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석, 나무에서 길을 찾다(글/이미홍_객원기자)

나무가 내게 왔다
매미 소리가 성화를 부리는 칠월의 막바지에 안동대학 정문 언저리에 있는 권재석(49) 선생의 송천 작업실 ‘자작나무’를 찾았다. 뙤약볕 아래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니 여고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마치고 오느라 조금 늦었다며 자작나무의 주인장 권재석 선생님이 나타났다. 만나기로 한 전화를 끊고 나서 오지 말라고 그럴까 많이 망설였다는 그는, 이제 겨우 한 걸음 시작한 셈인데 그리고 아직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데, 아무래도 지역에서 조심스럽다며 걱정을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아주 나중에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하게 되면 찾아오라는 말에 아마추어인 지금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자, 자신이 날라리이기는 하지만 목공에 있어서는 아마추어는 아니라고 즉각 정정을 한다. 그런 모습에서 스스로 목공예가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랄까 자신감 같은 걸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설득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에 빠져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그야말로 우연히 목공예에 빠져들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목공 이야기는 인사동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가본 인사동도 아니건만 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을 따라 간 인사동은 온통 음악이며 미술이며 문화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동안 문화적인 것들과는 담을 쌓다시피 하며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그에게는 그날의 인사동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애들 엄마가 그림을 좋아해서 전시회 가는 것도 좋아하고 인사동도 가끔 가곤 했어요. 10년쯤 전에 우연히 마누라 따라 인사동엘 갔다가 충격을 받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우연찮게 우리 전통 목공예 작품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나무가 주는 안정과 휴식 이런 걸 느꼈어요. 그날 거기에서 한참을 있었어요. 그러면서 나도 목공을 하고 싶다 목공을 배워야겠다, 그러니까 마누라가 농담인줄 알고 그냥 웃으면서 그래라 하더라고요.”


그때의 심경을 그는 ‘자작나무를 찾아서’ 라는 블로그(http://blog.naver.com/cham82)에 남겼다.
- 나이 마흔 하나가 되어 나무가 내게 왔다. 나무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침이 되면 나무 생각이 나고, 나무 생각하며 잠이 들고, 칼질하는 꿈을 꾼다.-




목공예가 권재석의 “자작나무를 찾아서”
그래서 돌아와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목공교실을 찾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혼자 이리저리 찾아서 공부도 하고, 공구도 사들였다.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목공이 좋아서 무작정 들이밀던 그런 시기라 일단 시작부터 하고 봤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렇듯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배워가면서 목공에 대해 알아 갈수록,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고, 답답한 게 늘어가면서 제대로 체계적으로 가르쳐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갔다.
“4~5년을 혼자서 여기저기 목공소도 기웃거리고 공방도 기웃거리고 나이 드신 선생님들이나 학교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 소싯적에 목공 쪽에 반다리라도 걸친 이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한계가 오더라고요. 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데 나한테 맞는 선생님을 만나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절에서 파는 차받침에 -절한 마음 닿지 못하는 곳이 없나니- 하는 글귀가 있어요. 제가 그 당시 정말 간절했어요. 그 마음이 닿았는지 정말 나한테 꼭 맞는 선생님을 제대로 만났게 되었어요.”


