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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에 얽힌 추억(글/박인수_본지 운영위원, 경희한의원 원장)

가을의 꽃 살사리 꽃
가을을 상징하는 꽃을 하나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스모스를 꼽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올 때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삼아 하늘하늘 피어있는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를 만나게 되면 마음부터 상쾌해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코스모스(Cosmos bipinnatus)는 멕시코가 원산지이다. 18세기에 스페인의 식물학자이자 신부인 커버니레스에 의해 유럽에 알려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10년경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되었다. 씨앗이 한 곳에 떨어지면 그곳에서 피고 자라 세력을 조금씩 넓혀 퍼지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덕에 전국토로 빠르게 퍼져나가 번식하여 귀화식물이 되었고 ‘살사리 꽃’이라는 예쁜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코스모스라는 이름은 8개의 바깥쪽 꽃잎이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장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그리스어인 우주의‘질서와 조화’를 뜻하는 코스모스(kosmos)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사방팔방(四方八方)이라는 말이 있는데 여덟 개의 꽃잎이 사통팔달하는 모든 방면을 가르치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코스모스의 매력이 뭘까 궁금해진다. 내가 생각하는 코스모스의 첫 번째 매력은 꽃이 작고 장미처럼 화려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백합처럼 우아하다거나 향기가 아름답지도 않다. 그런데도 꽃의 생김이 꾸미지 않고 단아하여 순수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코스모스의 꽃말이 ‘소녀의 순정’인데 꽃잎이 가늘고 하늘거리는 데다 꽃들도 무리지어 들판이나 언덕에 여기저기 피어있어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꽃대가 여리고 가늘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강인한 모습이 모진 풍파를 견디고 험한 세파를 헤쳐 가는 자신들 삶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듯 하여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의 매력은 강인함이다. 생명력이 강해서 해가 잘 들고 물 빠짐이 좋은 곳이면 어디서나 발아하여 잘 자라는데 기름진 곳보다 약간 척박한 토양에서 더 잘 자란다. 토양이 기름진 곳에 뿌리를 내린 것들은 키가 너무 웃자라서 한여름의 강풍이나 가을 태풍에 견디지 못하고 이내 쓰러져 버리지만 메마른 땅에 자란 코스모스는 뿌리를 옆으로 넓게 아래로 깊게 뻗어 서로가 서로를 유착하여 강한 바람에도 든든히 버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은 환경에서 화초처럼 자랐다고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척박한 환경에서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자란 것이 잡초처럼 더 강한 생명력을 갖게 될 수 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꽃이 코스모스다.

신이 연습 삼아 최초로 만든 꽃
세 번째 매력은 코스모스의 본뜻인 ‘질서와 조화 ’그리고 다양성에 있다. 코스모스는 단순한 생김새로 인해 신(神)이 연습 삼아 최초로 만든 꽃이라는 속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각자의 기능이 세분화된 아주 진화된 식물이다. 우리가 흔히 꽃잎이라고 부르는 꽃들은 혓바닥과 같은 모양인 설상화(舌狀花)이며 화려한 색깔로 곤충을 유인하는 역할을 할 뿐 실제로 번식을 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부분은 안쪽에 모인 작은 꽃들이다. 불필요한 꽃잎이나 꽃받침이 없기에 볼품은 없지만 암술머리, 씨방, 꽃밥들로 잘 배열되어 한데 모여 있어 화려한 설상화를 보고 찾아온 곤충들의 도움으로 튼튼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무엇보다 하나하나 낱개로 떼어서 보면 볼품없는 꽃이지만 이것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고 설상화와 더불어 아름다운 꽃차례를 만들고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꽃 색깔의 다양성이다. 코스모스는 무리지어 피면서도 꽃 색깔이 다양하다. 보라색과 진분홍, 연분홍과 흰색의 꽃들이 함께 피는데 신기하게도 한 색으로만 무리지어 있을 때보다 여러 색깔의 꽃이 한데 뒤섞여 피어있는 게 더 보기 좋다. 꽃들이 피어 있는 높이도 다르고 크기와 색깔도 저마다 달라 무질서한 듯 보이는데 오히려 그런 무질서가 더 조화로운 것처럼 느껴지니 코스모스의 신비한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매력을 지니고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꽃이다 보니 누구에게나 코스모스에 얽힌 추억들이 몇 개씩이나 있는 것이다.

