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구곡의 시적 기행(글/임노직_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장)
무이산과 도산은 조선 선비들의 이상향
산수 자연은 조선조 사림들에게 이상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공간이었다. 중국의 무이산은 주희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순수학문에 침잠하던 공간이다. 주희의 삶의 모습은 우리나라 성리학자들의 모범이었으며, 그의 견해는 조선 학계에 도학적 사유의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조선 사림의 정신적인 고향은 주희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일 수도 있었다. 그가 지은 무이구곡 시는 조선 사림들의 구곡시 창작의 전형이 되었으며, 퇴계를 위시한 영남 사림들의 산수관 확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산은 퇴계의 출생지로 그의 은거의 생활공간이자 학문적 열정과 산수미의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의 체험 공간이었다. 퇴계는 한평생 주희의 사상과 학문을 존중하고 신뢰했거니와 도산은 조선 주자학의 본산이요 퇴계학이 형성되고 구현된 현장인 것이다. 퇴계 사후 도산은 영남 중심의 남인 학자들 뿐만 아니라 당색을 초월하여 모든 학자들이 순례하는 성지가 되었다.
도산구곡 시가의 창도자- 광뢰 이야순
도산구곡이라는 명칭은 17세기 초에 편찬된 《선성지》 서문에 처음으로 언급되지만, 그 설정과 시가 창작은 정조의 명에 의해 〈도산도〉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예안지역 사림의 공론과 논의를 통해 본격화된다. 도산구곡 명칭은 모두 퇴계의 시문이나 관련 유적지에서 따온 것으로 제목마다 퇴계의 사상과 의식 등이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도산구곡 시가는 대략 20여 편이 전하는데 퇴계학파 계열의 문인에 의해 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집중적으로 창작되는 경향을 보인다. 퇴계 가학의 중심적 계승자라 할 수 있는 광뢰 이야순(1755~1831)이 주도하였다. 그는 퇴계의 학문을 충실하게 조술하고 그 자취를 빈틈없이 정리하고자 한 인물로, 당대의 거유 이상정과 김종덕을 사사하였다. 그는 평생동안 퇴계의 문집을 연구했는데 퇴계학의 전개와 발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매우 주목되는 학자다. 이야순의 도산구곡 시는 서시를 포함해서 7언 절구 10수로 구성되어 있다.
錦繡인듯 유리인듯 밝고도 신령하니
산은 더욱 높고 물은 더욱 맑아라.
대은병과 멀다고 말하지 마소.
노젓는 한 소리에 천년을 함께 하리.
1구의 ‘금수는 산빛을 말하고 ‘유리는 물빛을 비유한 것이며, 2구는 퇴계가 도산을 찾아 읊은 감회를 인용하였다. 영기가 깃든 도산의 수려하고 조화로운 산수를 통해서 퇴계의 위대한 학덕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도산 일대 만큼 대현의 학문 강학처로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비록 무이산의 대은병 아래에 위치한 무이정사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주희와 퇴계의 삶이 시간적으로 천여년의 선후가 있지만, 학문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러한 시공간을 뛰어넘어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노젓는 한 소리’는 주희와 퇴계를 동일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서시에서는 향후 화자가 노래할 것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一曲이라 운암에서 배를 저으니
군자 마을 외내라고 모두 일컫네
단풍과 노을을 누가 이어 읊을까?
한줄기 푸른 연기 蕭寺에 피어나네.
1곡은 운암곡이다. 운암은 예안현 남쪽 5리, 도산 남쪽 15리에 위치하는데 도산구곡의 수구 역할을 한다. 수몰되기 전의 광산 김씨 예안파 집성촌인 외내 마을과 인접한 곳이다. 외내마을은 군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여 군자리라 불리어졌는데 퇴계에게 급문한 선비들이 많았다. 퇴계는 이들과 더불어 운암사에 노닌 적이 있다. 3구는 당시 퇴계가 지어서 제자들에게 보여 준 싯구를 인용한 것으로 퇴계의 학문이 지속적으로 계승되기를 바라고 있다. 4구의 ‘한점 푸른 연기’는 운암사의 소산한 분위기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다.
二曲이라 부용산 옥처럼 솟고
풍월은 열려서 냇물 가득 비치네.
십 리 트인 들에 연원이 광활하니
한 겹 雲烟 막힌 거 개의치 마소.
2곡은 월천곡이다. ‘달래라 부르는 월천은 비암 동쪽에서 8~9리 떨어진 부용봉 아래에 위치하는데 퇴계의 수제자 조목(1524~1605)이 살았다. 퇴계는 예안고을의 산수를 언급할 때 반드시 월천을 으뜸으로 꼽았다. 퇴계는 1562년 7월 16일에 적벽의 고사를 본받아 문인들과 월천곡의 풍월담에서 선유를 즐기려다가 큰비를 만나 실행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조목은 퇴계의 문인이 된 후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스승을 모셨고, 퇴계 사후에는 문집의 편간, 서원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퇴계학의 광활한 연원 가운데 한겹의 구름과 안개가 끼었다는 것은 월천의 학문이 단절됨을 비유한 것이다.
