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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영의 추억(글/박인수_본지 운영위원, 경희한의원 원장)

내가 군대를 갈 때만해도 병역비리가 많았다.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나다보니 그 당시는 병역자원이 많이 남아돌던 때라 면제자들이 많았고 방위소집대상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신체검사에서 병역을 면제 받으면 신의 아들이요, 방위판정을 받아 보충역으로 가면 장군의 아들, 현역으로 가면 어둠의 자식이라는 말이 유행 했었다.

80년대 대학생들은 2학년 과정을 마치고 입대를 많이 했다. 당시는 대학에 교련과목이 있었고 병영훈련과 전방교육을 마치면 병역 3개월 단축이라는 혜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 때문에 27개월을 복무하고 제대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대학생들과 달리 한의과대학 6년 과정을 다 마치고 군대를 가야했었다. 한의대 공부가 2년을 하다가 중단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다시하기에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대와 치대는 6년의 교과과정을 마치면 공중보건의사로 병역을 대신 할 수 있었지만, 한의대는 그런 혜택이 전혀 없어 대학 6년을 과정을 마치고서도 사병으로 복무해야 했었다. 더군다나 한방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밟으려는 사람들이나 교수가 되기 위해 석 ․ 박사 학위를 밟으려면 병역면제를 받아 졸업과 연이어 학업이나 병원수련을 받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다보니 한의과대학 졸업생들은 병역을 면제받거나 최소한 보충역 판정이라도 받기위해 온갖 편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고 병역 브로커들과 결탁해 면제받거나 방위판정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동기들만 해도 입영대상자 100명 중에 현역입영을 한 친구는 25명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방위판정을 받거나 면제를 받았다.

이렇듯 한의과대학 졸업생들과 관련된 병역비리는 그 후 십여 년이 더 경과한 시점에 곪을 대로 곪아터지면서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고 언론에 집중 보도되기도 했었다.

스물일곱에 간 군대
어쨌거나 나는 어둠의 자식이 되어 1987년 크리스마스이브를 3일 앞둔, 12월 21일에 충남 논산훈련소에 입대를 했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이미 다들 군복무를 마친 뒤라 내가 스물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야한다는 소식에 다들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들이 “군대는 남자가 철이 들기 위해서 가는 건데, 너 같이 세상물정 다 아는 녀석은 굳이 군대를 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게 늦은 나이에 군에 가야 하는 나를 위로하는 말인 줄은 알지만, 그들은 이미 30개월이라는 청춘을 나라에 바친 몸, 만약 내가 부적절한 방법으로 병역면제를 받았다면 가장 먼저 비난했을 사람들도 그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신체가 건강했고 병역을 면제 받을 수 있는 그 어떤 사유도 없었다. 입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내게 스물일곱 살의 겨울부터 서른 살의 봄은 없는 것이다. 바깥 세상일일랑 모두 잊어버리고 철저한 군인으로 남자답게 살다 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음먹고 다짐을 해도 늦은 나이에 가야하는 군대는 쉽지 않았다. 입대 전날까지 악몽에 시달렸다. ‘입영전야’와 ‘전선야곡’은 하도 많이 불러 꿈속에서 잠꼬대를 할 정도였다. 거의 매일 친구들과 만나 술 마시고 취해 자고 다음날 깨었다가 다시 저녁에 술 마시고 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모두들 다 가는 군대였다면 그래도 이렇게 착잡하진 않았을 텐데, 하면서.