마침 그 무렵에 대구에 퇴직을 하고 새로 가구 공방을 낸 목공을 전공한 선생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길로 바로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그리고 그 목공예가 이성계 선생으로부터 목공예를  제대로 다시 배웠다. 그런데 그때까지 그가 혼자서 나무를 가지고 만들고 부수고 이리저리 주물렀던 게 헛짓은 아니었다. 온갖 종류의 나무를 가지고 찧고 다듬고 수십 수백 번 실패를 거듭한 그 경험들 덕분에 그는 남보다 빨리 기술을 습득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또 그 선생님으로부터의 배움을 통해 제대로 된 목공 기술을 연마할 수 있게 되면서 그때까지는 취미삼아 하는 일에서 조금 앞선 데 지나지 않았다면 그 시점을 계기로 그야말로 한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가 자신감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목공예의 길을 가야겠다 생각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는 만시간의 법칙
블로그 관리도 목공을 시작하고 처음 4, 5년은 목공을 배우며 알아가는 즐거움과 매력을 나누고 싶어 사진으로 부지런히 기록도 남기고 글도 올리고 했는데, 전시회를 생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에 매달리면서부터는 자연 그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랴, 목공일 하랴, 목공 교사 연수하랴 바쁘다 보니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틈틈이 작품 한답시고 남는 시간은 오로지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언젠가부터 글이 잘 안 써진다고 한다. 그래서 무언가 잘못된 건 아닌가, 내가 어느새 절심함이 덜해졌나 스스로 반성을 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타성에 젖어 감동이 적어져서 그런가 되짚어도 본다. 그런 때면 그는 작업실로 간다. 묵묵히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보내다 보면 또 어느새 괜찮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작업실에 들어가 공구를 잡는다. 그러다 보면 다른 모든 잡념이 없어지고 저절로 나무에만 집중하게 된다. 잠시만 딴 생각을 해도 표가 나는 지라 절로 집중을 할 수 밖에 없다. 전공을 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전시회를 가질 정도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그를 보고 교직 생활하면서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한다. 그가 그런 사람들에게 늘 하는 대답이 만 시간의 법칙이다. 누구든지 어떤 일에 전심전력으로 만 시간을 투자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인데, 만 시간을 10년으로 나누어 보면 하루 세 시간이라고 한다. 하루 세 시간씩 10년, 그가 1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꼬박 적어도 하루 세 시간 이상을 나무와 더불어 살아왔음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작년에 전시회를 하면서 주위에서 전공을 한 사람도 전시회 한 번 하기가 쉽지 않은데 10년 만에 이렇게 전시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들 말을 해요. 나로서는 10년이 되는 시점이라 작년 겨울에 아직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10년 동안 작업해 온 걸 돌아본다는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 내보인 거죠. 어떤 면에서는 욕심이 많아서 한 번 시작을 하면 목표한 걸 꼭 이루어내려고 하는 그런 면이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에서 목공 일을 시작하면서 그때 지인들에게 10년 후 쯤에는 꼭 전시회를 한 번 하겠다고 말을 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목표를 세우고 내 마음속으로는 다짐을 했어요. 그래서 틈틈이 목공 디자인 공부도 하면서 작품을 하나라도 더 하려고 매달렸죠. 아직 부족한 점도 많겠지만 지난 10년간의 내 자신의 발자취니까 부끄럽지는 않아요. 이게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이니까요. 대신 다음에, 다시 10년 뒤에 전시회를 할 때는 내 자신의 색깔을 좀 더 낼 수 있는 그런 작품 전시회를 인사동에서 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뉴욕, 파리에서도 전시회를 할 거고요.”
한 번 마음을 먹고 시작하면 웬만해선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는 그이고 보면 언젠가는 인사동을 거쳐 뉴욕에서 전시회를 꼭 하고야 말 것 같다.


작품을 하기 위해서 송천에 마련한 작업실은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공간이다. 그의 작업실 건물 앞에 걸린 자작나무란 간판을 보고 공방이나 갤러리인가 싶어 지나는 이들이 더러 들여다보고 작품을 팔거나 목공 일을 배우고 싶은데 가르치기도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자작나무’는 그의 개인 작업실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목공예 교사 연수 때 교육 실습을 위한 작업장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면 온전한 그만의 작업공간이다. 작업실에 들어가 나무 앞에 앉으면 일상에 흐트러지고 어그러졌던 마음이 저절로 가라앉고 안정이 되며 나무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목공의 매력에 더 빠지게 되었다는 재석 씨다.





작업노트 中에서


나무가 내게 왔다. 나무일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까짓, 옛날엔 딸 낳으면 집 마당에 나무 심어 시집보낼 때 장롱 해보내고 부모님 돌아가시면 나무로 관 짜서 보내드리고...그래서 모든 사람이 목수였다는데, 이렇게 처음엔 멋모르고 뛰어들었다. 나무일을 배워야겠다는 욕구는 더욱 강해져 지금도 나무만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침에 깨서부터 잠들기까지 나무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무는 사춘기 첫사랑 같은 느낌으로 점점 내 맘 깊숙하게 자리 잡았다. -2002.2.20.


장자 왈, 사람손이 기계보다 낫다.
몇 년의 목수일 배우기에도 진전이 잘 나지 않았던 이유가 기계를 의존하는 탓이 컸던 것 같다. 내 급한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데는 기계가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홍송으로 탁자를 만들었다. 몇 날을 고생해서 자르고 대패질하고 끼우고 완성했다. 그런데 마무리 단계에서 손사포로 해야 하는 공정을 빨리 완성하고자하는 고질병이 도져 벨트샌더로 갈아내다가 자세가 불안정했던지 한쪽 면이 삐딱해져버렸다. 주저앉아 한 시간이 넘게 자책했다. 다시 기계 사용을 최대한 유보하자고 마음먹는다. 기계보다 손이, 자보다는 눈이 정확하다. 장자의 말처럼 효율성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잃어버린다. 나무를 아끼고, 정성을 다해 만들고자 하는 본래의 마음, 첫 마음을 잃지 말아야겠다.-2004.5.20.


