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그리는 안동 화가 김규승(글/이희수_프리랜서 작가)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하는 화가, 김규승
꽃이 피는 봄이 오면 꽃에 취하고 시원한 바람이 그리운 여름엔 바다에 취하고 단풍이 그윽한 가을엔 산에 취한다. 군고구마가 생각나는 겨울엔 소복한 눈이 그리워 사람들은 눈 오는 날을 기다리며 설렘에 취한다. 왠지 겨울은 그렇다. 군불에서 타닥타닥 나무 타 들어가는 소리에도 깊은 그리움에 취하게 되는 계절의 순간들은 참 오묘하다. 감정에 따라 위로 받기도 하고 오래된 친구처럼 포근함을 느끼거나 때로는, 어떠한 순간에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인연이라고 말하기엔 식상하겠지만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건과 사람들은 인연이 닿아서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싶다.


제주도의 겨울을 그리는 화가를 만나러 간다는 소식에 적잖은 설렘을 가졌다. ‘제주도’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겨울보다는 봄과 여름의 제주도를 상상하지 않을까 싶다. 막 무르익었을 때, 한창일 때, 절정을 보기 위해 휴가를 빌어, 시간을 내서 제주도 행 비행기에 몸을 띄운다. 그 설렘만으로도 벌써 제주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 또한 여행의 묘미다. 필자 역시 제주도 하면, 관광이나 휴가지로서의 막연한 기대감이 먼저 떠올랐다. 그렇다면 화가에게 제주도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설까.


낯선 바다 바람, 해녀, 비릿한 부두, 해안가에 차오르는 파도의 역동, 이방인들의 웃음소리. 화폭에 담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어느 하나의 아름다움을 선택하기엔 많은 풍경들이 있다. 때문에 화가에게 제주도는 뮤즈로서의 공간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 여름에 보면 가슴이 탁 트여질 것 같은 여름의 제주를 상상하며 김규승 화가의 작업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 고요함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단 액자 속의 제주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그림을 본 순간,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제주도의 평온함이 다가왔고 그가 그린 제주도는 봄의 풍경이란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겨울이었다.




겨울에 그리는 제주의 봄
김규승 화가는 겨울에 본 제주도의 봄을 그리고 있었다. 겨울은 겨울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고정관념이 의아한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 봄이 가장 먼저 오는 제주도는 겨울에도 봄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화폭에 담긴 그림이 말하고 있었다. 겨울이지만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하는 꽃봉오리도 바다내음도 봄을 가장 먼저 알아챌 수 있는 곳이 제주도였던 것이다. 김규승 화가는 제주도의 봄을 그렇게 찾아냈다. 그는 해마다 시간이 날 때면 겨울에 제주도를 찾는다. 부러 겨울에 제주도를 찾는 이유는 일단, 관광객이 없어서 좋고, 오롯이 풍경을 담을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고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 안에서 봄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규승 화가의 제주도 그림은 풍경 그대로를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화가의 말처럼 제주도의 고요함과 평화 그리고 그 안에서 화가가 느끼는 고독과 쓸쓸함. 아무도 없는 제주도의 오름 위에서 제주도의 먼 겨울 바다를 그리워하듯, 그의 그림은 그림 밖의 시선이 아닌 그림 안에 서 있는 듯한 작은 착각도 불러일으킨다.


제주도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4~5년 전부터이다. 평소 등산을 취미로 가졌던 차에 마침 한라산을 등반할 기회가 있었다. 한라산 등반으로 제주도와 인연을 갖게 된 김규승 화가는 한라산에 올라 제주도의 어떤 모습을 담아왔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 순간이 김규승 화가를 매년 제주도에 이끌게 하는 인연이 아니었을까.
겨울을 가장 좋아하는 김규승 화가는 차 한 잔을 마셔도 겨울에 먹는 맛이 다르다고 한다. 최근 해안기지 때문에 속 시끄러운 제주도의 근황에 그는 안타까운 심경을 드러냈다. 그에게 제주도는 제 2의 고향과도 같다. 한결 같이 그가 참여한 전시회의 주제가 제주도의 겨울에 대해 이뤄진 것만 봐도 그가 봄의 옷을 입은 제주도의 겨울을 얼마나 아끼는 지 알 수 있다.


