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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류씨들의 마음의 고향 무실마을(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망향정이라는 마음의 수중렌즈 속 고향의 풍경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각자 갖고 있으며, 그중에 잊을 수 없는 기억들도 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보내던 곳, 고향과 관련된 것들이 많을 것이다. 한해가 저물어갈 때, 새로운 한해가 시작될 때면 과거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각자 태어나 성장했던 고향을 찾아간다. 그리고 고향을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들려오는 고향이야기와 영상 등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특히 각자의 사연을 갖고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고향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을 설렌다. 많은 사람들은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구들이 살고 있는 고향이 있다는 것에 대해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고향이 항상 그 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늘 그곳에 있어야 할 것이 사라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고향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는다.

안동지역의 농촌은 거주민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오랫동안 지켜온 고향들이 점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특히 안동의 일부 지역은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이 일순간 사라졌으며, 주민들도 그들이 살아왔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터를 마련해야만 했다. 현재 급변하고 있는 안동지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래된 고향이 있고, 최근에 만들어진 고향이 있으며, 또한 앞으로 만들어야 할 고향도 있다. 오랜 된 고향은 댐건설과 같이 타의에 의해 그들의 공동체가 무너진 후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남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날 때,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터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 터를 마련하여 새로운 고향, 새로운 삶과 풍경을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동 임동면에 있는 무실마을이다.

무실마을의 전주류씨들은 1990년 임하댐이 건립되면서 안동 시내와 타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또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인근 산자락으로 터를 옮겨 새로운 고향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실을 떠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마을을 떠난 전주류씨들을 기다렸으며, 마을의 대소사가 있을 때 외지에서 무실마을을 찾아오는 전주류씨를 반겼다. 현재 전주류씨들는 임하댐 물 위 수곡교를 따라 출입하고 있다. 현재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무실마을에는 당시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인근에 터를 마련하고 기존의 삶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려하는 고택 및 가옥들이 임하댐 물과 맞은편 산릉선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는 과거 무실마을을 그리워하는 망향정이 있다.

안동을 떠난 사람들에게 안동 모습, 무실마을을 떠난 무실마을 사람들에게 무실 모습은 남다르고 애틋하다. 무실마을을 떠나 구미 일선리에 살고 있는 무실마을 사람들은 현재 무실마을 이야기와 모습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 특히 연로해서 마을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는 노인들은 안동과 무실에 대한 그리움이 누구보다 더 크다. 무실마을과 일선리 전주류씨들은 망향정 기둥에 기대어 물속의 어린 시절 모습, 이웃들의 모습, 흙먼지를 날리면서 신작로 버드나무 사이를 달리는 버스 모습, 그간 잊고 있었던 것, 아무렇게나 넘기던 것들을 하나하나 열어본다. 무실마을의 전주류씨들처럼 나도 한해가 저물 던 날 망향정 기둥을 통해 지난 한해를 뒤돌아 보면서 저녁노을과 댐의 물, 멀리 펼쳐진 산릉선을 품어 본다.
전주류씨 마음의 고향 무실은 주변 환경과 사회구조의 변화로 초기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적인 정신과 골격은 바뀌지 않았다고 본다. 오늘 건축문화유산 순례자는 정신적으로 마을의 중심인 종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아랫목을 선뜻 내주신 전주류씨 무실종택 종부님을 만나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정신적으로 마을의 중심인 전주류씨 무실종택을 향했으며, 이 종택은 임하댐 완공 전 198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안동에서 전주류씨의 시작은 영주에서 살았던 유성이 무실마을에 살면서부터다. 이들은 이곳에서 번성하였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종택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본채와 솟을대문 형식의 대문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대문채는 사랑채 남측에 비스듬하게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안채 서측 담장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이건 전 종택은 사랑채 맞은편에 문간채가 있었고 사랑채 뒤편에 사당이 있었다.