젊었던 시절, 테니스를 배울 때 코치들에게서 항상 듣던 소리가 어깨에 힘을 빼라는 것이었다. 그게 왜 그렇게 안 되던지...한 십년을 치고 나서야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무일도 마찬가지다.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톱질해가며 하는 것, 세상 모든 일이 같은 이치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07.11.13


 




열혈교사, 나무로 다스리는 마음
그가 안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경대 사학과 캠퍼스커플이었던 부인이 안동에서 먼저 교편을 잡고 있어 89년 제대를 하고 그 역시 안동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면서였다. 결혼을 하고 남매를 낳고 안동에서 부부교사로 지내다가 아이들 학교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대구로 이사를 가면서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남매가 모두 대학을 가면서 대구에 있는 아파트를 팔고 안동에 살림을 합친 것이 올봄이다. 아침이면 부인은 청송에 있는 학교로 그는 송현에 있는 학교로 출근을 한다.
“떨어져 있다가 같이 있게 되니까 좋기도 해요.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건 둘이서 같이 무얼 하고 시간을 보내고 그러다 보니까 아무래도 혼자만의 시간이 많이 줄어들어서 작품에 대한 고민을 덜하게 되는 거지. 작업실에서 혼자 나무 다듬다가 잘 안되면 담배 한 대 물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다보면 뭐 하나 만들어지기도 하고 그러는 데, 그런 시간이  줄어든다는 게 조금 불편한 점이 있죠.”


그래서 요즘 청송에 집을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본인 생각으로야 지금이라도 본격적으로 목공예에만 매달리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아이들 교육문제라든가 앞으로의 경제적 문제 등을 들어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앞으로 교직생활에 충실하자는 부인의 말을 듣기로 했다. 퇴직 후에는 작품 활동을 주로 하면서 목공예 가구 교실 운영도 하고 차도 파는 갤러리를 운영하고 싶은 그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이런저런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나름대로는 55세를 마지노선으로 삼고 그때까지는 아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나누어 줄 수 있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학교 목공반 활동에도 힘쓰는 한편으로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도 소홀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간혹 작품에 심취해 학교에서도 마음이 조급해 빨리 작업실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앞설 때도 있지만 앞으로 나무와 함께할 시간들만큼이나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알고 보면 그는 열혈교사였다. 젊은 시절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 현실을 만들어주기 위해 교육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분명 많았지만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 중 일 년 간은 학교를 떠나 친구도 없다시피 그렇게 열성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리고 선생님도 학생들도 상처받고 결국은 각자의 밥그릇 싸움으로 치부되고 마는 아픈 현실이 되풀이 되는 상황에 그는 아마도 조금 지쳤나 보다.
“전임 활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분명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고 있는 데 왜 이렇게 서로 싸우고 갈등을 해야 하는지? 보다 나은 교육여건을 만들어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려고 하는 건데 왜 항상 갈등하고 반목하고 목소리 높여서 소리 지르고 그렇게 해야 하는 지? 그때 내가 내 사진을 보는데 매일 데모하고 싸우고 그러다 보니까 내 표정이 늘 인상 쓰고 화 나 있고 그야말로 싸움꾼처럼 보이는 겁니다. 혼자 생각이 많았지요. 이런 방법 말고 좀 다른 방법으로 서로 마음을 나누면서 평화적으로 하는 그런 건 없는 건가 싶더라고요. 내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도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그래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그런 방법도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지요. 좀 문화도 느끼고 마음의 여유도 배우고 남과 평화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 보자 그런 마음에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기 시작했죠. 그런데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게 나무였던 거죠. 나무를 만지고 있으니까 좋더라고요. 내 손으로 나무를 깎아 무언가를 만드는 것도 좋고 나무 냄새도 좋고. 그래서 이런 즐거움을 여러 사람들하고 같이 나누면 좋겠다 생각했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싸움이 다가 아니구나 투쟁만 있는 게 아니구나, 서로 내 주장만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이해하고 다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면 근본적으로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겠구나, 세상이 바뀌려면 우선 나부터 바뀌어야겠구나, 그게 나무를 접하고 그가 마음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었다.




