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경을 노래하다(글/임노직_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팔경은 아름다운 자연의 대명사이다
풍경을 특징짓는 경관은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기초로 한다. 특히 수려한 자연 경관은 그 자체가 미적 특질을 지님으로써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거나 서화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 경관 가운데에서도 팔경은 자연 풍경지의 전체적인 체험으로 성립된 것으로 문화적 유산의 범주에 속한다.
‘산수의 고을'로 불리는 안동에 살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팔경시의 전통을 관념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이 살던 주변의 경치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시문을 남겼다. 특히 청량산에서 하회에 이르기 까지 낙동강 연안에는 팔경이라 명명된 곳이 다소 존재하는데, 주로 누정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안동의 선비들은 대다수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남긴 자연 경관에 대한 수많은 기록문화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백운정은 반변천이 빚어낸 명소이다
돌아가신 부모를 그리워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백운정은 임하 천전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 문중 교육의 중심 공간으로 큰 역할을 해 온 곳이다. 반변천 저편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강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백운정은 16세기 중기에 세워진 건물로 규모나 형식이 당당하며 배치가 요지를 차지해서 정자로서의 기풍을 느끼게 해준다. 『영가지』에는 “임하면 북쪽 2리 부암연 위에 있다. 김진이 세우고, 그의 아들 수일이 옛 제도에다 더 늘려 지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정자는 김진의 손자인 김용(1557-1620)이 광해조의 난정을 피해 거처하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한데, 김용의 백운정 팔경시의 표제는 〈장림미우長林微雨〉, 〈평강제월平江霽月〉, 〈동교가색東郊稼穡〉, 〈북천행려北遷行旅〉, 〈약산석봉藥山夕烽〉, 〈기봉효일岐峯曉日〉, 〈요잠반조遙岑返照〉, 〈별포유어別浦游魚〉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림에 내리는 가랑비>
실처럼 흔들리며 빈 하늘을 비추니
강가에 수목이 보일 듯 말 듯하네.
깃을 말리느라 분주하던 백로는
늦게 백사장에 내려 바람을 쐬네.
백운정은 임하구곡 중에서도 선유정과 더불어 경관이 으뜸으로 평가되던 곳이었다. ‘장림’은 일반적으로 우거진 숲을 의미하지만 여기에서는 백운정에서 바라보이는 개호숲을 가리키는 듯 하다. 실처럼 날리는 가랑비는 그 자태가 마치 하늘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 하다. 비에 휩싸여 흐릿하게 비치는 강가의 수목은 한폭의 수묵 산수화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시인의 시선은 가랑비에 젖어 깃을 털면서 말리고 있는 백로에 머물러 있다. 저녁이 되어 가랑비가 그친 듯 백로는 어느새 기다란 모래톱에 날아 내려 여유롭게 바람을 쏘이고 있다. 비에 젖은 백로에는 혼탁한 정계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자적을 추구하던 시인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강물에 내리는 밝은 달>
구름 개이고 바람 자고 수면이 찬데
푸른 하늘에 흰 달이 둥글둥글하네.
고인을 볼 수는 없으나 그 마음은 남아 있으니
쇄락하고 허명한 것은 이에 다르지 않네.