입영전날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그냥 집에서 얌전히 잤다. 잠을 자기 전 사형수가 교수대로 가는 심정으로 마음의 정리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입대 준비를 했다.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했다.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따라 나오겠다는 것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만은 몸이 불편한 와중에도 시내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오셨다. 어머니는 시내버스가 올 때까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무척이나 까칠하게 느껴졌던 그 손. 어머니께선 외면하고 선 자식의 얼굴 옆모습만 쳐다보며 아무 말 없이 계시다가 내가 버스를 타려하자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버스에 올라 잘 작별인사를 했다. “잘 지낼 테니 염려 마세요. 금방 휴가 나올 겁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었다. 가지 말라는 손짓이 아니라 어서 가라는 손짓. 버스가 출발하자 제일 뒷자리 끝에 가서 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뺨을 타고 흘렀다. 가만히 버스 창에 기댔다. 20년 넘게 눈에 익었던 낯익은 풍경들이 차창 뒤로 빠르게 밀려갔다가 멈추고 또 다시 밀려가고 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없기에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해 가장 빠른 논산행 버스표를 끊고는 버스에 올랐다. 중앙고속 그레이하운드 버스. 잠시 고등학교 시절 추억이 있는 터미널 주변을 둘러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의 찌꺼기는 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내가 20여 년간 살았던 부산의 모습을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열심히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무 일없이 군대생활 잘 하면 다시 볼 수 있는 곳이지만, 행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다시 볼 수 없는 고향. 차가 이윽고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하자 나는 더 이상 바깥 구경하기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곧장 잠이 들었다. 버스가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사람처럼 잠을 잤는데, 논산터미널에 도착할 무렵에는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깼다. 대합실에는 배웅하러 온 친지나 친구 애인들로 인해 무척이나 혼잡했다. 나처럼 아무도 따라오지 않고서 그냥 혼자 온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여럿이 온 듯 했다. 친구나 친지들의 배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혼자 오는 것이 마음 편해 좋았다.

