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고요, 김원길 시인의 ′지례유사′ 읊던 날(글/이동백_시인)
지난 8월 7일, 지례예술촌에서는 뜻있는 행사가 조촐하게 열렸다. 지례예술촌 주변 정비 공사가 준공되고, 촌장 김원길 시인의 고희 기념 시집을 출간하는 겹경사를 치르게 된 것이다. 야외무대에서 행한 퍼포먼스로 시작된 이날 행사는 지당서당에서 열린 축하 공연으로 이어졌다.
야외무대에서는 대형 화폭에 송정 박재인 선생이 매화를 치고, 그 그림에 박문환 선생이 화제(畵題)를 다는 퍼포먼스가 이루어졌다.
저녁 식사 후에는 지산서당에서 99편의 김원길 시선집 『지례유사』에 대한 이건청 한국시인협회장의 헌정사와 강철수 시인의 서평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서 고진문 선생의 가곡과 선비춤이 최종민 교수의 해설이 곁들여져서 공연되었다. 고택에서 보는 것이라 조선 한량들의 풍류가 피부로 와 닿았다.
명사 초청 시낭송 순서에서는 이참 한국관광공사 이사장이 나와서 김원길 시인의 ‘고요’를 낭송하였다. 이참 이사장은 낭송에 앞서 한국인의 에너지를 ‘氣, 興, 情’으로 요약하면서, 氣는 ‘와’로 興은 ‘에이’로, 情은 ‘응’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세 마다의 여음구로 한국인의 에너지-문화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표현한 듯함-를 읽어내는 그의 눈은 예리하였다. 이참 이사장의 이런 생각을, 나는 한국 문화의 한 특질로 삼아 ‘신바람論’이라 일컫고 싶다. 그의 시 낭송 실력도 토종 한국인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 날 공연의 백미는 아마 이삼 스님의 대금 연주였을 것이다. 그는 사고로 오른팔은 잃은 까닭에 왼손 하나로 대금을 연주한다. 왼손으로만 연주할 수 있도록 제작한 대금, ‘여음적(餘音笛)’으로 스님은 ‘영산회상’을 연주하였다. 그가 만들어내는 대금의 소리는 절묘하였다. 때로는 우레와 같이 솟구치고 때로는 문풍지에 떠는 바람 소리나 숨비 소리이다가 또 한 고비 넘어서면 가락에 실이 감겨들듯 잦아들어, 듣는 이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농락(?)하였다. 이삼 스님의 대금 연주에는 무릇 氣와 興과 情이 넘쳐났다. 일찍이 김원길 선생의 만파식적에 빼앗긴 적인 있던 마음을, 이날 나는 이삼 스님의 여음적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이날 행사는 김원길 선생의 반세기 동안의 시업을 결산하는 99편의 시선집, 『지례유사』 상재의 기쁨을 여러 사람과 나누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이 시선집은 선생의 대표작들을 망라한 까닭에 그의 시가 지닌 정체성을 조감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선생의 많은 시에는 시조다운 律이 있고, 개결(介潔)하면서도 절제된 시의 格이 넘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가운데 근래에 발표한 ‘고요’와 ‘상모재’가 이러한 멋을 잘 보여준다.
달도 지고/ 새도 잠든// 정적 속/ 눈 감고// 귓전에/ 스스스스//지구가/ 혼자서// 조용히/ 자전하는// 소리/ 듣는다.//
지구의 자전 소리를 듣는 일을 물리적 상상력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는 넌센스이다. 이는 오롯한 시인의 감성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시인은 그 지구의 소리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스스스스’. 이 지구의 자전 소리는 시인의 지적 재산이다. 이 재산을 두고 그 가치의 고하를 논하는 일도 우스운 일이다.
실은 지구의 자전 소리는 적막한 침묵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구의 자전 소리는 이 적막한 고요에서 연유한다. 적막한 고요는 지례예술촌쯤에서나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얻는 정서는 보편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시에서 참 모호하게 쓰인 게 하나 있는데, ‘혼자서’이다. 이 시어의 주체가 시적 화자일 수도 있고, 지구 자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이 시가 주는 묘미의 하나이다.
달 아래/ 눈 위에/ 그림자 하나// 밤길/ 혼자서/ 재 넘어 간다.// 열두 발/ 풀어진/ 상모 같은 길에// 언뜻/ 사라졌다/ 다시 보이는// 아득히/ 흔들리며/ 가는 점 하나.//
이 시 속의 주인공은 물론 시인 김원길일 터이다. 자신의 몸은 상모재를 넘도록 해놓고 정작 자신의 생각은 까마득히 먼 공중에다 띄워 놓고 있다. 이 시는, 그 생각이 몸을 조감하는 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달이 된다.
어쨌거나 ‘상모재’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연담 김명국의 ‘설중귀려도’를 생각했다. 연담은 밤중에 나귀를 타고 정인(情人)의 집을 나서 눈보라가 들이치는 밤길로 들어서는 장면을 섬세하면서도 거칠게 표현해내고 있다. 상모재를 넘는 시인이 연담 그림 속의 산모퉁이 벼랑길에 이스라히 나타날 것만 같다. 나귀를 타고 구종을 딸리지는 아니했지만, 상모재를 하나의 점으로 넘어가는 시인이 걷는 길은 ‘설중귀려도’의 주인공이 가는 길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인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생각했을 터이나, ‘설중귀려도’의 주인공은 떨어지는 않는 발길을 험난한 길 위에 들여 놓았다는 점일 게다.
오르는 그 길이 얼마나 굽이지고, 내려가는 그 길이 얼마나 모롱이졌으면 스스로 상모재라 일컬었을까. 점 하나로 떠가는 시인의 까마득한 마음에 땀이 흥건히 배어드는 듯하다.
이 두 편의 시를 소리로 읽어보라, 그리고 마음으로 읽어보라. 한 번은 律이 감각으로 올 것이고, 한 번은 格이 마음으로 다가들 것이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