문학 작품에서 구름과 바람은 일면 타기의 대상으로 부정적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진실을 엄폐하거나 호도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물리적인 역경과 고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강물 위에 달이 떠 있는 상황에서 바람은 멎고 달빛이 환하니 강물은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평정심을 찾은 듯한 싸늘한 물을 통해 시류에 휩싸이지 않는 시인의 이성을 읽을 수 있으며, 모나지 않은 둥근 달을 통해 작자의 원만하고 고결한 인품을 느낄 수 있다. 옛사람을 뜻하는 고인은 이황이 〈도산전후육곡〉에서 노래했던 고인과 동일한 인물로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고인의 육신은 사멸하여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이 남긴 글과 행적은 영원히 어둠을 밝혀주는 저 둥근 달처럼 영원하다. 사실 광풍제월로 대변되는 쇄락과 허명의 풍격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미의식의 하나로 그들이 추구하는 보편적 지향점이라 할 수도 있다. 시공을 뛰어넘는 옛사람과의 정신적인 교유는 도심과 시심의 접맥을 의미하는데 성리학적 이념하에 동화된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삼구정에는 문장가들의 글이 모여 있다
삼구정은 안동 풍산의 소산마을 바로 앞 동오라 부르는 언덕 위에 있다. ‘세 마리의 거북’이란 뜻을 지녔는데 지금도 큰 거북 모양의 3개의 돌이 정자 옆에 놓여 있다. 원래 노모를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 지은 것으로 조선전기의 대문장가인 성현이 남긴 기문이 전하고 있다. 삼구정의 팔경을 처음으로 설정한 이는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을 주도했던 김상헌이다. 그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팔경시를 짓게 했는데 그의 부탁으로 류근, 김상용, 박동열, 신흠, 이인기, 김류, 홍서봉, 조찬한, 윤훤, 장유, 신익성 등이 시를 남겼으니 모두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류이다. 팔경의 표제는 〈학교청봉鶴嶠晴峯〉,〈마애초벽馬崖峭壁〉, 〈현리연화縣里烟花〉, 〈역동한송驛洞寒松〉, 〈장교관가長郊觀稼〉, 〈곡저타어曲渚打魚〉, 〈삼복피서三伏避暑〉, 〈중추관월中秋翫月〉 등 이다. 정작 김상헌 본인의 팔경시가 전해지지 않아 아쉽기는 하나 소산 출신으로 영남 8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양근(1734-1799)의 〈구정팔경〉이 전한다.
<학가산의 맑은 봉우리>
한 떨기 연꽃처럼 수려하니
천겹 쌓인 호박인양 투명하다
새벽 이내 속에 참모습이 드러나니
신선과 학은 몇 해의 풍상을 겪었던가.
짙고 옅은 구름은 젖은 듯한데
희미한 달은 가늘어 가는구나
솔과 삼나무가 비단 병풍처럼 붉어지더니
국사봉 동쪽에 막 해가 솟구나
황준량의 집승정 팔경시를 본떠서 지은 시다. 학가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어 안동․예천․영주 지역 사림들이 경영하던 누정의 팔경시에 중요 경관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들의 시문에는 신선이 자주 시어로 등장하는데 산의 모습이 학을 닮은 때문이다. 맑게 개인 날, 이른 새벽, 이내에 쌓여 있는 학가산의 산뜻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시인의 감정은 절대적으로 배제되고 사경에 치중해서 자연경물의 표상성을 온전히 드러내었다. 젖은 듯한 구름과 휩싸여진 달의 모습은 사물 본래의 면목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러한 부정성의 표출은 이어지는 싯구의 생동감 넘치는 전환을 통해 극복된다. 국사봉 동쪽으로 떠오르는 일출 광경의 묘사는 색채감이 충만하며 비유가 화려하다. 일출은 변화와 생명을 주도하는 원천적 에너르기이다. 그리고 중세적 어둠을 벗어나 밝음을 희구하는 시인의 심상과 다름 아닐 것이다.
<마애의 가파른 절벽>
그 옛날 귀신이 자귀로 다듬었는가?
절벽이 구름에 우뚝하게 솟구쳤네.
난새는 놀라서 엎어지듯 날고
거울같은 강물에는 푸른 하늘이 열렸네.
꽃은 활짝 피어 그림 같은 봄날인데
늦게는 바람 결에 꽃잎이 쌓이는구나.
요정이 변하여 푸른 병풍이 되었으니
조물주가 마음껏 재주를 부렸네.
