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여성들이 만주를 품었다′는 전시회를 다녀와서(글/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jpg)
1.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다
올해는 안동의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망명을 떠나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나라찾기를 모색한지 100년이 되는 해다. 석주 이상룡과 백하 김대락이 만주망명의 선두 주자였고 이분들의 망명기록과 활동은 서간도로 건너간 망명을 결행할 수밖에 없었던 간절한 독립의지가 담겨 있다.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석주의 <고국음>과 백하의 <분통가>는 일제의 서슬퍼런 탄압에 굴하지 않은 집념과 의지를 잘 보여준다. 이 분들이 결행한 망명의 길에는 이 분들의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딸들이 동행했고 힘든 삶의 여정이 죽는 날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이 여성들의 활동상에 관심을 기울인 예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 안동의 독립기념관에서는 안동 여성을 중심에 둔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은 만주망명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주를 품은 안동의 여인들”이란 특별기획전을 광복절에 맞춰 열었고, 내년 2월말까지 전시를 한다. 이번 준비를 담당했던 한준호 연구원은 그동안 독립운동가를 조사, 발굴하는 일이 남성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서 이제는 독립운동가들을 내조한 여성의 역할과 의미를 조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지 못한 점에 비추어본다면 이제부터라도 여성들이 활동했던 진면목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한준호 연구원 역시 남성이다보니 남성 중심의 시각을 쉽게 벗어나지 못해 전시 팸플릿 작업과정에서 남성인물들을 중심에 내세우는 기획안을 냈다. 전시내용은 여성에 초점을 두면서도 팸플릿 구성은 남성중심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이 도안을 본 강윤정 학예실장이 여성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여성중심으로 활동상을 정리하였다. 독립운동사 연구에 헌신적인 김희곤 관장님도 자료가 미비하지만 여성의 활약상을 운동의 관점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평소의 고민이 모아져 이번 기획전시가 꾸려진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기회로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 여성이 남성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는 아주 오랜 역사와 문화 안에서 관습화된 것임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가부장제 가족제도가 주류로 흐른 시간이 너무나 오래되었으니 여성들조차 여성성의 원형을 알기 어렵다. 관습화된 여성성을 여성 고유의 모습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에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 남성과 여성의 상호 수평적인 이해가 가능해질 수 있을까를 물어본다.
만주 망명에 관한 기록은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극비리에 작성한 <<고등경찰요사>> 잘 기록되어 있다. 감시와 처벌을 위한 일제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당시 독립운동의 실상을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석주와 백하의 망명의 길이 경상북도 독립운동가들에게 매우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1년 기록에는 2,500여명이 만주로 이주한 내용이 있는데, 해마다 증가하여 1920년대 말에는 2만5천명으로 10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안동출신 인사의 독립운동 참여는 놀랄만한 성과를 남겼고 전국단위에서도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누군가가 주장한 ‘유학적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표현이 안동출신 독립운동가들을 향해 던진 헌사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사회적 책임감에 대한 발로로서 독립운동의 결행이라는 등식이 이뤄진다. 이 특별기획전은 여러 곳에 관심을 받고 있는 중이다. 우선 ‘여성’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남성과 동등한 균형을 찾아가려는 사람과 단체들, 여성사학회, 타 지역 방송국, 잡지 <<순국>>, 임시정부사이트에 이번 전시의 의미와 소개글이 올라와 있다.
2. 김우락의 가사 <간운사>
* 웹상에 아래아가 지원되지 않는 관계로 간운사의 사표기는 아래아 대신 ㅏ로 표기됨을 양해 바랍니다.(편집자)
만주망명과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여성의 역할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석주 이상룡의 역사적 활약에 비해 그의 아내 김우락((金宇洛, 1854~1933)의 위상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거나 없다. 그녀는 임하 천전이 친정이고 백하 김대락이 큰 오빠이다.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 된 김우락은 남편을 따라 1911년에 만주망명길에 오른다. 그녀가 남긴 가사 <간운사> 에는 망명길에 오른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간운사>는 김우락이 1914년 무렵 고국의 형제자매를 그리워하며 지은 가사이다. 아래의 글은 <간운사>의 일부이다. 첫 부분은 1911년 만주망명 사실을 회고한 글이다. 둘째 부분은 만주생활을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사는 것에 비유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살겠노라고 다짐하였다. 세 번째 부분은 자신이 남자라면 세계 곳곳을 두루 돌아다니며 천하 사업을 다하고,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겠지만 쓸모없는 여자임을 애달파하였다. 그 당시 관습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심해서 자신의 뜻을 펼쳐내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여성으로 태어난 생물학적 조건의 한계를 매우 가슴 아파하지 않았을까 하고 헤아려 본다.