三曲이라 오담에서 배를 띄우니
易學이 그 언제 전래되었나?
음기가 그치고 천지가 열리니
정일재 서재에 달이 더욱 곱네.
3곡은 오담곡이다. 오담은 도산 아래 5리 쯤 되는데 바로 역동서원이 위치한 곳이다. 역동서원은 퇴계의 발의로 우좨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다. 우탁은 송대 신유학자인 정이천의 주역 주석서를 수용해서 깊이 연구한 뛰어난 학자였다. 퇴계는 돌아가시던 그 해에 역동서원에서 문인들과 《심경》을 강론했다. 3구는 음기가 극에 달한 순음을 지나 동지가 되면 양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 듯 만물이 생기를 회복하게 됨을 비유한다. 시어는 퇴계가 지은 역동서원의 기문과 유생들에게 준 시에서 차용했다. 4구의 ‘정일재’는 역동서원 서재의 이름으로, 정밀하게 관찰하여, 올바른 마음을 전일하게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四曲이라 귀먹바위 강물이 부딪고
자욱한 바위 구름 늘어져 푸르네.
농암에 거하시던 仙伯은 어데 갔소.
복사꽃 지고 달빛 못을 비추는데
4곡은 분천곡이다. 부내라 불리는 분천은 월천 서북 5리쯤에 있는데 이현보의 정관이 있었다. 농암은 “정승벼슬도 이 부내의 강산과는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귀머거리 바위에서 자신의 호를 취했거니와 만년 이곳에서 명리를 벗어나 참으로 ‘염퇴의 삶을 누렸다. 강호에서의 농암의 생활은 바로 지상의 신선에 비견되었기에 3구에서 퇴계는 농암을 다정하게 ‘노선백이라 지칭한 것이다. 4구는 임강사 곁에 위치한 반도단에서 농암이 퇴계를 초청해서 꽃을 감상했던 고사를 상기한 것이다.
五曲이라 탁영담 깊고 깊어서
온 숲을 적시고도 남아도네.
못물이 이처럼 끊임없이 흐르듯
옛님을 생각하니 내 마음 한결같네.
5곡은 탁영곡이다. 바로 도산서당이 위치한 곳으로 퇴계의 이상이 실현되던 공간이자 도산구곡의 중심을 이룬다. 낙천은 서당 앞에서 맑고 깊은 못을 이루어 흘러넘쳐 흐르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도산의 승경 가운데 퇴계는 특히 탁영담의 운치를 매우 좋아해서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 도산구곡의 5곡으로 탁영담이 설정된 것은 주희의 무이정사가 무이구곡의 5곡에 위치한 것을 고려했을 터이다.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말로, 속진을 초탈하여 고결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거나 시세에 따라 출처와 진퇴를 적당히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3구와 4구는 도맥이 면면히 이어져 단절되지 않은 것을 비유했는데 퇴계 자신이 지은 묘갈명에 나오는 “산은 높이 솟아 있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는데, 내가 고인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라는 구절을 차용하였다.
六曲이라 옥 굽이 수풀을 안고
물고기랑 백조와 사이좋게 지내네
하명동에 늦은 꽃 더욱 어여뻐
한자락 서쪽 골을 독차지 했네.
6곡은 천사곡이다. 이 구비는 탁영담 동서쪽 5리에 위치하는데 우리말로는 ‘내살미라 부른다. 천사 가에 자리한 자하봉 아래 하명동은 퇴계가 처음 복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야순은 이를 기념하여 자하산을 ‘우리 가산家山이라 부르고 자하산의 퇴계 시문을 모아 첩을 만들었다. 2구의 鯈魚와 白鳥는 속세와는 무관한 탈속한 경계를 상징하는데 산수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퇴계의 은자연한 모습을 의미한다. 4구의 ‘한 골을 독차지했다는 말은 왕안석이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상일을 잊고 지내던 시절에 지은 시에 전거를 두는데 늘그막에 은거를 꿈꾸는 선비들의 염원이 서려있어 운치가 있다.
七曲이라 여울이 한줄기 돌아 흘러
갈선대와 고세대 다시금 돌아보네
붉은 모래 일 만섬 하늘이 숨긴 보배
靑壁에 구름 피어 차갑게 비치구나.
7곡은 단사곡이다. 단사는 예안현 동쪽 20리 쯤에 위치하는데 석벽이 강가에 깎아지른 솟아 절경을 연출한다. 절벽이 붉은 빛깔을 띠어 ‘단사벽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남쪽에 왕모산성이 있으며 그 기슭에 ‘갈선대와 ‘고세대가 자리잡고 있다. 대의 명칭으로 쓰인 ‘갈선’은 연산 현산에서 수련했던 오나라 갈현에서 유래하고, ‘고세는 범속을 뛰어넘는 고결함을 의미하는데 모두 속세를 벗어난 청정한 신선 세계를 가리킨다. 시의 구성에서 위의 두 구절은 무이구곡시의 7곡시 형식과 유사한데, 주희의 시구를 염두에 두고 시상을 전개했음이 분명하다. 갈선 ․ 고세 ․ 단사 등의 탈속적 언어로 인해 이 시는 비교적 도가적인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八曲이라 고산에 옥경이 열리니
惺惺한 心法이 이곳에 서리었다.
