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가 권태문 선생의 고향 가일마을(글/사진/한경희_본지 편집위원, 문학평론가)

1.
마을로 들어서기 전 오래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신목처럼 우람하게 저수지를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마을보호수로 지정해둔 수령 200세인 회화나무에 용그림을 그려둬서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가일못 둘레에는 농업용수를 공급한다는 게시판이 서 있다. 며칠 전부터 비가 내려 못에 물이 제법 고여 있었다. 아마 1주일 전쯤 이곳에 왔다면 바짝 마른 저수지 바닥을 볼 뻔 했지 싶다. 비록 흙탕물이지만 저수지를 채우고 있어서 더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고목들이 드리운 그늘의 깊이가 그들의 수령만큼 되는데 저수지가 뿜어내는 시원한 기운이 보태져 마을사람들이 오가면서 쉬어가는 쉼터가 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마을 입구 느티나무 그늘에서 이곳에서 태어나 시집도 같은 마을로 간(할머니는 친정살이라고 하신다) 가일댁 할머니(82세)을 만났다. 다리가 불편하시다며 그늘에 앉아서 여쭙는 말에 조곤조곤 대답을 잘 해주신다. 권태문 선생에 대해 묻자 훤히 꿰고 계셨다. 유전할매 아드님이라며 아는 체를 해주신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며 선생도 부모님 품성을 닮아서 똑 그렇다고 보태신다. 이 할머니 주변으로 같이 있던 몇몇 마을사람도 거들어서 모두들 일가임을 증명하고 계셨다. 권태문 선생이 유년을 보낸 고향집의 위치를 묻자, 아무개네 손자 이름을 가르쳐 주시면서 물어가라 하신다. 아마 선생의 고향집을 그분이 사서 새로 지으려는 것 같았다. 지금은 살던 집도 허물어버리고 빈 터만 남아있다고 말씀을 덧붙이신다.


일단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노인회관도 지나고 약간 경사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니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고가가 나온다. 이곳저곳 기웃거릴 생각으로 사람이 있는 집을 찾아 들어갔다. 댓돌에 운동화가 가지런한 집 안으로 들어가 주인을 불러봤지만 감감하여 포기하고, 좀 더 언덕으로 올라가 텔레비전을 한창 보시는 할아버지께 부탁을 드렸더니 사람을 시켜서 안내해 주셨다. 그렇게 쉽게 찾은 곳은 가일길 43-6이란 팻말이 붙은 기와집 벽을 옆으로 둔 공터였다. 이곳이 한때 선생의 고향집이었다고 한다. 풀이 우거진 이곳에는 달맞이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보통 보다 훨씬 큰 쑥대들이 한창 웃자라고 있었다. 마을 농기계도 둘 곳이 없었던지 이 빈 터에 보관 중이었다.


집터의 경계를 따라 길이 나 있어 올라가보니 좁은 골목안으로 집들이 줄지어 있었고 옛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선생의 유년이 담겼을 고향집도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선생은 유년이 가난했다고 하시지만 그 시절 가난하지 않은 유년이 어디 있었는가. 가일댁 할머니에 따르면 유전할매네는 땅을 팔아 아이들 학교를 시켰다고 했으니 팔아먹을 땅이 있던 집이었다. 그럼 가난했다는 선생의 말은 겸사였던 것일까. 아니면 선생이 너무 예민하여 가난이 주는 불편함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힘겨웠을까. 이 집터는 앞에서 보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뒤로 갈수록 길쭉하니 꼬리를 물고 있었다. 덤으로 땅을 얻은 듯 붙어 있는 뒤쪽은 옛집에서도 뒷마당 정도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곳에는 고추와 토마토가 심겨져 있었는데 그때도 그런 비슷한 것이 자라던 땅일 거란 추측이 쉽게 갔다. 언제부터일지 모르지만 흙으로 지은지 오래된 집들이 나지막하게 앉아있는 골목길 안쪽은 멀리 옥정봉 쪽으로 몇 집이 줄지어 있었고 낯선 사람이 나타난 까닭에 멀리 개 짖는 소리도 울렸다. 때는 오전이라 더위가 시작되기 전 다들 들로 나가셨는지 마을은 차분한 고요 속에 있었고 풀벌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은 갈수록 몸이 불편해져 고향 다니는 일을 미루고 계신 듯한 인상이었지만 고향, 가일마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주변 작가들도 깊이 잘 알고 있다. 누구든지 고향에 대한 특별한 기억과 체험은 오랜 시간동안 녹아들어 자신의 일부분이 된다. 나이들수록 그 기억은 더욱 뚜렷해지면서 현재성을 얻어 고향은 최근의 이야기로 살아있다. 그런 선생이 고향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아쉬움과 아련함이 커서 그 마음을 다시 출렁거리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애틋함을 말로 풀어내기 싫기도 하실 테고, 말을 묻어두면 발효되어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효과를 기대하시는지도 모르겠다.