코스모스와 소녀
나 역시도 어릴 적 코스모스와 연관된 추억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내 어릴 적 짝사랑 하던 소녀였다. 그 소녀는 코스모스를 떨어뜨려 낙화하는 모습을 보기 좋아했는데 가끔 그 소녀와 둘이서 코스모스 꽃을 따서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다리 위로 올라가곤 했었다. 크고 예쁜 코스모스 꽃을 골라 꽃잎 넉 장을 한 잎 건너 떼어내면 꽃잎 넉 장이 남는데 그걸 꼭지를 잡아 비틀어 가만히 놓으면 프로펠러처럼 팽그르르 돌며 낙화하는 모습이 아주 멋졌다. 내가 좋아한 그 아이는 꽃잎을 던져놓고 그 꽃잎이 땅바닥에 닿을 때까지 춤추며 낙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좋아했는데 나는 그 소녀를 위해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신작로까지 뛰어가 색깔별로 다양한 꽃을 따다가 갖다 주곤 했었다. 하도 어릴 적이라 그 소녀와는 언제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좋아했던 한 소녀를 위해 힘든지 모르고 꽃을 따다 주었던 것과 그로 인해 같은 취미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스모스와 연관된 또 다른 추억은 가을의 낭만과는 다른 다소 생뚱맞은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봄, 새로 닦은 아스팔트 신작로 길가 화단에 코스모스 모종을 옮겨 심으러 갔던 적이 있었다. 도로를 새로 내다보니 화단은 많고 심을 꽃은 구하기 어렵고 해서 학생들을 동원하여 임시방편으로 코스모스를 심기로 한 모양인데 학년과 반마다 각기 정해진 구역이 있었고 거기에다 학교에서 가져 온 코스모스 모종을 옮겨 심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양동이에 물을 담고 물뿌리개를 가져가서 심어놓은 모종에다 물을 주고 왔었는데 그게 다였다. 그리고는 다들 코스모스를 심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그해 가을 박정희 대통령이 그 길을 지나가신다기에 모두 국기를 들고 신작로로 나갔다. 우리에게 지정된 구역은 신기하게도 몇 개월 전 우리가 코스모스 모종을 옮겨 심었던 바로 그 곳이었다. 아이들끼리 열을 지어가며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하며 가는데 우리가 봄철에 심어놓은 코스모스들이 우리들 키 보다 훨씬 더 크게 자라 예쁜 꽃잎을 달고서 하늘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한 일이라는 것에 대한 뿌듯함으로 무척 기뻐했다. 게다가 그곳으로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께서 지나신다니 혹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혹시라도 아이들이 장난치거나 딴 짓을 하다가 대열에서이탈하지나 않을까조바심이 나서호루라기를 불며 단속하고 윽박지르셨다. 그 바람에 아이들은 몇 발짝 뒤로 가면 되는 그늘에서 쉬지도 못하고 뙤약볕 아래에서 콩비지 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했다. 요즘 같으면 선크림도 바르고 모자도 쓰고 그랬을 테고 그늘에서 쉬면서 기다리다가 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코스모스와 벌침사건
그나마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와서 견딜 수 있었는데 아이들이 꼼짝도 못하고 열을 지어 기다린 지 한 시간이 지날 무렵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경찰 사이카가 호위하는 검은색 리무진이 경광등을 번쩍이며 나타났다. 아이들은 오랜 기다림 끝에 너무나 기뻐서 환호하며 팔이 떨어져나가라 깃발을 흔들어대었다. 그랬는데, 어라? 너무나 야속하게도 그 검정색 차는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그냥 아이들 곁을 지나쳐버렸다. 나중에 듣기로는 그때 차에 따고 있던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말도 있고 산업시설을 시찰하러 아프리카에서 온 국가원수라는 말도 있어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그랬다. 그런 높은 분들이 지나가다 차를 멈춰 세우고 내려서 우리와 악수까지 해주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먼발치에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가준다거나 창문이라도 열어 손을 흔들어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아이들의 이런 고생도 모르고 그냥 차를 타고서 씽하고 지나가버리자아이들은 “야, 뭐가 저래?”“이거 너무 심한 거 아이라?”하며 왁자지껄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도 맥이 빠졌다. 