무실종택은 전주류씨 무실파 대종가로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평면 형태는 안동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이며, 전면 좌측으로 큰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달아내어 사랑채 역할을 하도록 했다. 사랑채는 큰사랑방 전면에 사랑마루를 꾸며 외부 공간과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도록 평면 구성을 했다. 그리고 사랑마루는 좀 더 넓게 공간을 사용하기 위해 마루 끝을 기둥 밖으로 확장했다. 이 마루 끝은 비바람에 달아 나뭇결이 살아나면서 종가의 기품을 보여준다. 마루널의 나뭇결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서 더욱 더 무늬의 오묘함과 신비감을 더한다.

오묘한 나뭇결을 나 혼자만 보기에 아쉬워 오늘 순례에 동행한 친구를 불러 보도록 했다. 목수일을 했던 친구는 나무의 변하고 있는 모습을 나보다 더 뚫어지도록 보았다. 한 켜 한 켜의 나뭇결은 지나온 종가의 과거와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우리는 눈을 감고 마룻널에 손을 올려 나뭇결을 쓰다듬고 쓰다듬었다. 따뜻한 나뭇결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달되는 것을 느꼈다. 갓 사랑방에서 나오던 종부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왔냐?” 물으셔서 우리는 “안동대학교에서 왔습니다.” 답하고 “지난달 구미 일선리에 다녀왔다”고 하니, 종부는 “일선리 류씨 일가 다 잘 있죠.”하고 되물었다. 나는 일선리 사람들의 무실마을 사람들과 종부님의 안부를 전했다.
종부님의 손에 이끌려 어느새 우리는 아랫목에 앉았고, 무릎 앞에는 따뜻한 커피 한잔과 사과와 귤이 놓였다. 종부는 다시 물으셨다.
“일선리 류씨들 건강히 잘 있죠?”
“예, 다들 잘 계십니다. 종부님을 보고 싶어하는데, 다리도 아프고 기력이 떨어져 자주 찾아오지 못해 아쉽다고 합니다.”
종부님은 호탕한 웃음으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종택을 찾아준 것에 고맙고, 일선리 전주류씨 소식도 고맙다.”고 답했다.

순례자는 사랑방에서 나와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 안마당에 들어서 안채를 보는 순간 집이 종부님처럼 따듯하면서 단단하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마루를 올라봐야 종가를 다소나마 알 수 있지.”

종부님의 말씀에 따라 마루에 올랐다. 참으로 초겨울 날 따뜻한 햇살이 이렇게 좋은지를 처음 느꼈다. 최근에 바른 들기름 향은 고택의 향기를 더욱 더 진하게 가슴 깊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한 햇살이 이전하기 전 종택에도 드리우고 있었겠지 하는 생각, 그리고 무실을 떠나 구미 일선리에 터를 잡은 가옥들에도 비추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채에 드리우는 겨울날 햇살은 안채의 한지 문을 만나면서 더욱 따듯해진다. 안채의 종부는 이런 햇살을 늘 품었기에 따뜻한 종부의 넉넉한 인품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는지…….
순례자는 안채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종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종택을 나오려는데, 종부님이 방문을 열어 배웅을 했다. “눈길에 조심하시고, 또 오시게.”

우리는 대문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용자살 창문을 잡고 계신 종부님 손을 보았다. 손에는 고단한 종부의 삶이 묻어 있었다. 아니 고단했던 한국 어머니들의 손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거칠어진 손이 생각났다. 하얀 한지와 나뭇결, 겨울날 따뜻한 햇살은 종부님의 따뜻한 손으로 더 따스해진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겨 살아도 변하지 않는 무실마을의 모습이다.

