망했다. 형제가 그렇게 많은데 어째서 나 혼자 그 일을 다 해야 할까. 용매 씨는 이틀을 울면서 지냈다. 원망하고 사람들이 밉고 집안일을 해도 아이들을 돌봐도 억울하고 속상하고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 괴로운 생각이 떠날 줄을 몰라 지옥에서 사는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용매 씨는 생각을 바꿨다. 법명 따라 참고 사랑하는, 인애의 뜻을 찾게 되었다. 용매 씨는 지옥 같던 그 생각 속에서 생각 하나 바꾸니 모든 것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나 하나 고생하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이니 오로지 나 하나 희생하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자.’
그것은 고모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용매 씨는 그날 이후로 먹구름이 개인 듯 마음이 평온해졌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마음 바꾸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용매 씨는 그러고 나니 본인 스스로가 살 것만 같았단다. 생각 하나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게 용매 씨의 말이다.
그리고 용매 씨의 시부모님은 3년을 병상에 있다가 한 달 차이로 두 어른 모두 돌아가셨다. 용매 씨는 수발을 들던 그때보다 한꺼번에 두 어른을 모두 잃고 나니 한동안 헛헛한 마음에 더 힘들었다고 한다. 법명의 힘일까, 용매 씨의 심성일까. 어쨌든 다른 가족도 모르게 그이는 면에서 주는 효부상을 받기까지 했었다.
용매 씨의 인내와 심성에 칭찬을 하니 되려 용매 씨 손을 젓는다. 본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화종 씨의 배려 때문이란다. 용매 씨의 친정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보러 용매 씨는 없는 살림에 두 번 비행기 표를 사 중국에 다녀왔다.
많은 다문화 가족이 겪는 일이지만 사실 농촌에서 살다보면 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럭저럭 먹고 살만 해도 큰돈이 드는 비행기며 경비를 마련하려면 빚을 져야 한다. 주위의 다문화가정 여성 대부분은 친정의 비보를 들어도 전화기 너머로 울기만 할 뿐 가볼 수 있는 현실이 못된다. 하지만 화종 씨는 때마다 기꺼이 빚을 내서라도 용매 씨의 마음에 한 맺히는 일은 없게 해줘야 한다고 늘 먼저 나서줬다. 용매 씨는 지금도 그 일을 참으로 고맙게 얘기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 꼭 맞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중매를 선 둘째 고모의 덕이 예사스럽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인애보살 용매 씨, 찻잔에 행복을 우려내다
용매 씨가 인애보살이라는 법명을 얻게 된 데에는 집안의 배경이 빠질 수 없다. 용매 씨에게는 고모가 넷 있었다. 첫째 고모는 돌아가셨고 둘째 고모가 용매 씨 부부를 맺어준 한국에 있는 분이다. 지금은 딸 난난이와 아들 왕진이와 함께 한국에 살고 있다. 난난이는 중국에 일이 있어 들어가 있고 왕진이는 하이난대학 법학부에 합격해 대학생이 되었다. 사실 왕진은 공부도 잘하고 무술까지 겸비한 문무가 출중한 재원이다. 인간극장에 소림신동으로 방송도 탔었고 중국의 유명한 무술대회에서 1등도 했다. 어쨌든 둘째 고모가 한국에서 재혼을 하면서 왕진을 낳았는데 그 후로 고모는 불교에 귀의했다. 셋째와 막내 고모 역시 그 전에 귀의해 스님이 되었던 터다. 사실 백련다원. 백가지의 인연이 닿는다는 뜻의 찻집 이름도 막내 고모가 지어준 이름이다. 고모 셋 모두가 불교와 인연을 맺고 나니 그 영향이 고스란히 용매 씨에게도 미쳤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의 교리를 듣고 자란 그녀이기에 법명을 갖게 된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친정아버지 상을 치르고 용매 씨네 친정 식구는 이후 모두 한국으로 와 귀화를 했다. 친정엄마는 서산에서 정육점을 하고 있는데 사위 생일엔 늘 빠지지 않고 부위별 고기를 수북이 싸서 보낸단다.
용매 씨도 화종 씨도 농사를 지을 때 보다야 지금이 좋다고 얘기한다. 용매 씨는 좋은 차를 마시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연을 맺는 것이 행복하단다. 수입도 그렇지만 부부에게 있어서도 지금처럼 얼굴을 마주하고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매일 밤 늦게 왕다원을 정리하고 오는 용매 씨 때문에 집안일이 오롯이 화종 씨에게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쩐지 싸우는 그 모습마저 참 도란도란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부부는 손님이 왔으니 그냥 보낼 수 없다며 기어코 삼선자장면을 대접했다. 엄마, 아빠를 인터뷰하러 왔다는 낯선 손님들 사이에 앉아 혜은(12), 가은(10), 시은(8)이도 그날 자장면을 같이 먹었다. 딸들이 아빠를 닮아 쌍꺼풀이 있어서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용매 씨. 그날 그녀가 우려 주는 차는 이상하게도 쓰지 않았다. 마음이 추운 날이 되면 왠지 용매 씨의 차가 그리워 질 것 같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