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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선비집안의 품격이… -고 이광훈(故李光勳) 추모기(글/김용직_서울대 명예교수)

이광훈1941-2011 <사진:경향신문사 '여적'>

1. 서늘한 눈매의 주인공

이광훈(李光勳) 군은 시원한 이마에 서늘한 눈매를 가진 호남아였다. 언제, 어디서나 반듯한 몸가짐에 품격을 가진 말과 행동이 선비 집안의 혈맥을 느끼게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의 초입이 아니었던가 한다. 당시 나는 어렵사리 시작한 학부생활을 마치고 두어 해가 지난 터였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어 적지 않은 우울증을 가졌을 때다. 하루는 무슨 일로 고향친구들 모임에 나갔다. 이제 우리 곁에 없는 이광훈 군이 그 자리에 학부생활에 들어간 새내기 대학생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2. 친구의 아우, 믿음직한 후배

처음 이광훈 군을 보는 순간 나는 곧 그의 모습에서 그의 형 이종훈(李宗勳) 군을 떠올렸다. 그들 형과 아우는 그렇게 눈빛과 목소리, 체취까지가 닮아 있었던 것이다. 반가운 나머지 나는 악수부터 청하고는 곧 내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고인도 반색을 하면서 “형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던 것 같다. 이어 그가 꺼낸 말이 인상적이었다. “대학신문에 발표하신 <경계해야 할 매너리즘> 잘 읽었습니다. 저도 국문과를 택했으니 문예비평도 해볼까 합니다.” 그가 말한 형님이란 나와 중학교 동기인 이종훈 군이었다. 8.15 직후 우리는 안동 시내 소재의 중학교를 지망하여 같은 교정에서 공부를 하게 된 사이였다. 하루는 같은 반의 친구를 따라 서악사(西岳寺) 옆에 있는 그의 숙소를 가본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이종훈 군은 풍산초등학교 졸업의 최우수 학생으로 소개가 되었다. 우리의 첫 대면은 그러니까 10대 초반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후 이종훈 군과 나는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 나는 홀어머니를 모신 채 학업은 뒷전에 돌려버리고 부둣가에 나가 미군들의 군수물자 검수작업 일을 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자연 앙앙불락의 세월이었는데 그런 갈피에 나보다 한 발 앞서 서울대학교 학생이 된 이종훈 군이 나타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김호길(金浩吉), 이용태(李龍兌), 이동승(李東昇), 김명연(金命年), 김재은(金在恩), 유혁인(柳赫仁), 이상옥(李相玉), 유동식(柳東植), 김옥동(金玉東), 김규영(金奎榮), 김윤진(金潤鎭) 등 십여명에 이르는 동향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고향 친구들 면면을 만나기 전까지 내 피난생활은 사나운 뱃길에 나침반을 잃어버린 조각배와 같았다. 그런 내 앞에서 이종훈 군이나 김호길, 이용태 군 등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엄청난 전란을 만나 의욕상실증에 걸린 내 앞에서 끊임없이 장래의 꿈을 이야기하고 미래의 포부를 펼쳐보였다. 지금 나는 생각한다. 만약 당시 내가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청춘의 꿈을 불태운 고향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20대초가 어떻게 되어버렸을까. 어떻든 고마운 고향 친구들의 충격과 격려가 있어 나도 팽개쳐버린 공부를 다시 시작할 의욕을 가지게 되었다.

