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더위의 풍산골목(글/사진/백소애_편집기자)

11번 버스와 풍산
안동사람이면 다 풀어낼 흔한 퀴즈 하나. 11번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풍산과 안동대다. 10분 간격으로 동쪽과 서쪽을 가로지르는 11번 버스는 안동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시내버스다.
한낮의 폭염은 불쾌지수를 높였다. 멋드러진 양산으론 안 되겠던지 할머니는 장우산 펼쳐들고 마실을 나왔다. 풍산골목의 불볕더위는 그렇게 막아야 한다. 할매의 풍산 스타일.
11번 버스를 타고 2009년에 세운 안동의 서쪽 관문 서의문(西義門)을 지난다. 풍산의 지명은 풍성할 풍(豊)자에 뫼 산(山)자를 쓴 것으로 이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산 모양이 굽을 곡(曲)자와 콩 두(豆)자를 합친 것과 같이 생겨 이 두 글자를 합하여 풍(豊)자가 되고 뫼 산 자를 붙여 풍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풍산읍은 신라시대에는 하지현(下枝縣)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풍산현(豊山縣)이라 하였다가 1914년 부군면(府郡面) 통폐합에 따라 풍산면으로 바뀌었다가 1973년 7월 1일 풍산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19개의 법정리(죽전, 서미, 현애, 괴정, 오미, 소산, 만운, 신양, 매곡, 안교, 상리, 하리, 마애, 노, 막곡, 수, 수곡, 회곡, 계평)를 두고 있다. 2011년 12월말 기준 3,370여 세대에 7,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방학을 맞은 중2 조카녀석과 골목기행을 나섰다. 풍산까지 시내버스 구간이 좀 길었던 모양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이렇게 멀리 와본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자신의 친구 중에 하나는 시내버스 타고 신한은행이 있는 안동 중심시가지에도 한번 안나와본 친구가 있다고 했다. 용상에 거주하고 있는 아이는 집, 학교, 학원을 벗어나본 적 없다는 것이다. 황당하기도 하고, 나는 짐짓 어른 행세를 하고픈 마음으로 서의문을 지나며 안동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몇가지 설명을 해줬지만 조카녀석은 단지 하품만 안했을 뿐이지 유체이탈을 한 모습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는 잠시 세대차이로 이어졌다.
“야, 니네는 참 지리멸렬하게 사는구나.”
“뭐 어른들도 그닥 즐거워보이진 않아.”
그건 그래.



체화정의 여름
우리는 풍산시내로 접어들기 전 정류장에서 내렸다. 40도에 육박하는 한낮의 날씨는 대단했다. ‘유교문화길’팻말을 보며 길을 걷는다. 경북북부청사와 회곡, 모전삼층석탑, 안교사거리를 1.8km앞두고 있다는 팻말을 지난다. 서까래가 낮은 집 지붕엔 가지와 고추가 바짝 말려지고 있었다. 마당에는 몸빼바지와 원피스가 나란히 널려 있다.
풍산시내 진입구에 위치한 체화정(樺華亭)으로 들어섰다. 연못이 아름다운 체화정은 경북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조선 효종(재위 1649~1659)때 진사 만포 이민적 선생이 세워 학문을 닦던 정자이다. 이후 순조(재위1800-1834)때 국가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마을에 정문을 세우는 정려를 받은 용눌재 이한오 선생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효도하던 곳이다. 체화정은 이민적 선생이 그의 형인 옥봉 이민정 선생과 함께 살면서 우애를 다지던 장소로 유명하며, 형제의 화목과 우애를 뜻하는 ‘체화정’으로 이름 짓게 되었다. ‘체화’란 형제간의 화목과 우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경에서 그 의미를 따왔다.
연못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상징하는 방장(方丈, 지리산), 봉래(逢萊, 금강산), 영주(瀛州, 한라산) 3개의 섬이 있다. 체화정 양 옆으로는 배롱나무가 발갛게 피어 있다. 안기찰방을 지낸 단원 김홍도가 그 풍경에 반해 자주 들렀다는 체화정에는 그가 남긴 ‘담락재(湛樂齊)’현판이 있다. ‘담담하게 즐기는 서재’라는 뜻으로 그가 그림이 아닌 글씨를 남긴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42년간 체화정 관리한 이호직 어르신
폭염 속 체화정은 말이 없었고 관광객들도 없는 호젓한 한낮이었다. 체화정 주위에는 칠성상회를 비롯 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다. 그중에도 바로 옆
아담한 집에는 이호직 어르신 내외가 살고 있다. 손때를 많이 탄 자전거와 장판을 덧씌운 들마루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마당에서 잠시 집 구경을 해본다. 110볼트짜리 금성선풍기와 도란스가 마루에 놓여있는 오래된 집은 낡았으되, 정갈했다. 올해 여든 넷된 이호직 어르신이 나지막이 말한다.
“딱 반평생을 이곳에서 살았지.”
그는 체화정을 지은 진사 이민적의 8대 손이다. 자손 된 이유로 마흔두 해를 이곳에서 체화정을 관리하며 살았다. 관리래 봤자 청소나 하고 크게 특별한 것 없다고 한다. 어느덧 환갑, 진갑도 넘긴 자식들도 있는데 3남 2녀 모두 서울에 산다. 여든 전에는 건강도 퍽 괜찮았는데 요즘엔 부쩍 어지럼증도 느끼고 힘들다고 한다. 본인 대에서 체화정 관리는 이제 끝나지 않겠냐고,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어르신의 두 살 어린 마나님은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폭염도 고요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안교리 풍경
풍산시내로 진입을 한다. 풍산장터 안동한우불고기타운을 알리는 간판이 황소뿔 모양으로 세워져 있다. 마을 담벼락 곳곳에는 택시회사의 전화번호가 낙인처럼 찍혀 있다. 풍산버스정류장은 한산하고 버스를 기다리는 할아버지 한 분이 처마 밑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다. 오래된 건물의 대합실은 이미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인 듯 창고 대용으로 보였다.
이곳은 ‘풍산중앙길’로 불리는 안교리다. 풍산문구와 초이스다방, 경북이발관, 풍산파출소 등이 길가에 위치해 있고 11번 버스가 정차하는 곳으로 풍산읍의 중심지다. 1914년 부, 군, 면 통폐합에 따라 상리, 하리의 일부와 풍북면의 우안동 일부와 풍서면의 소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안교리라 하였다.
담벼락에는 ‘소변금지’문구와 만약 지키지 않을 시 중요부위를 잘라버리겠다는 무시무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식당집 마당의 수챗구멍에는 도망간 뚜껑 대신 급한대로 찌그러진 빠꼼양재기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시골마을에서 제일 활기찬 곳은 아무래도 다방. 현란한 스티커를 부착한 다방 앞에는 배달용 오토바이가 쉴 틈이 없나부다. 연꽃을 좋아하는 마담이 있는 듯 다방 출입문 옆에는 고무대야에 담아놓은 연꽃 한송이가 피어있다. 인도에 내놓은 화분은 그 뻗어나온 나뭇가지가 미용실의 수건을 너는 용도로 사용되고 인도를 점령한 고추는 퇴약볕에 누워 있다.
삼천리자전거 풍산점의 주인장이 50년 넘은 점포에 오래된 정물처럼 앉아 있다.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으니 “거 낡아빠진 거 뭐 찍을 게 있냐.”고 무뚝뚝하니 말한다. 그래서 찍는 거라고, 낡아서 찍는 거라고 말하려다 말고, “여기 이 건물은 대체 얼마나 된 거래요?”여쭈니 “얼매 안돼요. 오십년!” 호기롭게 외친다. 천장에는 한문으로 1966년 8월에 집을 지었다는 표식이 있다.



