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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암공방(글/사진/피재현_시인, 노암공방 대표)

작업실을 동경하다
어려서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작업실을 기웃거리길 좋아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음악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공간, 신기하게도 아름다운 무엇인가가 만들어져 나오는 곳, 일하는 손을 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여기저기 참 많이도 기웃거렸다. 어디고 괜찮은 곳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불쑥 찾아가 구경을 하고 인사를 텄다. 더러 타박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서 친해진 사람도 여럿 있다.
나는 늘 무엇인가를 만들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관심은 많았으되 재주는 없었으니 자연 여기저기 다니며 구경하고 감상하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게중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고등학교 때 불쑥 기차를 타고 찾아갔던 원주의 박경리 선생님 집필실이었다. 안 열어주겠다는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 기어이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 나왔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집필실은 오래도록 내 동경의 공간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이후에도 나는 어디 가까운 곳에 공방이나 작업실이 생겼다고 하면 열 일 제쳐놓고 달려가 기어이 구경을 하곤 했다. 도자기 굽는 가마가 있는 작업실, 먹향 진한 서실, 쇠나 돌을 깎는 굉음이 그치지 않는 공방, 유화물감의 기름 냄새가 진동을 하는 화실……. 그런 작업실에 다녀오면 나는 한동안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았다.

내 작업실을 갖다
그러던 내가 나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없는 재주로 서각전문을 표방하는 ‘노암공방’을 열게 된 사연은 이렇다.
하던 사업을 접고 대안학교 교사가 된 것은 지난 2006년이었다. 막상 대안학교를 맡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국어수업은 재미없어하고, 나는 그림이나 음악에는 아주 젬병이였다. 고민 끝에 내가 택한 것은 목공. 교사직무연수를 신청해 목공을 배우러 갔다. 순전히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수업을 찾다가 생각해낸 목공이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어릴 때, 과수원에서 사용하던 사과상자를 그때만 해도 직접 만들어서 썼는데 아버지 옆에 앉아서 송판에 못질을 하다보면 뚝딱뚝딱 만들어져 나오던 사과상자가 신기했었는데 뭐랄까? 그때의 기분처럼 나무상자도 만들고 장부구멍을 파서 차탁도 하나 만들었다. 연수 마지막 순서가 서각이었다. 은행나무 한 장에 서기상운(瑞氣祥雲) 네 글자를 양각하는 작업이었는데, 그때부터 나는 서각에 빠져버렸다. 밤낮없이 나무에 글씨며 그림을 새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텅 빈 학교에서 주로 작업을 하다가 밤이 늦으면 집으로 가지고 와서 소리를 줄이기 위해 망치를 붕대로 감싸서 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내에 사무실 한 칸을 얻어 동호회를 했다. 꼬박 6년, 글쎄? 내가 판 나무가 몇 장이나 될까? 족히 몇 백 장은 될 것이다.
학교를 그만 두고 2010년 10월 지금의 자리에 공방을 지었다. 늘어나는 공구며 나무를 시내 사무실에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고,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던 터라 공방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지금 나의 작업실은 남선면 원림리에 있다. 몇 년 전에 여러 사람이 함께 집을 짓고 살 터를 찾아 여기에 사 둔 땅이 조금 있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집을 지어 들어왔는데 나는 그 터에 공방을 지은 것이다.
내가 공방을 지은 데는 서각 이외에도 한 가지 더 목적이 있다. 오래도록 접어두었던 시를 다시 써 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나름의 집필실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30평 작업실을 둘로 쪼개서 서각 작업실 한 칸을 만들고 서재를 한 칸 만들었다. 나무는 따로 밭에 비닐하우스를 두 동 지어서 말리면서 보관하고 있다. 전동공구를 사용하기 위한 공간으로 따로 컨테이너를 설치했다.
시내에서는 작업 소음이며 나무 먼지 때문에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는데 한적한 농촌 마을이라 그런 걱정이 없어서 좋다.

나무와 정을 통하다
서각(書刻)은 쉽게 말해서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일이다. 글씨만 새기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새기므로 목판서화(木板書畵)라고도 한다. 우리가 잘 알기로는 팔만대장경 같은 금속활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책판이 대표적인 것이며 옛 건물의 현판, 사찰 기둥의 주련, 문패 따위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요즘은 실용성보다 예술성을 강조한 현대서각이 인기를 끌기도 하고 목가구나 목공예에 응용되기도 한다.
나무에 글씨나 그림을 돋을새김하는 양각, 반대로 파들어가는 음각 등의 기법이 있다. 그 중 나는 음각을 선호하고 공모전 두 번의 수상도 모두 음각이었다. 내가 음각을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리면서 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서각보다 나무에 빠져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서각을 하기 위해서는 여느 목공예와 다름없이 나무를 다듬는 작업을 하게 된다. 대개 나무를 다듬는 작업은 적당한 나무를 제재소에 가서 켜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나무를 켤 때부터 흥분한다. 썩어빠진 것처럼 보이는 느티나무가 제재소의 띠톱을 지나면서 속살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 벅차오르는 기분을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적당한 두께로 켠 나무를 가져와서 대패질과 사포질을 하게 되는데 나는 이 과정에서 장갑을 잘 끼지 않는다. 거친 나무 표면이 대패와 사포를 거치면서 애기 속살처럼 윤기가 나고 보드라워지는 전 과정을 나는 맨 손으로 느끼고 싶은 것이다. 몇 번이고 거듭 다듬어진 나무의 살갗을 만져보지만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나는 느티나무를 좋아하는데 우리나라 재래종 느티나무의 잔물결이나 오래된 소나무 고재의 물결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이 다 잊혀지고 넋을 놓게 된다.

