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비망록 영화 ′써니′(글/백소애_편집기자)
초등학생 시절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의 친구들은 ‘무지개’라는, ‘써니’와는 차원이 다른 촌스런 이름으로 뭉쳤었다. 나는 일곱 색깔 무지개 중에서도 ‘노랑’을 맡았었는데 그건 순전히 키 때문이었다. 키가 컸던 친구 순서대로 빨강은 소영이, 당시 나의 절친이었던 지윤이가 주황, 그리고 다음이 나였다. 자취하던 친구 집에 모여서 나미의 빙글빙글을 들으며 춤을 췄고(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낙동강변으로 수박서리를 갔으며 태권도와 쿵푸를 배우러 다니자고 약속을 했다. 태권도를 배우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시답잖은 반 남자애들을 패주려고.
도대체 왜 무리지어 다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또래끼리의 ‘조직’은 학교생활에서도 꽤 큰 힘을 발휘 했었다. 사교육이래 봤자 기껏해야 피아노학원 다니는 애가 있을 정도였던 우리 때에 학교를 마치면 모두들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기 바빴으니 친구와의 관계는 무척 중요했다. 그러니 내가 ‘써니’를 보고 비단 우리 언니 세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 모두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거라는 생각이 든 것은, 성인에게는 우리 학창시절의 추억의 앨범을 꺼내드는 것, 함께 관람한 학생들은 엄마와 이모 세대들이 열광하는 풋풋한 아날로그적 감성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도무지 불편한 것을 싫어한다. ‘적당히’불편해야지 ‘많이’불편하면 보기가 싫어진다. 영화 속에는 술집작부가 되버린 복희를 제외하곤 크게 불편한 에피소드가 없다. 심지어 암에 걸려 죽어가는 춘화조차도 유쾌하게 그려낸다. 과속스캔들로 홈런을 제대로 치며 입봉한 강형철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써니’는 2년차 징크스를 깨며 관객 500만을 넘어서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다. 그는 첫 작품에서 ‘가족’이야기를 두 번째에서는 ‘친구’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사람들이 잃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짚을 줄 아는 능력과 굳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괴로움은 과감히 생략해주는 대중성으로 비록 세련미는 덜해도 유쾌한 영화로 만들어주는 능력을 보여준다.
영화는 40대 중반이 된 나미가 병원에 입원한 엄마에게 들렀다가 우연히 옆 병실에서 입원한, 고등학교 시절 ‘써니’로 뭉쳐 다녔던 일곱 멤버의 리더 춘화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암투병중인 춘화는 두 달의 시한부 인생이었고 그녀는 나미에게 나머지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소원을 말한다. 나미는 친구들을 하나둘 찾으며 전라도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 온 어수룩하고 순수했던 1986년의 여고생 으로 돌아가 그때 그 잊지 못할 추억에 젖어들게 된다. 갓 전학 온 나미에게 춘화는 호감을 보이고 ‘껄렁’한 춘화 무리들과 의기투합해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의 디제이 이종환에게 이름을 부탁, 써니라는 상큼한 이름을 갖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날들을 보내고 있는 소녀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어리바리한 나미와 의리짱 춘화, 욕쟁이 진희, 쌍꺼풀 소녀 장미, 다구발 금옥, 사차원 복희, 얼음공주 수지까지 이들은 언제나 뭉쳐 다니며 고교시절의 추억을 쌓는다.
영화엔 노동운동을 하는 대학생운동권 대표이자 나중엔 경찰의 수배를 받는, ‘더러운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그만두라’고 공무원 아버지에게 대들다가 ‘니 잘난 술값을 누가 대주는데’라는 소리를 듣는 나미의 오빠가 등장한다. 이 오빠는 후에 사업체를 운영하다 직원들의 인금을 체불하고 도망가기에 이르는데 이런 아이러니함은 운동권출신으로 주류 정치권에 합류해 한심한 기성세대가 되어 한때의 치기어린 과거로 치부해버리는 이들에 대한 실망과 비꼼으로 이해했다. 영화는 1980년대의 풍경과 맞물려 써니의 라이벌파와의 패싸움이 길거리 시위 속에서 한꺼번에 이뤄져 난장판 속의 웃음을 보여준다. 이 미학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옥상에서 범인을 잡던 형사와 범인의 그림자 탱고처럼 혹은 ‘형사: Duelist'에서 조선 시장바닥에서 훔친 물건을 놓고 벌어지는 한판 럭비싸움처럼 감독의 재치가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써니에 들고 싶었지만 춘화의 관심을 못 받아 삐뚤게 나갔던 상미는 학창시절 있었을법한 캐릭터와 실감나는 연기로 인해 무게감을 주었다. 시계를 푸는 폭력선생에 맞서 그렇게 좋으면 군대에서 말뚝이나 박으라고 외치던 상미의 외침은 내 학창시절, 학생들을 다독이지 못하고 분풀이 매질을 하던 선생들과 오버랩되었다. 특히 화끈한 입담의 임부복을 입은 담임선생님, 밀대걸레로 스케이트 타기, 매점에서의 빵 쟁탈전, 소각장 에피소드 등등 이 남자 감독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공들여 재연한 여학교의 소소한 일상들이 등장한다. 또 나미에게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가 흐르는 헤드폰을 씌워주는 라붐을 패러디한 장면에서는 풋풋한 십대 소녀의 사랑을 잘 표현했고 언제나 첫사랑은 그렇듯 나미의 눈물바람으로 끝나지만 모든 여자들에게 잘해주는 ‘엄친아’수준의 어장관리남의 존재가 더욱 현실감 있었다.
물론, 마치 짠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두달 출장을 가준다거나, 딸아이를 괴롭히던 애들과 교복을 입고 맞짱을 뜬다거나 등 억지스런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장면들까지 사실은 관객들이 원하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아이들과 패싸움 후 연행되어 가는 이 ‘써니’ 아줌마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유쾌하게 이어진다. 우정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그렇게 폼 재지 말라는 것. ‘가장 찬란한 순간 우리는 하나였다’는 써니의 카피는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의 영화 친구보다 더 마음에 와닿았다.
언젠가 학가산 온천에서 ‘일곱색깔 무지개’의 빨강 소영이를 스치듯 만났으나 여건상 서로 모르는 척 했으며 몇 해 전에는 합기도 유단자에 직업군인이 된 지윤이와 이메일로 연락을 했다가 끊겼다. 우리들만의 비밀 조직 ‘무지개’멤버들이었던 그때 그 친구들도 영화 ‘써니’를 봤겠지?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