학교수업까지 중단시키고 전교생들을 데려나가 가을 뙤약볕에 길게 줄 세워놓고 환영식을 했는데 그 높으신 분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그냥 지나가버렸으니 선생님들은 선생님대로 실망한 빛이 역력했다. 다들 아무런 소득 없이 고생만 잔뜩 했다며 실망만 안고서 투덜투덜 거리며 학교로 돌아가는 길. 그런 아이들을 도열하듯 서있는 코스모스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며 따뜻이 위로해주고 있었다. 코스모스 위로 고추잠자리들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날고 벌들도 부지런히 꽃에 앉아서 꿀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코스모스에 내려앉은 벌을 장난삼아 잡으려 했다. 벌을 어찌 잡나 구경하려고 아이들 몇이 빙 둘러 모이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나도 그 무리에 끼이게 되었다. 사실 코스모스에 앉은 벌을 잡는 방법은 별거 없다. 운동화를 벗어 거꾸로 잡고 재빨리 벌을 그 공간에 가둔 다음 빙빙 돌려 땅 바닥에 ‘탁’하고 내동댕이치면 벌이 기절하게 되는데 정신을 못 차리고 빌빌거리는 벌의 몸통을 재빨리 손으로 잡으면 되는 거다. 벌을 잡으면 침으로 쏘려고 꽁무니에 달린 침이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그걸 건드려 살짝 뽑으면 된다. 벌침은 빠져서도 한동안 살아 움직이는데 그걸로 아이들에게 찌르겠다고 하면 다들 기겁하며 도망을 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애들끼리 장난을 많이 쳤고 나도 그걸 가까이에서 몇 번 본 적 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초보였던지 동작이 약간 어설펐다. 벌을 잡은 운동화를 빙빙 돌려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기절했어야 할 벌이 잠시 땅바닥을 기다가 날아올라 도망치려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내가 ‘치, 그것도 제대로 못 잡나?’ 싶어 엉겁결에 손을 잽싸게 뻗어 날아가는 벌을 낚아채었다. 그런데 손에 든 것이 파리도 아니고 모기도 아닌 벌이라.......
뜨악!!!
순간적으로 손바닥 전체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려 그만 벌을 땅바닥에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가운데 손가락 안쪽에 침이 꽂혔는데 가만히 보니 꿈틀거리는 것이 마치 원한에 사무친 복수를 해대고 있는 것 같았다. 벌의 독이 퍼져나갈 수록 손가락 마디가 쑤시고 아려서 죽을 지경이고 금방이라도 달구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지만 억지로 꾹 참았다. 반 아이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아픈 표정을 짓지도 울지도 못하겠고 “별거 아니야. 나 괜찮아” 하며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웃는다고 웃는 게 아니었다. 학교로 총알같이 뛰어가서 양호선생님께 보이고 암모니아수로 소독했지만 벌에 쏘인 상처는 낫지 않고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그날 밤 온 몸에 열이 나고 손가락 마디가 퉁퉁 붓고 쑤시는 바람에 밤새도록 끙끙 앓아야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나 때문에 애들이 난리가 났다. “네가 날아가는 벌을 잡았다며?”하면서 다들 손을 보자는데 겉으로는 대단한 영웅인 것처럼 나를 치켜세우면서 속으로는 ‘바보 같이 그걸 왜 잡니’하며 놀려대었다. 나는 한동안 학교에서 바보 아닌 바보로 유명세를 탔다. 등하교 길에서나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아이들이 곁눈질로 수군거리며 낄낄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벌에 쏘인 손가락이 팅팅 불어서 곤봉같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연필을 잡을 수 없어 며칠 동안 노트 필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벌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어린 마음에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이건 예전에 내가 코스모스 꽃이라는 꽃은 죄다 따다가 프로펠러처럼 날려먹었던 그 벌을 받은 걸 거야.’하는 것이었다. 그 후로 코스모스 꽃이 아무리 예뻐도 혹시라도 그 꽃에 벌이 있을까봐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았다. 코스모스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말았던 것은 물론이고 코스모스 꽃을 따서 날리는 그런 일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확히 따져보자면 그 후로도 깜빡하고서 몇 번은 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의 가사에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 역’이라는 부분이 있지만 고향이 부산이다 보니 그런 정취와는 거리가 멀고 부산역까지 나와서 마중하고 배웅해줄 이쁜이 꽃분이도 없었던지라 서울에서 보냈던 대학시절에는 코스모스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코스모스 황홀경