(표기 문제로 <간운사> 중략)
석주 이상룡이 1932년 5월에 순국하자 김우락, 이중숙, 허은 세 분 모두 귀국한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느라 밤에 주로 움직였다. 김우락은 습종(濕腫)에 걸려 손자에게 업혀오게 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추운 곳에 몸이 적응하지 못해 몸이 붓고 종기도 나고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고생을 한 몸이다 보니 귀국하고 1년을 넘기지 못하고 1933년 4월 79세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11년 뒤 1944년 며느리 이중숙도 중풍으로 돌아간다. 이중숙(李中淑, 1875~1944)은 하계마을 이만유의 딸로 태어나서 석주의 아들 이준형과 혼인했으나 남편 이준형이 1942년에 자결하고, 2년 뒤 이중숙도 세상을 떠난다.
허은 여사와(왼쪽) 이해동 회고록 <<만주생활 77년>>
3. 허은의 기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허은(許銀, 1907~1997)은 아버지 허발을 따라 1915년에 만주로 망명하였고 석주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1922년 혼인을 하면서 고난의 길을 걷는다. 그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읽으면 당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실상이 현장감있게 재현된다. 그녀는 1995년에 이 책을 내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8세에 아버지와 가족을 따라 만주 영안현으로 망명 온 소녀가 석주의 손부가 된 것이다. 후에 만주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은 운명이었고, 이천팔백 리 시집가는 길은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 되었겠는가?”라고 회고한다.
만주에 정착한 집들이 다들 그러했지만 먹을거리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인데 서로군정서 회의를 집에서 열게 되면 땟거리를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만주의 추위와 전염병, 풍토병이 괴롭혔으며 여기에 굶주림까지 보태고 있었다. 이런 힘든 환경 속에서도 김동삼, 김형식과 같은 독립투사들에게 옷을 손수 지어드렸던 일을 인생의 자랑으로 여긴다는 기록이 보인다.
1932년에 귀국해서 처음으로 임청각을 대하고 보니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유지가 더욱 생각이 났으나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월곡면 도곡으로 옮겨 살았다. 언제가 꿈꾸던 해방이 오기를 기다리며 가난하고 궁핍하게 생활했으나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남편이 죽게 되는데 이때 허은 여사의 나이 43세였다.
모진 세월을 기다린 보람은 시조부 석주 이상룡의 유해 봉환과 남편 이병화의 독립장 추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회고록이 1995년에 출간되어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지낸 독립운동사에 얽힌 석주일가의 이야기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이 책 말미에 “이제 좋은 시절 만나 여한이 없다. 비록 고달픈 발자국이었지만 큰일하신 어른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부끄러울 뿐이라”라고 썼다.
일송 김동삼 선생의 가족사진(사진제공: 안동독립운동기념관)
4. 이해동의 기록, <<만주생활 77년>>
이해동(李海東,1904~2003) 여사는 일송 김동삼의 며느리이다. 이 며느리가 가까이서 지켜본 시어머니 박순부(朴順夫, 1882~1950)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답게 개인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남편을 내조한 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송 김동삼의 아내 박순부 여사는 1911년 남편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다. 아들 형제를 데리고 만주로 떠나갔는데 독립운동가의 아내들이 그랬을법한 행복한 가정생활은 현실에서 멀리 있었고 집안의 모든 일은 박순부 여사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남편이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갇혀 있을 때도 면회를 가지 않을 정도로 남편을 위하는 일과 나라를 위하는 일을 동일하게 여겼던 분이다. 그런데 이후 남편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만다.
박순부 여사가 생각한 아내로서의 도리는 며느리가 남겨둔 글에서 잘 나타난다. 만주망명생활에서 단 두 번 남편을 만났다고 하니 며느리가 바라본 시어머니의 삶의 고단함과 결단력은 놀랄만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며느리는 시아버지 일송 못지않게 시어머니의 놀라운 투지와 인내심, 그리고 집안의 어른역할을 자임한 그 영향력에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독립운동 연구가 실제 투쟁과 결과에 중심이 놓여 있다고 할 때, 그 과정에서 생활의 무게를 감당했을 여성들의 헌신은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극심한 자기헌신과 처절한 인내,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인생에 대해 이제껏 누가 위로의 헌사를 보낸 적이 없다. 이해동 여사는 시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보며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시어머님은 혁명가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30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남편과 갈라진 시어머님은 아들 형제를 데리고 만주에 와서도 남들처럼 남편과 함께 따뜻한 가정생활을 하여 본 적이 없었다. 정말 과부나 다름없이 청춘을 살아 오셨던 것이다.