고인을 말하는 자리에서 형제관계로 이야기의 초점이 다소 빗나가 버리게 되었다. 이광훈 형과 내가 처음 만났을 무렵 그의 형인 이종훈 군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마쳤을 때였다. 졸업 직후 그는 결혼을 했고 같은 무렵에 학사장교 교육을 거쳐 진해의 해군사관학교로 부임해 갔다. 그러니까 고인이 나를 만난 것은 혼자 서울에 떨어져 고등학교를 마치고 갓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의 신입생이 된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광훈 군을 만나기 전에 나는 그의 형을 통해 아우의 이야기를 두어 번 들은 기억이 있다. 중학교를 시골에서 다녔기 때문에(풍산중학교 출신) 고등학교만은 서울에서 다니게하고 싶어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택하게 했다는 것, 이공계가 적성에 맞는 그와 달리 동생은 글짓기에 장기가 있어 문과에 보내야 할 것 같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고인을 만나기 전 나에게는 그 정도의 예비지식이 있었다. 그 나머지 고인을 만나자마자 오래 헤어졌다가 상봉이 된 혈육을 만나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되어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고인이 학부 때 내가 쓴 글 제목을 든 일은 지금 생각해도 뜻밖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가 말한「경계해야 할 매너리즘」이란 단지 타블로이드판으로 발행된 서울대학신문에 투고한 내 에세이 제목이었다. 그 분량이 20여매에 그친 것이었고 내용은 서울대학교 문리대문학회의 회지인『문학(文學)』제2호를 다룬 작품평이었다. 거기서 나는 우리 대학의 시와 소설이 한국문단의 새 지평(地平) 타개를 지향하리라는 구호만 앞세우고 실제 작품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명색이 비평적 에세이로 써 본 이 글은 발표와 함께 학내외에서 얼마간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학내에서는 내가 관계한 문리대『문학(文學)』지를 내가 비평했으니 당치 않다는 반응이었다. 우리 대학이 아닌 경우에는 자칫 제 잘난 맛에 사는 것으로 비친 우리 대학 자체에서 자아비판식 글을 쓴 예가 나온 것으로 까십 정도의 이야기거리 자료 구실을 했다. 내 학부생활은 뚜렷한 문단활동 실적도 갖지 못한 채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쓴 글 하나를 고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부를 마치고 나서 나도 당시 우리 주변의 관례에 따라 문예지의 신인추천제에 응모하여 입선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활발하게 이루어진 문예동인지 운동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 후 얼마동안 나는 단독 저서로서 비평집을 출간시키지도 못했다. 그런 나에 비해서 나이로는 10년 가까이 상거를 가진 고인은 학부 재학 때 이미 동인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63년 봄에 고인이 조동일(趙東一), 임중빈(任重彬), 주섭일(朱燮日) 등과 함께 낸『비평작업(批評作業)』이 바로 그것이다. 이광훈 군이 나오기까지 우리 고향의 내 연배들은 전공의 방향이 대체로 자연계쪽에 쏠려 있었다. 또한 기타의 예로는 법학, 정치학, 사회학, 철학 등 그 폭이 매우 넓었다. 그러나 순문학계로는 영문학, 불문학 전공자가 있는 반면 국문학 전공 지망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 어느 시기까지 나는 독보(獨步)가 아닌 홀로 산길을 가는 것 같은 의사 고립감을 품고 지냈다. 훗날 안동 출신이 아니지만 같은 영남북부 출신이기는 한 조동일이 불문과에서 국문과로 학사편입을 하게 되어 내 고립감이 조금 해소되었다. 이광훈 군의 출현은 그런 내 외톨이 의식을 더욱 확실하게 해소하는 촉매제 구실을 했다.

3. 절의(節義)의 가통, 청백리의 후예.

인간 이광훈(李光勳)을 기능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의 성장환경과 문화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원조(遠祖)는 전의이씨(全義李氏) 이웅(李雄)으로 고려말에 전농전(典農全)을 지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易性革命)이 있자 그는 그것을 있을 수 없는 반역으로 규정하고 영남 안동 땅 풍산으로 낙향했다.
전농공(典農公)의 후손은 풍산 하리에 터를 잡은 다음 500여 년을 세거(世居)했다. 전농공(典農公)의 아드님인 이화(李樺)는 세조 때 병조판서가 되었고 한때 문형(文衡)을 잡기도 했으나 명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 질박검소한 생활로 청백리에 녹선(錄選)되었다. 그 후 이 일파는 거의 모두가 산림(山林)에 조용히 사는 길을 택하여 영리(榮利)와는 담을 쌓았다.
영조 때의 나졸재 이산두(懶拙齋李山斗)는 이화의 7대손이었다. 경종(景宗) 원년에 문과에 응시하여 강을 마치고 거의 합격이 확실한 때였다. 그는 스스로 시관 앞에 나가서 자신이 글자 하나를 잘못 읽었다고 바로 잡아주기를 청했다. 그의 말을 들은 대관(台官) 홍용조(洪龍祚)가 물었다. <시관(試官)들 모두가 모르고 지나는 일인데 굳이 그것을 밝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자 공이 결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비록 남이 모른다고 해서 어찌 내 자신을 속일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분이 영조 8년(1732)에 다시 과거 시험에 응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포(藍浦) 현감을 지냈으나 집안 살림은 씻은 듯이 가난했다. 조정에서 그의 뜻을 기리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자시키고 공조참판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영조는 그의 높은 학덕을 가상히 여겨 화원을 보내어 영정을 그리게 했다. 만년에 정1품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된 분이다.