새로운 따듯함을 만들어가는 수애당 며느님을 만나다
수애당은 수애 유진걸이 1939년 지은 근대한옥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목조건물이며, 임하댐 건설로 현 위치로 이건 되었다. 평면 및 구조는 합리적 구성을 하고 있다. 정침은 안동지역 근대한옥들처럼 양질의 목재인 춘양목을 사용했고, 장식을 줄이고 견실한 가구 구성을 했다. 수애당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된 ‘一’자형 정침과 대문채, ‘ㄴ’자형 고방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중방과 사랑방이 있고, 우측에 부엌과 안방, 웃방이 있다. 고방채는 외형 변화 없이 고방 일부를 온돌방으로 개조했다.

수애당은 안동의 어느 고택보다 일찍 고택의 가치를 알고 고택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택의 젊은 아드님과 며느님의 지혜 덕에 수애당은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실용한옥문화 체험공간으로 외부에 알려져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현재 수애당은 임하댐 건설 이전에 볼 수 없는 또 다른 자연경관을 갖고 있다. 누구는 임하댐의 반짝이는 물과 겹겹의 산을 보면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즐기지만, 또 다른 누구는 과거 무실의 고택과 골목, 무실 사람들을 생각한다.

수애당은 주변 환경의 변화 속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물속의 무실을 바라보고 있다. 수애당의 의연한 모습은 건물의 외관으로부터 우러나오고 있다. 긴 수평의 담장과 약간 들어 올린 고방채 처마선과 용마루선, 고방채보다 더 들어 올린 정침의 용마루선, 자연이 빚어낸 먼 산릉선, 파란 하늘의 오묘한 조화는 수애당의 기품과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 순례자는 이들 앞에 서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낀다.

오늘 순례자는 수애당 젊은 며느님의 한옥 예찬에 끌려 사랑방에 앉아 고택의 운치와 정성을 맛보았다. 수애당을 지키는 젊은 며느님은 이와 같은 수애당의 가치를 인식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수애당만의 개성을 표했다. 그중에 순례자의 눈을 사로잡은 하나가 있었다. 어느 귀한 손님을 접빈하기 위해 깔아 놓은 침구였다. 그런데 광택이 나는 새하얀 천의 침구가 아닌 약간 누런 색감의 침구다. 이 침구는 광목천에 목화솜을 넣고 천에 전통 수예로 디자인했다. 참으로 침구는 수애당 젊은 며느님의 따뜻한 손길과 정성이 물씬 묻어있었다. 문화유산 순례자는 침구와 수놓은 꽃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어보았다. 참으로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순례자는 다시 한옥 가치와 활용에 대해 며느님과 함께 햇살이 드리우는 창문 앞에서 차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찻상 위에는 집에서 구운 과자가 있었다. 약간 출출하던 터라 입안에 침이 돌았다. 과자는 며느님의 따님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택의 온돌방에서 차 한 모금을 마시고 과자를 한입 먹으면서 색다른 체험을 했다. 과거 사람들이 즐겼던 차와 오늘날 젊은 아이들이 즐기는 과자와의 조화를 찾는 것은 새로 전통을 찾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순례자의 허기를 달래는 과자에 담긴 따뜻한 마음은 새로운 접근이며, 도전이라고 본다. 요즘 많은 사람들은 실패하거나 남들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서 해보지 않고 대부분 포기한다. 수애당의 젊은 부부의 행동은 이 시대 고택이 나갈 바를 보여준다.

종택에서의 따뜻한 차와 아삭한 과자의 만남은 앞으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전주류씨들이 임하댐 건설로 옛 터를 뒤로 하고 새 터를 잡아 새로운 무실마을, 전주류씨들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으며, 그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 있다.

오늘 순례자는 젊은 아드님과 며느님과 차를 마주하고, ‘앞으로 이런 고택들이 어떻게 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마을의 내실을 다지고, 내적 요소를 채울 수 있는 고민과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는 많은 고택들은 건축문화유산의 가치를 발굴하여 새로운 환경에 맞게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측면에서 새로운 터에 전주류씨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수애당 젊은 부부를 통해 그 답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3호>