아동문학가 권태문
1938년 안동 가일마을에서 태어남. 매일 및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제5회 한국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어린이 동화집으로 『달따는 아이』, 『이른봄에 운 매미』, 『아픔이란 열매』, 『이상한 그림』, 『까치소리』, 『거북이가 된 영희』, 『진짜 좋아』 등이 있다.


 


2.
현재 경기도 일산 백석동에 사시는 권태문 선생과는 전화 통화가 쉽지 않았다. 대체로 명망있는 작가분들의 특징은 전화통화가 걸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분은 좀 달랐다. 통화가 몇 달째 되지 않기도 했다. 다른 작가를 통해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고 흔적을 남겨둬도 전화가 걸려오는 법이 없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많이 힘드실까, 그 정도로 생각하다 또 몇 주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다. 사실 일산으로 찾아가 인터뷰를 하는 것이 도리이나 예를 갖추지 못했다. 안동에 앉아서 전화로 질문을 드리자니 앞뒤 막히는 말도 많고 주저해서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도 더러 생겼다. 그런데 어렵사니 막상 통화가 되고나니 그 뒤부터 척척 전화를 잘 받아주신다. 전화를 몇 번 드리면서 든 생각. 아마 전화기라는 기계와 좀 친하지 않은 분일 거란 짐작이 갔다.


고향 가일마을에 친구분이 계시냐고 질문을 드렸더니 얼마전에 안태종이라고 친한 친구분이 작고했다고 하신다. 아마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선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거다. 아쉬웠다. 늘 삶은 아쉬움 천지다. 좀 덜 아쉬워하고 살 방법은 늦은대로 아쉽지 않으려고 움직이는 그 자체에 있을까. 지금도 마을에 있는 풍서국민학교를 다닐 때 선생은 우등상을 따 놓은 소년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는 산처럼 우뚝했을 것이다. 그래서 병산중학교 십리길을 힘차게 걸어다니셨을 것 같다. 당시 그 길 걷는 정도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중학교 1~2학년까지는 우등생이었으나 3학년에 올라가서는 좀 달라졌다고 선생은 말씀하신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학교에서 시험도 못 치게 하고 집으로 쫒아내기도 하는 등, 공부하는데 마음을 두기가 어려워 점차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다. 집에서 병산중학교를 다니다 보면 배가 고파 배가 허리에 딱 붙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하루에 2회 버스가 다녔으나 늘 걸어 다녔다. 안동 시내로 들어간 버스가 다시 풍산으로 돌아나오는 것이 하루 동안 운행되는 버스노선이었는데 돈이 귀해 버스비로 쓸 수 가 없었다. 당시는 모두들 가난하던 시절이니 어찌하겠는가.