노래를 멈추고 절벽에 묻나니
시짓고 노닐던 일 능히 기억하오?
8곡은 고산곡이다. 고산은 청량산의 축융봉 서쪽 산기슭으로 예안현 단사 북쪽 10리에 있다. 퇴계의 문인 금난수의 별업이 있는 곳으로 도산구곡 중에서도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퇴계는 금난수의 호를 ‘성재’라고 지어주고, ‘고산정 편액을 써 주었으며 이곳의 풍광을 즐겨서 시를 남겼다. 이야순은 옥거울처럼 열린 월명담의 명경지수에서 퇴계 학문체계의 핵심인 ‘경 사상을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고산 주인이 추구하고 지향하던 성리학적 성찰의 경계를 언외에서 거론하고 있다. 고산 석벽을 노닐며 시를 짓던 퇴계의 옛일을 시인은 짐짓 창고한 절벽에 반문한다. 퇴계에 대한 강한 연모와 후학이자 후손으로서의 자긍심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九曲이라 산 깊어 형세가 끊어진 듯
뉘라서 산속에 냇물 흐를 줄 알랴.
무릉도원 알려질까 그게 두려워
沙鷗에게 분부하여 동천을 호위하네.
9곡은 청량곡이다. 청량산은 도산구곡의 극처로 유람이 끝나는 곳이다. 퇴계는 산사를 찾아 독서하거나 유산을 즐겼는데 그가 가장 즐겨 찾아 노닐었던 산이 바로 지척의 청량산이다. 퇴계는 독서하는 것과 산에서 노니는 것이 서로 같은 점을 들어 독서와 산놀이를 일치시키기도 했다. 1구의 단절을 뜻하는 ‘絶然’은 청량산이 속세와는 동떨어진 공간이자 경관이 기절한 것을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으로 시용되었다. 작자는 청량산을 이상향으로 인식하여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시적 소재를 찾았다.
이야순의 도산구곡 시는 주희의 무이구곡시를 차운하면서, 퇴계의 무이구곡 차운시의 의상을 기초로 도산일대의 산수의 아름다움을 묘사하였다. 다만 도산구곡 시가의 창작의 이면에는 퇴계의 학통을 계승하고 이를 정립하려는 의지가 들어있다. 수사적 측면에서 논한다면 집구시에 가까울 정도로 퇴계의 시구를 인용하였으며, 문학사상적 측면에서는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는 선적 취향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이야순의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선시대 도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문장을 학문의 여기로 여겼으며 도본문말의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문학을 인간의 성정을 교화하는 계몽적 성격으로 파악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도산구곡 시가에서도 충분히 감지된다. 도산구곡을 중심으로 한 자연의 실경 속에서 절제된 필치로 자신의 이상세계를 형상화하였다. 그의 시적 수준에 대해서 금시술은 "구름이 가고 물이 흐르는 듯하여 마치 구상하지 않아도 전아하고 대단히 통창하여 저절로 자연스러운 법도가 있다."고 평했다. 실로 시적 경계가 상당히 노숙함을 지적한 말이다. 산림처사로서 그는 진경을 통한 진락을 추구하면서도 심미적인 체험을 중시했기에 그의 시에는 강호자연의 서경성, 도학적 은일의 서정성, 기행적 서사성이 혼재되어 있다. 퇴계의 무이구곡 차운시에 비하면 관념성이나 문헌적 추상성이 배제되어 훨씬 직접적이고 강렬하다.
구곡 시가는 도학의 전승과 관계
구곡을 무대로 산수자연 속에 소요자적하는 것은 신선의 경지에 드는 일이다. 그러나 퇴계의 무이구곡시 수용과 퇴계 후학들의 도산구곡 창작은 주희로부터 퇴계에게 이어지는 도학의 정통성을 의미하며, 퇴계학파 인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계보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도산구곡의 설정과 시가 창작은 학통 계승의 문학적 표출이자, 퇴계라는 위대한 인물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구곡문화의 전승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것은 언어적 서술 이상으로 도학적 전통 및 도통 의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드러내려는 행위였다. 즉 도산구곡 시가의 창작은 영남의 퇴계학파 사림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과정에서 나온 것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도를 구현하고 체득하는 구도의 감각적인 예술로써 구곡시가를 창작했다. 선현의 참된 정신이 깃들고 자연과 융화된 인생관이 담긴 구곡문화의 합리적 계승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대립적 구도를 지향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화두로 떠오른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