하얼빈 영사관에서 체포되어 가족이 면회를 가는데 시모친은 남편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남편을 위하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는 시어머님 생각은 구식 여성으로서는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평생 남편에 대해 불평 한마디 없었고, 말없이 참고 침묵으로 살아온 시어머님의 일생은 훌륭하다고 생각된다. 시아버님께서 직업혁명가로 평생을 국권 회복을 위하여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 몫도 있다고 생각한다. 칠십 노인이 세상풍파를 다 겪고 살아 왔으며 유일하게 믿고 있던 아들이 먼저 떠났으니 생활 욕망의 마지막 기운이 없어졌을 것이다. 남편이 죽은 다음 실성한 사람처럼 말이 없고 그래도 제 정신이 있을 때는 내가 들일을 하고 있으니 집안 살림을 힘가는 데까지 돌봐 주었다. 비록 남편이 가고 쓸쓸한 집안이지만 늙은 시어머님이 생존하였을 때는 나에게 위안이 되었다."
(박순부의 며느리 이해동의 회고록에서)
5. 또, 만주를 안았던 안동 여성들
남편 권기일을 따라 1912년 통화현 합니하로 망명한 김성(金姓, 1885～1957)은 망명 8년 만에 남편이 무참하게 학살당한다. 1920년 여름, 봉오동 전투에 패배한 일본군이 신흥무관학교를 공격하여 무차별 살상을 할 때 죽게 되자 신흥무관학교 뒷산 ‘깨금다리밭’으로 남편의 시신을 옮겨 묻은 장본인이다.
서후면 금계출신의 김익모의 딸 김씨부인은 남편 배재형이 1919년 만주망명길을 따라나선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던 남편이 병사하자, 그녀는 18일 동안 단식 끝에 절명한다. 당시 한족회는 그녀의 뜻을 기리기 위해 포열장을 추서한다. 포열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故 학생 배군 在衡의 처 의성김씨가 남편의 병이 심할 때에는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흘려주고,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울지도 곡하지도 않고, 노시모의 가르침을 받아 집안일을 유지하며 시동생을 권면하여 어머니를 잘 보살피라고 하고, 슬픔을 참고 고통을 이기며 노시모와 시동생의 옷을 손수 만들었다. 또 이어 자기의 임종채비를 하고, 18일간 음식을 끊어 죽었다. 이는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하고, 孝烈을 온전히 이룬 것이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에 공로가 가상하여 棺材 일부와 銘旌 일구를 특히 포사함"
권오헌의 어머니 김우모(金羽模,1874~1965)는 안동시 서후면 금계마을에서 김세락의 딸로 태어나 가일마을 권동만과 혼인한다. 67세의 나이에 남편과 함께 망명길에 오른 자신의 심정을 담은 가사 <눈물뿌린 이별가>를 지었다.
서럽도다 서럽도다 망국백성 서럽도다
아무리 살려해도 살 수가 바이없네
충군애국 다 팔아도 먹을 길 바이없고
효우를 다 팔아도 살아날 길 바이없고
서간도나 북간도로 가는 사람 한량없네
가자가자 나도가자 애국하는 사람 따라
가자가자 너도가자 돈 골병든 사람아
고국을 떠나가니 그 심사 어떠하리
백발노인 두 노인도 그 중에 기었구나
저른 막대 드던지고 두 손을 서로 잡고
간다간다 나는 간다 그 어데로 가난 길고
(<눈물뿌린 이별가> 중에서)
안동독립기념관 전시회 덕분으로 여성 이야기, 그리고 안동여성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기회가 되었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자료도 지엽적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자료를 추적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연구한 결과 이렇게 안동의 여성들이 역사적인 의미로 재탄생하고 있다. 국가재난 앞에서 여성들의 신념과 의지, 그리고 여성들의 헌신적인 희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한 결과에서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전통시대 여성들의 기개와 지조, 배려와 희생의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부끄러워진다. 앞으로 안동독립기념관에서는 여성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내는 일에 더욱 많은 관심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한다. <안동>
(전시회 내용과 관련한 글은 강윤정 학예실장이 팸플릿 작업에서 정리해둔 글을 요약한 것이며, 가사자료는 한준호 연구원이 제공해 준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