안동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옛 옥동 파출소 앞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옥동에서 안동고등까지는 십리가 넘는 길이었고 병산중학교 시절처럼 여전히 걸어 다녔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 친척집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린 아들을 시내에 자취시킬 때 부모님들의 마음이야 아는 집이 좀 안심되는 구석이 있었을테니. 주말이면 집에 양식을 가지러 갈 때, 가는 길은 빈손이니 걸어서 갔고 돌아올 때 쌀과 먹을거리를 가지고 나오다보니 버스를 타고 나왔다. 밥은 해먹기 싫으면 굶다보니 반은 굶었다고 하신다. 그때 청년기를 보낸 어른들이 그렇듯이 선생께서도 밥 먹듯이 굶으며 지냈던 모양이다.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시절에 자취하는 학생이 무엇을 먹고 말고 할 게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이던 김시준 선생님이 선생을 제대로 알아보시고 선생의 글을 두고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글쓰는 데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처럼 잡지에 응모하지는 않았으나 헌책방에 자주 가서 소설을 읽고 돈이 있으면 책을 사오기도 했다. 염상섭의 <<삼대>>가 특별히 기억되며, 현진건 등의 한국작가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한번은 수학시간에 세계명작소설을 읽다가 발각되어 수학선생님으로부터 신나게 얻어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때부터 문학청년시절을 통과하고 있었던 셈이다. 구시장 안에 있는 헌책방에는 돈 없는 사람들이 책 보러 많이 왔고, 선생도 즐겨 찾아가 책을 읽기도 했다. 당시 헌책방 문화를 좀더 자세하게 말씀해주시면 좋을텐데. 선생의 표현은 담백하고 간단해서 힘이 있으나 모두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맡겨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상주 사벌국민학교에 초임발령을 받았는데 이때부터 아이들 글쓰기 지도를 하면서 창작공부를 열심히 했다. 오후에 수업을 다 마치고 아이들을 남겨서 글을 쓰이는 과외 일을 즐겨한 것이다. 당시 상주에는 선생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교사들 몇 분이 계셔서 함께 글쓰기연구모임을 갖고 학생지도도 함께 해나갔다. 1960년대 상주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김종상, 신현득 등의 작가들과 함께 상주글짓기회를 만들어 아이들 글쓰기 지도를 특별하게 이끌어 나갔다. 아이들이 글을 쓰면 문장을 함께 보고 잘된 것은 칭찬하고 못 된 것은 같이 고쳐가면서 문집도 직접 만들었다. 당시는 인쇄기술이 부족하여 학교 내에서 직접 등사판으로 프린트를 했는데 잉크와 종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즐거운 일이었다. 사벌국민학교에서 청동국민학교로 옮겨가서도 글쓰기반을 운영하고 지도했다. 청동국민학교는 글쓰기로 유명한 학교였다고 한다.


검정시험을 쳐 상주공업고등학교로 직장을 옮겨가서도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지도를 했다. 이때 따로 문집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잘 다독이는 선생님으로 인정받았다. 이곳에서 교사로서의 길을 마무리 한다. 아마도 글을 마음껏 쓰고 자유롭게 발표하고 싶은 작가정신이 가장 강하게 작용했을 것 같다. 젊은 나이에 교사로 지내는 시간보다는 좀더 변화무쌍한 사회생활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소년한국일보로 새롭게 옮겨가서 주로 한 일은 신문에 투고한 아이들 작품을 고치고 다듬어주는 일이었다. 아이들 글이라 손이 많이 갔을텐데 글쓰는 일 못지않게 즐겨 하신 것 같다. 교사로 지내면서 아이들의 글을 다듬고 문집을 만들던 그 마음과 다를 게 없는 일이다. 어깨동무에도 잠깐 근무했으나, 1972년 이후부터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창작에 전념했다.




3.
선생이 동화를 생각하는 마음은 <유년의 진실과 동심의 회복>이란 글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너무 인자적 태도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고 그리고 평범한 생활 속에 동심의 세계를 터치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욕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털어 놓는 이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아이들의 평범한 세계의 이야기를 주제로 다룬 것은 어느 면으로 봐선 그 당시 너무나 유년의 진실에 미쳐 있었던 것이다.’라고 선생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유년이 갖는 진실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동심의 진정성이라고 부를 그 진실성에 촌각을 세우고 작품을 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은 이 시기 신춘문예 당선작 두 편을 아주 아끼고 계셨다. 그 가운데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이른 봄에 운 매미>(1968)를 읽어본다.