눈물 났던 바리깡
터미널 근처에서 머리 깎을 이발소를 찾았다. 늦은 나이에 주변사람들에게 빡빡머리 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삭발을 최대한 미루었는데 여기서는 무조건 밀어야 한다. 간판이 크게 붙어 있는 이발소를 들어서니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제법 많이 앉아있었다.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데 삭발하는 모습이 제각각이라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몰랐다. 머리 깎는 애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여자도 있고, 삭발하는 자식의 모습을 대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부모와 누이도 있었다. 친구의 빡빡머리를 보며 낄낄거리는 제 또래의 철부지들이 있는 반면에 그냥 혼자 와서 담담하게 미는 나 같은 이들도 있었다. 이발사의 손놀림이 무척이나 재빨랐다. 바리깡이 지나가고 시커먼 머리털이 돌돌 말려 떨어질 때마다 허연 머리 속살이 신작로처럼 열렸다. 교차로가 만들어지고 사통팔달 몇 번 반복되면 박처럼 하얀 머리통이 드러났다. 꽤나 많았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어느 듯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이발사는 능숙한 솜씨로 하얀 나일론 천을 몇 번 툭툭 틀어 머리카락을 털어내고는 내 목에 둘렀다. 나는 잠자코 목을 길게 빼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삭발한 후의 내 모습은 어떨까?’ 내가 그런 감상에 잠시 젖을 틈도 주지 않고 차가운 바리깡이 부드러운 두피를 억세게 짓누르며 야멸치게 지나간다. 그런데 그날따라 너무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밀어서인지 날이 무딜 대로 무뎌져 있었다. 바리깡은 처음엔 기세 좋게 밀고 나가다가 어느 부분에 이르면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멈추어야 했는데 그렇게 가다 서다를 반복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뽑히며 아팠다. ‘이런, 지랄 맞은 경우가’ 가뜩이나 울고 싶어 죽겠는데 ....... 머리털이 뽑힐 때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이발사들이 빨리 밀어야 하는 조급한 마음이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따갑고 아프다. ‘그래, 두 번 다시 볼 일 없다 이거지?’ 괘씸한 생각에 눈가가 붉어지더니 뜨거운 이슬방울이 맺히고 그렁그렁 거리다 굴러 떨어졌다. ‘바보같이 그것도 못 참고서......’ 머리를 빡빡 밀 동안 몇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보았다. 낯선 얼굴의 사내가 나를 보고 슬픈 미소를 희미하게 짓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말고는 처음으로 밀어본 머리, 군 생활 내내 속세 떠난 중처럼, 도를 닦는 도인처럼 살라는 말 같았다.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연무대로 올라가는 길에 인파들이 많았다. 계백장군의 5천 결사대와 5만 명의 김유신 군대가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 그 황산벌에 대한민국 최대규모의 신병훈련소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참 재미있다. ‘연무대’라고 쓰여 있는 문을 지나 연병장으로 올라갔다.
입소식이 시작되었다. 지휘관은 무척이나 자상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주위에 도열해 있는 장교와 조교들의 표정도 유순하고 아주 부드러워보였다. 이윽고 대장인 듯한 사람이 연단에 올라 대한민국의 남아가 되는 길에 들어선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했다. 그 말이 우스웠다. 제기랄, 마지못해 끌려왔는데 환영이라니, 이럴 땐 좀 솔직해지면 안 되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병역의 의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 일, 그러니 힘들고 긴 시간이 될 지라도 잘 견뎌주길 바란다. 이런 식이어야 좋았을 텐데. 대장의 환영사는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지루한 입소식이 끝나고 이제 배웅하러 나온 가족 친지들과 작별해야 하는 시간. 장정들이 스탠드쪽을 향해 경례를 하고 뒤 돌아섰다. 행진곡풍의 군가에 맞춰 발을 옮겨야 하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곡에 발 맞춰서 걸어가는 나를 느낀다. 장정들의 발소리와 배웅 나온 사람들이 흐느끼는 소리와 고함소리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뒤섞이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장정들은 배웅 나온 가족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배웅 나온 가족들은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군 생활 잘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보자는 말들. ‘사랑해’라는 애절한 목소리는 고함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입소대대 생활관 쪽으로 행진해 들어가는 장정들의 표정이 다양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의 아픔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걸어가는 친구,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는지 실실 웃으며 가는 철없는 친구, 군대체질인지 씩씩하게 발 맞춰 행진하듯 걷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불안감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냥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착잡한 심정에서 못내 끌려가다보니 신발을 질질 끌며 걸어가는 친구들이 많았다. 연병장에는 장정들의 발밑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자욱했다. 행렬의 후미에 있었던 탓에 먼지를 많이 마시게 되는 바람에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는데 희미하게 입소대대 생활관 쪽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이게 뭔 소리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는데 모퉁이를 꺾어서 도는 순간 그 실체를 알 수 있었다. 생활관 입구 공터에는 인상이 험악한 빨간 모자를 쓴 조교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빨리 뛰어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입 모양을 보니 “XX놈들! 빨리 안 뛰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 달리는 소리가 아니라 장정들이 뛰어가는 소리였구나. 눈치 빠른 친구들은 부랄 두 쪽이 부딪히며 요령소리 나도록 달려갔다. 나도 그 친구들을 뒤따랐다. 그런데도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한 친구들과 사회에서 하던 버릇대로 개기는 꼴통들이 있었다. 바지춤에 손을 집어넣고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녀석들, 개중에는 뛰기는 자존심 상하고 그냥 걸어서도 안 되겠다 싶어 뛰지도 걷지도 않는 애매한 발걸음을 하는 녀석들도 있었다. 결국 그 대열 속으로 뛰어든 조교들의 이단 옆차기와 발 걸기에 걷어차이고 넘어져서 맨땅에 머리 박는 ‘원산폭격’을 해야 했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앞으로 취침/ 기상/ 뒤로 취침/좌로 굴러/ 우로 굴러......”
시작부터 제대로 못 하는 놈들은 호되게 깨지고 있었다. 조교에게 걸린 친구들은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뻗쳐와 기상을 반복하고 그것도 제대로 못하는 친구들은 군홧발에 수도 없이 걷어차였다. 주먹 만한 심장이 콩알만 하게 쪼그라들었다.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입소식이 끝나고 가족들과 애인들이 미처 입소대 정문을 벗어나지도 않은 시각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자식들은 짐승취급을 받으며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기합이 장난이 아니었다. 주먹을 쥔 채로 엎드려뻗쳐를 하고 원산폭격도 한다. 힘이 없어 제대로 기합을 받지 못하거나 조금만 요령을 피우면 그 상태에서 지체 없이 군화발이 날아온다. 시범케이스로 몇몇 친구들이 호되게 당하고 나서 열을 맞춰 앉아 일어서를 짜증날 정도로 반복했다. 그때부터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걸 일일이 기억해서 써내려가기에는 유감스럽게도 내 기억의 저장창고가 너무나 작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비참한 것이라 기억창고 저 깊은 구석에다 집어넣어버리고서 잊어먹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 시간 이후로 푸닥거리를 수도 없이 반복 하고 또 반복했다. 그렇게 하고 입에서 단내가 날 때쯤 겨우 내무반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바깥에서 하도 굴러서 정신이 없었다. 조교들이 입을 열 때마다 욕설이 튀어나왔다. 한 문장에 욕설이 두세 개 들어가지 않는 말이 없었다. 사람에서 언제 개새끼가 되고 개자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취급에 대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웃기는 것은 조교들이 그렇게 욕설을 하면서도 마지막 말에는 꼭 “알겠습니까?”하며 예대를 붙인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이 깔라면 끝까지 깔 것이지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게 더 기분 나빴다.