유난히 자전거가 많이 세워져 있는 곳은 의원 앞이다. 진료를 하러 온 어르신들이 마치 대형병원에 주차된 차처럼 제각각 자전거를 세워뒀다. 풍산고등학교 방향으로 직진하면 임진왜란 때 풍천 구담에서 의병 700명을 이끌고 왜군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풍은 이홍인에게 내려진 정려를 게시한 건물인 예안이씨 정충각과 이홍인의 8대손인 효자 용눌재 이한오
에게 내려진 정효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잿빛 재킷 하나가 세탁소 앞에 걸려있다. 소형가전을 파는 작고 낡은 전파상을 지나면 어란안길이 나온다. 어란(漁卵)은 마을 앞에 갈대로 우거진 늪이 있어서 고기가 모여들고 알을 낳고 부화하였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멀리 경신아파트가 우뚝 서 있고 입구에는 ‘안교리 알뜰저축의 집’현판이 달린 집이 있다. 마을부녀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집인 듯 했다. 저 멀리 할머니 한분이 장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다. 옳지, 제대로 된 더위는 제대로 막아야 한다.
골목 곳곳에는 빈집도 더러 보였다. 방치된 집 대문으로 잡목들이 비죽이 자라있다. 담장을 넘다 지쳐버린 듯한 호박잎과 담장 밖으로 나온 초록빛의 대추가 있는 풍경을 뒤로하고 나온다.



풍산장터길
장터길의 서연서실 앞에도 고추는 고즈넉하게 널려져 있다. 경일모다 앞 노상에서 뻥튀기며 사탕 등 주전부리를 파는 아저씨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엎드려 잠이 들었다. 파라솔 아래에서도 그의 검게 탄 피부가 보인다. 장사꾼들은 더위 말고도 싸워야 할 것이 많다. 북적이고 흥겨웠던 장터풍경이 그리울 것이다. 편광안경, 돋보기, 칫솔을 진열해 놓은 아저씨는 자리를 비운지 한참이고 토끼와 닭, 고양이까지 비좁은 우리 안에서 주인을 기다린다. 하얗게 삶아 입은 런닝 차림의 할머니들이 정자에서 화투를 치고 있다.
장터중앙길에는 컨테이너박스에 도도하게 자리 잡은 석경의상실이 있다. 도장도 판다는데, 도장과 의상실이라는 이 안 어울리는 조합도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가능해 보인다. 풍기인조 맞춤옷 제작을 하는 듯 진열해놓은 소박한 셔츠에 눈길이 간다.
더위에 깻잎은 꽃처럼 흐드러지게 열렸고 철공소 앞에 쌓아둔 철근은 국수 뭉태기처럼 묶여져 쌓여있다. 보신탕집은 더위에 몸보신하려는 사람들이 많은지 손님들 차로 주차장을 꽉 메웠다.
노상의 국수장수는 ‘잘 찍으소’하며 자신의 트럭을 가리킨다. 조카는 낯선 사람들이 말을 건다는 것을 희한하게 보았다. 혼잣말처럼 내뱉다가 대화를 이루게 하는 소통과 공감의 능력을 개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열다섯 먹은 조카가 어찌 알까.
인도에 널어놓은 홍고추에 자리를 뺏겨 걸어도 억울하지 않는 산책길,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어디냐는 물음에 ‘소불고기집’이라고 말하는 조카와의 풍산골목기행이 즐거운 한여름날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어디선가 바람이 인다. 더위에 아이 둘이 자전거를 타고 쉑- 지나간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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