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빛 고즈넉한 운안동 골목길(글/백소애_편집기자)
태화동인 우리 집에서 서부동인 사랑방 안동 사무실까지는 걷기에 맞춤한 거리이지만 나는 가끔 2번 버스를 탑니다. 태화오거리를 스쳐 안동공고, 36사단을 거쳐 안동MBC방송국, 운안동을 지나 성소병원 앞 그리고 시내까지 오는 거리거리엔 하루하루 볼거리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바퀴 빙 돌아 시내로 접어드는 그 코스가 전혀 시간낭비 같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영화 ‘스모그’에서 같은 풍경을 매일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미세한 풍경의 다름을 감지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죠. 지금 같은 가을이면 안동MBC방송국에서 시내방향 쪽의 가로수 길이 특히 운치 있습니다. 은행잎이 곳곳에 날리는 아침이면 어린이집 차를 기다리는 엄마 아빠들이 삐친 머리를 채 정돈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골목길에 서 있습니다. 인테리어 가게 ‘집과 사람들’ 맞은편의 KBS방송국 쪽의 감나무길 입구에서 매일 버스에 오르던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오늘 지각인가?’싶고 체인점 세탁소에 내걸린 ‘3일간 연수로 인한 휴무’안내는 그 세탁소에 가지 않음에도 기억해둬야 할 것만 같습니다. 1년 열두 달 할인하는 소박한 풍년빵집의 빵맛을 언젠간 맛보고 싶고 간판이 떨어져나간 자전거포에서는 자전거 바퀴 바람이라도 넣고 지나가야할 것 같습니다. 운안동의 큰길가인 단원로와 골목골목의 새골길, 마무골길 등을 산책하는 일은 퍽이나 운치가 있습니다.
안기역이 있었던 운안동
운안동은 1947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안기동일부를 분할하여 안동읍 운안동이 되었고, 1963년 안동읍이 안동시로 승격함에 따라 지금의 안동시 운안동이 되었습니다. 1997년 행정동인 평화동 관할이 되었습니다. 관거리, 새골, 분지골, 마무골, 무덤텟골, 스피절, 응달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08년 12월 31일 현재 면적은 551,179㎡이며, 총 1,469가구에 4,234명(남자 2,131명, 여자 2,103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개량 한옥집과 아파트촌, 현대식 주택이 공존하고 있지요.
안기동과 운안동 경계지점, 지금은 없어진 나이야가라식당 인근에는 공민왕의 사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관거리, 관척골이라 불려진 데에는 마을에 감옥이 있어 관청 사람이 많이 왕래하였다고 붙여진 명칭이라고 합니다. 간판이 나무에 가려 글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관청이발관의 명칭도 거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 관청골에서 두살 때부터 살아 지금 나이 일흔인 안동김씨 김덕진 사장은 이곳에서 오랜 세월 관청이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원 김홍도가 머물다 가서 단원로
운안동 큰길가는 지금 새주소길 이름으로 ‘단원로’라 불립니다. 단원로 거리에 주일엔 쉰다는 보양탕집 입간판이 재미있네요. 단원로라 이름짓게 된 연유에는 조선후기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년~ ?)가 안동에 근무한 인연 때문입니다.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안기역지(安奇驛誌)》의 <선생안(先生安)>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단원 김홍도가 40세 되던 해인 갑진년(1784) 정월에 안기의 찰방(察訪, 조선시대 각 도의 도로행정인 역참(驛站)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 문관벼슬)으로 부임하여 병오년(1786) 5월에 임기를 마치고 떠났다고 합니다. 지금의 상일대자연맨션과 명성한마음타운 부근이 옛 안기역 자리입니다.
안기역사 주변의 명승으로 덕유관(德流館), 유연정(悠然亭), 운안동천(雲安洞天), 국사신당(國士神堂), 소백당(小白堂), 원생사(願生寺), 석수사(石水寺) 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운안동천과 안기동에 위치한 석수암만이 남아 있습니다. 안전가스가 있는 새골길로 접어드는 동산주택의 길가 벼랑에는 지금도 <雲安洞天>이라는 암각 글씨가 남아 있어 옛 자취를 조금은 엿볼 수 있습니다. 암각은 흘러내린 앞머리처럼 길게 담쟁이덩굴이 수풀을 이뤄 가려져 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동천(洞天)이란 하늘 밑 첫 동네, 즉 신선이 살 정도로 경치 좋은 곳을 일컫는 말이니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이 가능하시겠지요?
운안동 새골은 관거리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예부터 경치가 아름답고 새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나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곳에 찰방(察訪)의 관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산주택을 오르는 새골길 언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평화동 일대가 보입니다. 개량한옥지붕이 많은 동네라서 풍경이 정겹습니다.