이런 나무에 대한 애정이 사람을 욕심 부리게 한다. 이렇게 작은 공방을 하고 있는 나도 벌써 내가 평생 써도 남을 만큼의 나무를 가지게 되었다. 어디 쓰러진 나무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트럭을 빌려 달려간다. 좀 싸다 싶으면 내가 쓸 나무도 아닌데 무작정 사놓고 본다. 제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 꼴이다.
시시때때로 반성하지만 막상 눈앞에 나무가 놓이면 고쳐지지 않는다.

외로움과 즐거움 사이의 공방살이
모두들 시내로 출근을 하는 아침, 나는 노암마을로 출근을 한다. 제일 먼저 장작을 가져와 난로에 불을 피우고 고양이 밥을 주고 똥을 치우고 나면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나무를 골라 자르고 대패와 사포를 하고, 칼을 갈고 나무에 무엇인가를 새기는 일이 나의 하루다. 간혹 글을 쓰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한다.
그 사이사이 동네 이장님이 불쑥 들어와 이런저런 동네 소식을 전해주기도 하고 순찰을 돌던 순경들이 들어와 차를 청하기도 한다. 전도활동을 하는 분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공방을 지을 무렵 시작한 붓글씨도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 공방은 동네 사랑방이기도 하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각자 음식을 조금씩 싸가지고 공방에 모인다. 송년회를 하기도 하고 윷판을 벌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적막이 맴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혼자만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싫다가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또 혼자 외로워서 무단히 고양이만 괴롭히고 있다.
이제 공방을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소위 ‘스펙’이 필요해 공방을 시작하고 두 번 공모전에 출품해 입상했고 활동의 폭을 좀 넓히고 다른 분들에게 귀동냥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으로 공예조합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무엇보다 내가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것은 글씨다. 서각을 하면서 제 글씨가 없다는 것은 하면 할수록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래서 10년 정도 계획을 잡고 글씨를 배우기로 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글씨를 배우기 시작했고 내 계획대로 10년이 지나면 내 글씨로 작품을 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돈벌이, 예술은 다 배고파야 하는가!
나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25살에 결혼을 했다. 결혼 하고 20년 동안 내 사업을 하거나 직장을 다녔다. 이제 딸애가 대학에 다니고 둘째인 아들도 내년이면 대학생이 된다. 어느 때보다 돈이 많이 쓰일 시기에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내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난 해에는 나에게 글씨를 가르쳐주시는 서예가과정(果丁) 선생님 덕분에 여기저기 작업을 좀 했다. 각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은 나무로 찻상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가지 경제적인 활로를 찾기 위해 구상하는 상품도 있다. 더러 블로그를 통해 판매가 되기도 하고, 시를 다시 쓰겠다는 계획도 진전이 있어서 올 봄에는 시집도 한 권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번 겨울을 지나면서 돈 걱정이 다시 되기 시작했다. ‘어려울 것이다. 각오하고 가야 한다’ 수도 없이 되뇌면서 결심을 하고 시작한 일이건만겨울 내내 이렇다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수입도 변변찮다 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지난 해에 좀 들어온 돈은 나무를 사는데 다 써버렸고, 도무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 난감하다. 답답하다.
그래서 10년 20년씩 공예를 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만나면 노골적으로 불어본다. ‘1년에 얼마나 벌어요?’ 놀라운 것은 나보다 더 적게 버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버티며 살아왔는지 본인들도 나도 불쑥 말해놓고 보면 기가 막힌다.

공방을 시작하면서 내가 택한 방법은 ‘안 쓰는 것’이다. 일단 지난 2년간 옷이나 신발과 같이 내 개인이 소비하는 물건을 사지 않았다. 돈이 들 것 같은 술자리는 가지 않는다. 사회단체 후원금, 장학금 같은 지출을 반 이하로 줄이고 신문도 끊었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한때 담배도 모질게 끊었었다. 사회적 활동 폭이 비교적 넓었던 나로서는 참 힘든 일이었지만 돈을 벌면서 받는 스트레스에 비하면 돈을 안 쓰면서 받는 스트레스가 참기에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예술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사실 서각은 그리 매력적인 작업이 아니다. 나무가 좋아서,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내가 다른 사람의 그림이라도 다시 가공하고 색칠할 수 있어서 빠져들었지만 예술깨나 한다는 사람이 봐서는 서각은 큰 재미가 없을 법 하다. 실제로 어느 날 내가 찾아 뵌 전각(돌에 새기는 작업)하는 고암 정병례 선생은 ‘뭐 그런 걸 하느냐’고 비웃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좋다. 여기에서 시작해 장차는 창조적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서각과 글쓰기를 통해 나는 행복하고 싶다.

작업실 순례를 계획하다
공방을 시작하고도 나의 작업실 순례는 멈추지 않았다. 전국의 유명한 각수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친구의 공방이며 선배의 공방을 찾아가기도 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나도 공방을 하니까 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찾아가되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서로 도움이 되도록 할 것, 예술가에 대한 예의를 갖출 것.
내 작업실 소개를 시작으로 우리 안동의 소중한 문화예술인들의 작업실을 사랑방 안동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꾸민다.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뭔가 창조적 예술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엿보는 것은 상당한 활력이 될 것이라 믿기에. 나에게도 독자분들께도 유익한 시간이 되길 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