동화의 내용을 보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귀봉이는 세수도 혼자 못 하고 지각도 맡아 놓고 하는데 이웃집 친구 종화는 그 반대이다. 혼자 세수하고 학교에도 일찍 간다. 그런데 사실 종화는 누나가 다 씻겨주는데 선생님께는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귀봉이는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에서 땅뺏기 놀이를 해서 종화 콧대를 납작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놀이를 하다말고 종화가 화장실에 가는 사이 귀봉이는 종화의 필통을 자기 가방에 넣고 감춘다. 종화가 지각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마침 다음날이 휴일이라 그만 귀봉이 혼자 일찍 학교에 가고 만다. 선생님께 칭찬받아보겠다고 종화 필통까지 훔쳤는데 일요일이었던 것이다. 스스로 꾀에 속은 것이 부끄럽고 분해 집에서 왕왕 울다니까 담임선생님이 찾아오셔서 종화도 필통이 없어 운다고 전한다. 그때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반성하고 종화의 필통이 든 가방을 들고 종화네 집으로 향한다. 선생은 귀봉이의 울음을 왕매미의 소리로 그렸다. 더운 여름철 나무그늘을 찾으면 땀을 식혀주던 매미소리처럼 청량한 소리로 비유했다.


<이른 봄에 운 매미>를 문집 제목으로 뽑아 이 문집 안에 실어 놓았다. 선생께는 결례가 될 글이지만 이영호 선생이 묘사하고 있는 선생의 외모와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어서 옮겨놓으려 한다. ‘그 까무잡잡한 얼굴하며, 땅짤막한 키(땅딸막한 키로 써야 함), 졸음이 디레디레 붙어 있는 것 같은 눈이 절대로 잘난 게 아닙니다. 게다가 목소리마저 좀 모자라는 사람처럼 축 처진 그런 탁음입니다.’ 이런 그에게 매력이 느껴져 끌리는 것은 어른들이 모두다 세속적인
욕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권태문 선생은 동심의 아름다움, 순진함, 착함이 그대로 있는 분이기 때문이라 설명을 한다.


세 번째 작품집 <<아픔이란 열매>>(1978)를 보면 선생의 삶에 대한 진정성은 지속적인 물음을 가진 화두였다. 삶의 진실을 고민한 까닭은 동심의 세계를 대변하는 작가의 목소리를 한결같이 지녀야 했던 까닭일까. 작가는 스스로 밝히길 두 번째 작품집 이후 붓을 거의 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변화된 생활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마음을 편하게 갖지 못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못하는 달팽이 습성’ 때문이라 한다. ‘꽃들로 가득한 세상은 아이들 마음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나의 충만된 삶의 추구케 해주는 순을 위해’라는 문구가 있는데 직접 여쭤보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멈추고 말았다.


1979년에 작가는 실제로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아픔을 동화로 창작하다보니 작가의 심연에 흐르는 슬픔이 그대로 드러난다. 왼쪽 눈을 실명해서 외눈으로 생활하고 계신다는 말씀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다. 이른 새벽 대구북부정류장으로 가는 택시를 탔는데 심하게 과속을 하다가 앞차를 들이받아 당시 꺾는 미터기에 눈이 부딪혀서 그런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 아픔이야 오죽하셨을까마는 그것도 세월 속에 묻혀있는 듯 했다. 스스로의 불행은 액땜이라 다 이해하더라도 맏아들의 죽음 앞에서 어쩌지 못했던 부모의 심정이 가슴 막히게 고통스러운 일로 비친다. 자신의 왼쪽 눈 실명을 불러온 교통사고와 거기에 이어진 맏아들의 군대 복무 중 사고사는 청천벽력의 재난이 아니었는가.  


