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딱 요리사 서연지의 행복한 부엌 이야기(글/김영희_객원기자, 사진/박영대_동아일보 사진기자)
홍대, 아메리카노, 와플 그리고 서연지
집이 홍대 근처라고 했다. 과천에서 멀리까지 오는 것을 염려했지만 우연히도 바로 전 주말에 박영대 기자의 딸내미 돌잔치로 홍대를 가본 적이 있어서 자신 있게 홍대입구로 약속을 잡았다. 나 같은 시골출신에게 지하철은 정말 요긴한 교통수단이다. 서울지리를 몰라도 지하철만 탈 줄 알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으니까. 계단이 많아 다리가 아프다는 것이 흠이지만.
주말의 홍대 입구는 젊은이들 세상이었다. 흥겹고 가벼운 기운이 거리에 넘치고 외국인도 많아 외국의 번화한 여행지를 거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약속 장소 근처까지는 온 것 같은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을 걸어볼 만한 내 또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약속시간을 넘길 위기에 처해 할 수 없이 서연지씨(31세, 요리사, 안동시 출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 장소를 멋지게 찾아 ‘저도 이제 서울사람 다 됐어요’ 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실패다.
우리는 바로 같은 거리 위에 있었고 1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사진촬영이 있다고 해서 단장을 하고 왔다고 했다. 밝고 경쾌한 걸음걸이에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투, 베스킨라빈스(31을 의미)보다 훨씬 어려보이는 동안미녀였다. 거기다가 스스럼없이 동네 언니를 만난 듯한 대화에 오히려 내가 긴장이 풀어지고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주말인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의 약속장소는 벌써 사람들로 꽉 차 자리가 없었고 그 주변도 사람들 소리로 소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홍대입구를 약간 벗어나기로 하고 골목길을 걸어 좀 한적한 거리로 찾아들었다. 거리 양쪽에 저마다 독특한 외양과 인테리어를 갖춘 커피숍과 까페들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테라스가 있어서 노천까페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해도 뉘엿하게 질 시간이라 분위기는 더없이 멋있었다. 서울의 매력, 도시의 매력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과촌(강남에서 가장 가까운 수도권 도시지만 너무 시골이라 )에서만 살던 나에겐 신선한 경험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와플 한 조각. 그리고 즐거운 대화.
옥상 텃밭에서 수확하는 기쁨
Nanas kitchen. 사실 서연지씨의 블로그를 통해 그를 먼저 알게 되었는데 네이버에서 선정한 파워블로거이다. 2008, 2009, 2010년 3년 연속 요리 부분에서 파워블로거에 선정되었고 블로그 이웃이 5천여명에 달하고 하루 방문객 수는 2천 5백여명이나 되는 막강 힘의 소유자이다. 그의 블로그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연지씨 이웃집에서 살고 싶다’였다. 그의 이웃집에 살면서 맛있는 요리를 나눠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요리들이 먹음직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곁들여져 더욱 미각을 자극한다.
특히 ‘쑥갠떡’이 인상적이었는데 흔히 우리가 말하는 쑥개떡을 직접 만들고 그 과정을 자세하게 올려놓았다. 방앗간에서 빻아온 쌀가루에 직접 삶은 쑥을 으깨어 넣고 반죽을 한 다음 나뭇잎 모양으로 예쁘게 빚어 찜기에 쪄내는 과정이 따라하기 쉽게 사진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검은콩을 볶아 믹서기에 갈아 체에 받쳐 콩가루를 만들어 떡고물을 묻힌 것은 먹음직스러운 것을 넘어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진과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떡 그까이꺼 뭐 나도 하겠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인터넷 상이지만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품이 너무 정답다.