고인의 형인 이종훈이 주손인 일성당(日省堂)은 숙종조에 이문한(李文漢)이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뒤에 산을 거느리고 남동쪽으로 자리를 잡은 이 집 옆에는 곡간수(谷澗水)가 흘러내렸다. 입구(口)자로 된 이 집은 크게 외당과 내당으로 구분된다. 외당에는 마루방과 함께 사랑방이 있는데 그것은 평소 독서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일성당을 중심으로 전이 이씨 일족은 대를 이어 청빈한 가운데도 수기(修己) 찰물(察物)의 경지를 열어갔다. 당호를 일성당(日省堂)으로 한 것 또한 논어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을 연상하게 만든다. <나는 하루 세 차례씩 자신을 되살펴 본다.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되 정성을 다함이 모자라지 않았는가. 친구와 더불어 사귐에 믿음으로 함이 없지 않았는가. 내가 배운 것을 충분히 습득하지 않은 채 남에게 전달하지 않았는가. <吾日三省吾身爲人謀而不忠乎與朋友交而不信乎傳不習乎>

이광훈 군이 태어난 일성당(日省堂)은 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는 가운데도 절의(節義)를 지키고 어엿하게 도학(道學)과 사장(詞章)의 줄기를 물려 내린 집이었다. 그의 조부인 다산(多山) 이한영(李漢榮) 공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단 세속적 일과 거리를 두었다. 만년에 이르도록 보수 사림의 상징인 상투를 자르지 않은 채 종산정사(鍾山精舍)를 지어 후진을 양성하고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길을 걸었다. 일제 암흑기에는 거듭된 총독부의 강요를 무릅쓰고 창씨개명(創氏改名)하기를 거부했다. 지금 우리에게 시문집인 『다산집(多山集)』을 끼치는 분이다.
이광훈 군의 아버님은 반월산인 이상인(半月山人李相寅) 공이다. 다산공(多山公)의 뜻에 따라 일제의 제도교육은 받지 않았다. 20대 초를 전후한 시기에 도일하여 동양의학 연수기회를 가진 것으로 전한다. 그는 일제말기에 조선어학회에 관계했다(1937년 경부터). 당시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진행중이었는데 반월산인(半月山人)은 이 가운데서 향찰, 이두 부분을 맡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 뚜렷한 자취로 포착되는 것이『한글』7권 5호(1939. 5. 1)부터 8권 5호(1940. 7. 1)까지 열 두회에 걸쳐 연재된 「이두초(吏讀草)」다.