풍산 마애의 곡강에 가파르게 솟아 있는 절벽을 읊은 시다. 거울같이 깨끗하고 잔잔한 수면에는 푸른 하늘이 담겨져 있다. 붉게 꽃핀 봄날의 정취가 그림 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저녁이면 바람에 진 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봄날의 생동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쓸쓸하고 무상한 느낌도 밀려든다. 풍경의 시간적 변화와 조화로운 색채 대비를 통해 작자의 시적 수준과 감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조화옹을 내세워 인위적인 측면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자연 경관에 대한 감흥과 경외감을 표출하였다.
분천은 국문시가 창작의 현장이다
지금은 수몰이 되어 예전의 풍광과 정취가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예안의 분천은 이현보(1467-1555)의 고향으로 국문시가 창작의 보배로운 현장이다. 그는 40여 년간의 벼슬살이를 동이에 갇힌 물고기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로는 강호에서의 참된 즐거움을 누렸다. 분천팔경은 바로 부네 주위에 펼쳐져 있든 경승과 원림을 집약한 것으로 이른바 분강가단의 풍류가 펼쳐지던 곳이다. 그의 팔경시는 일실이 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주세붕의 차운시를 통해 그 분위기와 면모를 이해할 수 있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1544년 4월 9일부터 12일 동안 청량산을 유람했는데 이때 이현보를 예방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풍류를 즐겼다. 분천팔경시는 이 시기에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분천팔경의 표제는 〈명농화벽明農畵壁〉, 〈굴탄조어窟灘釣魚〉, 〈농암등고聾巖登高〉, 〈남교사후南郊射侯〉, 〈영천심승靈泉尋僧〉, 〈서산관설西山觀雪〉, 〈송현방안松峴放鷹〉, 〈북원금리北園禁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귀머거리 바위에 올라>
신령한 강물이 바위 아래로 옥띠처럼 에워싸니
국화 핀 중양절은 정말 좋은 시절일세.
시골 노인이 술을 올리며 다투어 축수를 하니
공께서 이미 옷을 떨치며 힘차게 춤을 추시네.
음력 9월 9일은 양수가 겹쳤다는 뜻으로 중양이라 한다. 이날은 교외로 나가서 황국을 술잔에 띄워 마시며 시를 읊거나 그림을 그리며 하루를 즐겼다. 이현보도 중양절을 맞아 자제들과 더불어 귀머거리 바위에 올라서 풍류를 즐겼을 터이다. 주세붕이 그런 모임에 참석했는지의 여부는 실제로 확인할 수 없으나 위의 시는 향촌사회의 여유로운 생활 문화를 보여준다. 이현보는 만년에 향촌에서 시가활동과 놀이, 잔치를 통해 한거와 풍류를 즐기면서 이를 생활화하였다. 특히 뱃놀이에는 자제들뿐 만 아니라 이해와 이황, 예안현감 임내신, 안동부사 조사수, 손서인 황준량 등이 참가하기도 하였다. 분강은 어부가가 불리어지던 우리 국문시가 창작의 보배로운 현장이다. 그리고 뱃놀이는 현대에 와서는 전승이 끊긴 유교문화의 중요한 자산인 만큼 분강의 뱃놀이는 전통문화의 보존차원에서 그 복원과 재현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영천암의 중을 찾아>
흥이 나서 고적하게 스님의 거처를 찾아가니
나막신에 구름이 일어 모두가 여유가 있네.
성격이 산수를 사랑해서 자주 찾기는 하나
암자가 관청보다 반드시 낫기 때문만은 아닐세.