루비보다 래디쉬, 부케보다 래디쉬
그리고 또 하나. 그의 옥상 텃밭. 작은 천국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이제 갓 수확한 래디쉬 사진이 눈길을 사로잡는데 따라서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래디시 뿐만 아니라 고추와 상추, 참외, 수박, 깻잎, 치커리, 벌써 꽃이 핀 쑥갓과 이제 싹을 틔운 미니양배추까지...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행복한 상상을 하게 되는 곳이다. 그의 블로그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시골에서 자랐던 사람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도시에서 자랐던 사람에게는 호기심과 대리만족을 주고. 그 자신도 옥상 텃밭을 통해 큰 행복을 느낀다는 걸 곳곳에서 알 수 있는데 처음 수확한 래디쉬에 반해 루비보다 래디쉬 부케보다 래디쉬라고 감탄을 하고 있다.
음식을 직접 요리하는 과정 이외에도 음식의 재료, 냄비와 칼 같은 조리도구, 테이블 세팅, 찻잔, 간식거리에 이르기까지 음식과 관련된 전반이 고루 소개되어 있어 보는 즐거움도 쏠쏠하고 유용한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다.
요리책 발간 회사의 테스트 쿡으로 활동
그는 대전대학교 식품영양학과를 나와 요리사가 되었고 컨벡스코리아에서 일하다가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쿠킹클래스를 운영하고 ‘뚝딱 베이킹’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현재 다시 취직을 해서 ‘수퍼 래시피’라는 요리책을 발간하는 회사에서 테스트 쿡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희 잡지가 주부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요리책인데, 월간으로 발행되요. 가장 맛있는 래시피를 만들기 위해 무한반복 합니다. 가장 맛있지만 또한 가장 쉽고 간단해야죠. 조리과정이 복잡하면 주부들이 따라하기 어려우니까요. 왕초보도 책대로만 하면 멋진 요리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계량은 칼 같이 하고 조리 시간도 정확하게 합니다.”
닭고기가 주제였던 달에는 매일 닭고기 요리를 하고, 매일 먹어야 해서 회사 전 직원들이 아주 고역이었다고 한다. 모두들 입맛 까다로운 프로들이라 품평을 할 때면 또한 얼마나 신랄한지 모른다고, 가장 듣고 싶고 가장 바라는 찬사는 바로 ‘맛있다’ 그 한마디다. ‘맛있다’에 토를 달기 시작하면 그건 이미 맛있지 않은 요리가 되는 것이란다. 힘들고 괴로울 것 같아 걱정했더니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한마디로 걱정을 날려버린다.
“사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느낍니다. 평생 공부하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힘든 직업이예요. 지금도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도전을 받고 더 넓어지는 것을 느껴요. 회사 일이 힘들지만 배우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요리와 관련된 분야가 너무 넓고 파생되는 일이 다양해서 저도 더 배우고 성장하면 앞으로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할 지는 알 수가 없어요. 무척 기대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안동’지와의 특별한 인연
워낙 먹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먹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데 어떻게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우리 식구들이 워낙 손으로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할아버지도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취미로 하셨고 할머니는 옷을 잘 만드셔서 어릴 때 제 원피스나 드레스를 만들어 줄 정도였고, 엄마도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고 퍼나르는 것은 더 좋아해서 항상 집에 먹을 것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아시는 대로(‘안동’지 서이환 운영위원) 워낙 버라이어티한 취미생활을 즐기셨구요. 저도 손으로 하는 일은 다 좋아합니다. 또 아버지께서 앞으로는 디자인이나 미적 감각은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미술은 꼭 배워야 한다고 해서 다섯 여섯 살 때부터 화실을 다녔어요. 다락방 화실이라고 서예가 장종규 선생님 처제분이 하시던 그 화실엘 중학교 갈 때까지 꾸준히 다녔었죠. 그런게 바탕이 되었다면 결정적인 것은 고등학교 가정 선생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창여고 가정선생님이 좀 많이 특이하셨는데 그때 벌써 새로운 수업을 시도하셨어요. 