개인전 15회에 국내에서 열린 크고 작은 기획, 단체전 400여회의 경력을 가진 김규승 화가는 제주도를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줄곧 ‘겨울에 보는 제주의 봄’, ‘제주 올레 인상’, ‘가파도 인상’ 등 겨울의 화폭을 주로 담고 있다. 특히 요즘 그가 제주에 빠져있는 것은 ‘오름’이다. 오름은 산을 뜻하는 제주도의 방언이다. 오름의 매력에 한껏 빠져있다는 김규승 화가는 제주도에 있는 오름이 있는 곳곳에 들러 사진을 찍고 1년 치 그림으로 그려낼 소재거리를 찾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매년 제주도에 방문할 때 마다 찾은, 화폭에 담을 풍경들을 재산처럼 여기는 화가의 정성과 그림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라산에 오목조목 자리하고 있는 작은 기생화산들은 모두 오름으로 불리고 있고 김규승 화가의 말처럼 오름은 왕릉 같은 완만한 굴곡의 미가 있어 평안함과 안정된 느낌이 많이 든다. 화폭의 크기 또한 옆으로 길게 된 직사각형 모양의 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름의 완만함과 오름에서 내려다 본 제주 해안의 평안함을 보여주기 위한 화가의 의도이다. 그림의 크기에 따라 액자의 모양에 따라 그림을 달리 넣는 것은, 화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을 화가의 눈으로 투사할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회곡갤러리
회곡에 위치한 김규승 화가의 작은 작업실은, 봄 기운이 느껴지는 제주도의 겨울 그림이 가득한 것과는 달리 촉촉하지만 아직은 조금 쌀쌀한 봄비처럼 냉기가 느껴졌다. 지금은 폐교된 회곡의 풍동초등학교는 류상번, 송점용 작가들과 함께 작업실 겸 갤러리로 이용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폐교 사용에 대한 공개입찰이 이뤄져 지금은 1층에 다른 사업장이 들어와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작업실이나 갤러리로서의 분위기를 잃은 지 오래된 회곡갤러리는 현재 김규승 화가의 작품 보관 정도로만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 그를 만나러 들른 날은 비도 내렸고 1층의 다른 사업장 때문에 어색해져 버린 옛 학교의 전경은 다소 삭막하기까지 했다. 다른 작업실을 알아보는 중인김규승 화가는 마을 주민과 함께 전시회는 물론 문화공간으로, 어울림의 공간으로 꾸며졌던 회곡갤러리의 모습을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많아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주말을 이용해 안동 내에 있는 학교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수묵담채화 강의를 해 오고 있던 것은 선생님들의 일정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지만 현재도 만남은 가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회곡리의 작은 작업실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들른다.
수묵담채화를 그리는 김규승 화가는 본래 서양화를 전공 했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뭔가 모르게 수묵담채화의 매력에 빠져버렸다는 그는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공을 바꾸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제주도의 모든 그림은 수묵담채화로 그려진 것이고 수묵담채화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한국의 미와 제주도는 제법 잘 어울리는 듯 했다.


제주도를 그리기 전에는 예천의 초간정, 안동의 봉정사, 병산서원 그리고 지금은 수몰된 도연폭포 등 지역의 풍경을 찾아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왔었다. 스스로 그림 욕심이 많다는 김규승 화가는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꼭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잠들기 전에도 내일 작업실에 가서 그릴 그림 생각에 들뜬다는 모습은 천상 화가의 모습이다.


제주도에 대한 애정만큼 이후에 거주지를 옮길 계획은 없는지 궁금했다. 제주도에 발걸음 해 온지도 10여년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가끔은 안동보다 제주도에 있는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제주도에 정착할 생각은 없다라니, 의외였다. 지난 겨울 제주도에서 열린 기획전을 위해 2주간 제주도에 머무르며 비가 오는 제주도를 경험하고 나니 ‘살기에 나와는 맞지 않다’라고 결심을 했단다. 습한 제주 날씨에 몸살까지 겹치니 집이 그리워지더라는 그의 말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제주의 오름만큼은 두고두고 봐도 또 보고 싶단다. 오름에 서, 바다와 섬이 맞닿는 해안을 내려다보면 그 곳에 제주사람들의 삶이 있다고 화가는 말한다. 풍랑과 해풍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제주 사람들의 삶의 모습에, 가파도의 보리에, 온화한 제주의 오름에 김규승 화가는 많은 이야기를 담아두고 있었다. 어찌보면 화가는 그림으로 말하는 시인이 아닐까 싶다.
 