다섯 번째 작품집에 실린 <외쪽눈 방울새와 어린왕자>는 어린왕자가 쏜 총에 맞아 한쪽 눈만 갖게 된 방울새가 그 왕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동화이다. 그럼에도 너무나 처연하고 슬픈 이야기다. 왕자가 쏜 고무총에 눈이 맞은 방울새는 굴뚝새 할아버지의 치료로 겨우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섣달그믐 설 준비로 분주한 흥성스러움과 달리 방울새는 왠지 허전하여 집 밖으로 나온다. 주위에서 위로의 말로 ‘세상 보기 싫은 것들은 안 보고 좋은 일만 보도록 신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귓등으로 들린다. 왕자는 고무총 쏘는 연습이 하기 싫었지만 신하가 시키자 할 수 없이 짜증내며 우연히 보이는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향해 쏘았고 그것이 방울새의 눈을 적중했던 것이다. 왕자는 고무총을 맞고 새가 떨어지자 울상이 되어 마음 아파했는데 이 사정을 방울새는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방울새는 어린왕자를 미워할 마음을 갖지 않았다.




1998년 예순, 회갑을 기념하는 문집에서 작가는 글 쓴 지 35년이나 되었다고 밝혔다. ‘나름대로 바람을 보러, 새, 나무, 풀, 꽃, 벌, 나비, 짐승들의 소리를 들으려, 그들의 마음을 알아내려 산과 골짜기, 내와 강, 바다, 들판으로 부지런히 쏘다녔습니다. 그러나 보지도 듣지도 알아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채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는 겸사를 드러낸다. 현재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여전히 창작열이 식지 않으셨지만 회갑 무렵에 35년 작가이력을 정리한 내용을 보면 동화의 진정성에 매우 천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들, 우리가 자연물이라 부르는 생명에 대해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왔던 것이다. 벌, 나비 곤충, 새는 물론 온갖 동물들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되어 그들의 입장으로 생각해보고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려 애썼다는 이야기로 읽힌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삶의 진실함을 느끼기 위해 산, 골짜기, 강, 바다, 들판 어디든지 쫓아다녔으니 이야기 보따리를 풍성하게 가지고 계실 것이다. 거기다 실제로 선생은 자연을 탐험하는 일을 즐겨해서 곤충이나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로 많이 쓸 수 있었다.



4.
아이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어른들은 마치 아이들처럼 맑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한다. 물론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는 어른들만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이 아이의 진정성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것은 아이처럼 유치한 마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란 어른마음, 아이마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대상 따라 작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걸 우리가 마음이라 부른다. 실체도 없고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있다고도 할 게 없는 그 마음 말이다. 그런데 아이마음처럼 솔직하게 사물에 대해 반응할 수 있는 어른들은 귀하다. 마음 안으로 솔직해도 밖으로 똑같이 표현해내지 못한다. 그 솔직함을 어른들은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동화 쓰는 작가들은 그 솔직함을 흉내 내거나 아니면 아예 아이들처럼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고 살아간다. 더구나 어른이란 마음을 다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추는 것이며 적절하게 말하는 힘이라 배우며 자라다보니 어른스럽다는 것은 마음을 조건에 맞게 적당히 표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어른이 되면 거짓말을 한다는 것과는 좀 다르다. 아이들에게도 거짓말은 존재하고 그렇게 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솔직담백한 아이 심성을 어른들이 어떻게 글 속에 발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일인데 훌륭한 동화작가들 대부분은 ‘어른의 어른’이면서도 아이보다 더 솔직하게 마음의 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드러낸다. 왜냐하면 마음을 편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데 있는 마음 그대로가 더 자신있고 그걸 다 보여줘도 부끄러울 것도 없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좋은 동화를 읽게 되면 자신을 더욱 사랑하는 어린이로 자라나는 모양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권태문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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