이 작업은 향찰, 이두로 표기된 우리말 어휘를 ㄱ, ㄴ 등과 아, 어 등 모음의 차례로 정리하여 제시하고 그 음(音)과 뜻을 밝힌 것이었다. 그 허두의 일부를 제시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이 향찰, 이두 어휘 정리 작업은 매회에 다룬 말들 숫자가 60여개 정도다. 그것이 12회 연재되었으니 그 총수가 700여 개에 이르는 셈이다. 이것은 반월산인에 의해 시도된 향찰, 이두의 어휘 정리가 당시 우리 학계에서 이루어진 총량을 거의 모두 포괄시킨 것이었음을 뜻한다. 이와 아울러『한글』지를 보면 반월산인에 의해 시도된 특수 분야의 어휘가 채록, 정리된 것이 있다.『한글』6권 3호(1938. 3. 1), 6권 5호(1938. 5. 1)에 수록된「농촌용어」, 그리고 7권 10호(1939. 10. 1), 7권 11호(1939. 12. 1), 8권 1호(1940. 1. 1)에 실린「건축용어」가 그들이다. 구체적으로 농업용어 (1)의 <농구의 이름과 그 각부(各部)의 이름>은 <가래, 흙을 떠서 던지는 것, 장부, 잡고 일하는 자루> 등으로 시작하고 있다.「건축용어」(1)은 <재목(材木) 이름>의 항목 아래 <기둥, 집을 짓는데 세로 세운 나무, 집을 세우는 원체.> <도리, 기동과 기동 우두머리를 걸쳐 맞훈 나무, 특히 쟁에 위에 얹힘, 앞쪽과 뒤쪽에 한하여서 이름. 그 위에 혀까리가 걸쳐서 처마로 나옴.>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참고로 8·15 후에 발간된 한글학회의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여기 나오는 어휘의 풀이와 큰사전 사이에는 일맥의 연관성이 포착된다. 이것은 곧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편찬사업에서 반월산인이 특수어휘 수집, 정리를 담당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제 이런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명백해진다. 이것으로 우리는 고인이 된 이광훈 군의 혈맥 속에 선비의 지절(志節) 정신과 함께 민족문화의 계승, 보존의식이 맥맥하게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4. 한국 잡지 사상 최연소 편집장 이광훈
고려대학교를 마친 다음 이광훈 군은 월간『세대(世代)』에 자리를 얻어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세대』는 국내에서 몇 개 안되는 시사종합지였다. 거기에 이광훈 군이 단순 사원, 또는 평기자(平記者)가 아니라 발간 주체로 참여했다. 발족 당시『세대』의 사장은 최진우(崔珍雨)였고 편집장이 권영빈(權寧彬)이었다. 이런 진용이 두어 해가 지난 다음에는 크게 변경되었다. 얼마 뒤 이광훈 군이 편집장이 되었고 이어 그가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일개 잡지사라고는 하나 이 이례적인 승진이 한때 우리 주변에서 화제가 되었다.
하루는 내가 고인이 근무하는『세대』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전화로 사전 연락을 한 터여서 당시 세종로 쪽에 자리를 잡은 『세대』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인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자리에서 고인이 하는 두어 마디의 토로로 나는『세대』지가 발간, 운영되고 있는 속사정이 짐작되었다. 한마디로『세대』의 후견역할을 한 것은 당시 체제 안정에 신경을 쓴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다.
5.16으로 궐기한 소장 장교 일부가 일단 정권장악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군사 쿠데타는 곧 만만치 않은 국외와 국내 여론의 과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직면하자 박정희정권은 두 가지 대책을 세웠다. 그 하나가 일정 기간 검열제를 실시하여 언론을 통제하는 길이었다. 이것은 주로 동아, 조선 등 야당 성향의 일간지에 적용되었다. 한편 군사정권이라고 하더라도 언론 통제를 무한정 연장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당시의 정부, 여당이 생각해 낸 것이 그들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 보도매체를 육성, 보조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세대』의 발간은 후자에 속하는 정치정세에 힘입어 이루어진 면이 매우 강하다. 여기서 우리는 화제의 폭을 좀 더 좁힐 필요를 느낀다.『세대』지 발간의 구체적 요인이 된 것에는 당시의 대정부 비판지인『사상계(思想界)』가 있었다. 6·25 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간된 이 잡지는 신문사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단독 월간지로 당시 지식인들의 생각을 집약, 대변하는 구실을 했다. 그런데 거기 실리는 기획, 특집들이 빈번하게 정부, 여당에 대한 비판물로 채워졌다. 이에 신경이 곤두선 것이 집권 초기의 박정희 정권이었다. 그러니까『세대』는『사상계』와 같은 비판지의 대항마(對抗馬)로 기획, 발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세대』에 갓 학부를 나온 이광훈 군이 주역으로 발탁된 이유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혈맥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간 당시부터『세대』의 실질적인 주재자는 박정희 정권의 실세 중 실세인 이낙선(李洛善)이었다. 그런데 이광훈 군과 이 이낙선이 바로 동족부락 출신으로 일찍부터 각별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드러난 바와 같이 고인은『세대』지가 창간되고 나서 얼마 안된 다음 편집국장이 되었다. 청와대 측의 재정 원조를 받았으므로 때로 잡지 내용에 대해서 그쪽의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한『세대』가 의도적으로 정부, 여당을 비호하는 글들을 모아 특집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것은 고인이 잡지 발간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외풍(外風)을 엄격하게 차단하고 정치색을 배제한 종합교양지를 만들려고 한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다.

