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고기 먹고 까맣게 잊어버려/ 영구차 소동(글/김원길_시인, 지례예술촌 촌장)까마귀 고기 먹고 까맣게 잊어버려
2002년 여름에 나는, 일본 호세(法政)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안동출신 윤학준(1932~2003) 교수를 찾아가서 함께 근처의 공원을 거닐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하늘에 까마귀가 눈에 띄자 그가 물었다.
“어이, 원길이! 며칠 전 ‘문예춘추’ 여 기자가 전화를 걸어왔는데 최근 한국에선 까마귀 고기가 정력에 좋다는 말이 있다던데 그게 정말이냐는 거야. 그래서 나는 금시초문이라고 답하고 말았는데, 정말 한국에 그런 말이 있는가?”
“윤 선생님, 우리나라에서 건망증 심한 사람보고 까마귀 고기 먹었냐고 핀잔주는 건 아시죠?”
“그럼, 알고말고. 그건 아마 우리가 무얼 잊어버렸을 때 ‘까맣게 잊어버린다’고 한 데서 유래된 말일 거야.”
“맞습니다. 그러니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건망증에 걸려서 섹스를 하고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시도 때도 없이 덤벼들게 된다는 거죠. 이건 우스개일 뿐 실제 까마귀와 정력과는 아무 관계도 없을 거예요.”
“그런 걸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정력에 좋다’ 고 했으니 한국에 까마귀가 남아났겠나? 자넨 왜 그렇게 말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나?”
“정력에 좋다면 무어든 가리지 않고 먹어대는 풍조를 빗대느라 생긴 우스개인 듯합니다.”
“재미있구만, 진작 자네한테 물어봤으면 문예춘추에 글 한 편 올리는 건데···
영구차 소동
1989년 겨울 그 날은 춥기로 유명한 소한(小寒) 이었다. 소한이 얼마나 추우면 ‘대한(大寒)이 소한 집에 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우리 내외는 초저녁부터 군불 땐 방 아랫목의 온기를 몸으로 느끼려고 맨 방바닥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대문짝을 박살을 내고 말려는지 와당탕 흔들어댔지만 문을 닫으러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시끄럽지만 내일 아침까지만 버티면 제풀에 물러갈 것이다. 모른 척 참고 넘기자!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 맞다. 저건 승용차 클랙슨이 아니라 버스다. 버스로 손님들이 온 것이다. 드디어 대박이 터졌구나. 예술촌 만든다고 온 나라에 소문을 냈더니 드디어 손님이 왔구나. 나와 아내는 용수철처럼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불 좀 켜봐!”
나는 아내에게 촛불을 켜라하고 양말을 찾아 신을 겨를도 없이 오버에 목도리에 방한모까지 쓰고 후래쉬를 켜들고 밖으로 나갔다.
100여 미터 앞에 버스가 시동을 켠 채 헤드라이트를 집 쪽으로 비추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버스 모양이 영구차임을 알 수 있었는데 차 안엔 사람이 없는 듯 캄캄하였다. 망했구나 ······. 이때 들리는 완전 김새는 소리,
“영감, 서울로 갈려면 어느 길로 가나요?”
(영감? 아직 오십도 안 되었는데. 촌에 산다고 다 영감으로 보는 건가?)
“이 차가 어디서 왔소?”
“서울서 왔수다.”
“왔던 길로 가면 되겠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억누르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아니, 이 비포장 산길을 도로 넘어 가라고? 이 길 말고 다른 길 없소?”
“없소. 여기가 길 끝이요. 난 발이 시려서 들어가야겠소.” 하고 돌아서서 몇 발자국 걷는데 뒤에서 차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또 빵빵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아니, 그냥 갈 일이지. 또 왜?” 하며 다시 오버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벙거지를 쓰고 나가보았다.
“영감, 여기가 대체 뭐하는 데요?”
“그건 알아서 뭐해요? 어서 가기나 하시오.”
“아니, 내가 어딜 갔다 왔는지 알아야 서울 가서 설명을 하지! 여기 진짜 이상하지 않소?”
“뭐가 이상하다 그러시오?”
“무슨 놈의 마을이 삼십 리 길에 표지판 하나 없고 산길은 울퉁불퉁한데 갑자기 불빛 하나 없이 시커먼 기와집들만 나타나니 여기가 대체 뭐하는 동네요?”
“여기가 지례예술촌이라는 데요.”
“예술촌이 뭐하는 데요?”
그는 지금 히터를 켜놓고 따뜻한 운전석에 앉아있고 나는 칼바람 속에 이를 부딪치며 떨고 있다.
‘우리가 임하댐 건설로 고향마을이 수몰되어 문화재 건물을 이제 막 뒷산 중턱에 옮겨 짓고 예술인들의 창작을 돕기 위한 장소를 만드는 중인데 이제 막 산을 넘어 찻길을 뚫어 놓았고 전기도 없다. 당신을 재워주고 싶어도 불 때 놓은 방이 없으니 미안하다 등등의 기나긴 이야기를 이 추위 속에서 하얀 입김을 내 뿜으며 저 생각 없는 인간에게 해줘야하나? 아니야, 빨리 돌려보내고 말아야해.’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쯤 알고 그냥 돌아가세요.나도 영구차가 어쩌다가 여기나타났는지 묻고 싶지 않소. 난 그만 들어가야겠소.”라고 말하려다가 말고
“기사님,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영구차를 몰고 밤중에 이렇게 다니면 더러 무섭거나 이상한 일 없소?”
“오늘이 제일 이상하네. 꼭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아······.”
“이런 산 속에서 밤중에 백 살 넘은 노인을 만났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겠지······.”
“영감이 백 살 넘었소?”
나는 목소리를 깔고 아주 진지하게 이렇게 물었다.
“요즘도 경무대에 이승만이란 사람이 대통령하고 있소?”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기다렸다.
이쯤 되면 그는 머리를 얼음판 위의 팽이같이 빨리 굴려서 전광석화같이 결론을 이끌어 낼 것이다.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한 밤, 고가들만 즐비한데 이승만을 묻는 노인이 있다니 이게 꿈속인가, 옛날 고담 속에 나오는 무릉도원 같은 곳에 온 건가, 어쨌든 있을 곳이 못 된다. 튀는 게 상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차를 급발진시켜 전속력으로 몰고 달아나 버렸다.
이튿날, 산 넘어 수곡 동네에 가보니 상가가 있었다. 물어보니 서울서 영구를 싣고 왔던 영구차가 어젯밤에 서울로 간다며 산 넘어 지례 쪽으로 가더라는 것이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