영천암이라는 암자의 승려를 찾아가는 장면을 시화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사찰은 여전히 독서와 유흥의 공간이었고 정원의 구실을 하였다. 또한 사찰에는 시승들이 있어 사대부들에게 좋은 말벗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는 귀향 이후로 순연한 자연속에서 귀의하는 이현보의 탈속적인 경계가 드러나 있다. 주세붕은 이현보를 〈삼소도〉에 나오는 진나라 도연명이나 사령운 같은 물외적 인물에 견주었다. 그러나 주세붕 자신은 목민관으로서, 유자로서의 신분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는 만큼 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
묵계는 아득히 세상을 벗어난 곳이다
묵계는 연산군 때 김종직과 도의로 깊은 교분을 맺었던 김계행이 벼슬에서 물러나 우거한 곳이다. 김계행은 송암폭포 위에 만휴정을 세우고 자연과 벗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일찍이 “내집에 보물이란 없다.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이시항(1630-1689), 김성흠(1682-1757) 등이 묵계팔경시를 남겼으며 표제는 〈호담제월壺潭霽月〉, 〈문암청폭盆巖淸瀑〉, 〈학수모운鶴峀暮雲〉, 〈계잠효일鷄岑曉日〉, 〈만학송도滿壑松濤〉, 〈장교맥랑長郊麥浪〉, 〈원촌취연遠村炊煙〉, 〈만포어등晩浦漁燈〉으로 구성되어 있다.
<호담에 뜬 맑은 달>
비갠 초가을이라 하늘은 멀기만 한데
천척이나 되는 호담은 티 없이 맑구나.
가벼운 바람에 물결이 이는 것을 걱정하지 마오.
물속에 일렁이는 밝은 달이 보기 좋다네.
때는 비가 개여 하늘은 더욱 높게 느껴지는 초가을 이다. 천자나 높은 데서 떨어진 호담의 잔잔한 수면에는 한점의 더러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수면을 스치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에 개의하지 않고 물속에 비친 달을 들여다 보고 있다. 달은 어른거리는 물속에서도 본래의 밝은 빛을 잃지 않는다. 시인은 분명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 속의 수없이 나누어지는 달의 모습에서 이치는 하나지만 나뉘어져서 다르다는 성리학적 사유에 침잠하고 있다. 시인의 형안은 달과 물의 속성 속에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다. 그것도 자연과 동화된 유연한 심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분암의 맑은 폭포>
어느 해에 옥자귀로 이 대를 깎았는가?
대 아래에는 대낮에도 우레가 치네.
여산에서 폭포를 읊던 이백을 배운다면
후세에 귀양 온 신선이 다녀갔다고 말하리라.
만휴정 앞의 분암에서 머무른 계곡물은 호담으로 떨어진다. 숱한 세월 동안 물의 흐름을 견디어 온 분암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대를 이루었다. 대 아래로는 줄곧 대낮에도 우뢰소리가 요동치는 폭포수가 쏟아진다. 자신도 모르게 시인은 분암에서 쏟아지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포수에서 이백의 여산폭포시를 떠올린다. 이 시의 결구에서 작자는 자신의 시재를 천상에서 쫓겨난 이백에 견주어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팔경시는 장소와 경물이 만들어 낸 자연시이다
시는 구체적인 자질을 가장 큰 힘으로 삼는다. 구체성의 핵심적 요건 가운데 하나는 장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의 장소성은 넓게는 풍토성으로 새로운 뜻을 더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더한다. 이와 더불어 팔경시는 가장 그림다운 글이면서 동시에 산수 자연을 노래한 것이기에 자연에 대한 미감을 시 속에 끌어들여 감흥을 음미하게 해 준다. 자연미의 발견을 통한 감흥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자 미적 기준으로 제시될 수 있는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동지방 팔경시가 학가산을 주요한 표제로 삼은 것은 하나의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소재팔경의 ‘학가귀운’, 두릉팔경의 ‘학수추운’, 삼구정팔경의 ‘학교청봉’은 모두 학가산의 구름이나 봉우리를 묘사한 것이다. 안동지방의 팔경시의 내용은 대부분 경관이 중심이 되는 자연 그 자체의 완상에 따른 서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자연 경관의 감상을 심성을 수양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보편적으로 성리학적 성찰이 드러난다. 그들은 즉 인간의 내면과 주변세계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은 결과는 자연 경물의 묘사에만 그치지 않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거기서 어떠한 이치를 찾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한 경향은 후기로 내려올수록 더욱더 표면화 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