교사 김규승, 화가 김규승
그에게는 사실 직업이 하나 더 있다. ‘아직 맹 50대니더’ 라고 이야기 하는 김규승 화가는 이제 정년을 4년 정도 앞둔 미술 선생님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구에서 동료와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그는 당시 안동에 있던 선배의 교사 추천으로 운영하던 미술학원을 접고 영문고등학교로 오게 되었다. 사실 몇 년 만 있다 다시 대구로 갈 생각이었다는 그는 미술 교사 대한 뜻은 없었다. 우연히 흘러온 길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어쩌면 그에게 선생님이라는 직업 또한 인연으로 닿은 것은 아닐까.


안동여고에 재직하던 시절에는 학교 선생님들을 모델로 학생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이벤트를 했었다. 자신을 그리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선생님들에게는 그야말로 깜짝 선물이었을 게다. 모델이 된 선생님들은 흐뭇하게 기분 좋아했고 모델로 선정되지 못한 선생님들은 내심 서운했을 게다. 마지막에는 아이들의 노고를 인정해주자는 취지에서 그림을 팔아주었다. 미술 선생님인 그가 가장 먼저 자신의 그림을 낙찰 받아 사줌으로써 동료 교사들도 옆구리 찔러 절 받기 식으로 동참했다며 김규승 화가는 지난 일을 즐겁게 추억했다. 이 일화는 선례가 되어 한 동안 안동여고에는 선생님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는 행사가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현재 예천여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얼마 남지 않은 교직생활을 어떻게 마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 보였다. 미술실은 학생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자 또한 화가에게는 더 없이 좋은 작업실이다. 수묵담채화 외에도 그릇에 그림을 그려 구운 것으로 화분을 만들고 작은 소품형식의 액자도 만들고, 작업실 가득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물건은 없었다.
처음부터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다지만 어쩌면 그 옛날 교사추천을 해놓고 도망가 버린 선배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미술실에서 보낸다는 김규승 화가. 그의 하루의 시작과 끝은 학교 미술실에서 열리고 닫히기 때문이다.


제주도 명예시민
제주에서 명예시민권을 줘야 한다는 말은 반은 우스갯소리지만 실은 김규승 화가는 오히려 안동보다 제주도에서 더 알려진 화가가 아닐까 싶다. 개인전시를 열 때마다 빚이 생긴다는 말도 농담처럼 스쳤지만 개인전시만 15회라는, 그의 전시회 경력을 들으니 가볍게 스칠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 했다. 전시회를 열면 그림 판매로 인해 경비절감 효과는 없을까 조심스럽게 여쭸다. 예전 같지 않아 개인전시회는 잘 찾는 이도 없을 뿐더러 그림을 사는 이는 더 드물다 한다.


사실 작년 말과 맞물린 올해 초에도 그는 제주도에서 제주도와 안동의 예술가들과 함께 6인6색의 기획전을 가졌다. 올해 말에 찾아올 겨울에도 어김없이 제주도에서 개인전을 열 것이라고 말하는 화가의 눈 속에 벌써 제주도 오름의 겨울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인 제주도는 전시회를 열기에 좋은 곳이다. 화가에게 그림은 곧 화가 자신일 것이다. 낯선 이방인으로서 낯선 관객을 마주하고 화가는 나체로 서 있는 것처럼 자신의 그림들을 전시한다. ‘정말 잘 봤습니다’ 라는 낯선 관객들의 한 마디가 그림 하나 판 것보다 더 큰 힘이 된다고 화가는 말한다. 제주도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제주도에서 좋아하는 제주도 그림을 전시하는 일 만큼 화가에게 보람은 없을 것 같다. 김규승 화가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면 언젠가 안동에서도 개인전시회를 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바람이 불다.’ 김규승 화가의 한 전시회 주제다. 사실 그는 일찍이 가족을 잃은 아픔이 있다. 화가는말하지 않지만 언젠가 그의 아픔이 그림에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다. 초등학교이던 그 옛날, 줄곧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탔다는 그는 아버지가 단 한 번의 반대 없이 미대로 진학할 수 있게 지원을 해줬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에 지금은 그가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어 앉아있노라니 그 옛날 생각에 눈가가 촉촉해지는 듯 했다. 천상 그림을 잘 그렸던 김규승 어린이가 평생 그림과 뗄 수 없는 화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해 서 있다. 자신의 화폭을 채울 무언가를 찾아 나서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안을 들여다본다. 액자 속에 그려진 그림은 김규승 화가의 손끝에서 그려진 것이지만 그 안에는 그의 삶이 들어있다. 어지러이 늘어서 있는 회곡의 작은 초등학교 2층 교실에서 비릿한 바다 내음이 난다. 그의 그림 안에서 제주 오름에 서서 맞는 바다의 소리와 파도의 울림이 전해진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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