일주일에 가정이 3-4시간 들었으면 그걸 한 날로 다 몰아서 수업을 했어요. 월요일 1.2.3.4교시 가정시간. 이런 식으로요. 한식, 중식, 양식 등 간단한 요리들을 즐겁게 실습했어요. 당시 서울문화사에서 요리잡지가 창간 되었는데 창간호부터 다 모으기도 했어요. 그걸 보면서 집에서 실습도 해보곤 했죠. 선생님 보시기에 제가 소질이 좀 있었나봐요. 저도 무척 즐거웠고요. 하지만 저는 문과여서 문과 쪽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엔 식품영양학과에 원서를 내고 합격하게 되었어요. 대전대학교로 간 것은 우리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대전대학교 박물관이 할아버지 호를 딴 고암박물관이예요. 그 인연으로 대전대학교로 결정을 했어요.”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면서 문과에서 배우지 못한 이과 과목들 때문에 공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단순히 요리 뿐만 아니라 재료의 영양과 그 화학적 반응까지 포괄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리란 결국 사람이 먹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하니까. 옥상에 텃밭을 가꾸고 거기에서 수확한 야채로 직접 요리를 하고 직접 먹어보면서 재료에 대해, 사람과의 유기적 관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요리사 서연지의 행복한 요리공부
손님을 집에 초대했을 때 가장 자신 있게 내어놓는 요리가 어떤 것이냐고 물었더니 짧지만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잘하는 요리를 하면 안된다고. 작은 충격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잘하는 요리가 아니라 반드시 상대방의 식성이나 취향을 고려한 요리가 되어야 한다고. 정말 그렇다고 공감하는 말이었다. 아직 어리지만 요리사는 요리사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저는 아직 어립니다. 한복려 선생님 같은 요리 대가들의 수업을 들으면 정말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일반인들 보다 전문가들을 위한 요리강좌를 하시거든요. 사용하는 단어부터가 다르고 요리를 이해하고 설명을 하시죠.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느껴요”
음식에 방해 될까봐 화장도 못하고 손에 로션조차도 바르지 못하고 좋아하는 일은 그릇 사 모으고 포크 나이프 장만하고 요리도구 사들이는 일에, 시간이 나면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들을 연구하고 좋은 재료를 위해 시장을 헤메고 다니는 딸이 어머니는 좀 걱정이다. 시집도 가야할텐데 하시며. 이사를 도와주러 오셨는데 짐 싸는 아주머니가 ‘아가씨 혼자 사는데 왠 그릇이 이렇게 많냐고 싸도싸도 끝이 없다’고 불평하자 어머니는 듣기 싫으셨는지 한 벌로 산 것이 아니어서 많아 보이는 것이라고 딸을 두둔해 주기도 하셨다. 보고 배운 대로 하게 되는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딸들을 데리고 집에서 떡을 만들고 장을 담그고 명절에는 식혜와 감주는 물론 약과까지 손수 만들면서 음식 하는 재미를 가르쳐 주셨는데 너무 요리에만 빠진 딸을 보며 속으로는 좀 후회를 하실지도 모르겠다.
요즘 드라마에도 요리사가 심심찮게 등장하고 핸섬한 젊은 요리사들이 진행하는 요리 프로가 대세이다 보니 장래희망이 요리사인 어린 친구들도 많다. 조리과학고 입시경쟁도 치열한데 그는 요리를 너무 일찍 시작하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했다.
“제가 요리를 하면서 겪어보니 요리를 이해하는 데는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한 것 같아요. 요리에 관심을 두고 꾸준히 공부해 나가되 다른 학문을 먼저 공부한다거나 외국에 나가서 많은 여행을 하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것도 좋구요. 아무튼 인생의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후에 요리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 주변에도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가 시작한 사람, 심지어 회계사였던 분도 있는데 그런 분들의 요리에 대한 생각과 열정은 상상 이상입니다. 이전의 경험들이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요리입니다. 근데 이집 와플 상태가 오늘 정상은 아닙니다. 원래는 더 맛있거든요”
끝까지 직업정신을 잃지 않고 한마디 일침을 가하는 연지씨 때문에 긴 취재를 웃음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늘상 그의 블로그를 방문한다. 양배추 싹이 얼마나 자랐는지 풋고추의 진실이 밝혀졌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