호를 거듭하는 가운데 『세대』는 정치색을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잡지의 고유한 몫에 속하는 덕목도 지니기 시작했다. 초창기가 지나자 이 잡지는 문예작품 우선주의를 지향하고 나섰다. 한 해에도 몇 번이고 시인, 작가들을 동원하여 특집을 꾸몄다. 그와 병행하여 수준이 높은 시와 소설을 게재하여 때로 그 질적인 수준이 문예전문지를 웃돈다는 평가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세대』지는 신인문학상을 제정했고 장편 서사문학의 전통이 약한 우리 문단의 사정을 감안하여 대작 장편도 공모했다. 뒤에 한국문단의 인기작가가 된 박태순(朴泰洵), 신상웅(辛相雄), 조선작(趙善爵), 홍성원(洪盛原) 등이 바로 이런 『세대』의 편집 방침에 힘입어 우리 문학사에 부상한 사람들이다.

고인이 『세대』를 주재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나는 문자 그대로 무명의 문학도에 지나지 않았다. 60년대 초에 내가 문예지의 평론 분야 추천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매사 소극적인 성격에 글솜씨도 대단한 것이 못되어 문예물 발표는 연간을 통틀어도 한 두 편에 그쳤다. 고인은 그런 나에게 잊어버리지 않고 연락하여 글을 발표할 기회를 제공했다.『세대』의 에세이 특집에 수록된 두어 편의 글과 기타 「박두진론」, 「외래지향성과 그 극복의 길」등 초기에 내가 쓴 글들이 고인의 배려에 의해 발표된 것이다.