1.5평 배란다에서 대패 하나로 시작한 나무일
그렇게 그는 현장에서 한 발 물러선 대신 그가 빠진 목공의 즐거움을 나누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본인도 아직 초짜인 주제에 학교에 목공반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무 만지는 즐거움과 무언가 뚝딱거려 만드는 기쁨을 나누어 주는 데 열심이었고, 관심을 보이는 선생님들도 끌어들여 본인이 배운 한도 내에서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내친 김에 그 중 열성인 두 사람과 의기투합해서 셋이서 폐교를 빌려서 작업실도 열었다. 1.5평 베란다에서 톱하고 대패 하나 가지고 ‘이 베란다는 이제 내거다’ 하고 선언하고 식구들 눈치 봐가며 혼자 뚱땅거리던 차에, 취미가 같은 선생님들끼리 술자리 끝에 같이 작업실 얻어서 하면 좋겠다는 말에 그 다음 날로 당장 알아보고 폐교를 계약했다. 뭔가를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고 마는 그의 추진력이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셋이서 공유하는 작업은 그에게는 늘 모자랐다. 사실은 공동으로 쓰기로 하고 구입해 놓은 질 좋은 느티나무를 두 사람이 아끼고 있는 차에 나무만 보면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 그가 이것저것 막 만들어 보느라 먼저 다 사용해 버리곤 해서 두 사람의 원성이 끊이지 않는다든가, 새로운 공구 구입문제라든가, 작업 속도라든가 작업시간 조정이라든가 등등의 불만들이 서로 맞지 않아 결국은 두 사람은 각자 취미 생활로 하기로 하고 폐교를 접고 그가 작업실을 따로 얻어 독립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 작업실에서 교육청에 신청을 해서 인가를 받은 목공예 첫 교사직무연수를 했다. 컴퓨터 상담 일색이었던 교사연수에서 벗어나 아이들 인성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교사 연수를 시도하는 시점에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경북에서 그가 목공예로 연수 점수가 인정되는 교사직무연수를 인증 받아 시작한 것이다. 처음으로 목공예 직무연수에 참가한 선생님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열광적이었다고 한다.
연수 가면 매일 뒷자리에서 졸기만 하던 선생님들도 자신의 손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크고 작은 소품 가구들을 만드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공구 다루는 즐거움에 자기 작품 만들기는 뒷전이고 모든 여선생님들의 나무를 잘라주는 데 열성인 남선생님, 초보이면서 공부하는 책상 만들기에 도전하신 여선생님, 한 작품씩만 하기로 했는데 욕심을 부려 혼자서 뚝딱 세 작품이나 만드신 선생님, 시간을 정해 놓았건만 남들 다 자는 한밤중까지 공구 들고 열심인 선생님 덕에 강제로 소등을 해야 했던 일까지, 목공예 연수를 시작하길 잘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고 한다. 선생님들도 저럴진대 아이들은 어떨까, 저 선생님들이 돌아가서 목공반을 만들어 운영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 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초보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나무교실 열어
그가 학교에서 운영하는 목공반 아이들 중에도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즐거움에, 눈을 빛내며 시간만 나면 목공실에 들러 만들다 둔 나무에 매달리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목공의 길에 들어선 후 제일 기쁘고 보람을 느낀 일이 바로 학교 목공반을 만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입시와 취업의 문턱에서 짓눌려 있는 아이들과 공부 외에도 나눌 것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주는 계기도 됐다. 그래서 그는 큰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연수 한 번 하려면 그 준비에도 많은 시간이 들지만 자신이 좀 힘이 들어도 목공 교사직무연수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운영하고 있다. 연수를 신청하시는 선생님들이 늘면서, 그에게 목공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대구공방과 안동 송천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나누어 연수를 하고 있는데, 올해는 사정상 대구에서 연수를 한다. 


