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곡연계록(善谷蓮桂錄)과 만나게 된 이야기(글/권경인_경기도 성남 사는 안동사람)
“아버지께서 남기신 책이 많아. 주로 한문으로 되어 있고 고서도 있는데, 집안에 글 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정리해야 할 지 큰 걱정일다. 나도 예전에 맏아버지로부터 배웠지만 문리가 나기 전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마저 배우지 못했지. 지금은 다 잊어 버렸고….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조카라도 한 번 시간을 내서 책 정리하는 걸 도와 줄 수 없는가?”
맏상주이신 종숙께서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년 초에 안동 사시는 종숙으로부터 종조부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병을 다녀와야겠다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차일 피일 하던 차에 채 보름이 지나기 전에 덜컥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조고께서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집안의 최고 어른이셨고 나를 많이 사랑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라 송구하고 죄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일요일, 안동으로 내려가 경황없이 문상했다. 상주와 함께 곡하노라니 슬픔이 온 가슴에 치밀어 올랐다. 월요일 오전에 회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월요일 오전 서울로 출근했다가 휴가를 내고 다시 빈소를 찾았다.
이날 문상객들이 다 돌아간 밤 늦은 시간에, 종조부님 지인 몇 분이 영전에 보내온 만사(輓詞)의 뜻을 함께 어두운 눈으로 풀어 본 다음, 종숙께서 “정말 큰 일 났다”라는 말을 몇 번 되 뇌이신 후 내게 건넨 말씀이다. 어른이 돌아가시니 글도 함께 끊어져 집안에 남아있는 서적도 간수하기 어렵다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소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동시에 생전에 종조부님께서 어떤 책을 보셨는지 호기심도 생겨서 “그러지요. 저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제가 책 정리하시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종조부님 휘는 호순(權鎬舜 1925~2012)이시고 평생 안동에서 사셨다. 젊은 시절, 백형이신 조고(祖考) 경와(敬窩 權鎬胤 1913~1972)공과 함께 주경야독으로 공부하셨다고 한다.
한식을 맞아 선친 산소 성묘 차 안동을 다녀 올 계획을 세우면서 종숙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 한식이 지난 4월 8일 오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삼형제가 안동으로 갔다. 와룡에서 성묘를 한 후 종숙께 연락을 드린 후 방문했다. 기다리고 계시던 종숙께서 먼저 꺼내 보여주신 책이 자고서(自考書) 필사본이었다. 조고께서 공부하시면서 참고로 적어 엮은 책이다. 선친께서 이 책 복사본을 한 부 가지고 계셔서 눈에 익숙한 책으로 반가웠고, 어떤 책이 더 있을 지 흥미로워지기 시작했다. 양장본과 고서 한적 더미가 어지럽게 쌓여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우선 조고께서 1960년대에 경영하셨던 봉화의 내성석판사(乃城石版社)에서 출판한 책 중 조고님 필적의 석판본들은 모두 남기기로 했다. 가치 있는 고서, 집안의 역사, 종조부님 행적과 관련된 책, 기타 참고할 만한 책은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처분하기로 하고 한 권씩 펼쳐보면서 정리를 시작했다. 한참 작업하다가 표지에 선곡연계록(善谷蓮桂錄)이라 쓰인 제목을 발견했다. 순간 반갑고 기쁘기 한량없었다.
선곡연계록이라면 지금까지 이름만 들어봤던 책으로 늑정(櫟亭) 권시중(權是中, 1572~1644) 공께서 선성지와 함께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예안의 향토사 관련 책이 아니던가? 조고 경와공께서 필사한 책이라 늑정공이 쓰신 원본은 아니지만 그 실물을 확인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손가?
1993년에 간행된 국역선성지(國譯宣城誌) 해제를 읽어본 후 나는 처음으로 선곡연계록을 알게 되었다. 인용해 본다.
“편찬자 늑정(櫟亭) 권시중(權是中)에 대하여. … 그의 자는 시정(時正), 호는 늑로(櫟老), 늑정(櫟亭)
또는 야주자(野舟子) 갈선노수(葛仙老叟) 등이다. 일찍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 그의 일생을 기록한 글이나 족보를 보면 그가 ‘선성읍지’와 ‘선곡연계록(善谷蓮桂錄)’을 편찬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선성읍지’는 필사본 ‘선성지’ 구지(舊誌)를 말한다.”
1936년에 석판본으로 간행된 문집인 늑정일고(櫟亭逸稿)에도 선곡연계록후서(善谷蓮桂錄後序)가 실려있어 어디엔가 책이 남아있을 것 같아 궁금증이 더 커졌던 것이다
이때까지 나는 과문한 탓으로 선곡연계록을 소장하고 있다는 곳을 알지 못했다. 국역선성지발간추진위원회에 이름이 올라있는 종조고님께 선성지 필사본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었는데, 부포의 봉화금씨 댁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선곡연계록의 존재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다. 시간이 많지 않았던 탓에 표지 사진만 찍은 후 일어섰다. 세 시간 가량 쪼그려 앉아서 먼지를 뒤집어쓴 보람을 가슴에 가득 품고, 책 몇 권을 챙겨서 형제들과 함께 해가 지기 전에 귀가 길에 올랐다.
선곡은 예안의 신라시대 이름이다. 연계록은 문과 무과 생원 진사과의 합격자 명단을 말한다. 만력(萬曆) 정사(丁巳)에 서문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선곡연계록은 1617년 편찬될 때까지 예안 지방의 문무 생원 진사과의 합격자 명단을 모두 수록하고 있을 터이다. 고향 안동은 타향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서 언제나 내 마음의 중심이다. 다음 안동행에서는 선곡연계록을 복사해야겠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