논산훈련소 입소대대 내무반, 침상에 다들 올라가 양반자세로 앉았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군인 자세가 나왔다. 방금 전까지 건방을 떨든 친구들조차 기가 완전히 죽어 부동자세를 취하는 모습이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무반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얼마 후, 그 무거운 적막을 깨고 어깨에 견장을 단 조교가 들어왔다. 이곳에서 몇 일간 지낼 것이고 그동안 어떤 것들을 하는 지에 대해 친절히 설명했다. 그리고는 계급이 낮은 조교들을 시켜 큰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게 했다. 참 이상도 한 것이 이놈의 훈련소라는 곳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계급이 낮은 조교들은 인상도 험상궂고 욕설에다 구타를 예사로 하는데 계급이 상병 이상인 조교들은 표정도 온화하고 말투도 부드럽다. 조교들이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서 각자가 가져온 소지품을 넣고 옷을 벗어 싸고는 포장을 하고 겉봉에다 집주소를 적었다.

며칠 뒤에 부모님께서 받으실 거니 정성스럽게 옷을 싸라고 조교가 일러주었다. 조교의 입에서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조교들이 큰 봉투를 수거해 가고 나자 다른 조교가 왔다. 신상명세서를 한 장씩 쓰기 시작했는데 이번 조교는 아까보다 좀 신경질적이었다.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친구들이 신상명세서의 내용이 뭔지 몰라 제대로 쓰지를 못하고 다시 종이를 요구하자 조교는 “동작 그만”하고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기합. 그리고 다시 쓰기. 그랬더니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것이 있으면 주변에 물어보고 쓸려고 하다보니 내무반이 소란스러워지고 그걸 주의시키느라 또 다시 기합을 주었다. 그리고 또 적고……. 나중에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일인데, 침상에다 머리를 박았다가 바로하고를 반복을 하면서 모든 서류의 작성을 끝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교들이 내뱉은 욕과 구타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고도로 계산된 수법인 것 같기도 했다. 사회에서 격리되어 군에 입대한 첫날부터 아무 생각도 못하게 얼을 빼놓으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깥에 나가서 다시 키대로 줄을 서고 포대자루 같은 군복을 지급받았다. 눈치 없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사람 손들어보라는 말에 손을 들었던 친구들은 불려나가서 또 다시 한바탕 호되게 당했다. 지급된 군복이 맞지 않거든 군복에다 몸을 맞추면 된다고 했다. 군대말로 “까라면 까는 거지, 뭔 말들이 많아.”하는 식이었다. 저녁시간이 되자 까끌까끌한 짬밥으로 저녁 끼니를 때웠다. 저녁을 먹고서 잠시 담배를 피우고 숨을 돌리게 해주더니 다시 내무반으로 집결시켰다. 다시 고요한 침묵.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올랐다. 두고 온 사람들의 얼굴들 그들로부터 잊혀져야 할 내 신세.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미련……. 앞으로 27개월 동안은 사회에 나갈 수 없는데도 이제부터는 민간인이 아닌 군인의 신분이 되는데도 바깥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지 못하고서 미련을 가지는 내가 우습고 눈물날 것 같았다.