“연수하러 온 선생님들이 본인들이 목공을 배워서 만들어보니까 너무 좋으니까 선생님은 참 일찍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이만큼 자리를 잡았다고 부러워하는 분들이 많아요. 특히 40대 , 50대 남선생님들이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싶어 하는 그런 창작 욕구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누구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늦지 않았다고 만 시간의 법칙 이야기를 해 주죠. 실제로도 제가 전국에서 제일 먼저 목공 연수를 시작했는데 제게 연수를 하고 간 선생님들끼리 동호회를 만들어서 활동하시는 분들도 있고 학교 목공교실을 운영하시는 분들도 있고 지금은 전국적으로 목공연수가 활성화가 되어서 많은 분들이 활동을 하고 있어요. 목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창작의 욕구 창작의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그런 작업이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배우면 즐겁고 생산적이고 그리고 마음의 평안까지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작업이에요. 그래서 나는 목공의 즐거움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무언가를 만드는 데서 오는 창작의 즐거움은 그렇게 그를 사로잡았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그 즐거움을 그는 나무를 통해 일깨워내었고 자연의 숨결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나무와 함께 한 지 10년, 그는 어느새 사람들과 나무를 깎고 다듬는 일을 나누고,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교직에의 열정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무와 더불어 평생을 살고 싶은 목공예가의 길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목공을 하면서 제 스스로 놀란 점은 제 안에 있는 예술적인 감수성이었어요. 물론 그전에도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하고 또 아닌 일에는 흥분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스스로 목표 지향적이고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실제로 참 열심히 데모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많은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나무가, 자연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감수성을 이끌어낸 거죠. 나무의 결과 나이테를 만지고 있으면 그게 어떻게 의자가 되고 책상이 되고 문갑이 되어갈 지 생각하게 되고 그리게 되고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나무를 알아가는 즐거움에 빠지게 되니까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할까, 스스로도 전에 비해 많이 편해지고 부드러워진 걸 느껴요. 제일 많이 변한 게 그거죠. 타인을 이해하는 법도 조금씩 알게 되는 거 같고요. 그래서 목공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 매순간 느끼죠.”


나무는 결 따라 재질 따라 습도 따라 날씨 따라 뒤틀리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고 휘어지기도 한다. 옹이를 만나면 살살 달래서 돌아가야 하기도 하고 때로 결을 비켜 가기도 해야 한다. 어렵고 힘들게 자란 나무가 더 단단하다는 것도 나무를 만지면서 알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풍상을 제 몸 안에 다 품고 있는 나무를 다듬어 대대로 쓰일 가구를 만들면서 순리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처음 이리저리 쓸고 다듬느라 여기저기 생채기를 내가면서 몇날 며칠을 걸려서 찻상을 만들어 갔을 때 아내의 반응은 ‘뭐, 그냥 목공예 배웠다고 투박하니 뭐를 하나 만들어 오긴 왔네’ 딱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찻상이 도마 같다고 놀려서 오기가 나서 상판을 깎아서 홈을 파서 다시 만들었다. 남들이 뭐라 하건 모양새가 좀 투박하건 그는 처음으로 그 찻상을 만들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그가 애용하고 있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짜임가구 갤러리 열어 문화공간으로 만들고파
그가 만들고 싶은 가구는 전통적인 짜임으로 만들되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의 목가구다.
“가구는 미술이나 음악과 달라서 예술과 실용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해요. 특히 목가구는 실용이 배제되면 그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예술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되 어디까지나 실용성을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원목을 가지고 전통적인 짜임 기법으로 만든 가구는 몇 대를 내려가거든. 내가 우리 어머니께 드리려고 대여섯 달 공을 들여 경첩(거울)을 만들어서 드렸는데, 이곳 공방에서는 몇 달을 두어도 괜찮던 것이 하루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공기가 다르다고 이게 열리지가 않는 거라. 그런 단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원목짜임가구는 색이 바래면 바래는 대로, 결이 틀리면 틀리는 대로 멋이 있고 세월 따라 대를 이어 같이 가는 거니까 생명력이 길어요. 목가구는 따로 장식을 많이 하지 않아도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멋이 있어요. 그게 목가구가 가지는 가장 큰 매력이죠.”


인사동, 파리, 뉴욕은 그가 앞으로 향해 나갈 하나의 구심점이자 좌표다. 그 구심점을 향해 그는 큰 밑그림을 그려 넣고 그 안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채워나가는 작업들을 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 그가 열고 싶은 갤러리는 자신만의 작업공간이면서 동시에 목공교실과 전시공간이 함께 있고 사람들이 와서 차 한 잔 마시며 나무도 보고 차도 마시고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뭐든지 한 번 생각하면 계획을 세워 추진하는 목표지향적인 그는 벌써 후보지도 물색해 두고 부지 마련을 위한 자금도 모으고 있다. 십 년간 꾸준히 목공 일에 매진해 신뢰를 얻음으로써 처음에는 구경꾼이던 아내의 든든한 지원과 동의도 얻었다. 이제 아내는 나중에 갤러리에 카페를 하면 손님들에게 내놓는다고 제빵제과 기술을 배우겠다며 의욕을 보이기도 한다. 훗날 그 약속이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아내가 그가 꿈꾸는 그 길을 반대하지 않고 함께 가주겠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큰 힘이 된다.
그가 만 시간의 법칙을 마음에 새기고 지난 십 년을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였다면 앞으로의 십 년은 권재석 그만의 색깔을 입히는 또 다른 만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십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열고 자신만의 목가구를 선보일 것이다. 그리고는 파리와 뉴욕으로 날아갈 것이다.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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