그랬는데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코스모스를 다시 본 것이 가을도 아닌 대학 본과3학년 때인 한여름이었다. 그때는 충청북도 깊은 산골로 무의촌의료봉사를 갔었는데 졸업을 1년 앞두고서 갔던 터라 대원들 중에 내가 거의 최고참에 속했다. 진료실장을 맡아 환자를 보면서 날이 하도 무더워 푸념을 했더니 환자 중에 한 분이 마을에 좋은 천연 공중목욕탕이 있는데 밤중에 거기로 가보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후배들 중에 동작이 날랜 친구를 시켜 답사를 하게 했더니 우리가 숙소로 쓰고 있는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주 멋진 노천탕이 있고 남탕과 여탕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했다. 그날 저녁 마을 이장님께 마을 주민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밤늦은 시각에 학생들이 한 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도록 부탁을 드렸고 허락을 받았다. 캄캄한 밤이었는데도 보름달처럼 둥근 달이 떠서 논둑길을 훤하게 비쳐주는 바람에 가지고 간 랜턴 불빛 한 두 개로도 길을 밝히기에 충분했다. 여학생들이 먼저 올라가서 개울 위쪽에서 자리 잡고 아래에서 위쪽이 보이는지 확인하고 되돌아갔다. 물론 훔쳐보면 죽는다는 협박까지 하고 약속으로 엄지손가락 도장까지 찍어갔다. 남학생들은 보라고 통사정해도 안 볼 테니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면서 거기서 조금 아래쪽인 남탕에 들어가 미역을 감았다. 그런데 그곳은 지형지물은 정말 특이하게 생겨서 아래에서는 위쪽이 보이지 않고 위쪽에서도 아래가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거리는 아주 가까워 물이 첨벙첨벙 거리는 소리와 자세히 귀 기울이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였다. 시원한 개울물에서 더위를 식히고 한참을 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한기가 드는 느낌이어서 여학생들이 내려오기 전에 남학생들이 먼저 몸을 대충 말리고 옷을 입고 기다렸다.

먼저 갈 애들은 가고 남자 몇 명이 남아서 여학생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보다 목욕하러 올 때는 자세히 보질 않아 몰랐던 코스모스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코스모스는 부드러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나는 하마터면 숨이 멎을 뻔 했다. 코스모스의 하얀 꽃잎은 짙푸른 회색빛 감도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바람결에 따라 하늘하늘 거리며 잔영을 남기고 있었다. 그 당시 나는 클래식 음악에 심취하여 불꽃의 지휘자로 불리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bert von Karajan 1908~1989)이나 뉴욕필하모닉 상임지휘자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의 지휘 장면을 익히 보았던 터라 마에스트로(Maestro)의 동작 하나 하나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몸짓보다 코스모스의 움직임이 더 우아하게 느껴졌는데 그 느낌은 아주 황홀하리만치 멋졌다. 나는 코스모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서 넋 나간 사람처럼 한참을 보고 있었다. “선배님 안 가고 뭐해요? 우리 다 가는데.......”하는 후배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때서야 아쉬움을 남기고서 일어섰다. 논둑을 걸어오며 나는 내가 보았던 코스모스의 몸동작을 흉내내보았다.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라 똑같이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러면서 나는 잠시잠깐 동안만이라도 바람에 온전히 몸을 내맡기는 코스모스가 되고 싶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