어려울 때 만난 친구
복도 저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점점 가까워지더니 조교 하나가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박인수가 누구야?” 나는 그 소리에 손을 들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접니다.” 그 조교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잠시 나를 위아래 훑어보더니 자기를 따라오라며 복도 쪽으로 먼저 걸어갔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사회 같았으면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따져 물었겠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는 일 조교가 따라 오라고 하니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따라 가니 의무실이었다. 의무실에는 얼굴이 햇볕에 검게 그을린 조교 하나가 책상에 앉아 나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멋을 내려고 각을 잔뜩 잡아 눌러쓴 모자에는 공포의 5만 촉광이라는 노란 송충이 한 마리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그놈은 다짜고짜 내게 “야, 너 나 알아?”하고 물었다. 내가 잔뜩 쫄아서 “글쎄...에...요”하고 머뭇거리자 그놈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낄낄거리며 웃더니 “나야, 낙기. 김낙기!”이런다. ‘김낙기?’ 나를 아는 체 하는 걸로 보아 그 이름이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낯설지도 않은데. 눈을 크게 뜨고 다시 그 놈을 자세히 보니 친구다. 내 대학동기 김낙기, 이름이 낙기인 탓에 별명인 ‘낙지’로 더 많이 불렸었는데.
반가웠다. 여기서 이 놈을 만나다니. “낙지, 이 새끼”하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다가 입술의 저항 때문에 먹혔다. 행여 내가 원한 산 것은 없지만 혹시라도 여기서 반가운 마음에 낙지라고 했다간 왠지 큰 일 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고 “아……. 네, 압니다. 저… 만나서 반갑네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낙기가 그런 내 행동이 재미있다며 웃고는 “짜식아, 쫄기는. 괜찮아 풀어, 풀어~”이런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고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반가웠다. 낙기가 내게 다가와 가만히 서있는 나를 끌어 앉혔다. “오늘 힘들었지?”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낙기는 내게 고생했다며 과자부스러기와 음료수를 내밀었다. 밖에서는 잘 먹지 않던 것들이었는데 그게 먹혔다. 나는 의무실에 낙기와 단 둘이 있었다. 가끔 조교들이 들락날락하기는 했어도 별 다른 간섭을 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렇게 낙기는 나를 취침 점호가 시작되기 전까지 나를 데리고 있었다. 취침점호 하는 시간이 되어 내무반으로 가니 다들 찐하게 기합들을 받고서 군기가 잔뜩 들어 있었다. 나는 낙기 덕에 그 기합에서 열외 될 수 있었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에도 저녁식사 후에는 의무실로 갔다. 입소대대에 있는 동안 매일 저녁 낙기는 나를 의무실로 오게 했다. 낙기는 내게 훈련소의 생활에 대해 상세하게 가르쳐주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군 생활에 쉽게 적응하는 방법인지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해서 입소대대에서의 기간 동안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친구가 있다는 게 힘이 되었다. 입소대대에 있었던 기간 동안 낙기는 내 멘토가 되어주었다. 자기도 입대한 지 얼마 안 되는 졸병신분으로 고참병들의 눈치가 보였을 텐데도 나를 잘 보살펴 주었다.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암울한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가 고맙게도 거기에 있었다.

군대를 제대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나는 그때의 그 고마웠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한 번씩 연락을 하고 만나면 그때 일을 한 번씩 이야기 한다. 그러면 그 친구는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자꾸 왜 그러냐.”하며 겸연쩍어 한다. 하지만 어려울 때 만난 친구 낙기는 나에겐 무척이나 고맙고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친구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