언젠가 내가 『세대』사에 들렸더니 그날은 우리 둘만으로 점심을 해야겠다고 반겼다. 조선일보 뒤에 있는 꽤 깨끗한 일식집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좀 의아해 하면서 자리에 앉았더니 고인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여당 배경의 잡지를 하다가 보니 문우(文友)들의 핀잔을 자주 받는다는 것이 그 하나였다. 그때 그의 나이 아직 20대 초반이었다. 그래 그의 말에 나는 농담기를 섞어 응수했다. <그런 친구들 말보다 실질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내가 알기로 이제까지 『세대』가 정부, 여당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주변의 문화적 감각이나 사회정서를 교란, 왜곡시킨 일은 없다고 본다. 그뿐인가 편집인으로서 이광훈은 신문관을 만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지 『소년(少年)』지를 발간한 최남선(崔南善) 이래의 최연소 잡지 편집인이 아닌가. 이런 사실을 덮어둔 채 쓰잘 데 없는 말들을 흘리는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인이 오랜만에 좀 숨통이 트이는 농담을 듣게 되었다고 파안대소를 했다.
이어 그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한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고인은 그때 내가 한 것이라고 까마득히 잊고 지낸 말을 되들려주었다. <처음 형님을 만났을 때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은 국문학연구자로 사는 일인 것 같다. 학부를 마치면 다른 분야로 나가기보다 연구실에 남는 길을 택해보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고인은 <내가 그렇게 못한 것은 무엇보다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여느 경우 같았으면 그때 고인이 한 말은 그런 자리에 흔히 하는 한담의 하나로 들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대』사에 자리를 잡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고인이 특히 나와 둘이 된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것에는 그 바닥에 얼마간의 사연이 깔려 있다. 그가 학부를 마쳤을 때 형인 이종훈 군은 갓 결혼을 한 터여서 신접살림을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진해에서 차리고 있었다. 당시 초급장교의 봉급으로는 그런 두 사람이 생활해 나가기에도 빠듯했을 것이다. 그런 형편에 이종훈 군은 아우의 학비를 부담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막내 누이동생도 서울로 불러 올려 등록금부터 만만치 않은 이화여대에 입학시켰다.
학부과정에서 이광훈 군은 줄곧 가정교사로 숙식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본래 고인의 생가인 일성당은 안동 쪽의 종가 가운데도 살림이 넉넉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와 8·15 직후에 이루어진 농지개혁, 이어 몰아닥친 전란의 여파가 이 집안을 비켜가지 않았다. 주손인 이종훈 군이 서울대학교에 합격이 되었을 때 일성당을 홀로 지키게 된 어머님이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이 어른이 당시 어느 고을의 군수를 하고 있었던 친정 오라버니를 찾아갔다. 후일을 약속하고 어렵사리 필요한 액수를 얻어 썼을 정도다. 학부에 다니면서 이광훈은 그런 가정 사정을 아프게 느꼈을 것이다. 그 나머지 학부를 마친 다음까지 형님의 도움을 받는 일은 참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 것 같다. 그런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지낸 나에게 고인이 들려준 몇 마디는 참으로 뜻 깊었다. 그것으로 나는 고인과 그 형 사이를 잇고 있는 우애의 부피를 실감했던 것이다.
『세대』지에서 기반을 닦은 이광훈 군의 언론 활동은 그 후 『경향신문』으로 연결되었다. 『경향신문』에서 그는 논설을 맡아 주필을 역임했다. 정론을 펴는 가운데 부드러운 말씨, 논리정연한 문장을 써서 언제나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뿐만 아니라 고인은 문예비평 분야에서도 좋은 글을 발표했고 원만한 인간관계로 많은 사람들의 칭예를 들었다. 그 사이에 관훈클럽의 대표로 활약하고 기타 사회봉사 단체에도 관계한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5. 아 밝은 별 사라진 밤
내가 고인의 작고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 구정 초인 2월 4일이었다. 그날 나는 다른 자리에 일이 있어 그쪽에 가볼까 한 참이었다. 거실에 놓인 전화벨이 울리기에 받았더니 국문과의 동기동창인 이종석 군이 고인의 작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처음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며칠 전 나는 고인의 형인 이종훈 군을 월례행사로 모이는 한시회에서 만났다. 귀가 길에 얻어 탄 차 속에서 의례 그렇게 하듯 “광훈이 요즘도 잘 있지”라고 물었다. 그때 이종훈 군의 답도 관례대로 “그럭저럭 그렇지 뭐”였다. 그런 고인이 느닷없이 이승을 하직했다고 하니 내 귀가 의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든 뜻밖의 작고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나는 영안실이 있는 강남 삼성병원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고인의 사진틀 위에 걸린 검은 띠를 보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내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고자 안간힘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내가 분향재배를 마친 얼마 뒤 고인의 형인 이종훈 군이 나타났다. 내가 손을 잡자 그의 눈에 금세 가득히 눈물이 고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차마 조문(弔問)의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만사는 그날 내가 집으로 돌아와 50 성상에 걸쳐서 오고 간 우리 사이의 정을 생각하면서 만들어 본 것이다. 내 솜씨가 시원치 않아 평소 우리가 나눈 정의의 몇 토막도 담지 못한 것이 되어 부끄럽고 부끄럽다.

一.
그 모습 맑고 밝아 티끌 먼지 떨쳐냈고
청론 탁설(卓說) 펼친 세월 더없이 지났구나
밝은 별 문득지고 어두운 밤 밀려드니
하늘가 외짝 기럭 외로움에 울음운다

二.
흉허물을 잊은 세월 몇몇해가 지났던가
오고간 설흔해에 다시 스물 겹치었다
상도 노래 한 마디에 울음소리 끊긴 자리
쓸쓸해라 고향산천 외로움이 사무친다.

동향에 세교가 있는 집안의 친구 이광훈 군이 신환으로 작고하니 때가 신묘 2월이었다. 고인은 10대에 책짐을 지고 상경하여 고려대학교에 학적을 두었고 재학 때 문예평론으로 등장하여 문명을 드날렸다. 경향신문 주필, 관훈클럽 회장을 거쳤는데, 문상 다음에 내가 슬픔을 이길 길이 없어 이 두 마디를 지어 만사에 대신하다.

輓李光勳君

一.
雲表英姿脫俗塵淸談卓說歷多旬
文星一落冥冥夜天際歸鴻鳴隻身

二.
忘形同伴幾多春來往卅年加二旬
一曲薤歌聲斷處蕭條嶺海嘆吾身

同鄕世友李光勳君辛卯二月以宿患作故.
君十代負笈上京學於高麗大學在學時以
文藝評論登壇有文名歷京鄕新聞主筆寬
勳俱樂部會長余問喪後不禁悲懷作二首
爲輓詞.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