운안동에서 가장 큰 자연마을 마무골
안동MBC방향으로 길을 오르면 2000년에 준공된 명성한마음타운이 나옵니다. 요즘 어느 아파트라도 주차난이 골치인지 아파트입구에는 ‘외부차량 주차금지’라는 경고판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대성맨션을 지나니 단원로에 커다란 자연석들이 쌓여 있습니다. 인근의 할머니께 여쭤보니, 땅주인이 옮겨놓은 돌이라고 하는군요. 부근에는 주인 떠난 빈 한옥집이 몇몇 보입니다. 빈집을 휘감은 담쟁이덩굴은 마치 세탁물을 담은 세탁망 같습니다. 막걸리 빈병이 차곡이 쌓인 대성슈퍼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이곳은 마무골길입니다. 옛날 마고선녀가 내려와 산기슭 언덕에 높다란 절벽 마고동천(麻姑洞天)에서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유래되어 마무골, 마모골, 마고동이라 했다는 군요. 운안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며 솔숲이 울창하고 골짜기를 흘러내린 맑은 냇물이 폭포를 이루었으며 아름다운 천석(泉石)이 절경을 이루었다 합니다.
마무골길 골목을 접어서 오른쪽에는 폐가가 보입니다. 집주인은 폐가 바로 옆에 새집을 지어 살고 있습니다. 이 폐가는 지금 방치되어 있지만, 허물기엔 아름답습니다. 그 앞에도 낮은 담과 녹슨 철문이 조화를 이룬 낡은 집 한 채 덩그러니 있습니다. 깨진 보일러 물통이 위태롭게 벽에 매달려 있고 뚫려진 문풍지가 발린 문은 가을볕을 쬐고 있습니다.
어느 집 대문을 열고 할머니 한분이 나옵니다. 조씨 할머니, 여든은 안됐고 일흔은 넘었다는 할머니의 대답에 숙녀에게 나이를 묻는 실례를 범한 것 같아 웃음이 납니다. 이곳은 함안조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떠났다고 합니다. 일직 송리로 시집갔던 할머니는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법상동에 살다가 이곳으로 이사온 지 3년째, 연어처럼 처음 났던 곳으로 돌아온 것이지요.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골목길이 좋아 걷고 있어요.”하니 걷기엔 그만인 동네라고 자랑하십니다. “찬찬히 둘러보소” 할머니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함안조씨 집성촌, 마무골의 가을
운안동천에서 운안동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면 조씨 집성촌이 된 데에는 단종의 절신(節臣) 조욱(趙昱)의 후손이 조선 세조 말부터 세거한 역사에서 비롯됩니다.
골목집의 열어둔 대문틈으로 뽑지 않은 풀이 수북한 마당이 보입니다. 골목가에는 가을햇볕에 감, 토마토, 가지, 나팔꽃, 호박잎이 커가고 낮은 집 슬레이트 지붕에는 고추가 바짝 마르고 있습니다. 열려진 문으로 페트병에 심어놓은 채소가 보이고 주황색 철문 아래 나란히 세워둔 돌덩이가 이채롭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함에는 액자 하나가 버려져 있습니다. 어느 집에 하나씩은 있을 법한 ‘복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남에게 베풀고....’로 시작하는 ‘마음 다스리는 글’이 적힌 액자입니다. 주인은 본인 마음은 이미 다 다스렸는지 액자만 덩그러니 버려져 있습니다.
마무골길로 쭉 오르면 예쁘게 가꿔진 집 한 채가 나옵니다. 홀로 무릉도원에 온 듯 마당이 잘 가꿔져 있습니다. 할아버지 한분이 방문을 열고 가을볕을 쬐고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집 수명을 묻자 ‘잘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무엇에 그렇게 집중하는지, 집 사진 좀 찍겠다는데 고개도 들지 않고 ‘그라소’하곤 계속 거울만 보십니다.
집의 왼쪽으로는 열루재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한지그림갤러리와 찻집을 겸하고 있는 ‘천년지예’가 나옵니다. 갤러리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리문에 ‘아름다운 한지공방’이라 쓰여져 있고 부재시 누르라는 벨이 있습니다. 주인장을 만나고 싶었으나 벨을 눌러도 응답은 없습니다. 말끔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골목길을 되돌아 다시 단원로로 나옵니다.
낡은 집과 전봇대가 서 있는 길가의 집들을 보면서 걷습니다. 곧 있으면 은행잎이 후두둑후두둑 떨어질 것입니다. 앞서가는 아주머니가 잠시 길을 멈추고 주변 풍경을 살핍니다. 언제나 경적소리 시끄럽던 출퇴근시간에만 보다가 차들의 이동이 뜸한 낮 시간대 이 길을 걸으니 느낌이 다릅니다. 길가에 버려진 소품에 눈길이 갑니다. 장식함과 소반이 버려져 있는데, 유럽 어느 나라쯤 가면 동양의 대단한 보물인양 호들갑 떨 사람이 나올지도 모를 퍽 예쁜 장식함입니다.
단원로의 전선줄이 어린시절 실뜨기 놀이의 실처럼 엉킨 모습을 보면서 이 가을, 운안동의 고즈넉한 골목길 기행은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저에겐 무척 여운이 남았던 운안동 골목기행이었습니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